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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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능력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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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반어법 표현으로 그가 복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는 바울이 믿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기 때문이라는 의미도 함축합니다. 자신이 믿는 복음은 세상의 이론과는 다른 진짜 복음이기 때문에 자랑스럽고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자신이 믿는 복음에는 능력이 있고 비 복음에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본문 17절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1:17
Romans 1:17 NKRV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세상 종교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으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옳을 ‘의’ 영어로 Righteousness,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입니다.
이 의는 자격없는 죄인을 자신의 아들 예수의 희생을 통해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법정적인 ‘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보시고 그 핏값으로 죄인을 대신 구원하셨다고 법원에서 판정을 내리는 ‘의’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보시고 더이상 그 악함을 기억하시기 보다 내 안에 예수를 보시고 그분의 의로움을 통해 나를 보아 주시겠다는 그 분의 강인한 의지와 뜻이 담겨진 ‘의’인 것입니다.
이 의는 영적으로 죽었던 죄인의 눈을 열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의’인 것입니다.
이 의는 죄악된 습관을 끊고 새로운 습관을 갖도록 하는 ‘의’인 것입니다.
이 의는 지옥갈 운명을 천국가도록 하는 ‘의’인 것입니다.
이 의는 새로운 성향과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이루도록 하는 ‘의’인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가 들어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셨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 복음의 가치를 알고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분명 복음을 부끄러워했던 인물입니다.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보면 바울이 살던 때에 복음을 부끄러워했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에는 유명한 철학자들이 신성시 되었던 것입니다. 헬라 철학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라인들은 복음의 메세지를 어리석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 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Acts 17:32 NKRV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당시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셨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았났다는 메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메세지였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에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호전적으로 들렸을 수 있습니다. “회개해라!” “천국이 있습니다.” “지옥이 있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와 같은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듣기 거북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어두운사람들에게는 듣기 싫은 메세지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정황 가운데 오늘 로마서 일장 십육절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창피하게 여겼고, 거북하게 생각했던 복음이 자신의 삶을 바꾼 “능력의 복음”이라는 그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표현은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제가 경험한 복음은 조건없이 예수님을 보고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과 그 사랑을 실제 자신의 죽음을 통해 보이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예수님의 사랑을 오늘 나에게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게도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독기가 있던 저는 죽고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삶과 그 삶에 걸맞는 성향과 성품을 선물로 받은 지금의 제 삶을 보았을 때 복음은 탁상공론의 이론이 아닌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어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복음이 능력인 이유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초월적 사랑, 능력과 그 사랑과 능력을 우리에게 보이실 수 있는 임마누엘을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복음에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과 능력이 있습니다. 이 초월성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게 아닙니다. 이 사랑과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초월적 사랑과 능력입니다. 죽은자를 살리시는 사랑과 능력인 것입니다.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것을 부르시는 사랑과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믿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랑과 능력이 저 멀리서 있는 형상과 같은 것이라면 저와 여러분들은 바울과 같이 복음을 “능력”이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깨달아진 예수님이 초월적 능력으로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해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과 능력은 의미가 있게 되었고 우리는 그 사랑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이 초월적이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말, 논리, 합리성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 안에 없는 초월적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고전 4:20
1 Corinthians 4:20 NKRV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이에 대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로마서 주석을 쓰신 이한수 교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 주는 좋은 충고가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복음은 자신이 경험한 세상 학문이나 율법 나아가 세상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군사, 과학, 교육의 영역에서 얻을 수 없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초월적 능력에 있었고, 그 능력이 자신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가지 요소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데 너무도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초월적인 사랑과 능력,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바울이 경험한 복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능력의 복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주어진 초월적 능력을 힘입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무한한 능력과 지혜, 깨달음과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지 않고 자신의 힘과 논리, 인간관계와 건강을 가지고 삶을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구원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으로 있는 자들이 자신의 자원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다가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 삶의 주인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리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복음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자신을 깨뜨리고, 날마다 새롭게 하고 있으며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자신에게 부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능력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모습의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 게 “죄”가 무엇인가?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능력이기 때문에 죄로부터 인생을 자유하게 만들 뿐 아니라 죄를 극복할 힘도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원어로 “하마르티아”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뜻’이란 과녁을 원치 않아 자신이 상정한 과녁에 화살을 쏘는 행위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원을 거부하고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어 자신의 자원을 가지고만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죄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교육으로 포장을 받아도 그 선택이 자기중심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납니다. 죄인의 선택은 아무리 이타적인 모습의 선택이라고 하여도 그 이면에는 모두가 자기중심성이라는 죄악된 동기를 숨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십오장을 보시면 자기중심성의 죄가 결국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무한한 자원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자원으로 삶을 살아보겠다고 시도한 탕자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다 떨어지게 돼 돼지가 먹는 쥐엄 나무의 열매를 탐하는 신세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그 때 탕자는 깨닫게 됩니다.
Luke 15:17 NKRV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담과 하와를 대표로 하고 있는 인류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지는 삶을 살다가 지식의 결핍, 지혜의 결핍, 건강의 결핍, 행복의 결핍 때문에 삶을 불행하게 살다가 삶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열매인 것입니다.
타락의 삶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17(이라는 과녁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Genesis 2:17 NKRV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인류가 하나님 앞에 최초로 죄를 지은 날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고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그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시간이 흐려면서 그들에게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평안함이 사려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숨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슬 걱정하지 않았던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계를 책임져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또한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여 동물들의 이름을 척척 지어주었던 때가 있었는데 언제 그런 총기가 있었는지 모르게 기억력과 총기도 감퇴 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지혜와 지식도 부족하여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결정해야할지도 잘 모르게 되었습니다. 점점 시력도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습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땅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몸에 병이 찾아 왔습니다. 이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담과 하와는 깨닫지 않았을까요?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그 때 말씀하셨던 ‘죽음’이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로 결국은 하나님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 살다가 궁극적 다양한 “결핍”을 경험하여 영과 육신적 모든 죽음 이르게 되는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새생명’을 얻는 것을 가리켜 돌 감람나무에 “접붙임”되어 자신에게 없었던 자원을 공급받게 되는 상태, 또는 포도나무라는 무한한 자원에 붙어 나무로부터 올라오는 무한한 진액을 공급받는 가지의 상태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죽지 않은 것 같은 상태 때문에 다들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져나간 가지는 곧 시들어 죽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70이요 강건하면 80의 인생을 살 때는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으며 살지 않는 인생은 곧 멸망하게 된다는 게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들의 상태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이러한 죄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가 경험한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에만 열중하게 만듭니다. 그 자원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무한한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탈되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자가 공중의 권세를 잡은자 사단인 것입니다
Ephesians 2:1–2 NKRV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여러분 누가 죄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대표로 하고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당장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죄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입니까? 현재 삶에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하늘과 땅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가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매일매일의 삶에서 초월적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인인 것입니다.
쇠렌 키르케로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으려 하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마음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켜 낼 수 있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삶의 의미를 삼을 만큼 중요한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환상이 바로 영적인 교만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우리의 한정적인 자원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무한한 능력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초월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그리고 그 초월적 사랑과 능력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임마누엘의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흰두교나 불교의 신론은 범신론입니다. 범신론은 모든 세계에 신이 내재해 있다고 믿습니다. 즉 신의 속성이 세상 곧곧에 깃들여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런 점에서 신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는 신은 뚜렷하지도 않고 초월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흰두교나 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르기 위해 수행을 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즉 불교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자력종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어떤 스님으로부터도 자신들이 믿는 불교가 “능력”입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는 초월적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의 신론은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은 신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세상일에는 관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즉 신의 초월성은 인정하지만 신의 내재성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도 교도들은 세상 밖 초월자의 모습으로 있는 알라의 뜻대로라는 구호를 외치기 좋아합니다. “인샬라” 그들은 초월자인 알라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금식과 종교적 규례들을 지켜 행하고 메카로 순례를 떠나기도 합니다. 특히 알라를 위한 거룩한 전쟁에 나가 순교하는 것 등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범신론의 반대인 이신론 역시 결국 자력 구원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초월성과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복음에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의 복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임마누엘로 함께하실 수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 복음의 능력은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내재하신 복음의 능력이 오늘 믿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성령으로 경험되게 하시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세윤 박사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 하나님이 초월자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전능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 더 크시고 우주 밖에서 계시는 분이어야만 고장난 이 우주를 고칠 수 있고 병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 초월자 하나님이 단지 하늘 위에 앉아 계시다면, 여기 우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의 노예인 우리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월자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셔야 비로소 우리게 구원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초월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 내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초월자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내재하셔야하지, 내재하시기 위해서 그의 초월을 포기하시면 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초월자로서 오셔서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는 분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초월성과 내재성, 임마누엘을 함축하고 계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복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위”에서, 즉 하나님의 초월과 영원에서 “아래”로, 즉 이 내재의 세계에로 보냄을 받아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신적 생명, 곧 “영생”)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내재의 세계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계시하였기에, 우리가 이 “아래”암흑(무지)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었기에 우리가 이 “아래”죽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보여졌고 성령님을 통해 오늘 이 시대에도 누려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는 그 믿음이 예수님과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이 경험은 복음의 신비적 경험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능력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을 실제로 덕입는 길은 믿음입니다. 즉 믿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우주적으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을 우리 개개인의 실존적 구원의 사건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방도인 것입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복음, 즉 “그리스도가 우리(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 받아들임은 우리를 우리들의 대신이요, 대표로 죄에 대해 죽고 신적 삶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 안에 나를 포시켜, 하나님 앞에 그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이 되게 하고, 그가 하신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삶에로 부활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됨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불의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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