복음은 실화다

22년 성탄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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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화와 같은 이야기 2. 레알 3. 족보 = 이력서 4. 족보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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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와 같은 이야기

오늘 읽은 이 본문 여러분 제대로 읽어본 적 있나요?
수많은 ‘낳고 낳고'의 반복이기 때문에 스킵하고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봐요.
사실 저도 이 본문을 제대로 정독하며 읽어본적 거의 없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읽으며 묵상을 해보니, 대충 읽고 넘길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이 족보 안에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예수님의 출생은 좀 달라요.
원래 전설들을 보면, 알에서 사람이 태어났다 혹은 마늘과 쑥을 먹었더니 동물이 사람이 되었다 등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로 시작을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출생은 좀 많이 달라요. 뭐 놀라운 여러가지 사건들이 등장하지 않아요. 정말 단순하게 별과 목자 그리고 말 구유가 등장해요.
적어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면 벼락이 내리치고, 내리친 자리에 아기가 있었다던지 혹은 태어나자마자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니면서 말을 한다던가 그런 MSG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의 탄생은 정말 너무 평범하다 못해 최악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말 구유가 위생적이진 않았을 것 아니에요. 더군다나 이 때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아기가 태어나면서 죽는 일은 다반사였단 말이죠. 정말 최악의 상황에서 태어나셨어요.
여러분 혹시 예수님의 탄생은 일반적인 아기가 태어나는 것처럼 출생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나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출생. 탄생이 아니에요.
이것은 신의 강림이에요.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그 분께서 이 땅에 직접 사람의 몸으로 강림하신 사건이에요.
우리가 곧 맞이하게 될 성탄절. 그 날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탄생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강림이에요.
우리가 인내심을 잃고 무조건 스킵하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족보에는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인간이 지나 온 역사 속에 예수님에 대한 단서가 남겨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굉장히 자신있는 어조로 선포 하고 있는거에요.
예수는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근거가 있는 실존했던 인물이었다! 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거에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우리가 허상을 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했던 인물을 믿고 그를 향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어요.
신의 강림이라는 말 자체
사실 우리가 잘 아는 전설이나 판타지와 같은 요소와 같은 말로 보여요.
강림은 다른 말로 다른 세상에서 우리 세상에 침투하셨다는 의미이거든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던 분께서 우리를 위해 시간과 공간을 뚫고 침투하셔서 우리 곁에 오셨어요.
그렇게 오신 분께서 기적을 행하고 자연을 다스리는 정말 판타지와 같은 일을 하기 시작하세요.
병을 고친 사람을 살리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고, 거칠게 몰아치는 바다의 풍랑들을 말 한마디로 제압하세요.
그러던 분께서 적들의 공격을 받아 죽었어요. 모든 삶의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그 순간 다시 부활하셔서 모두를 구원하고 희망을 주셨어요.
이렇게 보면 굉장히 동화와 같은 이야기이죠.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쉬고)
그런데 세상의 전설과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어요. 바로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다는거에요.
예수님의 이야기가 성경에 적혀있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오셔서 한 모든 흔적들이 여러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동화가 아니라 레알 진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모든 이야기가 가리키는 진짜 실체가 있었던 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복음 그 분의 이야기는 실화에요.
우리는 실체가 있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구요.

족보 = 이력서

취업 준비하는 청년들 자소서랑 이력서 많이 써봤죠? 자소서에 어떤 내용을 주로 쓰나요? 나의 단점을 쓰기는 하겠지만 장점을 최대한 부각해서 자소설을 작성하겠죠?
그럼 이력서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가죠? 학력, 경력, 수상 내용, 다양한 사회 활동 등이 들어가죠? 나한테 조금은 불리한 이력이나 내용들은 수정하고 삭제하기도 할거에요.
성경이 쓰여졌을 그 당시 족보는 지금의 이력서와 같았어요.
족보를 통해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그리고 어떤 가문인지를 사람들은 보고 판단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족보를 위조하거나 수정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어요.
일단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을 족보에 올리는데, 그 중 유명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나와 가깝다는 것을 어필했어요. 그러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이런 가문이야!”를 보여주었어요.
가족들 중 문제가 있거나 좀 삐리한 사람들이 있으면 바로 삭제했어요. 그래서 이 당시의 족보를 보면 가족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몇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이 되어 있는거에요.
내가 수준 높은 명문가 출신임을 보여주는데 방해되는 여러 이름과 요소들을 선택적 삭제를 통해 지워나갔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보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당대에 중요해 보이는 사람 혹은 대표적인 인물만 기록이 되어 있어요.
처음 이 족보를 받아서, 읽었을 일차 독자들은 “우리 집 족보와 다르지 않네. 여기도 우리처럼 중요한 사람들 이름만 적어 놨네"라고 생각했을 거에요. 하지만 읽어 내려 가다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아요. 왜냐하면 이 족보는 고대의 족보들과 다른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굳이 이 사람들의 이름을 올렸어야 했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 유대인의 족보에 올린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마태가 쓴 이 족보에 다섯명이나 되는 여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거든요. 고대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를 족보에 언급한 예가 없어요. 이 여성들의 이름은 정말 큰 충격과 함께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주었어요.
다섯 명의 여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마리아에요.
이 여성들은 유대인들의 정신이 혼미 해질 정도로 충격을 주는 이름이에요. 사람들은 이 여성들의 출신과 상황을 듣고 거의 기절할 정도까지 얻어 맞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말과 라합, 룻은 이방 여자들이에요. 그것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일단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관계를 맺고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어요.
다말은 유다의 큰 아들과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죽었어요. 그래서 당시 법에 따라 둘째 아들이 형의 아내인 형수와 함께 관계를 맺었어요.
그렇게 자녀가 생기면, 형의 아들로 족보에 올라가게 되고 그 가업을 이어나가게 되는데, 둘째 아들은 그것이 싫었던거에요. 그래서 임신을 하지 못하도록 방법을 썼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모습이었기에 그 아들이 또 죽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어린 막내 아들이에요. 이 아들이 크면 다말과 관계를 맺게 해서 자녀를 얻어 기업을 이어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유다가 보니까 막내까지 죽을까봐 겁이 났던 거에요.
그래서 막내가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말이 그 기업을 이어나가야 하기에 아버지를 속이고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았어요.
라합은 가나안 여인이에요.
그리고 매춘부였어요.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녀는 매춘부였어요.
룻은? 저주 받았던 모압 사람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영원히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말씀까지 하셨어요.
다윗의 할아버지를 낳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모압사람이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어요.
우리야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족보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우리는 우리야의 아내의 이름이 밧세바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마태는 밧세바라 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왜 일까요?
마태가 우리야의 아내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마태가 분명하게 의도했던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다윗의 불륜이에요. 우리야는 다윗을 끝까지 지켰던 충신 중의 충신이었어요.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불륜을 덮기 위해 우리야를 죽였죠.
다윗이 덮고자 했던 그 불륜이 기억 나도록 하기 위해 밧세바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해 뒀어요.
마지막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요.
결혼 할 남자와 어떤 관계를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가졌던 여인이었어요.
세상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 다섯 여성의 이름은 절대로 족보에 올라가면 안되는 것 이었어요. 예수님의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아주 부끄러운 이름들이었어요.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는 성경의 가장 더럽고 추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여성들이었어요.
역기능적 가정의 모습. 즉 올바르지 않은 형태의 가정을 보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럼에도 마태는 굳이 이 여인들의 이름을 넣었어요. 도대체 왜 이 여인들의 이름을 족보에 넣었을까요? 그 집안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족보에 왜 여인들의 이름을 적은 것일까요?
왜 우리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낳고 낳고 낳고 낳고 낳고'의 이야기를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족보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에요.
재미없는 족보. 인내심을 잃게 만드는 족보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세 가지에요.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이야기도 사랑하시는다는 거에요.
더럽고 추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모두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정말 창피한 사건이라 해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만의 비밀도
개의치 않고 사랑하신다.
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계신거에요.
저와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는 어떠한가요? 우리도 이 족보에 담긴 사람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요?
저는 저의 삶의 모습을 잘 알고 있어요.
저도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저는 설교 할 때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요.
열심히 준비한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설교를 하고 내려 갈 때마다 자괴감과 같은 감정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럴 때마다 한 주간 내가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너무 의미 없이 보내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한 주를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청년들이’ 은혜를 받지 못했다. 라는 생각이 저를 힘들게 할 때가 정말 많아요.
그런 마음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로해주실 때가 있어요.
청년들을 통해서 혹은 유튜브에 올라간 설교를 듣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을 통해서 위로해 주시더라구요.
나의 부족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계시더라구요. 그 부족함 마져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 주시더라구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한 주간 여러 모습으로 살아냈을 것이고, 그 모습들을 갖고 이 자리에 나오고 있을거에요.
이 예배의 자리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위로를 경험하고 또 회복하는 시간이 되고 있나요?
숨기고 싶은 나의 모습 혹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여러 생각들로 인해 집중이 잘 안되는 순간들도 있을거에요.
하나님은 다 상관없다고 말씀하세요. 개의치 않는다 말씀하세요.
그저 이 자리에 앉아,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셔요.
이 족보가 지금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첫번째 메시지는, “어떠한 부끄러운 이야기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족보의 교훈

족보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두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하셨던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 질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특히 메시아가 오기까지 정말 많은 세대가 흘렀어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약속.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처럼 수많은 자손들이 생기게 될 것이며, 그들을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셨던 약속도 정말 오랜 시간 후에 성취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 보다 더 이전에 전 인류를 대상으로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어요. 세기창 3장 15절에 Ä . 속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했던 사탄에게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모든 말씀들이 성취될 때까지 수십세기 수천년이 흘렀어요.
그리스도가 태어나시기 직전 400년동안 메시아는 커녕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잊으신 듯 보였고 아무도 오지 않았던 암흑과도 같은 시대를 보냈어요.
모두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그 소망을 놓아버리고, 그 빛이 희미해졌을 때, 예수님께서 오셨어요.
구세주가 메시야는 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오셨어요.
나는 우리는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정말 많아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거에요.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와 자신의 딸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움직이지 않으세요.
오히려 시간을 지체하셔요. 그래서 결국 그 딸이 죽었어요.
그 때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던지셨던 정말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었어요.
“믿기만 하라"
나를 너의 시간 기준에 꿰어 맞춘다면 결코 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러니 의심하는 잘못을 하지 말라
그리고 야이로의 집에 가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 말씀하셨어요.
“야곱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형을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가로챘어요. 그래서 가족이 분열되었어요.
야곱은 집에서 도망쳐 삼촌 라반의 집에 가야했고, 에서는 집을 나가 나라를 이루었어요.
그리고 야곱을 죽이고자 하는 적의를 품었어요.
야곱은 도피 생활을 이어나가던 중 레아와 라헬과 결혼을 했어요.
아버지와 형을 속여 가족을 분열시켰던 야곱이 결혼 한 이후에도 자신의 가정을 또 분열시켜요.
레아와 라헬은 서로 아이를 낳기 위해 혈안이 되어 갔고, 잘 되지 않자 자신들의 여종을 사용해서까지 아이를 낳아요.
야곱 때문에 두 가정이 분열되고 서로를 미워하고 싸웠어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야곱을 사용하셨어요.
추악하고 미련하고 또 사기까지 쳐가며 살았던 이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더러움도 사용하셨어요.
결국 하나님은 본인이 계획하신 그 약속의 목적을 이루어내셨어요.
지금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두번째 메시지는, “나는 너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다" “믿기만 하라"에요.
세번째 메시지는 ‘우리에게 쉼을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너무 잘 아세요.
세상은 우리를 받아주지 않아요.
세상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박하여 살아가기를 매순간 결단하는 우리를 세상을 절대 받아주지 않아요.
받아주는 척하겠지만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계속해서 건들면서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족보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거에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너가 세상에서 겪는 고생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다.
물론 그 시간이 너와 내가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 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너에게 소망을 주려 한다.
그 소망과 위로를 주기 위해 내가 직접 이 땅에 왔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허구가 아닌 실제 사건이었음을 너에게 알려주려 한다.
이 족보가 바로 그 증거이다.
내가 이 땅에 와서 너에게 구원과 쉼을 준 것은 진짜이며 실제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이 세상에 들어오셨어요.
구원은 나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죠.
세상이 말하는 구원“내가 노력해서 쟁취해 낼 수 있는 것”이에요.
내가 무엇인가를 주도적으로 하면 마치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해요.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해 불교에서는 백팔배를 하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씻어내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끊임없이 삶을 제한하는 고행을 하도록 만들어요.
여러분 정말 이렇게 하면 정말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능하죠.
하지만 이 족보는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정말로 역사 속에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다시 말해 “내가 너희에게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거에요.
“내가 너를 바꿔주러 왔다.”
“내가 너를 다시 나의 자녀의 자리로 올리기 위해 왔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셔요.
우리가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복음단순히 감동을 우리에게 줘서, 그 순간의 마음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절대로! 율법. 지침만 잘 따르면, 스스로 구원을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절대 말하지 않아요.
우리의 구원은, 내 행위가 아닌 그 분이 이루어내신 일에서 난다는 것을 복음이. 이 족보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주부터 매주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나누며 그분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거에요.
이번 한주 오늘 나눈 이 세가지를 꼭 기억해 주세요. 메모 할 수 있으면 메모하고, 이것을 출퇴근, 등하교, 공부 할 때 꼭 소리내어 읽으면서 묵상해보세요.
“나의 부끄러운 모습과 이야기. 그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고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으시다."
“하나님은 나에게 쉼을 주고 싶어하신다.”
이 세 가지는 저와 여러분의 한 주의 삶에 굉장히 중요하고도 강력한 메시지가 되어, 그 분의 오심을 더 깊이 있게 묵상하게 만들어줄거에요.
꼭 이 세가지를 아침 저녁으로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요.
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이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그 은혜가 있는 한 주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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