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에서 게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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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에게 찾아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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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바꾸어시는 변화

본문: 요한복음 1:35-42
John 1:35–42 NKRV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시몬에서 게바까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나 주셨던 장면의 내용입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시면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실 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이란 이름은 유대식 이름으로 당시 흔했던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그 뜻은 “들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특별한 사건들을 통해 이름을 개명해 주시는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삶의 존재 방식, 삶의 추구점, 삶의 이유와 목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개명을 통해 말씀해 주고 있으신 것입니다.
시몬은 다혈질적이고, 성격이 무척 급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우지 못했고, 가난했습니다. 그는 수동적으로 듣고 쉽게 잊어 버리거나, 들었던 것을 곱씹으며 사고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이름처럼 그저 “들음”에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사장, 마가복음 일장, 누가복음 오장에서 갈리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나 주셨던 내용과는 다른 사건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즉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에서 나오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주셨던 사건보다 앞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시몬을 먼저 만나 주셨고, 공관복음의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그 이후 재차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났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전제하시고 오늘의 말씀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주셨던 내용은 저자들 마다 서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사건들은 같은 내용을 세리 마태라는 관점에서, 청년 마가라는 관점에서, 의사 누가라는 관점에서 기록했던 것입니다. 즉 서로 같은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사건 자체가 다른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를 갈릴리 바다에서 만나 주시기 전에 베다니 근방에서 먼저 만나 주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들었던 ‘복음’, 그 외의 말씀에 큰 감흥을 받지 못하고 자신이 활동 지역인 갈릴리로 돌아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어업활동을 계속 했다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몬은 ‘들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듣는 영성을 넘지 못하는 시몬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 42절 말씀을 통해 ‘들음을 넘어 행하는 영성’으로의 삶의 전환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4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 1:42
John 1:42 NKRV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마태, 마가, 누가는 이 ‘들음을 넘어 행하는 영성’에 대해 이와 같은 표현을 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이 그의 존재와 삶의 방식을 바로 바꿀 수 있는 이름으로 바로 바뀌지는 못할 것이라는 단서를 ‘장차’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과거형입니까? 현재형입니까? 미래형입니까? 그렇습니다. 미래형입니다.
베드로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원어는 ‘페트로스’입니다. 그 뜻은 ‘바위 조각’입니다. 반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헬라어 ‘페트라’ ‘바위’입니다. 이를 아람어로는 ‘게바’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즉 들음의 삶을 ‘게바’, 즉 반석의 삶으로 변화 시켜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초기 교부이자, 설교가로 유명했던 크리소스톰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 사실은 옛계약을 하셨던 분, 즉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그리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신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 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찾아 만나 주셨고 그의 이름을 장차 ‘게바’로 바꾸시어 하나님께서 아브람(큰 아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되게 하시고 사래(공주)를 사라(열국의 어미),되게 하시고 야곱(발뒷꿈치를 잡은 자),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되게 하셨던 것 처럼 예수님도 베드로를 시몬(들음)에서 게바, 베드로(반석)으로 빗어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 베드로의 인생은 하루 아침에 반석 위에 우뚝 선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생을 앞에서 끌어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시는 은혜를 보여주심으로 그를 단순 ‘들음’의 영성에서 ‘반석’ 행함의 영성으로 빗어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한번 듣는 것이 사람을 쉽게 변화시킬 수 없다는 단서가 등장합니다. 이는 듣는 것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게 필요하고,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9
John 1:29 NKRV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그저 듣고만 있지 행함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라는 제자가 있을뿐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은 무수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제자 하나도 세례 요한이 목놓아 선포하고 있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제자들의 반응과 회중들의 반응에 연연했던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성을 가진 자였습니다. 태어난 사람 중 세례 요한과 같이 훌륭한 사람이 없다는 칭찬을 들었던 자가 세례 요한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제자들과 회중들의 무반응 속에서도 다음날도 같은 메세지를 증거합니다. 요한복음 1:36
John 1:36 NKRV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동일한 메세지를 선포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런데 그 날은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37
John 1:37 NKRV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여러분 시몬 “들음”은 장차 “게바”, 반석이 된다는 말씀은 우리가 듣는 것 마다 순종할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장차”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진리가 있음을 명시해 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들음”은 시작이고 과정이고 훈련이 될 것이지만, 장차 반드시 “반석”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재차 동일한 말씀을 선포했던 날에는 두 제자는 들었던 것입니다. 비록 첫번째 들렸을 때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제자들이 재차 듣게 되는 과정 속에서 반응 하는 제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바꾸어야 할 것들을 즉시 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몬에서 게바까지의 공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들음 2. 따름 3. 버림
1. 들음 2. 따름 3. 버림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게바로 바꾸어 주시면서 시몬의 삶에 1. 들음 2. 따름 3. 버림의 훈련이 따를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이 “장차”시몬에서 게바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서 확인해 볼 수 있어어 합니다.
요한의 제자 였던 안드레가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에게 자신이 들었던 복음을 “즉시” 전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공관복음에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모습과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배와 자신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여러분 들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체, 멈춰 서 있습니다. 마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란에서 지체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듣고 마음에 깨달아지는 부분은 지체하지 마시고 즉시 실행에 옮기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복음을 알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더욱 더 그래야 합니다.
존 칼빈은 예수님께 복음을 듣고 신속하게 반응한 안드레를 생각하며 이와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철저히 알게 된 후에 다른 사람들도 그 은혜를 함께 나누는 자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그 나태를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존 칼빈-
듣고 지체하는 것, 멈추어 있는 것을 가리켜 칼빈은 “나태”라고 표현했습니다.
안드레는 듣고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John 1:40 NKRV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렇습니다.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시몬의 형제인 안드레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에게 자기가 보고 들었던 놀라움을 즉시 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앞날을 내다보시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John 1:42 NKRV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장차 게바라 하리라....
베드로는 자신의 동생 안드레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실제 만났지만 그의 말씀을 그저 듣기만 했지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후 다시 자기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지만 그는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 자로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후 예수님과 베드로가 재차 만나게 된 사건들을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 게네사렛, 디베랴 바다에서 예수님께서 재차 베드로와 안드레를 찾아가 그들의 배 위로 올라가시어 재차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해 주셨던 것입니다. 갈리리, 게네사렛,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의 주변 지역으로 갈릴리 호수를 지칭하는 동일한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밈암인 줄 믿습니다. 시몬은 장차 게바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 듣고, 확인하고, 경험하고, 실수하며 단단한 반석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문제 앞에 들으십시오!
지금 여러분들 앞에 있는 그 시련도 시몬에서 게바가 되게 하시려는 과정의 일부일 것입니다. 이를 알고 계신 분들은 “아! 또 시련이 왔구나…!”라고 속으로 말하며 외부에 펼쳐지고 있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문제가 있으니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는 거 아니야! 문제가 있으니 지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는 거 아니야! 문제가 있으니 나는 망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경험하고,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그 문제 앞에서 기도하며 버텨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과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문제를 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에게 있어서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은 생계와 연관 되었고, 베드로는 결혼까지 했을 뿐 아니라 장모님도 모시고 있었기에 다른 총각 어부들보다 큰 문제를 떠 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가 시몬을 게바로 빗어가야 할 절호의 찬스라는 것을 아시고 시몬의 배에 우연을 가장하여 타십니다. 눅 5:3
Luke 5:3 NKRV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사건으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 오십니다.
우연한 만남인 줄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 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인 줄 알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자신의 배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또 그저 수동적으로 들으려고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의 귀에 너무 잘 들어올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목수인 예수님께서 어부인 시몬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였던 태도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요한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베드로보다 예수님의 제자가 먼저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안드레는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활하셨던 나사렛이란 지역은 갈릴리와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떠한 삶을 사시다 가버나움을 거쳐 갈릴리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안드레는 듣고 이를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분명 자신에게 명령하는 예수님께서 어업 활동에 문외한 사람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명령이 들려 왔을 때 행동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때 시몬이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그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씀으로 역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 중에 좀처럼 주님께 돌아올 여지가 보이지 않는 남편, 부인, 자녀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들도 은혜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려주시고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그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Luke 5:5 NKRV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내 경험과 상식에 의지하지 않고, 당신을 의지해보고 내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보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몬, 들음이 예수님이란 반석 위에 자신의 삶을 올려 놓았던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깨서 시몬에서 장차 게바가 되게 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시몬의 삶에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따름-버림....
버림의 단계
시몬이 듣고, 그 다음 단계인 따름을 실시 했더니 그에게 “버림”에 단계의 과정이 펼쳐집니다. 누가복음 5:8
Luke 5:8 NKRV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에 대해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까의 저자 신현우 교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문맥상 분순종으로 인한 죄인이 아니라, 주의 능력과 위엄 앞에서 느끼는 일반적 무가치함으로 인한 죄인을 뜻한다.” -신현우,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자신이 붙들고 있었던 아집과 고집, 집착과 자랑 모든 것이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니 무가치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시몬은 이와 같이 고백했던 것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에 대해 랍비여,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시몬과 안드레였는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의 역사하심 앞에 ‘자신의 무가치함’을 발견하고 그 호칭을 바꾸어 부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듣고, 따르며 다양한 것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버림의 단계를 지속 반복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종교 창시자요, 나보다 뛰어난 성인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듣고, 즉시 따라보십시오. 하지만 그 앞에 문제가 펼쳦질 수 있습니다. 그 다양한 문제 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의 아집과 고집 생각과 뜻이 얼마나 볼품 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버림”의 과정을 지속 반복적으로 경험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라고 말씀하시며 시몬을 바로 게바 되게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버림의 단계를 통해
베드로는 그물을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여러분 듣고, 따르고, 그로 인해 경험되어지는 다양한 시험 앞에서 분명 저와 여러분들은 희생, 포기, 내려 놓음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의 말씀 의지하여 희생, 포기, 내려놓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버림”의 단계를 거쳐가게 하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시몬에서 게바로 나아가게 하시는 은혜를 더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버림이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생업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예수를 따른 이후에 자신의 가족을 돌보았던 정황들이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가 장모을 모시고 살았다는 증거마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는 사도 바울과 같이 결혼도 안 하고 신부와 같이 자신의 삶을 다 드리며 하나님을 따라가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육하고 땅에 번성해야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대부분은 결혼을 하셔야 하고 이 세상의 있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관리하기 위해서 세상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가로 남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 대분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양용의 교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생업과 가족을 버렸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가족과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8:14(장모). 그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그 어떤 삶의 방식이나 가족 관계도 예수를 따르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정립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양용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들음, 따름, 버림의 과정을 거친 시몬에게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와 마가는 이에 대해 “사람을 낚는 어부”라 표현 했습니다.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I will make you become fishers of men
(누가는 앞으로 만들어 주겠다. 훈련시켜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표현을 통해 시몬이 장차 게바가 되는 데 다양한 훈련과 과정이 포함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사람을 취하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눅 5:10
Luke 5:10 NKRV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취하다”라고 버너역된 헬라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한다면 “사로잡다”라는 뜻입니다.
2 Timothy 2:26 NKRV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기 위해 취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다양한 문맥속에서 ‘그물’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는 잘못된 예배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는 어부들을 보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렘 16:16). 예레미야가 말한 낚시는 심판을 목적으로 죄인들을 모으는 것이므로, 사냥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4:2에는 낚시 바늘에 꿰여 잡혀가는 심판의 그림이 나온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약속하는 이미지로 낚시를 사용한다(겔 29:3~16; 참조. 마 13:47).
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하셨을 때의 그물은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무리를 회복시킬 일꾼들로 제자들을 부르신 문맥을 통해(9:36~37), 예수님께서 그물로 사람들을 낚는 동기는 심판이 아니라 긍휼이며 그 목적은 회복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하러 오셨으므로, 사람을 낚는 제자들의 삶은 사실상 예수의 사역을 재연하고 계승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13:47~50(하나님 나라)에도 그물 이미지가 나오는데, 이는 마지막 날에 천사들이 사람들을 모으고 의인과 악인으로 분리시키는 장면이며 마지막 날의 “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4:19과 13:47에서 종말의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하늘나라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 그물의 역할도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말씀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소생시키고, 회복시키고, 살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 들이시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생업을 포기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양용의 교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잘못된 사고관, 세계관, 물질관을 사람을 살리는 기독교적인 사고관, 세계관, 물질관으로 바꾸어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고, 선생님은 제자들을 교육하고, 목사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소방관은 변화된 소명 의식을 가지고 불을 끄고, 경찰관은 변화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치안에 신경써 주시고,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변화된 물질관을 가지고 돈을 다스리고, 미용실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변화된 의식을 가지고 손님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며 나아갈 때
수많은 시몬이 변화되어 게바로서 영혼들을 직간접적으로 살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역은 그물과 같이 서로가 서로 연결된 사역이 될 것이고, 그 그물 안에 걸려 들어온 또 다른 시몬을 우리는 게바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종사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그 물을 펼쳐 예전에 듣고 무시했던 자신과 같은 시몬들을 건져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과 모습은 각기 다양할 것입니다. 모두가 목사일 수 없고, 모두가 신학자일 수 없는 것 처럼 여러분들이 현재 던지고 있는 그 그물의 용도와 목적을 사람을 살리는 용도와 목적으로 바꾸라는 명령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고, 버림의 과정을 거치게 될 때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수 많은 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들음과 행함 그리고 버림의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시몬에서 게바로 빗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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