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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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종교적 열심 포도주: 참된 기쁨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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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 책 요한복음

요한복음에는 수많은 상징언어가 등장합니다. 빛, 암흑, 물, 포도주, 떡, 목자와 양...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상징언어를 상징 그 차체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상징 배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위에서 온자 예수께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했습니다. 당시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에게는 이원론적 사고관이 팽배했습니다. 어떠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위와 아래, 육체와 영과 같이 두 양극단으로 나누어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를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교육과 문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이원론적인 표현을 차용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을 대비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John 3:13 NKRV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대 플라톤 철학에 물들어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는 신령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책 “대화록”에서 현상 세계를 잘 관찰하고 진리를 터득해서 가짜를 인식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져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는 불변하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그 불변하는 진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만이 이 가변하는 세상 속에서 진리가 될 것이고 우리가 그 진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삼장 십육절의 말씀이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예수께서 ‘위에서’ ‘아래로’ 오셔서 ‘위’의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길얼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위’로부터 내려와 ‘아래’ 세상에 ‘위’로부터 오는 힘을 가져다 줍니다. 그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 3:5
John 3:5 NKRV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래서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가리켜 위에서 내려와 아래의 사람들을 구원하신 인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예수님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셨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셨기 때문에 재차 들리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민수기에서는 ‘놋뱀의 들림’이라고 표현해 놓았고, 요한복음 삼장에서도 놋뱀이 들려야 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John 3:14 NKRV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처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언어는 매우 심오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요한복음을 가리켜
‘심오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표적을 말씀하는 책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편화시킴(2:1~11)
고관의 아들을 치유하심(4:46~50)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 치유(5:1~15)
오천명을 먹이심(6:1~15)
물 위를 걸으심(6:16~21)
소경을 치유하심(9:1~12)
나사로를 부활시킴(11장)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하늘의 영원한 실체를 띠고 있습니다. 그의 이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물리적 현상들이지만, 위의 진리 또는 실체를 가리키고(Point), 표적해 주는(Sign) 성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들을 표적(Sign)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예수님의 이적들을 물리적인 현상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가리키고 표적하고 계시하는 바인 ‘위 세상’의 진리와 실체를 터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기적을 일으키신 장소가 가나의 혼인잔치 집입니다. 그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이 사건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구약 예언들을 ‘성취’하셨고 그로인해 유대교를 ‘능가’ 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능가’ 했다 함은 결국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체계로서 자신이 구약과 유대교를 ‘대치’(Replacement)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해석
물과 같은 맹맹한 유대종교에는 포도주와 같은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고조용기 목사님께서는 유대교는 물과 같이 맹맹한 종교였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죽은 종교였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종교는 종교성은 있어 나름 구제와 봉사 그리고 금식과 말씀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오는 기쁨이 상실한 종교였던 것입니다.
물에는 맛도 없습니다.
물에는 냄새도 없습니다.
물에는 색도 없습니다.
하지만 포도주에는 맛이 있습니다.
포도주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포도주에는 색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안에 종교적인 형식과 습관은 남아 있는데 언제부터 “기쁨”이 상실 됐다면 예수님께서 그 종교적 형식을 패하시고 그 자리를 자신이 대치하시어 성령을 통해 기쁨을 각 사람 안에 주시고자 하셨던 사실을 잊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성수를 하고 있습니다. 주중 공예배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나, 그저 예전부터 내가 해왔던 익숙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면 어느덧 내 내면에 유대교적인 형식과 의식의 종교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 항아리 6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종교적 헌신과 노력의 산물을 사징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혼인잔치 집 앞 마당에 준비된 정결예식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물항아리 6개’입니다. 아무리 손과 발을 씻고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결혼 잔치에 참여한 예수님을 삶에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않고는 손을 씻고 또 씻는다고, 헌금을 하고, 주일 성수를 하고, 때론 금식과 기도를 한다고 하여도 그 안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이장 이후 삼장에 유대종교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래의 것들만 생각했고 위의 것에는 무관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다시 나야 한다는 처방을 듣게 됩니다. 이는 성령을 통해 그 안에서 참된 관계가 형성되고 그로 인해 배에서 부터 흘러 넘치는 생수 즉 기쁨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사장에는 그리심산에서 예배했던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물항아리 6개는 그 여인이 의지했던 6명의 남편을 가리켜 말합니다. 6개의 물항아리나, 6명의 남편이나 요한은 그것을 예수님 없이 구원을 이루려는 유대교적인 종교적 체제나 종교 형식 주의를 가리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포도주가 가득한 잔치집과 같습니다. 이를 증거하는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와 사마리아교를 대체할 뿐 아니라 이 시대에 허무한 곳에 굴복한 모든 종교를 대체하시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 포도주가 넘치는 잔치의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구원을 ‘잔치’에 또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잔치로 비유했습니다. 시편 23:5
Psalm 23:5 NKRV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포도주가 넘치는 잔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잔치는 풍요로움, 배부름과 만족, 나눔과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상징 합니다.
포도주가 없는 종교형식주의나 자기 중심성 삶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결핍입니다. (지혜, 능력, 사랑, 시간과 공간),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 비교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 끊임 없는 불만과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또다른 포도주가 넘치는 잔치를 구원에 비유한 유명한 예화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 하나님 나라
사탄: 쥐엄열매도 얻어 먹지 못하는 결핍
아버지: 자녀의 회복,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는 잔치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부유하신 이로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가난해 지신 분 또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경험한 이후 옥에 갇힐 때나 부유하게 살 때나 일체의 자족을 배우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기도하게 됐습니다. 이는 종교가 아닌
하나님을 예수님의 생명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을 받아들이시고 종교인이 아닌 하나님의 영생을 소유한 예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본인만의 색깔이 있고, 본인만의 가치가 발현되며, 본인만의 감각과 느낌이 있어 매사 삶이 감사와 감격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결론(성령)
이 기쁨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그로인해 주어진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여러분들의 배에서 부터 흘러넘치는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이루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이 여러분들의 냉냉한 종교성을 포도주로 바꾸시어 매사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여 남편은 남편의 역할을 통해, 부인은 부인의 역할을 통해 오늘 하루를 기쁨으로 살아내게 하실 것입니다. 학생은 학생의 역할을 통해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교회 안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루살렘도 아닌 그리심산도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신령이란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는 단어이고 진정이란 진실한 마음이 아닌 진리를 가리켜 말씀하는 단어입니다. 즉 이 아래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인 하나님 나라의 실체,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는 그 능력의 말씀을 따라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기쁨을 발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교회 안에서 만의 크리스챤이 아닌 세상 속에서 기쁨을 가지고 자신이 오늘도 수행해야 할 그 역할이 소명임을 깨닫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아내 앞에 서 십시오. 주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남편 앞에 서 십시오 주님이 주신 기쁨을 가지고 상사와 종업원 앞에 서 십시오! 그것이 교회 안에서 성직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세상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는 기쁨을 상실한 유대 종교인 즉 물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증거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종교인들을 대체하시고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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