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없는 사람

야곱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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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아들의 출생 2. 에서와 야곱 3. 이유 없는 선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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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출생

지난 주일 교회학교 교사 발표회 때 여러 모양으로 수고했던 교사들 그리고 응원해주었던 청년들을 보면서 괜시리 흐뭇했던 것 같아요. 저도 여행을 간 곳에서 한인 교회를 갔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서 실시간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청년부 예배도, 교회학교 발표회도 다 보았거든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겨준 모든 교사들과 응원으로 동역해준 모든 청년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쉬고)
지난 주 전도사님을 통해 들었던 말씀대로 한주를 잘 살아냈을 것이라 믿고, 2주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부터 야곱이라는 사람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에요.
야곱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어가는지를 볼 수 있어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그것을 성화라고 표현하는데, 야곱이 성화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깨닫는 시간들이 되기를 소망해요.
(쉬고)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을 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어요.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크게 기도하지 않던 그가 결혼 후 20년이 되어갈 때 쯤 자녀를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하죠.
이삭은 약속의 땅을 차지 하지 못한 것 빼고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사람이에요.
모태신앙에다가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에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이면서 모든 복을 받은 사람내 아버지인거에요.
집에 돈도 많아요.
외국인이라는 약점만 빼면 그는 정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하나님을 아는, 믿는 믿음이 없었어요.
하나님을 향한 절박함이 없었어요.
대부분의 모태신앙이 그러하듯 그에게 하나님은 태어나니 자연스럽게 믿게 된 존재. 내 가족이 믿고 있었던 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많았지만, 가슴으로 믿지는 못하고 있었어요.
모태신앙은 간절함이 약한 경우가 굉장히 많죠.
그가 결혼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자녀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간절하지 않은거에요.
왜?
이삭 자신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75세에 약속을 받고 25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단순한 생각으로 결혼 생활을 한거에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그 분을 붙잡아야 한다는 절박함 없이 태어나니까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며 그냥 살아왔던 것이죠.
2주 전에 나누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삭에게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 자신의 하나님이 아닌거에요. 아버지의 신앙이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 쉽게 생각한거에요.
(쉬고)
이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적용이 되어요.
우리는 “다른 이의 고백과 신앙적 체험을 나의 것으로 오해하며 살아 갈 때가 많거든요”
가온누리 청년부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모여 있다보니 ‘내 신앙이 좋은 것처럼’ ‘신앙 좋은 선배의 모습이 마치 나인것 처럼’ 여기며 살아갈 때가 있다는거에요.
우리는 코로나로 모이지 못했을 때 ‘나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이미 경험했어요.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없을 때, 혼자 예배를 드릴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이미 우리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더 모이고 싶었던 것이잖아요.
그래서 예배의 자리가 더 사무치게 그리웠던 것이잖아요.
나 혼자서는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버겁고 힘들기에,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그들에게 나의 힘듦을 이야기하고, 서로 의지하며 걸어갈 수 있는 이 예배가 그래서 그리웠던 것이잖아요.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신앙을 제대로 보려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내 믿음이 크다 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해요.
(충분히 쉬고)

에서와 야곱

그렇게 생각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자녀를 허락하시죠.
이삭은 이상하리만큼 절박하게 기도했어요.
지금까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알았을 뿐 기도하거나 의지하거나 혹은 붙잡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그가 자녀를 위해 처음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린 것이죠. 그리고 아이를 갖게 되었어요.
절박하게 기도해서 약속의 응답을 받았어요.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죠?
맞아요. 감사해야죠.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신 신이라는 고백을 해야 하죠.
(쉬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아이를 갖게 되자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다시 절박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요.
(쉬고)
여러분은 어때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잖아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동역자가 이렇게 많아요. 여러분은 중고등부 아이들이 닮고 싶어하는 교회 오빠 교회 언니들이에요.
(쉬고)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절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있나요?
아니면 이삭처럼 필요할 때 혹은 특정한 때에만 기도하고 붙잡았다가 해결되면 또 내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나요?
(쉬고)
다른 이들의 삶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우와!”하고 넘어가지 마세요.
더이상 “다른 이의 고백과 신앙적 체험을 나의 것으로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향한 절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회복되는 삶이 나에게도 있어야 해요.
(쉬고)
20년만에 기도하여 얻게 된 아들들이 태어나요. 그리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죠. 아기가 태어날 때의 상황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당시 문화였어요.
쌍둥이가 태어나서 나오는데, 처음 나온 아이의 모습이 조금은 충격적이었어요.
여러분 상상을 해보는거에요.
아기가 태어나서 받았는데, 온 몸이 붉어요. 그런데 거기에 동물 가죽을 걸친 것 처럼 전신에 털이 많아요.
여러분 붉은 털로 전신이 덮여있는 아기를 본 적이 있어요?
머리 숱도 많이 없는 아기들이 있는데 온몸이 털에 덮힌 아기는 본 적 없을거에요. 아마 그런 아기가 태어났다면 유튜브에 떳거나 혹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을거에요.
에서가 지금 그런거에요.
태어났는데 온 몸이 붉고 털로 덮혀있어요.
여러분이 부모이고 이런 아기가 태어났다면? 완전 충격이겠죠. “와 이게 맞나?‘하지 않았을까요?
(쉬고)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이삭의 반응이에요.
“붉은 털복숭이 아기가 태어났네? 그래 니 이름은 에서다!”
이 이름은 첫번째, 동물 가죽처럼 거친 털이 가득한 너를 보니 굉장히 동물적인 사람이 될 것 같다. 너는 거칠고 의리 가 넘치는 남자가 될 것 같다.
두번째, 붉다. 굉장히 세속적이고 정열적이고 열정적인 남자로 클 것 같다. 두가지 뜻을 갖고 있어요.
정리하면 붉고 전신이 털로 뒤덮여서 태어난 아기를 보고 “너는 거칠고 강한 프로 사냥꾼이 될 것이다”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죠.
(쉬고)
그리고 뒤를 이어서 바로 아기가 나오는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어요.
이것도 이상한 장면인거에요.
거의 똑같이 나왔는데, 한 아기는 붉고 전신이 거친 털로 덮혀 있고, 또 다른 아기는 뒤꿈치를 그냥 잡은게 아니라 꽉 움켜쥐고 나왔어요. 거기다 쌍둥이인데 얘는 또 털이 없어요.
진짜 조회수 1억뷰는 될만한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삭이 또 놀라지 않고 “그래 너는 야곱이다!”라고 이름을 붙여주어요. 비유적인 표현으로 ‘속이는 자’ ‘부정한 속임수’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에요.
붉고 거친 털로 뒤덮힌 아기에게는 “거칠지만 진짜 남자가 될거야”라는 이름을,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뒤꿈치를 잡고 나온 아기에게는 “남을 속이는 남자”라는 이름을 지어준거죠.
아무리 상황에 따라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 한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이름을 준거에요.
이미 이름을 통해 사람들은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자라나게 될지를 파악했을 거에요.
야곱의 인생은 앞으로 죄와 관련된 것들로 가득차게 되어요. 속고 속이는 일들만 계속하며 살아가요.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만나 씨름을 하고, 야곱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뀔 때까지 죄만 짓는 삶을 살아요.
우리 모습과 같은거에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죄가 죄인지도 모른 체 죄를 짓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정체성이 바뀐 이후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쉬고)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알고 있어요?
야곱의 이름의 뜻”속이는 자“ ”사기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름의 뜻에는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너의 뒤에서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도 있어요.
야곱은 몰랐지만 그의 모든 인생 뒤에서 보호하고 계셨던 분이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도 그렇잖아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문제는 우리는 그 것을 머리로만 알고 살아갈 때가 많다는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내 힘이나 능력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는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내가 내 자신을 속이며 스스로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삶”을 살아가죠.

이유 없는 선택은 없다

하나님은 왜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당시에 사람들이 존경하는 남자 그리고 되고 싶었던 워너비는 야곱이 아니라 에서였어요.
태어날 때만 남자답게 태어난게 아니었어요.
에서는 커가면서 남자답게 호방한 스타일로 그리고 강한 리더십을 보였단 말이에요.
그가 나라를 세우는데 그를 따라 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모두가 그를 좋아했어요.
반면 야곱은 에서와는 다르게 생겼죠.
여러분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야곱하면 대부분 기생오라비, 마마보이 혹은 약한 남자로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에요.
야곱은 목동이었어요. 수많은 양과 염소를 치는 사람이었어요. 목동은 아무나 시키지 않아요.
힘이 쌔고 통솔력이 있는 사람들이 목동의 리더가 되어요. 다시 말해서 야곱은 에서만큼 강렬한 이미지가 없었을 뿐 그도 강하고 힘이 쌘 남자였어요.
단지 에서처럼 사냥을 하는 격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뿐이에요.
그도 충분히 강했지만 겉모습이, 에서보다 약해보였고 둘째였기 때문에, 엄마의 말에 따라 움직였기에 막내, 동생, 마마보이 등 이라는 이미지가 생긴거죠.
하지만 누가 봐도 에서가 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삭의 모든 집안을 통솔할 능력이 있었어요.
(쉬고)
하나님은 에서가 아닌 사람들을 대할 때 계산적이고 잔머리를 굴리던 야곱을 선택하셨어요.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셨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12지파의 시초가 되는 아들들이 태어나도록 하셨어요.
(쉬고)
도대체 왜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누가봐도 형 에서가 더 듬직한데 왜 이런 야곱을 선택하신 것일까요?
(쉬고)
질문을 바꾸어서, 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셨을까요?
(쉬고)
왜 하나님의 보호하심도 잊고 내 힘대로 살아가고, 스스로를 의지하는 것이 더 편안한 저를,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셨을까요?
그런 생각해 본적 없어요?
나보다 더 하나님 잘 믿고 사랑하고 또 말씀 읽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이 자리에 세우시고 여러 역할들을 맡기실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쉬고)
리브가가 하나님에게 “첫째가 둘째를 섬기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것을 이삭이 들었을 때,
그리고 태어난 아기들을 보았는데 ”절대 둘째가 첫째를 넘어 설 수 없는 비주얼”이었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쉬고)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이성으로는 절대 이해도 납득도 용납도 되지 않는 말씀을 들은거에요.
둘째가 첫째를 넘어서는 것은 말이 안되는 사회인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겠어요?
왜 하나님은 이렇게 강렬한 첫째가 아닌 계산적인 둘째를,
왜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저와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신 것일까요?
(충분히 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어요.
왜 야곱을, 나를 선택하셨지? 라는 생각 각조차 할 수 없어요.
우리는 그냥 세상에 살다 죽어 지옥에 가는게 정해진 사람들에 불과했을거에요.
(쉬고)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조건들을 보고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먼저 선택하셨다다 똑같은 사람들만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을거에요.
(쉬고)
미안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좋은 대학? 직장? 성공? 하나님이 없으면 다 부질 없어요.
결국 우리의 끝은 지옥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처한 상황이 다르고 모든 생각과 행동이 다른 저와 여러분을 먼저 선택하셨어요.
우리가 가진 조건이나 능력 그리고 외모를 보고 택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조건에 따라 정해지지 않아요.
그 분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갖고 있느냐,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은 사역과 헌금을 하느냐 그 것에 주목하지 않아요.
우리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해도, 예배에 나오려는 모습,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 전혀 예배할 수 없는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입 삐죽거리면서 찬양하는 그 모습. 그 것만으로도 족하시기에 우리는 먼저 선택하신거에요.
(쉬고)
우리를 살려낼 수 있는 자신이 있으시거든요.
예배에 집중하지 않아도,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해도, 왜 내 인생은 이러지? 왜 나를 선택하셨지? 라는 생각을 갖는다 해도,
아무런 가능성 없는 저와 여러분을 세워서 살릴 준비가 되어 있으시거든요.
어떤 모습이던지 간에, 저와 여러분을 통해 받는 그 예배가 너무 좋으시기에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고, 가능성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우리가 살아내는 삶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내라고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거에요.
(쉬고)
아브라함이 100살 일 때 이삭이 태어났어요.
아브라함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아들이에요. 아브라함에 의해 태어난 이스마엘은 택하지 않으셨어요. 그가 첩의 아들이어서?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달린거에요.
선택은 혈통에 따라, 인간의 노력에 따라 정해지지 않아요.
에서와 야곱. 둘 중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야곱이었어요.
아이의 외모나 능력을 보기도 전에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어요.
하나님은 태어나기도 전에 말씀하셨어요.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다.”
“나는 야곱을 선택한다.”
(쉬고)
야곱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태아일 때부터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그를 통해 결국엔 하나님의 일하심, 살아계심을 보여주셨어요.
(쉬고)
우리의 인생도 이와 동일하다 생각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태초 이전부터 선택하셨죠.
우리가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을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을 배신할지, 하나님을 정말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기나 할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먼저 선택하셨어요.
아무런 가능성 없어 보이는, 아니 가능성이라는 것 조차 알아볼 수 없는 그 때에 우리를 부르셨고 세우셨고, 지금 이 때에 같은 공동체에서 생활하도록 하셨어요.
(쉬고)
이것만큼 놀라운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우선적인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우리에겐 그 선택이 아무 의미 없는 선택이 되지 않도록 살아낼 의무가 있어요. 그 선택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쉬고)
이 놀라운 은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해요.
아무런 가능성 없는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내며 살아야 해요.
(쉬고)
앞으로 야곱의 삶을 살피면 살필수록 우리랑 너무나 비슷함을 깨닫게 될거에요. 그 때 우리 꼭 이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야곱의 이름에 “사기꾼” “남을 속이는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는거에요.
한주를 살아가며 하나님을 잊는 순간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겠지만, 그 순간에도 나를 붙들고, 세워주시며, 삶에 가능성을 부여하며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꼭 떠올리는 우리가 되길 바래요.
(쉬고)
이번 주 미션이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아침 저녁으로 선포하는거에요.
“나를 선택해주신 하나님이 오늘도 내 삶을 지키시며, 내 마음을 지키신다”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거에요.
(쉬고)
하나님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던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고, 우리의 마음과 삶을 지켜주고 계셔요”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꼭 깨닫는 이번 한주가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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