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꿈

요셉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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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의 사람 요셉 2. 미움을 받다 3.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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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사람 요셉‌ ‌ 혹시

혹시 꿈과 비전의 차이점을 알고 계신가요? 너무 갑작스럽게 질문을 드려서 당황하셨죠? 혹시 당황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번 더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꿈과 비전의 차이점.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비전내가 계획하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은 비전이고, 내 계획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꿈입니다.
(쉬고) 저는 “꿈"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성경적인 단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서 “꿈”이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셉이나 다니엘과 같은 꿈을 꾸는 성경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꿈"보단 “비전"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쉬고)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고 상상하며 삶을 살아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절대 놓쳐서 안되는 것이 바로 “꿈"이라는 단어입니다.
(쉬고) 꿈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비전. 삶의 계획과 목표 그리고 방향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이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비전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쉬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12아들 중 11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는 단 한번도 스스로 애굽의 총리가 되기를 원했던 적 없고, 온 가족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비전을 가져본 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꿈을 주셨을 뿐입니다.
요셉과 가족들이 살아가던 가나안 땅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 요셉 4대에 이르기까지 아직 소유하지 못한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곳에서 외국인으로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족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지기는 하는 것일까?”
(쉬고) 사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꿈이 있고, 우리는 그 것을 놓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보여주시고 주신 마음은 확실한데 그 것이 너무 더디게 진행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하나님 언제나 될까요?”하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쉬고) 야곱의 가족들 대부분 믿음이 좋았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많이 “꿈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믿음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형제들의 마음에는 어떠한 평안함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사고를 쳤고,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인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배다른 형제라해도,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시기를 넘어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가졌습니다.
(쉬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평안도 없는, 어떻게 보면 콩가루 집안과도 같은 야곱의 아들들 중 11번째 요셉을 찾아가 꿈을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꿈으로 인해 형들에게서 더 큰 미움과 시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11절을 보면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라고 기록이 되어있죠.
시기란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기 때문일까요?
앞으로 나누게 될 요셉이 꾼 꿈 때문일까요?
(쉬고) 이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형들은 현실을 살아갔고" “요셉은 현실을 넘어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쉬고) 요셉도 다른 형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더 사랑을 표현하는 아들이긴 했지만 형들하고 똑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아갔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땅을 차지하게 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그런 불확실한 현실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붙들고 기억하며 현실을 넘어, 경험해보지 못한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미래를 바라 보았습니다.
(쉬고) 7월 말 저는 청년들과 함께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 주 오후예배 때 나누겠지만 그 곳에서 저는 예수님으로 인해 현실을 넘어선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저희가 만났던 사람들은 집이라 부를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누울 수 없는 공간. 몸을 이리 저리 접는다면 누울 수는 있겠지만 움직이기 어려운 그런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더운 나라에 냉장고도 없었고, 모든 음식들이 통에 담겨 여기저기 쌓여 있었습니다.
그 곳은 현지 교인의 가정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어떠한 희망도 소망도 없어보였습니다. 화장실을 가려면, 몸을 씻으러 가려면 수직으로 된 위험한 사다리를 내려와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가정을 심방하며 그들과 교제했습니다.
한 집. 두 집. 방문을 하는 동안 저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쉽게 웃을 수 없는 환경인데, 어쩌면 한숨만 쉬면서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이 비좁은 곳에서 살다 죽는 것이 내 인생인가?라는 말 외에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없는 곳인데 그들은 행복해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쉬고)
그들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꿈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의 현실은 비참하고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지만,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무허가 건물이니 나라에서 강제로 철거하고 쫓아내면 다시 떠돌이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그 안엔 예수님께서 주신 꿈이 있었기에 그들은 웃을 수 있었던 것이죠.
(쉬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뀔 수 없는 현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붙잡으며 그 분만을 의지하며 충분하다 그들은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죠.
(쉬고)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던 것똑같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면서 미래를 말하고, 미래를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받다

사실 미래를 말한 것만으로 모든 미움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형들도 처음부터 요셉을 미워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행동과 쌓여가는 여러 일들의 결과로 미움과 시기가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쉬고) 첫째,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요셉이 정말로 철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형들의 잘못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들은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는 돌발 행동들을 하던 자녀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연장자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하는 문화권에 살던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길 원했고, 아버지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행동까지 했습니다.
큰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자신의 배다른 동생들의 어머니와 동침을 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오자,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부족을 몰살시키고 돌아오기까지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자잘한 실수들을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의 도덕적인 악함에 대해 아버지에게 가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악함을 묵인할 수 없었고, 말씀에 대해 제대로 가르칠 권한이 있었던 아버지에게 가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의 편애입니다.
성경은 야곱의 노년에 얻은 아들이 요셉이라 말합니다. 사실 요셉에게는 베냐민이란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야곱은 요셉을 가장 많이 사랑했습니다.
내리사랑을 준다면 막내 베냐민이 받아야했는데, 이상하게 모든 사랑이 요셉에게 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것은 첫번째 이유, 요셉이 야곱에게 가서 형들의 악함을 고발했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 요셉은 형들의 부끄러움을 영적으로 살필 수 있었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근거로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아들.
다른 아들들과 다르게 바른 믿음을 가진 아들이 요셉이었던 것이죠.
안 그래도 가장 사랑했던 부인 라헬의 자녀인데, 요셉의 모든 행동들이 더 사랑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사랑을 담아 ‘채색옷'을 지어 요셉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가 오로지 요셉에게만 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원인 제공은 아버지 야곱이 했습니다.
야곱도 사실 부모의 편애로 고통을 받은 전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형 에서를 더 사랑했고 편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편애를 받았습니다.
편애에 대한 아픔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셉을 편애했고, 결국 형제들과 요셉의 사이가 멀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야곱 역시 이런 상황으로 인해 요셉을 예전처럼 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셋째, 요셉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 했습니다.
미움과 시기가 최고조에 이르도록 하는 사건은 요셉이 꿈을 이야기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꿈을 말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미워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엄청난 용기가 아니고선 말할 수 없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언어와 행동에서 다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가서 자신이 꾼 두가지 꿈을 이야기 합니다.
첫번째 꿈을 말하고 나서 집안이 뒤집어 집니다.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요셉도 보았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한 그 상황에 요셉이 또 두번째 꿈에 대해 말합니다.
(쉬고) 요셉이 가정의 분위기를 알면서도 두 번째 꿈을 말한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형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요셉은 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꾼 꿈은 요셉이 스스로 계획을 세우면서 꼭 이루고자 했던 비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이었기에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쉬고) 그가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힌네!” 히브리어로 “보라!”라는 뜻을 가진 “힌네!”를 외치며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외쳤습니다.
“힌네!”
“이 것 좀 보세요!!”
“저에게 주신 꿈을 한번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꿈을 말하지 않고선 절대 견딜 수 없었던 것이죠.
형들은 타락해서 이런 꿈 못꾸지? 나는 꾸었어! 라고 말하며 놀리거나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쉬고)
사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듣고 크게 반응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냥 무시하면서 넘어가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첫번째 꾼 꿈은 “야곱 가문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꿈은 “들판에서 얻은 곡식단들이 일어나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집안 사람들은 목축업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꿈을 듣고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분노합니다.
그 꿈이 내 삶과 상관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듣고 싶은대로 듣고, 상상하고 싶은데로 상상하면서 분노를 쏟아냅니다.
(쉬고) 꿈의 진실과 의미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너에게 절하는 것 자체가 싫어!! 라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꿈을 듣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상관없는 꿈을 꾸도록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지 말씀인지 나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냥 너라는 사람 자체가 싫어. 하나님이 너에게 말씀하신 것도 싫어. 왜 하필 너야? 라는 불편한 마음만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죠.
(쉬고) 사랑하는 여러분.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며 그분에게 제사를 올려드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겉모습만 하나님을 믿었을 뿐,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았을 뿐, 마음 다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쉬고) 요셉을 향한 미움과 시기가 너무 커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꿈은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신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꿈을 사용한다. 라고 여겼고, 그것을 정설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생겨났고, 그들을 키워내는 학교가 생겼습니다.
다니엘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 수많은 점술가와 박수들이 등장하는데, 그 것처럼 꿈은 신이 주는 것이기에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쉬고) 그런데 지금 요셉의 형들은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꿈. 어쩌면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꿈임에도 불구하고 무시하면서, 오직 분노의 감정만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만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그 꿈을 주신 하나님 자체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쉬고)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그 땅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겉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속은 그 분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쉬고) 우리는 요셉의 형들의 이런 철없음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만 가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나. 저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쉬고) 우리는 정말 넘쳐나는 말씀의 바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면 어디서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말씀들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들은 말씀이 나의 것이 되어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은혜를 누리도록 만들고 있습니까?
(쉬고)
최소한 저는 말씀을 인터넷으로 쉽게 들을 수 없었던 그 때만큼 간절하지 않다는 것을 요즘 느낍니다.
유튜브로, 티비 방송으로 나오는 것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 저는 예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목사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녹음도 했고, 설교노트도 빼곡히 적었습니다.
한주를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녹음된 것을 듣기도 했고, 설교노트를 꺼내어 보면서 붙들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부끄럽게도 그런 모습이 저에게 없습니다.
어느새부터 저의 신앙의 모습이 이상하게 굳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생각하고 그 것을 놓고 기도하면서도 결국엔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걸어가고 있더라구요.
말씀을 향한 간절함이 사라지자 저에게 나타난 것이 있습니다.
(쉬고)
평안함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지 않고, 제가 아는 지식으로 말씀을 대략 짐작하고 묵상하고 끝내게 되더라구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여겨지지 않고,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지 않는 상황이 자꾸 생기게 되더라구요.
(쉬고) 요셉의 형제들의 모습이 딱 저의 모습이더라구요.
바라건데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저와 달랐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만약 저와 다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그래 왔던 나의 삶을 고백하고 다시 돌아서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요셉의 두가지 꿈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며, 이루어 나가실 꿈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쉬고)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결정적인 이유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의 역할을 야곱이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불평등함을 느끼도록 했고 그래서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편애하며 그 불평 등을 더 증폭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을 보고도 자신만 간직했을 뿐 그 의미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들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역할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수요예배까지 나와 하나님께 은혜 받기를 바라는 우리의 역할이 정말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봉사를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말씀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갖고, 그 것을 삶에 적용시키며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굳어진 신앙의 습관이나 예배의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만을 간절히 바라며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그 모습이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쉬고) 왜 인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며 꿈을 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분명한 꿈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쉬고) 나이. 신앙의 연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선택하셨고,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고, 르우벤이 아닌 요셉을 선택하셨습니다.
큰 아들들이 아닌 동생들이 하나님의 꿈을 꾸며 살아가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쉬고)
그 분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분의 계획을 이 땅에 드러내는데 사실 우리의 역할은 필요 없습니다. 그 분 혼자서도 충분히 위대하심을 보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계획. 꿈을 세워두셨고, 그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너무 불필요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자각하고 그 것을 위해 살아내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정말 의미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와 함께 그 꿈을 이루어내기 위해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때에 맞는 은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쉬고)
그런데 만약 우리가 굳어진 어떤 습관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거나 혹은 요셉의 형들처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향해 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꿈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미래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혹은 과거의 나의 모습에만 매여 사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쉬고)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꿈을 꾸고 계십니까?
혹시 굳어진 신앙의 습관이나 여러 생각들이 내가 듣고 싶은데로 듣고, 말하고 싶은데로 말하고, 하고 싶은것만 하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았나요?
(쉬고) 남은 한주 나는 어떠한 모습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는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에게 주셨던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꿈을 붙들고 살아감을 통해, 현재가 아닌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꿈이 올 하반기 그리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그 날까지 우리의 삶의 힘과 원동력이 되기를, 견뎌낼 수 있는 기쁨이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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