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 같은 사사시대를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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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사사시대를 뚫고
[삼상1: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삼상3: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오늘은 칠흑 같은 사사시대를 뚫고”, “칠흑 같은 사사시대를 뚫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참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대 속에서 가장 약한 자였고, 가장 비천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러한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 이스라엘을 기쁘게 여기셨고, 이스라엘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 사랑의 관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을 놓아 버림으로써 끊어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주님을 향 이스라엘의 사랑과 감동은 점차 사라지고,
언제 당신이 필요했냐는 듯 하나님 외면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없는 삶을 시작했고, 세상 복판에 홀로 남겨졌습니다.
죄와 압제, 심판과 부르짖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사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어둡고 황폐했던 최악의 시대를 뚫어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영광 되이 쓰임 받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의 이름을 원어로 풀이하면
[듣다, 들으셨다]라는 의미의 샤마이 라는 단어와 [하나님]을 뜻하는 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배경을 통해 그 중요성이 더욱 확대 됩니다.
사무엘상 1 1절과 2 그리고 6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이런 내용입니다.
한나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적수였던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기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 괴롭힘이 얼마나 심하고 서러웠던지
성경은 한나가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17 하반절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그렇게 슬픔에 잠겨 있던 한나는
마음의 괴로움으로 인해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이런 서원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사무엘상 1 11의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에게 아들을 단 한 명만이라도 허락하신다면
그를 거룩한 자,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끝은 오늘 본문 20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마무리 됩니다.
20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한나는 하나님께 구하였고,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이름의 사무엘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
왜 한나의 태를 닫으셔서 그 모진 말과 괴롭힘을 인내하게 하셨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기도한 끝에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한나의 기도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도 소중한 유일한 아들,
사무엘을 주님께 드린 한나는 2장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나의 기도
하나님,
돈이 많은 이들이 불로소득을 누리지 않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하게 하옵시고,
배고픔에 신음하는 이들이 다시는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게 하소
가난한 사람은 그 작은 자리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사람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성도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소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갈
주님이 세우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어 세우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옵소서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취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이 황폐하고 범죄한 시대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인격의 수준과 신분의 격차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존재 그 자체로 전인격과 삶이 존중 받는 세상,
배고픔에 신음하고, 가난에 허덕이는 이들이 없는 세상,
성도의 걸음은 순탄하며, 악인의 발자취는 어둠속에서 소멸하는 세상,
그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와 섭리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선한 피조세계를 반드시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주님의 확고부동한 의지가, 오늘 한나의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아름답고 선하게 회복하기 위해, 한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가장 어둡고 황폐했던 시대 속에서 빛으로 부름 받은 사무엘을 취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듯,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
우리 인생의 아픔과 상처, 그 아득한 슬픔을 뚫고 영광스러운 꽃으로 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난은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름이며,
우리의 연약함은 높으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성령의 은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 삶을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은
시대와 세상을 품고 눈물 흘리는 그리스도인 되었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병들고 신음하는 이 시대를 품어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첫째.
과연 사무엘은 어떻게 이 칠흑 같았던 사사시대를 뚫어내고
하나님 앞에 영광 되이 쓰임 받을 수 있었는가?
둘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칠흑 같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뚫어내고
사무엘과 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영적 리더로 설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의 공통된 영적인 원리를 사무엘과 한나의 기도를 통해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칠흑 같은 시대를 뚫어낼 영적인 원리는 한나의 서원기도에 있습니다.
함께 사무엘상 110-11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의 기도는 통곡의 기도였고, 탄원의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부르짖음의 기도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레미야 33 3의 말씀을 통해
극심한 고통과 공포, 멸망의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나는 인생의 바닥을 맛보고, 더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만큼 깊은 수렁과 극심한 괴로움 가운데에서
수년간 하지 못했던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것은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의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고백입니다.
무슨 말이냐면요,
이 서원으로 말미암아 한나의 인생에는 아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 남을 뿐,
그 아들의 실체가 자기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나의 고백은 우리에게 매우 큰 교훈을 줍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고백보다도,
고백한 삶으로 이행한 한나의 정직함이 더 위대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 명확한 진실 한 가지를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그것은, 다소 안타깝고 부담스럽지만
대를 뚫어낼 기도는 자기 전부를 버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순종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한나는 어머니로서 그 어떠한 소유권도, 권리도, 권한도 행사하지 않고,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자신의 전부였던 아들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서원기도를 통한 하나님께 드림신앙의 전수라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마치 오늘날 유아세례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유아세례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아이가 스스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부모로서 그 신앙을 잘 간직하도록 옆에서 돕겠습니다.라고 하는 책임이 따르는 부모의 결단입니다.
그리고 본문 속 서원 역시도 나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그 어떠한 권한과 권리도 행사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어머니 나의 결단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유치부,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무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때까지 옆에서 지켜내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이곳에 모인 모든 원일의 성도님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어두운 시대를 뚫어낼 하나님의 일꾼을 세워가는 원일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는 애매한 다수의 무리가 아, 믿음직스럽고 충성스러운 확실한 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한나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사무엘을 서원하게 만드셨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무엘은 어두운 시대를 뚫어낼 시대의 빛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한나가 자신의 괴로움과 수치 가운데에서 목숨과도 같았던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를 세워갈 영적 리더를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원하고 바라기로는,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의 기도가 모여 우리 원일교회 가운데 이 어둡고 황폐한 시대를 뚫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영광되이 쓰임 받는 사무엘과 같은 영적 리더가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둘째, 칠흑 같은 시대를 뚫어낼 영적인 원리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본문 310을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규칙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다지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사무엘인가?하는 것입니다.
사무엘 당시 대제사장은 엘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에게는 홉니비느하스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대제사장 엘리도 아니고,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아닌, 어린 사무엘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사무엘상 2 12은 엘리의 아들들을 이렇기 기록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또한 32은 엘리의 영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이 말씀만 읽어봐도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쓸모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 모양, 이 꼴이었으니,
당시 이스라엘의 수준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시대를 밝히는 영적 리더의 역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상 3 3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등불을 지켜야 할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니,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새우잠을 자기 위해 누워있었습니다.
사무엘이 한 일은 그저 머물러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전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책임질 하나님의 등불을 지키고 싶어서 성전 안에 자리를 피고 누워 있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어떤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상을 살아갈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예언자, 제사장이라고 하는 목회적 라이선스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그저 머물러 있실력이 필요합니다.
시대를 뚫어낼 영적 리더는
기도의 자리에, 하나님의 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대충하고 끝내는 기도가 아니라, 주어진 중보기도제목만 다 읽고 끝내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한 시간, 두 시간 내가 정한 시간 채우고 만족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나에게 친히 말씀하실 때까지,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같고, 전혀 현실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한 것 같이 느껴지는 시간,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기도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앉아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2023년 우리 교회의 표어기도의 불을 켜는 교회입니다.
제가 이 기도의 불을 켠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고민하다가 번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제 신대원 동기들과 함께 바베큐를 먹는 시간을 가졌는데,
고기를 굽기 위해 장작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제 나무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아서 토치를 딱 끄면 불도 꺼지고,
또 다시 토치를 켜서 불을 내고 다시 끄면
또 장작에 있던 불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불을 켠다는 것은 이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불이 나무에 옮겨 붙을 때까지 토치를 키고 있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기도의 불이 옆 사람, 특히 다음세대에 옮겨 붙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기도의 불을 켜기 위해서는 기도를 받는 대상,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실 때까지 엎드려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시대를 뚫어낼 영적 원리
주님 내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것이 나의 것입니다.라고 기도와 함께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머물러 있는 성도 한 사람의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원일의 성도님들을 이러한 영적 리더로 부르고 계십니다.
때론 기도하고, 서원하여, 포기하는 한나로,
또 때론 주님 앞에 순종함으로 머물러 있는 사무엘로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하나님의 놀랍고 신비와 부르심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영상을 하나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영상]
십자가의 길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영적 리더로 서겠다는 고백은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과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인내하신 이루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고난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한나의 심정과
두렵지만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사무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또한 그 촛대는
다시 영상 속 조마리아 여사와 도마 안중근에게 이어졌고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알 수 없고 두려움과 수치심만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우리 유치부가, 아동부가, 중고등부, 청년부가 잘 살아낼 수 있도록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고,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고, 자유와 회복이 있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그래서 그 십자가의 능력 하나 의지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설 수 있도록
이 곳에 모인 성도님들이 기도의 불을 키시고, 이 시대의 한나가 되어서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샤마이 ”,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말씀하시며,
우리 다음 세대를 사무엘과 같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세상의 빛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칠흑 같고 캄캄한 어둠의 골짜기를 메울 생명의 근원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사시대를 뚫어낸 영적 원리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나도 그리 살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 원일교회가
이 고백 위에 신앙을 세워가고
이 고백 위에 신앙을 전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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