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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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다나엘을 찾아간 빌립 2. 나사렛? ㄴㄴ 너나 믿어 3. I see you (내가 만났다)

Notes
Transcript

나다나엘을 찾아간 빌립

감사를 고백했던 지난 한주의 삶 어땠나요? 감사의 삶이 점점 더 커져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정말 바래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삶으로 변해요. 그 분이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 만큼 큰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죠.
감사를 매일 고백하며 그 안에 또 다른 은혜와 기쁨을 찾아가는 우리 모두기 되를 소망해요.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그 기쁨과 놀라움을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의 친구에게 달려가요. 마치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 “메시야 만났어!!” “가자!!!”라고 했던 것처럼 빌립도 한 친구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이야기 해요.
안드레는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굉장히 짧게 이야기했지만, 빌립은 달랐어요. 예수님을 제법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선지가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그는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다.
과거에는 성이 흔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기 위해 집안이나 혹은 출신 지역을 먼저 말하곤 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출신 지역"을 듣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번 알아차렸어요.
빌립이 갑자기 달려와서 “야야야야야야야!!! 만났어 만났다고!!! 그그 우리가 맨날 보고 묵상하던 그!!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사람!! 선지자들이 말한 그 사람을 만났다고!!! 진심 미쳤어!!!” 라고 이야기를 해요. 나다나엘도 굉장히 놀랐을거에요. 왜냐하면 나다나엘도 정말 정말 메시야를 기다렸고 만나고 싶었거든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물으려고 하는 그 찰나 거슬리는 단어 하나가 딱 들렸어요.

나사렛 ㄴㄴ 안믿어

“나사렛 예수"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들리자 마자 나다나엘은 이야기 해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난다는거야?”
“나사렛? 휴. 장난하나 진짜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왔다고? 웃기지 마 안 믿어.”라고 하면서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요.
왜냐하면 당시 나사렛은 아무 쓸데없는 동네로 통하고 있었거든요.
이스라엘을 점령한 로마군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과 나사렛이 굉장히 가까웠어요.
따분한 병사들이 나사렛에 넘어와서 온갖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더러운 동네로 불리기도 했어요.
인천을 마계인천? 이라고 표현하더라구요? 코미디 빅리그보니까 오른팔에 흑염룡을 갖고 다니는 양아치가 마계부평출신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던데, 예전에 항구도시들이 험했으니까 그런 표현이 붙은거겠죠?
나사렛은 그 이상의 평가를 받는 지역이었어요.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나던지 상관은 없는데, 적어도 나사렛은 아닐거야.
저렇게 아무 쓸모 없는 지역에서 절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는 탄생하지 않아. 불가능해. 라는 인식들이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다 있었어요.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지역을 정말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빌립이 “우리가 매일 묵상하던 그 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도, ‘나사렛'이라는 지역 하나만으로 그 분은 메시야일리가 없다. 라는 결론을 바로 내버리게 된 것이죠.
그러자 빌립이 이렇게 대답해요.
“아 됐고, 가서 보자" “아니 와서 보라고!” “내가 하는 말이 뭔지 바로 이해할 거니까 와서 보라고!!”
나사렛에서 절대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신뢰하는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다나엘이 그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해요.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세요. 그리고 “나사렛 무시했다면서? 나 나사렛 출신인데, 내가 메시아면 어떻게 할래?”라는 말 하지 않으세요. 어떻게보면 무시 당한 것인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씀을 툭 던지세요.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너는 정말로 솔직하고 꾸밈 없는 사람이구나!”
“하나님을 찾으려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정말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굉장히 쌩뚱맞은 소리 아닌가요? 아니 언제 봤다고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다.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재작년 11월에 왔잖아요? 그 때 제가 첫 설교를 할 때 여러분을 처음 만나마자 “너는 진짜 인천제2교회사람이다. 너 진짜 착하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봐요. 그래요 딱 그 표정 지었겠죠.
나다나엘이 딱 그 상황에 처한거에요.
와서 보라고 해서 왔더니, 갑자기 자기보고 “너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고 가식적이지 않구나!”라고 말하는거에요.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우리가 찾는 그 분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할 때부터 아닐 줄 알았다.” 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그런 순간이죠.
근데 나다나엘이 물어요. “저를 어떻게 아시죠?”
(쉬고)
“나는 너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무화과나무는 사람들에게 기도와 묵상 그리고 말씀을 연구하는 장소였어요. 그리고 더위를 피하게 해주는 휴식처이기도 했어요.
세상은 굉장히 시끄럽고 정신없고 죄로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던 장소였다는 것이죠.
“너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것을 보았다"라는 그 말에 나다나엘이 바로 예수님을 자신이 기다렸던 메시아라고 인정해요.
여러분 이 대화의 흐름이 이해가 되세요?
“가서 보자고! 와서 보라고! 그러면 알게 된다고!!”
“너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거든"
“당신은 진짜 메시야군요!”
아니 무슨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대화를 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이 대화의 흐름이지만 나다나엘이 믿고 그것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그의 마음이 지금 굉장히 가난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에요.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팔복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어요. 여기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 것 같으세요?
이것을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표현을 했어요.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도움의 손길이에요.
아주 단순하게, 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 올려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요.
그 상황을 알고 품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요.
그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말고,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그냥 그 상황 자체를 이해하고 품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여러분 친구들 중에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힘이 되어주는 그 사람이 나다나엘에게는 정말로 필요한 시기였어요.
아무리 말씀을 묵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아무리 기도해도 메시아가 보이지 않아요.
아무리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간다 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과 현실이 자꾸 내 가슴을 짓눌러요.
아무리 노력해도, 공부해도 뭐하나 풀리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내 상황 속에 그가 있었던 거에요.
(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 속에 간사한 것이 하나도 없도다" 라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사랑하고 그 분의 뜻을 찾아가기를 원하는 뜨겁고 순수한 마음이 너에게 있구나! 라는 뜻이에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그 말씀이 그에게 별안간 날아가 비수같이 꽂히면서 마음이 순간 뜨거워진거에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거에요.
말씀을 읽거나 듣다가 혹은 찬양을 하던 중에.
수련회를 참석 했을 때
아니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확 뜨거워지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던 순간이 있었을거에요.
나다나엘이 지금 그런 상황인거에요.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고 이성적으로 정말 해석되지 않는데 믿어지게 된거에요. 그 분이 진짜 메시야라는 것이 마음에 다가 온 것이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세가지로 표현해요.
첫째, 랍비여!! 선생으로써 최고의 지위를 지닌 개인에게 부여되는 호칭. 랍비여!
둘째,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완벽히 내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의 이 마음을 고백합니다.
셋째,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입니다!
나사렛에서 절대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그 나다나엘이 이렇게 돌아서 그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삶의 예배자"의 모습을 갖고 살았다. 라는 것이에요.
말씀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떤 일을 하던지간에 묵상하며 생각하고, 찬양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으면서 어떻게해서든 삶으로 살아내보려 했던 사람이 나다나엘이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쉬고)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삶의 예배자. 라는 단어가 나와 가깝게 느껴지나요 혹은 멀게 느껴지나요.
일주일에 한 번 집중적으로 말씀을 듣고 나누는 이 시간이 여러분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나요?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해 선포되어지는 그 말씀들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가요?
작년 초 성막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예배시간은 나와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시간이다! 라고 했었는데 여러분 기억나나요? 기억이 나면 안돼요. 그래야 제가 또 써먹죠.
성막 안에 들어가는 언약궤 안에 증거판이 들어있죠.
그 증거판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증명하는, 서로가 상관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요. 하지만 그 증거판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요. 우리에게 증거판은 없어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장해주는, 증거해주는 것이 하나 있어요. 바로 우리가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예배에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증거하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내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고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
그것이 바로 예배에요.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을 서로 확인하고 증거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예배에요.
예배의 결론과 목적하나님과의 관계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아요.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내가 드리는 예배의 도장에는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붙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장에는
“그래 잘왔어.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기죽지마 내가 너와 함께 하잖아. 나는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아.” 라고 적혀 있는 것이에요.
예배는 서로의 마음이 담긴 도장이 찍혀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친밀해지고 깊어지는 것이에요.
은혜를 받고 누릴 수 있는 이유바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예배이기 때문이에요.
나다나엘은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보러 갔어요. 와서 보려고만 했는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아닌 “나를 보게 되었어요"
“내가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가까이하면서 삶의 예배자로 살아갔던 이유가 바로 이 때를 위해서였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걸어갔던 이유가 바로 이 날. 이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구나"
우리가 한주를 살아가면서 삶의 예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말씀과 가까이하면 살아가지 않는다면 이 예배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정말로 미안하지만 종교 활동을 하는 시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면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이 있어요. ‘경건 생활'이에요.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말씀과 가까워지려는 열심도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굉장히 어려운 길을 걸어가겠다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진짜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한다면, 그 분에게 계속해서 관심이 생길거에요. 그 분을 더 알기 위해서 뭐든 읽고 묵상하면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질거에요.
여러분 예수님에게 얼마나 관심있어요?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여러분 저는 일본어를 4년 공부했어요. 왜 공부한줄 알아요? 고등학교 때 일본어 선생님이 예뻤거든요.
여러분 저 한자 급수도 땄어요. 왜 딴줄 알아요? 중국어과였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 예뻤거든요.
그분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뭐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서 미친듯이 일본어랑 한자 공부를 했었어요.
관심이 있다는 것은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더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 부여를 계속해서 하게 되어있어요.
한주간 얼마나 말씀과 가까이하며 살았는지를 반드시 돌아보아야 해요.
주일날 예배의 자리에 왔는데 잠만 온다면,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면 아니 아무런 감동도 없다면 그건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거에요.
관심 있는 존재를 만나러 나온 자리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거든요.
오늘 여러분의 예배는 어떤 내용으로 가득차고 있나요?

I SEE YOU (내가 만났다)

요한이복음 1장 35절부터 51절까지 보면 찾아내다. 만나다라는 말이 5번 등장해요.
안드레가 시몬을 찾아 -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다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셨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했다
안드레는 시몬에게 “우리가 만났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다!”라고 만남을 다르게 표현해요.
서로가 서로를 찾아 각자의 표현과 방법으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라는 것이죠.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이야기로 채워지지 않는다해도, 우리가 매일 삶의 예배자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고 해도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에요.
예수님이 안드레와 사랑하는 제자 그리고 빌립에게 와서 보라! 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시몬에게 게바라 부르겠다고 하셨고, 나다나엘에게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던지간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이에요. 내가 시간이 되어서 왔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죠.
왜 우리를 또 예배의 자리로 불러주셨을까요?
한주간의 삶을 내가 제일 잘 알잖아요.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조금은 부끄러울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또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쉬고)
우리가 와서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고 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에요.
와서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와서 보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평안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해 돌아오는 사람들에 주어져요.
“참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참 나를 사랑하는 자구나!” “너는 나의 부름에 참으로 반응해서 오는구나!”
(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은 우리 때문에 시작됐어요.
우리를 주시하면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들을 계획하셨고 시작하셨어요.
말씀을 머리로만 받아드리면 우리의 변화는 정말 더디게 진행이 되어요. 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지금과는 달라질거에요.
삶을 바라보는 그 시야와 기준이 달라질거에요.
저는 여러분이 기회만 되면 외국으로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여행이 되었던 워홀이 되었던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 곳에서 내가 쥐고 아둥바둥하며 살던 것들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이 넓은 세상을 지으신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구나. 나에게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고 누리라고 다양한 것들을 예비해두셨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외국으로 좀 많이 나갔으면 좋겠어요. 여행만으로도 삶을 바라보는 시야와 기준 그 깊이가 달라지거든요.
(쉬고)
그런데 여러분 예배라는 이 자리가 바로 외국을 여행하는 것보다 더 큰 시야와 기준을 준다는 것 알고 있어요?
그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인되시며 그 분만이 드러나는 이 예배는 저와 여러분에게 세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시선과 마음을 주는 자리에요.
(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와서 보라" “예배의 자리에 와서 나를 보라!” “이 자리에서 나를 똑바로 보라!”라고 말씀하교 계셔요.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어요?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여러분은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었어요?
여러분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어요?
(쉬고)
오늘 설교 제목인 I SEE YOU는 아바타에서 나오는 대사에요.
I see you.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제서야 내가 당신의 눈을 바라봅니다. 내가 당신의 삶을 바라봅니다.
I see you. 당신과 나는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한 방향을 보며 걸어갑니다.
I see you. 내가 너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었다.
도마와 마태와 안드레 시몬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을 지켜보았듯이, 그들에게 살아갈 목적과 희망을 주었듯이, 너에게도 전부가 되기 위해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I see you.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살펴본 도마부터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였어요.
다른 액션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구세주와 자녀의 관계가 성립되었어요.
(쉬고)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었나요? 무엇을 보고 살아가고 싶은가요?
I see you.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이제서야 당신을 봅니다! 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당신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당신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
“가난하고 벼랑 끝에 선 사람의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사모하는 자"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바로 너였다"라는 그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해요.
이번 한 주 저와 여러분은 I see you를 고백하는거에요. 그리고 사진 찍어서 순톡방에 올리세요. 꼭 이 자세여야만 해요. I see you.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 가득찬 한주를 보내기를 기도할게요.
그리고 저와 여러분. 나의 예배가 내가 바라 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차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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