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에 회의가 찾아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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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1-6
여러분, 혹시 ‘고원장애’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높은 산지에 펼쳐진 넓은 들판이라는 뜻인데요. 높은 곳을 뜻하는 ‘고원(高圓)’에 ‘장애(障礙)’라는 말을 붙였으니 대략 무슨 뜻인지를 아실 겁니다. 사람이 승승장구 계속 오르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성장이 멈추는 단계를 고원장애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최정상에 오르기까지 이 고원장애로 이르기까지 슬럼프에 빠지고 위축되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운동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2년 차 징크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프로리그에 데뷔해서 괄목하게 주목을 받던 신인선수가 이듬해에 이상하게 슬럼프에 빠지게 되어서 주춤하게 되는 것을 2년 차 징크스라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주목받는 신인선수들에게 이 2년 차 징크스가 적용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원장애’를 만났을 때, 또는 2년 차 징크스를 만날 때, 그것을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가 거목 선수로 더 성장하게 되느냐 아니면 그냥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하게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단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고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 아닙니까?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의 감격을 누리면 가슴이 벅찹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세상에 어떤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벅찬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무덤에 갈 때까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드시 중간에 고원장애를 만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고 은혜가 되지 않고 여러 가지로 시험에 빠지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바로 이럴 때 이런 영적인 갈등을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가 그게 관건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요한도 자신의 신앙에 회의감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확고하게 믿고 있던 사람 아닙니까? 확고하게 믿는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에 그 사실을 선포했던 사람이었죠. 요한복음 1:15-18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고 그것을 온 세상에 선포했던 사람이 세례요한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 본문에서 깜짝 놀랄만한 행동을 합니다. 2-3절 합독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여러분, 이거 굉장히 충격적인 질문 아닙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우리가 딴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 여러분,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보십시오. 아니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던 세례요한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도발적이고도 충격적인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세례요한의 믿음에 회의감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게 우리 인간의 모습 아닙니까?
여자가 낳은 이 중에서 이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할 정도로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세례요한에게 이런 신앙의 회의감이 찾아왔다면 오늘 저를 비롯해서 우리 중에 누구도 ‘나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거야’라고 자신할 수 있는 분이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요즘 신앙이 성장하거나 영적으로 충만하신 분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라는 말씀처럼 늘 우리는 성경의 권고를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내게 이런 영적인 고원장애가 찾아오고 언제 내게 이런 믿음의 회의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은 그렇게 견고한 신앙을 가졌던 세례 요한이 어쩌다가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성경을 자세히 묵상하다 보면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가 있는데요.
세례 요한이 신앙에 회의에 빠지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생각한 메시아 관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례 요한이 어떤 메시아관을 가졌는가 봤더니요. 마태복음 3:11-12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러분, 이 세례 요한이 어떤 메시아 관을 가졌습니까? 그가 생각한 메시아는요.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세상을 갈아엎으시고 이 악한 로마 정권을 심판하실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예수님은 이런 종말적인 세상 변혁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뒤집어 버리기보다는 세례 요한 자신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기가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세례요한과 같이 자기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자기 기준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믿음에 회의감이 찾아오는 경우가 참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 교회론은 목사들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이래야지” 이것은 누구라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배 중에 박수를 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찬양을 많이 불렀으면 좋겠다고 하고요. 그러나 어떤 분은 교회는 그저 경건하게 묵상하듯이 조용히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가 “이 시대 앞에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해!” 하는 분이 있는가하면, 구제보다는 이 교회가 몇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정말 각양각색의 교회론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러다보니 내가 원하는 바가 교회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회의감이 찾아올 때가 종종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하름교회 성도님들이 예배 때마다 자기중심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정말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 요한의 회의감이 시작된 두 번째 요인은, 자신의 풀리지 않는 고통스러운 환경 때문입니다. 2절에 상징적인 표현이 있습니다.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지금 이 세례요한이 감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왜 잡혀갔습니까? 마14:3-4을 보니까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여러분, 요한은 부도덕한 정치인이나 선동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정한 왕의 모습을 책망한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분봉 왕이었던 헤롯이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그런 부정한 모습을 보고 그를 정죄하고 비난했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간 것 아닙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바른 소리를 하다가 괘씸죄로 투옥된 거예요.
여러분, 그러면 이 요한에게 어떤 기대감이 있었을까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주님으로 이 땅에 오셨으니 이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하시고 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바른 소리해서 잡혀 있는 자기 자신을 풀어줄 거라는 기대감이 그에게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를 않아요.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 로마 정권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악한 헤롯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투옥당했는데, 메시아라는 분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방치해 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 불의한 이들을 그냥 둘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왔던 것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왜 그가 이런 회의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세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요한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간접적으로는 전해 들었겠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 스스로가 자신이 확고하게 갖고 있던 메시아 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었으니까요.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긍휼이라든지, 이해하기도 힘든 겸손함이라든지,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대라는 말씀, 왜 그러시는지를 제대로 알 리가 없잖아요?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 답답하다고만 전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시는 모든 분들이 다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간접적으로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저 자신도 오류가 많아요. 오류가 많은 사람이 전하는 설교에는 불순물도 많고 심지어 진리를 벗어난 피해야 할 말씀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님들이 제가 전하는 설교 하나로 신앙생활을 만족하신다면 세례 요한과 같은 회의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인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셔야 합니다.
과거 종교개혁을 시발점이 되었던 로마가톨릭의 오류가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교황을 통해서만, 사제를 통해서만 고해성사할 수 있고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학을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누구라도 그분께 직접 나아갈 수 있고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기 때문에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세례 요한이 깊은 회의에 빠졌는데, 원인을 규명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대안을 마련하는 일 아닙니까? 우리도 역시 세례요한에게 닥친 깊은 영적 회의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대안을 말씀드리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에 불신이 찾아오고 영적 회의가 찾아오셨습니까? 자, 첫 번째 방법으로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쓴 「영적침체」라는 책에서 시편 42편 5절을 가지고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글을 보고 참 공감을 했었습니다. 시편 42:5 합독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지금 이 시편 기자는 뭔가 어려운 고통 속에 있는데, 자기의 어려움과 고통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해결의 첫 출발점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메이징 터치 영성훈련을 해 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제가 2009년도에 시애틀형제교회가 국내 아웃리치 처음 나왔을 때 1기로 참여했었거든요. 유일하게 저 혼자 목회자였습니다. 비롯 목사 안수를 앞둔 전도사였기 하지만, 그래도 목회자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 영성훈련 기간에 자신의 거짓된 신앙과 쓴 뿌리들을 당시에 섬겼던 성도들 앞에서 다 고백을 하는데요. 생각지도 못하게 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더라고요.
간혹 설교 때 제 연약한 면을 고백하면 제 아내가 말릴 때도 있어요. 꼭 그렇게까지 고백 안 해도 되지 않냐고요. 여러분, 그래도 저는 그렇게 하려고요. 저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라도 제 아내에게 듣기 거북해도 좀 참아달라고 누가 좀 전해 주세요. 천사표 같은 저의 모습은 온전한 제 모습이 아닙니다. 자꾸 끄집어내야 해요. 자신의 고민과 아픔을 솔직하게 끄집어내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너무 체면만 생각해서 너무 포장되고 자신의 내면을 숨기면서 우아한 교제만 하려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의감이 들고 갈등 겪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그걸 허용하세요. 로마서 14:1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그런가하면 유다서 1:22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연약함과 의심에 대한 범위가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을 목사 앞에서라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42편에 나와 있는 저자를 보면 자신의 내면 상태를 솔직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거든요.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느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오히려 찬송하라”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이에요?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말들입니다.
여러분, 자꾸 선포해야 합니다. “네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해 하느냐?” “하나님을 바라라” 여러분들의 감정을 방치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회의감을 극복하는 비결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 영적 회의감이 찾아올 때 두 번째 방법으로는요. “하나님께 아뢰기”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것도 필요하고요. 자기 자신에게 선언하고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신앙생활은요. 마인드 컨트롤 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스스로 나를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 합독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종의 영’이라는 것은 ‘Servant spirit’이라고 해서요. “노예 정신”을 뜻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이 패배의 영, 낙심의 영, 분노의 영과 같은 노예 정신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양자의 영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신앙에 회의가 와서 영적인 침체에 빠져 계십니까? 어떤 어려움에 처해 계십니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주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회의감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11절의 말씀이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몰라요. 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도발한 것 아닙니까? “당신 메시아 맞습니까?” “진짜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 이렇게 예수님에게 도발한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11 합독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러분, 이런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회의를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좋으신 분이십니까? 저 같으면 정말 불쾌할 텐데, 예수님은 그러질 않으세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회의감을 억누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갖고 나아오시길 바랍니다.
시편도 보세요. 감사와 찬양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울분을 토하는 내용도 있고 억울해 죽겠다고 하는 내용도 있지 않습니까? 온갖 감정을 다 쏟아 놓는 게 시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억울한 마음, 섭섭한 마음, 불신과 의심, 회의감을 다 갖고 나오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다 쏟아 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꾸짖지 않으시고 허용하신다는 겁니다.
영국의 한 직물공장에 절대적인 규칙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일하다가 실이 엉키면 무조건 공장장에게 보고하시오” 이게 규칙이었다고 합니다. 여직공이 새로 들어왔어요. 열심히 일하는데, 신입이다 보니 일을 하다가 실타래가 엉키고 말았습니다. ‘이 정도쯤이야 내가 풀 수 있지’ 하면서 자기가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점점 더 크게 엉켜버리는 거예요.
결국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서 공장장에게 가서 “공장장님, 제가 최선을 다했지만, 더 엉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보고했더니 그 공장장이 화를 내면서 “실이 엉키면 공장장인 나에게 보고하는 것이 최선인 걸 몰랐습니까?” “당신이 풀려고 애쓰는 게 최선이 아니고 공장장에게 보고하는 게 최선입니다”
저는 우리 아바 아버지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회의감, 상하고 깨진 마음을 아바 아버지께 먼저 보고하시는 게 그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최선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께 물어보시고 다윗처럼 투정을 부리시고 해결해 달라고 강청을 하세요. 아니면 점잖게라도 하나님께 대화를 요청하세요. 그러면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그게 네가 해야 할 최선이란다”라고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내 믿음에 회의감이 찾아왔을 때 해야 할 세 번째 방법은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키기”입니다.
시험에 빠진 세례요한에게 예수님께서 간단한 처방을 주시는데요. 4-5절 합독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굉장히 묘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이런 태도 때문에 시험에 빠졌거든요. 지금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을 돌보고 못 걷는 사람을 돌보고 나병환자를 돌보고 못 듣는 자들을 돌보다가 이 세상의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 때문에 시험에 빠졌는데, 예수님께서 처방전을 주시길 요한이 가장 싫어하는 처방을 주시더라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발견한 믿음의 회의를 극복하는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믿음의 회의는요. 드디어 하나님께서 내 생각에 굴복했을 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킬 때 신앙의 회의감이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부디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키는 훈련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훈련에는 두 가지를 마음에 담으셔야 합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깊고 크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의문이 풀리지 않을 때 하나님의 생각이 더 깊으시기 때문에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시키겠다는 이 태도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가져야 할 태도는요. 하나님은 항상 내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선하게 살고 정직하게 사업하려고 했는데, 억울하게 모함을 받거나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이 두 가지를 마음에 담아 두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는 어린 나이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서 그래도 잘살아 보겠다고 애를 쓰다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다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사람은 뭔가 엄청난 일을 감당하고 나면 보상심리 같은 게 작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보셨죠?” “이 무서운 유혹을 다 이겨냈습니다.” “뭘로 보상해주시겠습니까?” 이런 요셉의 기대감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죠? 강간미수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요셉에게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가요? 요셉이 등장하는 본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느냐?”고 “살아계신 하나님 맞느냐?”고 삿대질을 하거나 상처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에 굴복하고 순종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 순간은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내게 주셨을 거야’ ‘필요해서 연단하고 계시는 거야’ 이런 요셉의 마음이 요셉을 형통한 자로 나아가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결과는 여러분들도 다 잘 아시잖아요? 결국 하나님의 생각이 옳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저는 우리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면서 자주자주 하나님의 생각에 여러분들의 생각이 굴복되는 일이 많아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안 하셔도 됩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것과 같이 환경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거야’ 그러시면서 기도 응답을 받아 행복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해서 행복한 인생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수요예배 때 박미화 전도사님 간증을 들으신 분들 참 많은 은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전도사님의 친정어머니께서 머슴을 12명이나 둘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에서 태어나셨다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가세가 기울고 어머니는 청각 장애에 재산은 모두 탕진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면서 그 6남매가 거의 집에서 편하게 잘 때가 없었다고 하잖아요? 오죽하면 그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게 마음의 소원이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때마다 가족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뭐였습니까? 바로 어머니의 성경가방!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오더라도 그 성경가방은 어떻게든 챙겨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믿음과 기도가 박전도사님을 비롯한 6남매를 훗날 훌륭한 신앙인들이 되고 건실한 사회인이 되는 힘이 되었던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무엇과 싸우고 계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바르게 살려다가 감옥에 갇혀 투정 부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빨리 해결해 주시지 않아서 마음에 회의가 찾아오고 의심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따지듯이 도전하고 계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부디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쏟아 놓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상한 마음을 가감 없이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쏟아 놓으시되, 두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크고 깊으신 분이시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지금 이 연단의 과정은 내게 필요해서 주시는 거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신실하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사랑이 우리 성도님들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2부) : 내가 주인삼은
❙합심기도
여러분, 요즘 세례 요한처럼 뭔가 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한 마음에 믿음에 회의감이 찾아오신 분들 계십니까? 혹시 너무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고 환경도 달라진 것같지 않아 그저 그렇게 교회만 다니시는 분들 안 계세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오늘 말씀 기억하시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함께 기도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신앙생활을 잘 해왔었는데, 견디기 힘든 상황에 부딪혔거나 세례 요한처럼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교우들이 있다면 먼저 주님 앞에 나와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내려놓고 신앙에 회의감이 왔음을 아뢰길 원합니다. 그리고 아뢰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내 생각보다 넓고 크신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굴복시키길 원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필요해서 연단을 주시는 것임을 잊지 않고 믿음의 발걸음을 더 힘차게 내딛는 우리 교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우리 믿음에 깊은 회의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와 아뢰고 더 크고 넓으신 하나님의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께 내 생각을 굴복시키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저들의 가정과 일터와 기도제목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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