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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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 1)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 2) 소명을 통해 들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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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일

우리에 가장 가치 있는 일
본문말씀: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고별하며 나눴던 대화의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이 한 지역에 머물면서 전도한 지역 중 가장 오랜 시간 체류한 지역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서 대략 3년 동안 머물면서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로마로 이송되기 전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에베소 성도들과 대화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19:21절 말씀에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가보 선지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로마로 가는 것을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심을 따라 그 곳에 가려고 했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해주는 구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했던 행동은 히브리말로 그가 만났던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증거 했던 것 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했던 게 바로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살고, 죽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것 보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에 목말라 하는 현대인들...)
여러분들은, 왜 젊은 사람들이 요즘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에 대해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바로 그 교회’의 저자이며, 현대 교회의 건강 도를 점검하는 일을 하시는 컨설턴트 김성진 소장님의 진단에 귀 기울여보고 싶습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간략하게 말합니다. “젊은이들은 교회에서 하는 헌신, 설교, 헌금, 선교 등에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돈을 투자할 줄 몰라서 교회에 헌금을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현대 교회에 자신이 소중하게 번 돈을 투자하거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있는 젊은이들은 NGO 기관인 기아대책이나 그 외의 자선 단체에 돈을 기부합니다. 그 이유는 말만 많고, 행함과 진실함을 잃은 교회보다는 실질적이고, 행동하는 단체들이 그들이 볼 때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요즘 젊은 사람들과 현대인들은 가치에 목말라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곳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인디아나존스 시리즈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희소성 있는 물건들을 찾아 모험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조차도 마음을 졸이며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에 집중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일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기 원합니다. 그렇다고 가치 있는 일에 목숨을 내 놓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숨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돈도 명예도 그 어떤 즐거움도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1년 1월 26일 일본 신오쿠보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6살 한국인 청년은 술에 만취하여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함께 전철에 치여 사망했습니다. 한국인 청년이 알지도 못하는 일본인을 구하려다 죽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매스컴은 일제히 이 사건을 이와 같이 보도했습니다. “술 취한 승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진 살신성인의 한 사람.”
그 살신성인의 한 사람은 대한민국이 낳은 아들 이수현씨였습니다. 이수현씨는 부산 출신으로 고려대를 휴학하고 99년 11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한국인 청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 남다른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타인을 위해서 희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이수현씨가 사고를 당한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나 또한 철도로 뛰어 들어 그 사람을 구했을까? 갑자기 손발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검은 터널 끝에서 전철이 들어오는 요란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순간 제게 밀려온 공포 때문에, 저는 온몸이 굳어버렸습니다. 그 순간 전철은 넘어져 있는 취객을 치고 제 앞에서 서서히 멈추었습니다. 저는 그 짧은 순간에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저 전철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만보고 있어야 할 뿐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게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수현씨는 어떻게 그 위급한 순간에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즉각 철로로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분명 한 순간 충동으로 일어난 행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지하철 안으로 전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취객을 구하겠다고, 그 죽음의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용기는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는 남다른 정의감과 희생정신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덕목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가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안타깝지만 이수현씨는 그 일본인을 구하지도 못하고, 함께 전철에 치여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수현씨에게 있어서 그 일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선택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런 고별인사를 합니다. 사도행전 20:23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 그리고 로마로 향하는 것은 그의 삶에 ‘환란’을 자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곳에 가야 했던 것 입니다. 고 이수현씨가 철로에 뛰어 내릴 때 그 곳은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그 곳에 가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히는 운명을 맞이하면서까지 그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골고다로 향해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환란과 죽음을 직면 하면서 까지도 어떠한 상황에서 자신을 아끼지 않는 이유는 그 무언가에 자에게는 엄청난 가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무엇일까?”를 묵상하게 됐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을 통해 크리스챤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제 표현으로 바꾸어보았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탈선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은혜의 복음을 잘 전할 수만 있다면 나의 목숨도 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개혁 성경에는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이란 표현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아직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즉 그 일을 마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표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하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 본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Ac 20:24, NLT)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바울은 오늘 무엇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복음은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특별한 호의와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공짜 복음이 뭐가 그토록 가치가 있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공짜로 받은 복음을 통해 사도 바울은 거듭나게 되었고, 새로운 삶의 가치와 목표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은혜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성경 말씀이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버지 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아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참으로 부유하시고, 자비하시며, 사랑이 많다는 것을 뒤 늦게깨닫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탕진한 후에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존스토트는 이 부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십자가를 언급한 곳은 없지만, 그것을 여러 곳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가 아들을 멀리서 보고 측은히 여겨 만나기 위해 달려가서 환영한 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면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 품에 안겨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회심자만이 이 놀라운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한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 처단하실 수 있으셨을텐데 도리어 자신을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왕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선택해주신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몸소 경험했던 것입니다.
천관웅 목사님의 찬양 중 밀알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의 가사 중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 낳고, 주님 볼 수 있다면 나의 삶과 죽음도 아낌없이 드리리 죽어야 다시 사는 주의 말씀 믿으며 한 알의 밀알 되어 썩어지리니 예수님처럼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는 이처럼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가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받은 이 놀라운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에 크나큰 가치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전하는, 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첫째는 자신이 달려갈 길을 끝까지 마치는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아직 끝까지 달려가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달려가고 있는 그 길을 마치기를 원했습니다. 믿음의 순례의 여정을 끝까지 잘 마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도 자기가 달려가고 있는 길에서 탈선하거나 멈추어 설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표현한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신앙인은 천국 문에 이를 때 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고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사도바울 또한 자신이 전하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 말씀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렇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 존경 받는 장로, 집사님이라도 마지막 때에 믿음을 져버리고 타락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헌신했던 자였습니다. 나머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고,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에 포함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으로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시고, 마음을 울리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 분의 감화력 있는 설교도 수차례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바라보고, 자신에게 맡겨진 회개의 업무를 정직하게 하지 않았을 때 사단은 그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파멸의 자리로 몰아갔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4절 말씀에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 말씀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대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유다는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은 30십에 팔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품었을 때 사단이 자신을 유혹할 틈을 열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에베소서 4:27절 말씀을 통하여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절대로 강제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지, 정, 의를 통해 우리가 악한 생각을 하고, 그로 인해 악한 행동을 동반할 때 사단에게 틈을 내어 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실패를 사단에게만 나무랄 수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부디 성경적이고, 밝고 맑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양한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거룩하고, 밝고, 맑으며, 상식에 어긋나지 않도록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우리의 행동을 낳는 주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의 원어인 metavnoia(메타노이아)의 뜻이 “생각을 바꾸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이 자신을 연마하는 수행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이 거룩해 지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가까이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즉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거야라고 백번 외치고 외칠 때마다 그 문제는 자신을 더 감싸게 되고, 더 많은 시간 그 문제에 싸여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관심사를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즉 십자가로 옮기면 어느덧 그 문제는 십자가 뒤에 가려져 작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님의 증언을 들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할 때, ”나의 죄를 없애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리를 얻으려면 반드시 이 일을 해야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만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는 사라지고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선물도 이미 받았으니, 하나님이 내 편이고 나를 도우시리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따를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순종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 고난과 기쁨을 그분과 함께 맛보면서 날마다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행할 것이다.“ (존파이퍼, 로마서 1권 P232) 즉 하나님께 집중하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행동하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존 스토트의 책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에게 햄릿이나 리어 왕 같은 희곡을 주면서 그와 같은 희곡을 쓰라고 말해보았자 헛된 일 뿐이다. 나는 할 수 없다. 나에게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헛일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천재성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희곡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신다면 나는 그 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 복음 안에서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신앙의 여정에 성령님을 여러분들의 삶에 인도자요, 조력자요, 보호자요, 변호자로 인정하시고, 모셔 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기독교인이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참으로 우리의 인생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삶 또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그가 1, 2, 3차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에 그는 줄곧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는 고별설교 시에도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2, 23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결박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 21장4절 말씀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전하는 메시지라며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바울을 설득해 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분명 바울 또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전하는 메시지라고 말하는 제자들의 말에 한 순간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매일매일 말씀하시는 성령님이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성령께서 아주 선명하게 바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분명 바울이 가고 있는 그 길은 아주 가치 있는 길이며, 그 가치 있는 삶과 선택에 성령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의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신앙생활이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렇다고 이 가치 있는 삶을 중간에 포기하거나, 어영부영 살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따르고, 전하는 삶은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살아 낼 수 있도록 도우시는 우리 성령님과 함께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다함께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가치 있는 삶은 우리의 사명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일이 그의 사명이었고, 그 사명을 통해 바울의 가치관은 세상에 들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명이라고 나와 있는 한글 표현의 영어 표현은 'Ministry'입니다. 이 단어의 원어는 ‘디아코니아’입니다. 디아코니아는 ‘섬기다, 봉사하다, 지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집사라는 표현은 ’디아코노스‘입니다. 디아코노스의 뜻은 시중드는 사람, 즉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끝마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 즉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통해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사람들이 들어야 그들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기 때문에, 금과 은은 줄 수 없어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던 것처럼 사명이란 우리의 'Ministry'이고 우리의 ‘디아코니아’인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섬기고, 봉사하는 일과 남을 온전하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명을 통하여 우리의 가치 있는 삶은 세상에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11, 12절 말씀에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면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도바울이나 오늘날의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나 사명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평신도들은 그런 특별한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명은 타인을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하여 사람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시명을 가지고 타인을 섬기시겠습니까? 타인을 섬겨주고 봉사하는 일에도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섬겨주셨습니다. 남을 섬겨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 꼭 신학교에 입학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벧전 2:9절의 말씀처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우리의 ‘Identity’이고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 자격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까? 성경은 어두웠던 곳에서 자신을 건져내 주신 예수님의 섬김과 헌신을 당신의 사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타인을 가장 잘 섬겨주는 일은, 타인의 영과 육을 살려주는 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 흘리시면서 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섬겨주셨습니까? 그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시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은과 금을 주어서 육체를 살찌우게 하는 것도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지만, 그 영혼이 죽은 이후에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진정 그 사람을 살리는 섬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또한 모진고초를 당하면서까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명은 우리의 소원과 직결돼 있다.)
사명과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2:13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소원은 저와 여러분 마음에 있는 염원의 마음, 어떠한 것을 갈망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과 로마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바람과 소원은 바울의 삶을 사명의 삶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사명을 따라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그 예루살렘과 로마에까지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다 바울과 같은 사명자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바울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을 것입니다. 이 사명을 이미도 발견하신 분들도 있으시고, 아직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사명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알치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배우 김혜자씨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으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저는 매일 죽음을 준비하며 삽니다. 영정사진도 준비해 놓았죠. 임종의 순간에 얼마나 소유했고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느냐로 평가받고 싶어요. 전세계 빈곤아동의 엄마로서 김혜자의 마지막 소원은 무엇일까.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과 음식이라면 세상의 헐벗고 배고픈 이들에게 제일 먼저 갈 겁니다. 그녀는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온 이후로 그 곳에서 만난 아이들과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꾸 생각나고 눈에 밟혔던 것입니다. 이것이 김혜자씨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매달 아프리카의 아이들 103명에게 일인당 매월 3만원씩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 남들은 잘 보지 못하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것, 이와 같은 사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이 사명을 통해 세상에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내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마 5:16, 개정)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은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은혜의 복음은 그의 사명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의 복음의 가치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여 부르시고,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나가게 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삶이 막막하고, 힘들며,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거 같습니다. 우리가 이 인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시명을 따라 삶을 가치 있게 살아낼 때 하나님은 참 하나님으로 우리의 삶과 세상에 경험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치 있는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끝까지 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명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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