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갈망을 가지라

야곱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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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서와 야곱 2. 붉은 죽 3. 왜 야곱일까?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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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

여러분의 마음을 지켜주고 보호하셨던 하나님과 동행했던 한주였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탄생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셨던 내용들에 대해 함께 살펴봤었죠.
오늘은 우리가 정말 잘 아는 내용. 에서가 장자의 권한을 붉은 죽 한 그릇에 팔아넘기는 부분이에요. 사실 이런 부분을 설교할 때가 가장 힘들어요. 왜냐하면 내용들을 들어봤고 알고 있기에 대부분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쉬고)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 본문에 대한 ‘선 이해' 그러니까 알고 있는 부분을 덜어내고 들으려고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거에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방해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나는 이 본문에 대해 잘 모른다"
“대충 흘려 듣지 않겠다" 라는 마음을 가질 시간을 줄게요.
(쉬고) 오늘 본문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에서와 야곱이에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에서는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아.. 이것까지 다 지워버린거에요?”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그래도 에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텐데 무엇이 먼저 생각나요?
일단 에서는 하나님이 그 삶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지만 무신론자와 같은 삶의 모습을 갖고 살아갔어요.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에 대한 기대감을 갖지 않고 살았어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머리로만 알았기에, 아버지 이삭과 가까운 신일뿐이지 나와는 가깝지 않다 여겼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에서는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약속의 성취보다지금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즐거움을 쫓으며 살았어요.
순간의 만족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투자했다는 것이죠.
아마 지금은 많이 바뀌었을텐데 10여년 전 제가 필리핀에 있었을 때 조금은 독특한 문화? 분위기가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니까 일반화를 시키면 안돼요.
저랑 나름 친하게 지냈던 필리핀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도 월급이 얼마 되지 않지만 그 때는 더 적었어요. 한달에 30만원도 채 벌지 못하는 월급을 받는 친구였는데,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불러서 나갔더니 밥을 사주겠다고 하는거에요.
저는 그 친구를 알거든요. 제가 스타벅스를 한번 데려갔는데 그 때 나온 컵을 간직하겠다라고 말하면서 집에 가져갔던 친구에요. 10여년 전에도 스타벅스 커피는 필리핀에서 비싼 편이었어요.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그랬던 친구였는데 그보다 더 비싼 밥을 사주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너 로또 맞았어?”라고 했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오늘 월급날이야"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정말 그 날 자기가 받은 월급의 80%를 써버렸어요.
저는 당연히 뜯어 말렸어요. 그랬더니 그 친구가 “난 오늘을 보고 살았어. 다음 달은 또 월급날을 기다리면서 살면 돼" 라고 하더라구요.
우리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간과 물질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은 것 처럼 그 친구도 저에게 자신의 한달의 노동의 댓가를 사용한 것이죠.
한달간 또 힘들게 살아야 할 것이 분명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겠지만 그 친구는 월급날 맛있는 것을 사먹는 그 기쁨만을 바라보면서 살았어요. 그리고 월급날 “순간의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한 것이죠.
(쉬고) 우리의 사고로는 이해 하기 어렵죠?
에서가 딱 그렇게 살았던 거에요. 누가 봐도 진짜 절레 절레 할만큼. 이상하리만큼 오늘 하루만 살아내던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내일은 없다라는 신조를 가진 사람처럼 “오늘.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았어요.
그랬기 때문에 동생에게 바보같이 붉은 죽 하나에 장자의 권한을 팔아 넘긴 것이죠.
(쉬고) 에서가 자신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그 이야기를 몰랐을까요?
전 알았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는 분명히 알았어요. 하지만 믿지 않았, 아니 무시했어요.
왜냐하면 말이 안되거든요.
당시의 문화권 안에서 동생을 섬기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누가봐도 에서가 더 강하고 잘났거든요. 야곱이 아무리 힘이 강했다 해도 에서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았거든요.
그런데 동생이 자신의 위에 선다? 에서는 듣고 콧방귀를 꼈을꺼에요.
(쉬고)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며, 무신론자처럼 하나님도 그 말씀도 신뢰하지 않던 에서가 어느 날 사냥을 실패하고 돌아와요.
돌아가던 중 야곱이 있는 곳에 들렸는데 그가 마침 붉은 죽을 쑤고 있었어요. 그 것을 보고 에서가 뭐라고 말하죠?
“나 배고파서 죽겠다. 그 것 좀 가져와라"
(쉬고) 혹시 여기에서 밥을 안먹어서 배가 정말 고프면 손이 벌벌 떨리는 사람있어요?
“그 때 어때요. 배고파서 죽을 것 같죠?”
“근데 진짜 죽었어요?”
(쉬고) 죽었으면 여기 없겠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사람은 쉽게 죽지 않아요. 더군다나 에서는 지금 한끼 정도를 걸렀을 뿐이에요. 많이 걸러봐야 두끼?
당시 사냥꾼들은 언제 사냥을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육포와 같은 마른 음식들을 갖고 다녔어요. 지금 에서는 그 것을 다 먹고 배고픈채로 돌아오고 있었어요. 진짜 막 배가 고파서 아사하기 직전의 모습이 아니라 평소보다 배가 좀 더 고픈 상태였다는 것이죠.
(쉬고) 그런데 그가 야곱을 보자마자 “나 배고파 죽을 것 같으니까 그 것 좀 가져와"라고 해요. 우리가 점심시간이 되면 “아 배고파 죽겄네"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쉬고) 이 때 야곱이 어떻게 반응하죠?
33절. “오늘 내게 맹세하라" “어 줄게. 대신 여기에서 지금 당장 맹세 해"
형이 배가 고프다는데 일단 먹을 것을 주고 그 이후에 요구해도 되는데, 주기 전에 거래를 하고 있는거에요.
“어 줄게. 그런데 장자권을 나에게 팔겠다라고 맹세 해"
(쉬고) 32절. 에서 “내가 죽게 생겼는데 장자의 명분이 뭐가 중요해. 너나 가져"
어떻게 보면 에서의 입장에서 이건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을거에요. 지금처럼 누가 영상을 찍는 것도 아니고, 지장을 찍는 것도 아니잖아요.
입으로 “알았어 니나 가져"라고 하고 먹고 난 후에 “죽을래?”하면서 협박해도 되는거잖아요.
그런데 에서는 그냥 줘버려요.
왜?
그는 순간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던 사람이었거든요. 빈 곳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거에요. 지금 그의 눈에는 하나님. 그 약속. 장자의 권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니라 “음식"만 들어와있는거에요.
(쉬고) 여러분 우리 인간은 시각적으로 정말 약한 존재라는 것 알죠?
일단 눈에 뭔가가 들어오면 계속 생각이나요. 그리고 그 것이 결국엔 내 마음의 중심에 들어와서 앉게 되는거에요.
지금 에서의 눈에는 오직 “붉은 죽" 하나 뿐이었어요.
동생이 거래를 해왔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갈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야곱이 머물던 그 진영과 집이 멀지 않았거든요. 배고픔을 조금 더 참고 늘 먹을 것으로 가득 했던 집에 가서 더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34절.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다"
그의 머리속에는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집. 하나님이 아닌 오직 “붉은 죽"만 있었어요.
(쉬고) 야곱은 드디어 스스로의 힘으로 장자권을 갖게 되었죠. 잘한 것일까요?
절대 아니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잖아요.
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와 같이 살았어요.
야곱도 별로 다르지 않죠. 자신을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스스로 쟁취하려고 한거에요.
장자권은 어차피 야곱의 것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 말씀하셨고 선택하셨어요.
그런데 야곱은 그 것을 신뢰하지 않았어요.
오랫동안 장자권에 목을 매달았어요.
언제 저것이 나에게 올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 저 것을 가질 수 있을까!에만 집중하고 살았어요.
(쉬고) 장자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의미있게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 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연결시키지 못한거에요.
장자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 것을 가진 사람이 승자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그도 에서와 다르지 않아요.
에서는 대놓고 “오늘의 만족을 위해" 살았고, 야곱은 “장자권을 쟁취해 오늘부터 만족하는 삶"을 살려고 했어요.
하나님이 계셔서 만족한 삶이 아니라, 장자권이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아왔고, 장자권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지금이 더 중요"했어요.
그도 에서처럼 “지금. 보이는 축복”이 더 중요한 삶이었어요.
장자는 재산 상속시 두 배의 몫을 받게 되거든요. 야곱이 봤을 때 자기 집 너무 부자인거에요. 유산이 엄청난 것이죠.
거의 동시에 태어났는데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적게 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죠. 거기다 자신이 장자의 권한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저거 내건데. 빨리 가져와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하고 살았던 거에요.

붉은 죽

야곱이 쑤고 있었던 이 붉은 죽은 정확하게 에서를 겨냥하고 만든 것이었어요.
에서는 들사람이에요. 호탕하고 성격상 꼬인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야곱은 아니었어요.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쉬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용한 사람들의 특징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또 사색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죠.
야곱도 그랬는데 좀 결이 달랐어요. 관찰하고 사색하는 모든 목적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어요. 온통 잔머리를 쓰는데 사용한 것이죠.
형의 패턴을 관찰하면서 연구했을거에요.
첫째, 형은 배가 고프면 눈이 돌아서 뭐든 먹으려고 한다.
둘째, 형은 늘 이 시간대에 집에 돌아온다.
그래서 정확하게 그가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고 그를 겨냥하여 일부러 죽을 끓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정말 말도 안되게 마침 그날따라 에서는 더 배가 고팠어요.
(쉬고)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때요?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둘다 딱하다 딱해'
‘덤 앤 더머도 아니고 둘다 왜 저러냐' 등 여러 다양한 생각들을 하게 될거에요.
(쉬고) 그런데 여러분 우리라고 다를 수 있었을까요?
내가 에서였다면, 야곱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내가 힘이 있는 장자 에서였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그 이야기? 당연히 들리지 않았을거에요.
누가봐도 자신의 곁에는 사람들이 넘치고, 모두가 자기를 좋아해요.
동생은 맨날 혼자에요.
양치러 나가서 혼자 앉아있고 생각만해요. 도무지 저 녀석의 속마음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자신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사람이에요. 모두가 그를 따랐단 말이에요.
(쉬고) 내가 야곱이었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그 이야기? 당연히 들리지 않았을거에요.
자기 옆에 아무도 없어요. 엄마 리브가만 있어요. 하나님이라는 신이 말하기를 형이 자기를 섬기게 된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말이 되지 않아요.
자기는 형을 이길 힘도 없고, 그를 넘어설만큼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집안도 이웃들도 자신보다 형을 더 좋아하고 따라요.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지 자신의 신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 말씀? 중요하게 여겨졌을까요?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무기. 관찰력과 잔머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쉬고) 우리라고 다를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구원 받았죠. 구원 받아서 자녀가 된 것은 좋은데 그 것이 여려분의 삶에 도움이 되고 있어요?
구원받은 삶이 여러분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이 있어요?
예수님이 돌아온 여러분에게 돈을 쏟아주시던가요? 진급을 시켜주시던가요. 길을 활짝 열어주시던가요?
구원이. 예수님이 여러분 밥 먹여주던가요? 삶의 만족을 주었나요?
솔직히 까놓고 “구원 받은 백성의 정체성을 포기하면 편하지 않아요?”
(쉬고) 저는 휴가를 가면 진짜 자유함을 느껴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저를 모르는 장소에 가면 진짜 너무 좋아요.
왜 인줄 알아요?
저를 목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다리 꼬고 앉으면 와서 풀어버리는 예림이도 없고, 틈만나면 플러팅하는 채연이도 없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으면 무섭다고 말하는 유현이도 없잖아요.
면도 일주일 안해서 몰골이 비루해지고 털보가 되어도 눈치 볼 사람 없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막 망나니처럼 다닌다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저를 누르고 있던 여러 무게들을 내려놓고 목사 양휘석이 아니라. 인간 양휘석으로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자유하다고 느껴요.
(쉬고) 목사 양휘석을 모르는 장소에만 가도 편안함을 느끼는데, 구원 받은 백성의 정체성을 포기하면 진짜 정말 편하지 않겠어요?
학교던 직장이던 사람들이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을 몰랐을 때알고 난 이후 여러분의 언행에 제약들이 걸리지 않았어요?
저 예전에 직장 다닐 때, 교회 다니는 것 비밀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3시간만에 걸렸어요. 제 옆 자리가 팀장님 자리였는데, 자꾸 저를 쳐다보시는거에요.
그러시면서 “아 내가 임마 어디서 봤는디 기억이 안나네”를 반복하시다가 3시간만에 “야 너 논산중앙교회에서 피아노 치는 그 놈이지?”라고 하셨어요.
그 날부터 회사에서 저에게 자유는 없었어요. 저를 몰라봤던 그 3시간 그게 저의 마지막 자유였어요.
구원 받아 자녀가 된 것은 좋은데 이 것이 여러분의 삶에 도대체 어떤 도움을 주고 있었나요?
온통 불편한 것 투성이잖아요. 삶의 만족도가 매일 100인 것도 아니잖아요.
포기하면 편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여러분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거에요?
(충분히 쉬고) 내가 왜 그래도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고민과 확신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해요.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쉬고) 저는 여러분이 그럼에도 예수님을 붙잡고 아둥바둥 버티며 살아내는 이유가 이 로마서 말씀에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과 에서, 야곱과 분명히 다른 점이 여기에 있어요.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어요.”
구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거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소망하며 구원을 얻었어요"
확실한 구원이라는 소망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들에 속아서는 안돼요"
보이는 것은 나의 소망이 될 수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거든요.
눈 앞에 상황에 약해져서 여러분의 믿음을 의미 없이 내던지지 말아요.
(쉬고) 에서는 눈 앞에 상황에만 집중하느라 장자의 권한을 의미 없이 내던졌어요.
야곱은 당장 그 것을 손에 쥐고 싶어서, 눈에 보이는 물질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 없이 내던졌어요.
(쉬고) 에서와 야곱 둘다 똑같았어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정체성을 포기했어요.
한 그릇의 붉은 죽 때문에 이미 손에 쥔 소망을 내던졌어요.
(충분히 쉬고) 여러분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실리보다 명분을 붙잡고 살아가야 해요.
먹고 마시면 사라질 붉은 죽 그 한 그릇에 집중하지 마세요.
잠깐 있다 사라질 것들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왜 야곱일까?

에서도 야곱도 잘한 것 없어요. 둘다 의미 없이 믿음을 내던졌어요. 그냥 땅바닥에 내다 꽂았어요.
(쉬고)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어요.
장자권을 산 이후 야곱의 삶은 굉장히 복잡해지기 시작하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야곱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시면서, 그를 집에서 살지 못하게 만드셨어요.
장자의 축복을 받았는데, 그 성공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도망쳐서 삼촌 라반의 집에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기 시작해요.
(쉬고)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어요.
누군가를 선택하셨다. 라는 것은 때론 우리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이 것은 필요한 부분이에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선택하신 것일까? 불공평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선택교리는 불공평한 것이 아니에요.
이런 생각은 전제가 잘못 되었어요.
(쉬고) 먼저 선택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나요?
선택을 받을만큼 선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나요?
(쉬고) 우리는 선택 받기에 부적격한 상태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쁘신 뜻을 따라 야곱을 선택하셨듯,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먼저 선택해주셨어요.
우리는 공평과 불공평을 따질 위치에 있지 않아요.
야곱은 앞으로 계속 문제가 많은 삶을 살아갈 것이거든요.
우리도 앞으로 계속 문제가 많은 삶을 살아갈 것이거든요.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를 먼저 선택해주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선택받아 누리게 된 이 기쁨을, 주위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이 잘 살아내야 하고 그들이 우리처럼 살아가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며 우리는 살아야 해요.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삶은 “에서와 야곱처럼 본성"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쉬고) 우리는 에서와 야곱과 달라요. 적어도 우리는 본성대로 살아가더라도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려는 의지를 보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적어도 여러분은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움켜쥐려는 삶을 살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믿어요.
정말로 그랬다면 이 자리에 없을 거거든요.
(쉬고) 로마서 8장 24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쉬고) 이번 한 주 우리가 붙잡고 살아야 할 말씀이에요.
이 말씀을 수시로 묵상하세요.
가능하면 외우세요.
보이는 것에 두세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영적 갈망이 가득한 사람들로 만들어 줄거에요.
(쉬고) 여러분 기억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그 분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영적인 갈망”이 계속해서 생겨나요.
에서와 야곱은 “영적 갈망이 아닌” “오늘의 나를 채워줄 욕망"을 갖고 살아갔어요.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의 나를 채워줄 욕망"이 아닌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영적 갈망"이 가득한 한주를 살아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요.
로마서 8장 24절이에요.
한 주간 수시로 묵상함을 통해 영원한 소망을 붙잡고 삶의 기쁨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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