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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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순간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만남의 순간, 삭개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만남의 순간’이란 표현은 참으로 설레는 표현입니다. 제가 제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가 유치원생일 때 서울에 있는 ‘가산중앙교회’에서 였습니다. 지금도 ‘가산중앙교회’에서 저의 장인, 장모님과 저희 부모님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저와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교회를 다녔고 부모님도 같은 교회를 섬기며 가산중앙교회가 개척교회에서부터 중형교회로까지 성장하는 동안 양가 부모님들은 장로와 권사로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물론 부모님들은 이미 은퇴을 하셨습니다.
저는 아내를 ‘만나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예수님을 매일 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성을 만드시고 그 여성을 남편의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는 데에는 남편과 부인의 ‘만남’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 맞지 않아 싸우고, 싸우고, 싸우며 서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과정을 통해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Genesis 1:27 NKRV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부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는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잘 녹아져 있는 공동체가 바로 부부 공동체, 가족 공동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 연약한 부분을 돕고 도와가며 서로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부부에게 있는 연약함을 보강하시어 서로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형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가장 뚜렷하게 교차하는 공동체가 부부공동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부부로 살아가는 수 많은 남성과 여성이 둘 중 하나라도 ‘만남의 순간’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면 그 만남을 통해 부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 부부가 모두 ‘만남의 순간’ 예수님을 모두 만나게 된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은 부부 공동체를 통해 남편과 부인 모두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만남의 순간’ 삭개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름의 뜻은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그의 부모님은 ‘삭개오’를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길러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과 같이 자라주지 않는 게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녀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혹시나 여러분들의 자녀가 ‘의로운 사람’으로 잘 자라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남다른 은혜를 주셔서 자녀가 평탄히 자라고 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신의 교육방법과 남다른 자녀 양육방식으로 자녀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을 한다면 교육 자체가 통하지 않는 자녀를 만나게 될 때 자신이 교만했다는 사실을 뒤 늦게 깨닫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삭개오의 부모도 삭개오를 남다른 방법으로 양육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을 치리하고 있던 환경에서 자라났던 삭개오는 어려서부터 분명 아무런 계획 없이 불의에 맞서서는 안 되고 힘이 있는 자에게 붙어서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교육방식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상이 악하고 악한데 자신만 의롭게 행동한다고 하여서 그 누가 인정해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는 자신의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투쟁과 경쟁을 통해 사회에서 인정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직업을 이와 같이 묘사합니다. 눅 19:2
Luke 19:2 NKRV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일반적인 세리가 아니라 그 세리들을 관리하는 ‘세리장’이라고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는 분명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렷을 때부터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세리가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과 로마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습득해야 할 뿐아니라 셈에도 능통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신학박사 김홍전 목사님은 그의 저서 ‘예수님의 행전’이란 책에서 세관에 대해 이와 같이 진술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서 미관 말직으로 일하던 미미한 그런 사람이 아니고 교육도 상당히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관은 로마나 혹은 팔레스틴 이외의 다른 곳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큰 통로에 세워진 것입니다. 마태가 여기에 앉아서 일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외국 상인이나 대상을 상대로 세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일반 히브리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언, 즉 아람 방언 하나만 가지고 쓰지 않고 당시 지식분자들이 서로 지식을 교류하는 데 중요히 썼던 헬라 말도 알았을 것이고 혹은 로마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라틴 말, 즉 로마 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 세리가 되기 위해서도 다양한 검증이 이루어진 이후에 그 중 뛰어난 사람을 로마인들이 뽑아 세금을 걷게 하는 세리로 고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일반 세리가 아니라 세리들을 관리하는 ‘세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세관 업무를 보던 곳이 세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의 책임자가 바로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세리라고 불린 세관 직원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습니다. 이정도면 크게 성공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관 업무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가리켜 “부자”였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세관 시스템에 대해 김형국 목사님은 그의 저서 ‘만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당시 세관 업무는 중앙 정부, 즉 로마 제국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누구는 얼마, 또 누구는 얼마씩 세금을 내라”고 개인별로 지정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은 세금으로 이만큼을 내라”고 전체 금액만 정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세관장은 관할 지역 사람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중앙 정부로 보낸 후, 남은 돈은 자기가 취했습니다. 세관 업무를 보는 사람이 중간에 얼마를 가져가든 로마 제국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지역에 할당한 세금만 잘 거둬들이면 괜찮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관 업무를 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금을 많이 걷어 남는 금액을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 중에 부자가 많았습니다. 삭개오 역시 부자였고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삭개오는 당시 불안한 사회 환경에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엘리트로 꼽힐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일어나야 하는 경쟁 시스템에 뛰어 들어 3명의 세리장만 존재했던 이스라엘에 ‘세리장’으로 뽑혔던 인물이 삭개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경쟁이 선의 목표를 위해 선의의 경쟁을 벗어나 부정부패를 일삼고, 자기 중심성이란 죄에 갇혀 자신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한 경쟁이 될 때 그 경쟁은 그 경쟁에 참여한 대부분의 삶을 파괴하게 만듭니다.
오늘 날 수 많은 현대인들이 그 경쟁에 뛰어들어 소수 5%미만의 사람들만 그 정점에서 성공이란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95%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소수가 이루고자 하는 경쟁에 뛰어 들어 몸과 마음을 다치게 됩니다. 물론 그 소수 5%의 사람들도 자신이 이룬 그 성공 때문에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저와 아내는 아주 가난한 집안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야구선수로 활약을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운동을 지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 아내는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다 저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다 나은 위치에 서기 위해 경쟁 구도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교육대학원을 진학하여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아내도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저보다 앞서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먼저 마련했던 사람이 제 아내였습니다. 과외와 인터넷 강의등을 통해 받은 수강료로 자신이 원하는 교육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저는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칠 때 쯤 제가 이루려고하는 꿈에 회의가 들게 되어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저는 장교로 군복무를 마칠 때 쯤 교육 대학원 입학을 보류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군 생활 중 만났던 수 많은 장병들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를 교육대학원이 아닌 신학대학원으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절 다양한 혼란함 속에서 아내와 헤어질 생각까지 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갈 사람이고 저는 그 꿈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 아내가 제게 했던 말입니다. “나는 사모에 대해 잘 몰라.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가 되면 내가 사모가 되는 것이겠지.” 저는 그 말에 감동을 받기 보다 이 사람이 참 많이 모르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아내와 헤어질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아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제가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저는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내의 말에 설득이 됐고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삭개오가 세리장으로 살며 거듭거듭 고민했던 현실과 이상 사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저와 아내가 하도록 하셨습니다.
저와 아내는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결혼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유학시절 아내는 하루가 멀다하고 여행용 가방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저는 어려운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고군부투를 하지만 제 마음처럼 쉽게 따라갈 수 없는 현실에 고민하고 있을 때 찬이가 미국에서 태어나게 됐습니다. 저와 아내는 아들 찬이를 얻은 기쁨 때문에 유학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찬이의 이름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란 뜻을 부여하여 ‘김찬’으로 지었습니다. 3년 후 태어난 띨 란이도 동일한 의미로 ‘김란’으로 지었습니다. 찬이와 란이의 이름을 합쳐 부르면 ‘찬란’이 됩니다.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다가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성경 구석구석에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를 함축적인 표현으로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여리고에서 삭개오를 만난 이후 예루살렘에서 일주일을 보내신 이후에 십자가를 지실 것을 잘 아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신 이후에 대제사장의 재판장에 설 것까지 잘 아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의 재판장으로....
예수님께서는 빌리도의 형 확정판결을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실 것을 잘 아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시고 자신의 몸이 무덤에 이를 것을 잘 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무덤으로...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에서 죽음을 거쳐 ‘부활’에 이를 것을 잘 아셨습니다. 성육신에서 부활까지...
여러분 예수님의 발자취를 잘 따라가 보시면 그 분의 삶의 성공과 영광은 모두 ‘십자가’로 귀결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삭개오가 이에 대한 고민 때문에 힘겨워 했던 것입니다. 높은 직책도 얻었고, 돈도 많아 부자로 살고 있고, 자신의 노년마저도 보장되어 있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허전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형상에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할 때 천지신명이니 부처니하며 신적 존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어떠십니까?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명확한 로드맵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 경쟁을 통해 한 자리 하기 위해 오늘도 뛰고 있으십니까?
명석했던 삭개오는 아무리 생각해도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자신의 삶을 담보해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보통 세리들은 직업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 많은 셈을 해야하기 때문에 적고 적고 기록하는 직업 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도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그 의미와 내용을 곱씹어 보았을 것입니다.
어느날 자신과 동족업종에 종사했던 레위, 마태라는 사람이 세리의 직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마태도 세리였는데 그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중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 앞에 즉각 순종하여 예수님을 따라 갔고, 그 이후의 삶이 완전 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Luke 5:26–27 NKRV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에 대해 신학박사 김홍전 목사님께서는 그의 저서 “예수님의 행적”이란 책에 이와 같은 설명을 덧 붙였습니다.
“나를 쫓으라”는 그 말에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금방 쑥 일어나서 좇았겠는가? 그런 일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어떤 사상의 내용을 전달할 때 그것을 수긍하고 때닫고 자기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는 자발적인 자원의 심정이 생기는 데는 그럴 만한 정도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실 때 예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을 다 모아 가지고서 이리저리 끌고만 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항상 도전적인 설득을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말씀이 권능이 있다고 할 때 그 권능은 사람을 기계적으로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고, 또 그 사람을 제압하듯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를 해서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비취시지 아니하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취시기 이전에 ‘아, 그렇구나’하고 깨닫고 나올 만한 내용의 말이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만한 내용의 말을 마태에게 전하셨겠고, 또한 마태의 직무에 장해가 안 될 때를 보시고 그를 취하셨을 것입니다.”- 신학박사 김홍전-
그렇습니다. 마태도 그렇고, 삭개오도 그렇고 하루 아침에 예수님에 대해 호감을 갖았던 게 아닙니다. 그저 삶을 육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고민을 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누적되게 들려 왔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그들이 순종하여 자신들의 직업을 내려 놓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로 들어오셔서 제 2의 삭개오를 찾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접어든 경쟁 사회에서 회의를 느끼고,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는 이유는 대게 주변 사람들 중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 부도덕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거나 사회에 폐를 끼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꺼려하게 됩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의 역할로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삭게오도 세리 마태나 그외 세리들이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삶을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듣고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싶으십니까? 복음 앞에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인을 주님께로 인도하시기 원하십니까? 이론 보다 우리의 삶을 그들에게 먼저 아름답게 보여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의 삶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싶으십니까? 말보다 행함으로 교육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먼저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먼저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방식이 너무나도 은혜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 그 개인을 지명하여 찾아오신 방식을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70억 인구 중 세트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게 아니라 70억 인구 중에서 나 한 사람을 향한 맞춤형의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Luke 19:5 NKRV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러분 저를 따라 읽어 보겠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며 그 한 사람을 향한 맞춤형의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전도자들을 통해 다양한 사건과 기회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알도록 하셨는데 그 방식이 여러분 개개인을 향한 맞춤형의 방식으로 “아무개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는 말씀이 바로 “은혜의 복음”인 것입니다. “너 이놈! 세리! 할 짓이 없어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일을 했느냐?”라고 책망하시지 않고 “내가 너의 삶에 그저 함께하고 싶다. 내가 너와 대화를 하고 싶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 전까지 듣지 못했던 은혜의 복음 앞에 자신이 이전에 들었던 말씀인 자신과 같은 일을 했던 마태에게 일어났던 사건, 그외 세리들과 다양한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참으로 진실된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더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됩니다.
Luke 15:1 NKRV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누가복음 십오장에 말씀했던 사건들이 삭개오의 수첩 어딘가에 적혀 있었을 것이고 그는 그 수첩의 내용들을 살펴보며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 해답을 줄 수 있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오시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것은 너무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가치와 하늘나라의 소망을 복음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를 구원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있음에도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

삭개오가 세리 마태의 삶의 변화에 매력을 느끼고 예수님께 관심을 갖았던 것 처럼 말입니다. 삭개오가 아무런 근거 없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오시는데 자신의 키가 작음이란 제한과 돌감람나무 위를 기어 올라가야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기다렸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누군가의 삶이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 변화된 소식을 듣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도 그 사람처럼 변화된 삶을 통해 삶의 참된 목적과 비전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지금까지의 삶의 주인이었던 부와 명예와 권세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Luke 19:8 NKRV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자신의 소유를 팔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삭개오가 참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을 따를 수있게 된 것입니다. 진짜 만남은 진짜 구원을 이루게 합니다. 진짜 구원은 진실된 행함을 수반하게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과다 경쟁 사회에서 정점의 찍어본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회에서 상위 5%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당대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과도한 경쟁 구조 속에서 그의 부모가 지어준 “의로운 자”라는 자신의 이름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사람과 경쟁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승리자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인생의 질문이 던져졌던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또 이 땅에서 무엇을 하다, 또 어디로 가야하는가?”이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존재가 어디서 시작 되었고? 또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진단
이 질문 앞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야! 이정도 죄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죄도 아니야, 이 정도 죄도 안 짓 사는 사람이 어딨어? 종교인들은 더 추억하더구만!”이라고 말하며 과도한 경쟁 사회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영광 육을 진단하지 못하고 계속 잘 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삭개오가 잠시 멈추어 서서 했던 질문을 그들이 할 수만 있다면,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했던 질문을 그들을 할 수만 있다면,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허무와 무의미를 통해 발견한 질문들을 통해 신을 찾았던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해 질 수만 있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Luke 19:10 NKRV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괜찮아 톨스토이는 짧은 우화를 여러 개 썼는데 재밌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수도사에게 두 여인이 찾아와 그르침으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그러면 일단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참회부터 하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여인은 아주 큰 소리로 울면서 참회했습니다. 진심으로 큰 죄를 고백하며 참회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다른 여인은 맹숭맹숭하게 서 있었습니다. ‘참회할 게 별로 없는데? 나는 정상적으로 살았는데, 이 여자는 정말 죄를 많이 지었나 보네.’라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수도사는 두 여인에게 과제 하나를 주었습니다. 참회한 여인에게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을 들고 오세요.”라고 했고, 그냥 서 있던 여인에겐느 큰 자루를 주면서 “돌을 잔뜩 넣어서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한 여인은 큰 돌을 들고 왓고, 다른 한 여인은 자루에 돌으르 잔뜩 넣어 왔습니다.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자, 그럼 가지고 온 돌을 원래 자리에 갖다놓으세요.”그러자 큰 돌을 들고 왔던 여인은 돌을 그 자리에 갖다 두고 왔습니다. 하지만 자루에 돌을 잔뜩 넣어온 여인은 “이 많은 돌을 어떻게 제자리에 갖다 놔요? 어디 있었는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나 이 여인이나 죄의 양은 비슷합니다. 이 사람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 줄 알았고, 당신은 여기저기서 자질한 죄들을 지었기 때문에 둘이 죄의 양은 같은데도 스스로 정상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다인도 이 사람처럼 참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60억 인구 중에 하나로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일대일로 보고 계십니다. 예수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서 개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온 인류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경우처럼 아주 위태로운 순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오셔서 구해내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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