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로 말미암아

빌레몬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6 views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2. 은혜와 평강 3. 너로 말미암아

Notes
Transcrip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남은 7월 4주 중, 마지막 주에는 제가 선교로 없어서 3주동안 말씀을 나누어야 하는데, 어떤 말씀을 나누어야 할까 참 많은 고민을 했었어요. 그러던 중 빌레몬서가 생각이 났고, 이 말씀을 꼭 나누라는 마음을 주시더라구요.
빌레몬서의 정체를 알지만 잘 읽어봤다거나 혹은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들어본 적은 많이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빌레몬서는 딱 한장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나눌만큼의 많은 이야기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에요.
사실 빌레몬서는 수련회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꼭 수련회 이후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을 만나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내용들이 이 한 장안에 꾹꾹 압축되어 있어요.
빌레몬서를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자면 “복음으로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에요.
“복음으로 달라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영접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이 바뀌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정체성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요.
복음을 경험하기 전과 후의 삶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통해 매일 삶을 돌아보아야 하고,
내 정체성이 무엇인지 상기해야 하며,
복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해요.
그 노력 가운데엔 당연히 넘어짐, 낙망, 실망 등이 포함되어 있어요.
말씀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어 내겠노라는 자신의 의지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겠죠.
복음을 통해 우리는 매일 삶을 돌아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내 삶의 자리로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쉬고) 빌레몬서를 보면 여러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중 주된 사람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그리고 바울이에요.
오네시모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어요.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고, 그를 통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완전히 변화되었어요.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주에 좀 더 나누도록 하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쓴 편지의 서두를 오늘 함께 살펴보려고 해요.
(쉬고) 바울은 빌레몬서를 통해 빌레몬에게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게 딱 한가지를 요청해요.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맞아달라.
(쉬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당신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를 당신에게 돌려보내려 하는데, 이전에 그가 지었던 죄에 대해 논하지 말아달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기억해 달라. 라고 말해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일까요?
용납하고 용서하며 품어주는 것이에요.
바울을 만나기 전의 오네시모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게으르고 악한 종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오네시모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거듭난, 이전과 달라진 사람이 되었어요.
죄인. 종의 정체성을 가졌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전의 오네시모는 분명히 잘못했지만, 지금 너에게 돌아가는 오네시모는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고백한 사람이다.
우리와 똑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니 그를 다르게 대해주기를 원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사랑과 믿음에 어울리는 선택을 하라.
너가 믿고 있는 예수를 의지하여, 오네시모를 품어주고 용서하며 그를 동일한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죠
(쉬고)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빌레몬은 바울을 정말로 리스펙하던 사람이라는 거에요.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받아줘"라고 하지 않고 “오네시모를 용서해라"라고 해도 빌레몬은 그대로 했을 사람이에요. 그만큼 바울을 믿고 신뢰하며 리스펙하고 있었어요.
바울이 쓴 성경들을 보면 대부분 “그리스도의 사도된 나 바울"이라고 시작을 하는데 오늘 빌레몬서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없어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자신을 표현해요.
바울은 자신이 빌레몬에게 내 말대로 하라고 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이 있었지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빌레몬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느냐라고 물으며 그 것을 허락해주기를 바란다. 라고 요청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진정한 용서와 사랑강요나 재촉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누군가 재촉하거나 강요하면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내면의 감정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도 사랑도 될 수 없어요.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받아주기를 요청하면서 2절. 동시에 자매 압비아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도 인사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오네시모를 받아드리고 용납하고 사랑으로 대해주어야 하는 대상이 빌레몬뿐만 아니라, 그 교회 교인 전체이기 때문이에요.
배신하고 도망쳤던 종을 다시 맞이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빌레몬만 받아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교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빌레몬은 자신의 집을 내어주어 교회를 세웠고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거든요.
오네시모를 받아드리는 것은 빌레몬과 교회 전체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라는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으라"라고 강요하거나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지 않고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품어주기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거에요.
(쉬고) 빌레몬에 대해 알아보면, 그의 이름의 뜻은 애정 있는 사람, 사랑의 사람이에요. 바울은 그러한 빌레몬을 향해 나의 사랑을 받는 자. 라고 이야기를 해요.
바울이 빌레몬을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식어에요. 이름의 뜻대로 사랑이 많은 빌레몬을 바울이 더 큰 사랑으로 아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을 향해 동역자.라고 표현을 해요.
바울에게 있어 동역자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해요. 바울이 여기에서 동역자라고 말하며 사용한 헬라어는 ‘쉰에르고스'인데,
이 것은 같이 일하는 사람.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함께 손을 잡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처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어주고 잡고 함께 걸아갈 수 있는 사람.
때에 따라 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바울에게 있어 빌레몬이라는 것이죠.
(쉬고) 2절을 보면 바울이 압비아를 자매라고 말하고 있어요.
로마 헬라 사회는 굉장한 가부장적 사회였어요. 여성의 인격이나 지위가 무시당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와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자매'라는 친근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압비아를 향해 ‘자매'라고 말해요.
그리고 아킵보를 향해선 함께 병사 된 이라고 말하고 있죠.
너는 내 동료야. 내 동역자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동료 병사라는 말은 아킵보에게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어요.
왜냐하면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이제 막 신앙 생활을 시작했던 터라 눈치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라고 생각도 하고 또 작은 것에 실족하고 넘어지면서 “나는 쓰레기야. 나같은 놈이 무슨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은 나를 싫어하실거야" 등등 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던 초신자를 향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믿음의 선배이면서 스승인 바울이 “동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초신자들에게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 답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 맞을까?
하나님이 나에게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던 그와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잘하고 있고 잘해내고 있다라는 위로와 독려이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 너가 틀렸어. 말씀대로 살아야지 라는 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내고 있고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 라고 말하는 그 위로가 정말로 필요하거든요.
아킵보에게 “함께 병사 된"이라는 이 말은
‘나도 바울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도전
‘믿음이 부족한 나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구나'라 위로의 은혜가 함께 했을거에요.
(쉬고)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빌레몬이 바울을 알고 사랑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여자인 압비아에게 자매라고 친근하게 표현하면서 그 여인의 존엄성을 세워줄 수 있는 이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고, 동일한 믿음의 시련을 겪지 않는 젊은 청년에게 ‘동료 병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바로 복음 안에서 만났기 때문이에요.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즉,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공동체로 묶일 수 있었던 이유“하나님 우리주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잘보면, 10절 전까지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아요.
빌레몬과 교회 사람들은 이 편지를 받아 들고 읽어 내려가면서,
바울과 우리가 한 공동체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참 큰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었을거에요.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무리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웠을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각자 다른 삶의 무게와 자리를 살아가던 우리가 모이고,
함께 뛰고 찬양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 우리 주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 아닌가요?
(쉬고) 우리가 사회에서 만났으면 한마디라도 나누었을까요?
여러분이 저를 사회에서 만났으면 말이라도 걸었을까요?
이렇게 다 다른 우리가 모여서, 같은 말씀을 나누고 같은 하나님을 붙잡는 모습들기적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는거에요.
바울은 빌레몬과 교인들에게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때문이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은혜와 평강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은혜와 평강"이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인이 매일 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은혜와 평강이에요.
은혜는 우리 믿음의 시작과도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붙잡고 고백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거든요.
평강은 우리 믿음의 마지막과 같아요.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삶이 바로 평강이에요.
예수님께서도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여러번 말씀하셨어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바로 ‘평강'이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정말로 은혜를 경험했다면 삶 속에서 평강. 평안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며, 평강을 간절히 구하며 살아야 해요.
(쉬고)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할때가 많죠. 평안. 평강보다는 불화, 분노, 불평등이 더 가득할 때가 많아요.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는데 내면에 평화가 없을 때가 더 많은 정말 이상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평강과 정확히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가요.
우리 스스로가 평강을 깨뜨리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체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의 정체성. 평강을 누리는 삶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데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는거죠.
내가 내 스스로 평강을 부수고, 정체성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에요.
여러분 제가 정말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분명한 한계가 있어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납해주는 것에는 분명한 마지노선이 있다는거에요.
사랑하라. 예수님처럼 용서하라. 예수님을 닮아가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조건 용납하고 사랑하고 져주라는 뜻이 아니에요.
인간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존재에요.
선을 긋는 것도 중요해요.
품어 주어야 해!
사랑해야 해!
교회 공동체니까 용서해야지! 나라도 품어주어야지!!
그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거야!!!
라는 생각에 함몰되지 마세요.
서로를 위해 단호함이 필요해요.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 맞아요. 주어야 해요.
하지만 그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에 있어 내가 을이 되거나 약자가 될 필요가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면서 나를 위한 선을 만들어야 해요.
정말로 상대를 챙기고 품고 싶다면, 나부터 힘을 잃지 않아야 해요.
내가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평강은 깨어져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오히려 내가 배려하고 품어주던 상대에게서 ‘사랑이 없다' ‘변했다'라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게 돼요.
사랑하고 용납하는 과정에서 나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그 과정에서 나를 잃어버리거나, 내가 을이 되거나 약자가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를 품고 사랑하고 용납해 줄 수 없어요.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낙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거든요.
“예수님을 닮다"라는 것
품을 수 없는 존재를 억지로 품으며 아파하고 감내하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에게 있어 그 사람도 중요하지만 여러분도 중요해요.
내가 나를 잃어가면서 누군가를 품어주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을 깨뜨리고 불안의 자리로 나아가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려면 여러분이 먼저 바로 서야 해요.
내가 먼저 서야 다른 사람을 품고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겨요.
다 개인의 짐으로 짊어지고 가려고 하지 마세요. 선을 긋고 밀어냄으로 여러분이 먼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세요.

너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강을 정말 누리며 살아가려면, 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해요.
은혜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일방적인 감사한 은혜에요.
우리는 평강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 주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평강을 받고 누릴 수 있게 된거에요.
(쉬고) 더 이상 스스로 을이 되거나 약자가 되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품으며 스스로의 평강을 깨뜨리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강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선을 확실히 긋고 나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어요.
나와 같은 평강이 없는 상대를 위해 기도하는거에요.
(쉬고) 4절. 바울은 빌레몬을 위해 기도 할 때마다 감사가 나온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평강을 모르고 살아가던 존재였던 빌레몬이 예수를 만나 변화되었고, 그 안에 평강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내 절로 감사가 나온다는거에요.
바울은 빌레몬을 볼 때마다, 생각 할 때 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어요.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었고 예수님을 몰라 불안에 떨다 죽어 지옥에 갈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가 예수를 믿고 집을 내주어 교회도 세우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겨주고 있어요.
그리고 7절의 말씀처럼 기쁨과 위로를 주는 사람으로 성장했거든요.
(쉬고) 여러분은 옆 사람에게, 동역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괴롭히고 상처를 주어 나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싶은가요?
아니면 나로 인해 평안함을 얻었다. 나로 인해 위로함을 얻고 있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가요?
(쉬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너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평안함을 얻고 있다.
너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정말 잘 흘려보내주고 있다! 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쉬고) 여러분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보여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에요.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고 계셨던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매일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에요.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동요하지 않고 세상에서 버티며 살아갈 수 있어요.
그 삶을 이루는데에 나를 힘들게 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하세요. 그에게도 나와 같은 평강이 있기를!! 바래야 해요.
(쉬고) 너로 말미암아 내 옆에 있는 동역자가 평강을 누리고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우리가 정말 공동체라면 ‘나로 말미암아' ‘너로 말미암아' 서로가 위로가 되고 도전을 주고 받는 내가 되어야 해요.
(쉬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평강을 위해 기도 하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래요.
그리고 그 평강을 내 주위 사람들에게 잘 흘려보내는 은혜가 동시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이번 주 미션은 빌레몬서 1장 3절을 적고 외우는거에요. 나눌 수 있는 곳에 나누면서 나로 말미암아 상대방에게 은혜와 평강이 넘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세요.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힘을 얻고 은혜를 누리고 평강을 주고 받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