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치유하는 힘

다시보는 룻기 시리즈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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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Ruth 1:7–14 NKRV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지난 주일에 <룻기>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그 주인공을 룻이 아닌 나오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모압 땅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상실감에 빠진 나오미를 다시 채우는 이야기가 <룻기>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은 그 주인공인 ‘나오미’가 얼마나 텅 빈 상태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할까 합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이민을 하자마자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국땅에서 ‘싱글맘’이 되어 아들 둘을 키웠습니다. 당시 사회는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는 남성 노동력이 중심이 된 그런 사회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나오미에게 사회적인 보장이나 제도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별히 남편이 없고, 고향이자 하나님의 땅, 거룩한 빵집 공동체였던 베들레헴을 떠났다는 것은 공동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방 땅에서 남편 없이 어린 두 아들을 키워야했던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가장 심각한 약자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소망이 있었는데, 바로 두 아들 ‘말론과 기룐’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식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녀에 대한 소망의 마음을 담아 이름을 짓잖아요? 그런데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우리의 이런 상식을 깨뜨리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장남인 말론은 ‘병약하다’라는 뜻이고, 기룐은 ‘낭비하다’라는 뜻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 두 아들의 이름을 연구하면서 이 아들들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났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액땜하려고 일부러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군대 있을 때 훈련소 동기 이름 ‘김 땡’ 삼신할머니가 안 그러면 죽는다고 했음) 믿어주세요~
아무튼 말룐과 기룐이라는 아들들은 이름과는 달리 나오미에게는 소망이고 삶의 이유였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두 아들이 잘 자라서 모압 여인들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그것도 이방 땅에서 홀로 자식 둘을 키워야만 했던 나오미가 두 아들을 잘 키워 장가를 보낼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두 며느리가 나오미의 집에 들어오고 그들과 함께 한 상에서 밥을 먹으며 또 얼마나 행복한 미소를 보였을까요? 이제야 뭔가 살아볼 만한 여유가 생긴 것 같은데, 장성한 두 아들이 그만 모두 죽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나오미가 두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이미 늙고, 가난한 이민자였던 나오미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을까요? 만일 누군가가 위로한답시고 나오미에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이런 식의 위로를 한다면 어떨까요?
가톨릭 신자인 소설가 박완서 씨는 57세가 되던 해에, 남편과 외아들을 연이어 잃고 난 후에 겪은 고통을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어느 날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나간 명문대 의대생이었던 아들이 저녁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책을 통해 그녀는 이렇게 심경을 토로합니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 것입니까? 계신다면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왜 내게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심지어 박완서 씨는 죽은 자녀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으면 하는 모진 생각도 했을 만큼 큰 슬픔에 빠졌었는데요. 이 시기에 그녀가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죽은 아들은 그만 잊으라”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나오미 역시 남편을 잃었을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아들 둘을 잃고 나서는 큰 슬픔을 이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생명과도 같은 두 아들을 잃었으니 삶이 모두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에게 들린 소문이 고향 베들레헴에 빵이 다시 생겼다는 거예요. 아무런 희망도 없이 나오미의 마음은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절망보다 고통스러웠을 그녀에게 희망이 보이고, 삶이 보이기 시작한 거죠. 다시 자빠져도 흙과 풀이 받아준다는 고향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겠어요?
이제 우리가 다시 나오미의 삶으로 들어가 봐야는데요. 오늘부터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나오미와 며느리들이 베들레헴으로 향하던 길 한가운데서 나눈 대화들입니다. 그녀들의 대화를 들어보겠습니다. 7-9절(중반)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중략)”
지금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 유다 땅으로 가던 며느리들에게 갑자기 “각각 자기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 며느리의 고향은 모압이고, 부모님과 가족들이 모두 거기에 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함께 베들레헴으로 갈 것처럼 하더니 갑자기 며느리들은 친정으로 가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왜 생각을 바꾸었을까요?
아마도 신앙의 이름으로 며느리들에게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표현이 8절에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보통 남편과 사별한 여인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했습니다(창38:11, 레22:13, 민30:17, 신22:21). 그런데 나오미는 왜 굳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캠벨이라는 신학자는 “친정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딸의 결혼에 대해 의논할 수 있는 상대”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나오미는 각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서 재혼해서 잘 살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11절과 12절에서 며느리를 부르는 나오미의 목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11-12절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중략)”
11절의 “내 딸들아 돌아가라”, 12절에서도 “내 딸들아 되돌아가라” 나오미는 지금 며느리들을 두 차례 반복해서 “내 딸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어구는 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며느리들을 향한 나오미의 진심은 며느리들이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결혼하여 남편으로부터 위로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둘째 “죽은 자들(즉, 너희 남편이었던 내 아들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한다.”, 셋째,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재혼하도록 허락하셔서 남편에게 위로를 얻기를 원한다.”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굳이 따라가겠다는 며느리들을 왜 그렇게 보내려고 할까? 그냥 못 이기는 척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왜냐하면 늙은 시어머니로서는 두 며느리는 생계수단을 위해 꼭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할 테고, 지금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굳이 또 “너희는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하며 돌려보내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바로 여기에서 룻기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8절 합독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우리말 성경에는 8절 본문에 두 번의 선대(善待)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히브리 원어 성경에서 나온 선대라는 두 단어는 8절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먼저 앞에 있는 ‘선대하다’는 히브리 원어로 ‘아사’라고 해서 ‘일하다, 만들다, 형성하다’ 의미이고, 뒤에 있는 ‘선대하시기를’은 ‘헤세드’라고 해서 ‘친절, 인자, 자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헤세드” 많이 들어보셨죠? 이 ‘헤세드’라는 단어 자체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구약학자들이 정리한 이 단어의 의미는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사랑이나 충성’이라고 정의합니다. 쉽게 말해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사랑과 헌신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많은 부분에서 헤세드를 ‘인애’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이 헤세드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비슷하게 해석된 단어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입니다.
이제 이 단어의 느낌을 잘 살려서 8절을 풀이해 보면 이런 뜻이 되죠. “며늘아기야, 너희가 내 아들들과 나에게 행한 선한 일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자비와 인애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한다.”
실제로 나오미의 두 며느리는 정말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들들에게는 좋은 아내였고, 시어머니에게는 좋은 며느리였습니다. 그 어려운 시간을 함께 있어 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죠. 그래서 진심을 담아 축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지금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오미 자신이잖아요? 나오미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늙은 여인인 자신이 자비와 인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나오미가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가 자신의 며느리들 가운데 있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시에 새벽예배가 있었으면 나오미가 새벽마다 이렇게 기도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 혹시나 저를 돌아보실 자비하심이 있으시다면, 그 자비를 이 두 며느리에게로 돌려주십시오. 이 아이들은 제 딸과 같은 애들입니다.’ 이러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나오미가 지금 진짜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실 헤세드가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며느리들에게 부어 달라고 진짜 사랑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요. 나오미가 말로만 이렇게 사랑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며느리에게 사랑의 행위로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합니까?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들을 보내주려 합니다.
여러분, 내일이면 5월 아닙니까? 5월은 가정의 달이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까지 있잖아요? 그야말로 누군가에는 가장 돈이 많이 지출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번 5월에는 시어머니들이 며느리들에게 먼저 선물을 해보면 어떨까요? 먼저 선대해 보면 어떨까요?목사님, 며느리가 해준 게 있어야 베풀죠?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러시는 것 아니죠?
어쨌든 9절에 며느리들에게 입 맞추면서까지 완전한 이별을 고했던 나오미에 대한 두 며느리의 반응을 보십시오. 10절.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고향으로 돌아가라”라며 작별 인사를 하는 시어머니를 며느리들을 끌어안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합니다. 원어적인 표현으로 보면 체면상 “안 가겠다”고 한 게 아니라, 이 두 며느리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강한 결심으로 “안 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들어보면 이들의 굳은 결심을 알 수가 있는데요.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원래 히브리어는 동사가 먼저 나오는데, 이 문장은 “어머니와 함께”라는 주어가 먼저 나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시어머니는 더는 헌신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빨리 어머니의 집으로 가라고 권면하고,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며 우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럼에도 룻과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어서 11-13절까지 나오미의 두 번째 권면이 이어집니다. 나오미는 재차 떠날 것을 말했고 두 며느리는 더욱 크게 소리를 내어 웁니다. 결국 한 명은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다른 한 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게 되죠.
아시다시피 친정으로 돌아간 며느리는 오르바였습니다. 시어머니를 떠나 자신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는 오르바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어떤 분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지켰어야지 따라오지 말란다고 그렇게 돌아가면 어떡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르바가 나쁘다는 것이죠. 성경은 이에 대해 부연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내막은 알 수는 없습니다. 정말 오르바가 룻과 달리 하나님을 몰라서 세속에 물든 자신의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했던 말들을 잘 생각해 보면 오르바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있는데요. 나오미가 오르바를 평가하는 말을 잘 보세요. 8절 중반부에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라고 평가합니다. 룻 뿐만 아니라 오르바 역시 죽은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책임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두 며느리를 돌려보내는 것이 맞다고 판단해서 그들을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그때도 오르바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오르바를 오히려 나오미가 거듭 설득해서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14절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붙좇았다고 합니다. “붙좇았더라”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다브카’는 단순한 동정심이나 친근함의 표현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결합 즉 시어머니와 완전한 결합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로 묶어 버렸습니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나’이고, 내가 어머니라는 거예요.
켐벨이라는 구약학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나오미의 나이가 45세 정도가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고대 근동의 결혼 풍습을 생각해 봤을 때, 룻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많아도 2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이런 나이 어린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희생 아닙니까? 이 붙좇는 행위 자체가 바로 룻이 나오미에게 보여주었던 인애의 표현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룻의 붙좇는 행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룻의 선택을 함께 보시죠. 16-17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여러분, 지금 룻이 뭐라고 말하는 겁니까? 지금 망하는 사람, 아니 이미 망할 대로 망하고 고향에 가서 손가락질 당할 일만 남은 사람과 한 편이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이제 늙은 시어머니 봉양하는 일로 평생을 고되게 살아야 할 판인데, 젊은 이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하나가 되겠다고 하고, 그 죽음과 같은 텅빈 고목 같은 삶으로 함께 들어가자는 거예요. 얼마나 그 각오가 대단한지요.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1:17) 이러는 거예요.
이 표현이 언뜻 보면 매우 시적인 것 같은데요. 사실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고요. 이스라엘의 매장 풍습에서 나온 아주 실제적이고도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매장법은 가족이 한 무덤에 세월의 차이를 두고 묻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이 썩는 동안 눕혀 놓는 무덤이 따로 있어서, 그 무덤에서 시신은 썩어 뼈만 남게 되는 거죠. 그리고 얼마 후, 후손들이 무덤 입구를 열고 들어가서 뼈만 남은 유골을 옮겨 조상들의 뼈가 쌓여 있는 곳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죽은 후에도 유대인들은 가족끼리 뼈와 뼈로 다시 만나게 되는 거죠.
여러분은 이러한 룻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간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사실 이해가 안 돼요. 룻의 선택은 상식적이지도 않고, 사실 의리도 아닙니다. 아무리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하는 선대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잖아요? 지금이라도 오르바처럼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건강하세요.” 하면서 떠나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잘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룻이 “저는 죽은 자와 하나가 되겠습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룻의 이런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나오미와 룻 둘 다 모압에서 유다로 왔는데, 누가 진짜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일까요?
저는 오늘 이 부분에 집중해서 두 가지의 중요한 메시지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나오미와 룻의 행동을 통해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은 모압 지방을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오기입니다. 14절 합독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작은 단서 같은 것들이 있는데요. 룻기 1장을 보면 “돌아오다”라는 동사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아오려 하여”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돌아가라”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등등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 나오미와 룻임을 다 아는데, 왜 이렇게 굳이 반복하고 있는 건지 저는 참 궁금하더라고요.
여러분,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 나오미입니까? 룻입니까? 당연히 나오미이죠. 왜냐하면 “돌아온다”는 것은 원래의 장소로 복귀한다는 뜻이잖아요? 지금 원래의 장소로 복귀하려는 여인은 룻이 아니라 나오미 아닙니까? 그래서 룻기 4:3에서 보아스가 나오미를 가리켜서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 전체에서 볼 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이라는 표현을 나오미에겐 한 번만 쓰이지만, 룻에게는 두 번이나 쓰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봐야 하는데요. 당연히 겉으로 볼 때는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은 나오미가 맞죠. 롯은 어딘가를 갔다가 다시 돌아온 여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묵상해 보면 진짜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은 나오미가 아닌 바로 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온 여인 룻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모압을 떠나 여호와께로 돌아온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여호와를 떠나 살던 이방 여인이 나오미와 함께 돌아왔으니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은 바로 룻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모압 지방에 잠시 머무르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났는데, 아예 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오미처럼 잃고 혼자 남은 인생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룻처럼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분이 계십니까? 그저 부모님이나 누군가에게 들어온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자꾸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손길을 느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삶의 문제로 아직까지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그리스도를 전한 분과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믿음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룻의 행동만 인정하시고 나오미는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교훈 두 번째는 모든 고통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 합독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우리는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권면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이중적인 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스스로를 ‘마라(쓴 물)’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나오미가 자신이 당한 재앙과 환난을 두고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나오미가 당한 고난의 이유가 불신앙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권면하는 중에 자신의 고통을 며느리에게 전가하지 않으려고 했던 점과 그녀가 특별히 죄를 지었다는 언급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나오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나오미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안 되고 오히려 동정의 눈을 가지고 바라봐야 합니다.
독일에서 건축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하던 아들을 등반 중에 실족사로 잃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자신을 아들을 잃고 나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란 책을 통해 고통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고통이 따르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어떤 고통은 전쟁, 폭행, 풍요 속의 빈곤, 상처 입히는 말과 같은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어떤 고통은 징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부 그렇지는 않다. 나머지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의 폭은 아주 미비하다. 고통에는 우리의 죄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있다.
여러분, 이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시겠죠? 고통과 고난이 왜 생기는지 모두 정답을 알려주지는 않는다는 것 아닙니까? 내 죄로 인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통에는 우리의 죄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요?
여러분, 나오미는 자신의 삶에 왜 흉년이 찾아왔는지, 왜 자신들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는지, 왜 타국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몰라 너무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단지 그녀가 1장 13절에서 고백한 대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들보다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하는 것처럼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나오미에게 배우고 싶은 것은, 나오미가 고통의 자리에서 주저앉아만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을 피해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 바로 이것이 여호와께서 설령 자신을 쳐서 마음이 매우 아프다고 토로하면서도 여전히 나오미는 그 여호와의 손이 강력하게 다스리시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고통의 이유를 다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나오미처럼 그 고통을 통해 더욱 깊은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눈이 열린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그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손을 피해 도망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치유하시는 힘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저를 한 번 따라 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고통에는 / 치유하는 힘이 있다”
재난과 환난이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의 시간이 더 깊은 영적인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 결코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앞서 소개해 드린 소설가 박완서 씨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의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고 말씀을 마치려 하는데요. 외아들을 잃고 난 후에 그녀가 어느 가톨릭 신부님의 사제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사제관 응접실에서 신부님을 뵙고 긴 위로의 말씀을 들었으나 자식도 낳아보지 않은 분이 내 마음을 어찌 알까 싶어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경청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놓인 백자 필통이 눈에 띄었다. 거기 쓰인 “밥이 되어라”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신부님이 손수 쓰신 건지, 아니면 어떤 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이 쓰신 건지 그건 분명치 않았다. 누가 썼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밥이 되어라, 밥이 되어라”를 입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이곳 수녀원에서 맡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 냄새를 떠올렸고, 어쩌면 주님이 그때 나에게 밥이 되어 오시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몇 날 며칠을 밤이나 낮이나 주님을 찾아 대들고 몸부림쳤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나요? 한 말씀만 하시라”고 애걸복걸도 해보았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래, 분명히 뭐라고 그러셨을 거야. 다만 내 귀가 독선과 아집으로 꽉 막혀 못 알아들었을 뿐인 것을.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하는 응답으로. 그렇지 않고서 그 지경에서 밥 냄새와 밥맛이 그렇게 감미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분의 고백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텅 빈 상태로 두시는 분이 아니고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고통 가운데서 자기 백성에게 “우선 먹고 살아라” 하시면서 양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생명의 양식이 된 분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몸을 찢겨 가면서 우리에게 밥이 되어주시고 빵이 되어주신 분, 바로 그 주님 안에 진정한 치유하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잖아요? 여러분, 지금도 잘살아오셨습니다. 잘해오신 거예요. 이제,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시는 주님이 계신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도 반드시 치유하는 힘이 있음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저는 이 찬양을 일주일 내내 듣고 수요예배 때도 부탁을 해서 함께 부르고 했었는데요. 룻기를 함께 나누면서 우리 성도님들과 저의 주제 찬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단 찬양 : 시편 40편
❙합심 기도
오늘 우리 하름교회를 정말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길 원하는데요. 주님, 저야말로 모압에 눌러 앉은 인생이었지만, 룻처럼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나오미처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치유하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의 생명이신 주님, 치유와 회복의 영을 주시옵소서. 우리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한목소리로 합심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마침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아버지 하나님!
나오미와 같이 내가 의지할 것들을 잃고 텅 빈 마음을 부여잡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계신다면 주님, 오늘 이 말씀이 그분들에게 영의 양식이 되고 새 힘이 되었길 소망합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고 강한 팔로 능히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힘을 믿고 일어나 새노래를 부르며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직까지 모압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못한 성도들이 있다면 룻과 같은 의지와 믿음을 주셔서 나를 주님 앞으로 인도한 그와 함께 돌아오는 믿음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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