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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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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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호 6:1-6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힘써 알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호세아라는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이 정치, 경제, 사회, 군사, 교육, 문화의 모든 면에서 부패하여 앗수르라는 나라에 멸망당할 시점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양극화 현상’이 뚜렷했습니다. 가진 자들은 더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였습니다. 부정부패가 심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날마다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였지만 빈곤층들은 너무 가난해서 자신들을 스스로 노예로 파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혼합종교가 이스라엘에 들어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그들의 삶에 실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부유의 신 바알이나, 다산의 신 아세라 여신도 함께 섬겼습니다. 북왕국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한 동상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그의 아내 아세라가 너를 축복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아내를 이방 우상 아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 당시 얼마나 종교가 혼합되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형식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호세아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1장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당신의 처참한 모습을 투영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 백성과 영적으로 결혼을 하였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세속주의와 혼합주의 그리고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남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폭로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고멜’ 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지만, 그 고멜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외도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호세아와 같은 비극적인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는 없습니다. 호세아는 본인의 의도가 아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멜은 음탕한 여인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을 떠날 수도 없고, 그런 여인을 마냥 기다려 줄 뿐 아니라 심지어 달래줘야 하는 참으로 가엽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호세아 선지자 보다 더 가엽고, 처량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음란한 여자를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기다려주고, 달래 줬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떠났을 때에 그들을 기다려주고, 달래주고, 사랑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외도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만나 외도를 한다면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참고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를 배반할 뿐 아니라 외도까지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녀의 몸과 마음이 노쇠해져 더 이상 음란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어 그녀는 그녀를 이용했던 포주로부터도 버림받는 비참한 신세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호세아는 고멜을 용서하고 포용해 주기 위해 그녀를 찾아갑니다. 우리는 그 호세아를 통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넓으신 사랑을 엿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고멜로 비유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된 데에는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지식을 그들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서 4장6절 말씀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호세아는 이렇게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6장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알자’라고 사용된 히브리어 원어는 ‘야다’입니다. 이는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엑스포지멘터리의 주석’은 이 안다는 표현을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표면적인 지식을 알 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 체득된 지식을 포함하여 알아야 한다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AW토저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세 단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지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성을 주셨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세상을 탐구하듯이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해 놓으신 것들을 우리의 지성을 가지고 탐구하여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과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로 주신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밭제일교회에서 현재 실시 중인 말씀 P.T에 꼭 다들 참여하시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혜를 누리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란 신비적 체험을 찾아 나서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신비를 실제 체험할 수 있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양 그리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머리로 아는 하나님을 가슴으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토저 목사님은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지성을 뛰어 넘어 성령 안에서 누리게 되는 영적인 체험인 예배와 기도 그리고 말씀 묵상이나 성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토저 목사님의 견해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설교나, 성경을 연구해서,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고, 영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균형잡힌 사모함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셀무스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사모함으로 주를 찾게 하옵소서. 찾는 가운데 주를 사모하게 하옵소서. 사랑으로 주를 발견하게 하소서. 발견하는 가운데 주를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소원,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속성은 어떤 게 있는지? 그분이 인간과 다른 점은 무엇이 있는지? 그 분의 일하시는 방식은 어떠한지에 대해 성경을 통해 배우고 싶은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지식을 통해 성령님을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머리로 아는 지식을 넘어 가슴으로 아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10월 부터 시작되는 말씀 P.T를 통해 한밭제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은 은혜를 경험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위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시면 하나님을 사모하여 그 분을 더 알기 원하는 분들 중에서 그 내면에 가지고 있는 ‘상처’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결핍’ 때문에 아니면 ‘이 세상 문화’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선입견’, ‘전이해’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은 있으나 그 열심이 잘못된 지식에 기반된 분들이 있으십니다. 그런분들에게는 건강한 신앙 인격의 열매를 찾아 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모함은 성령 안에서 올바른 방향이 유지될 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올바른 방향이란 자신의 고집을 내려 놓고,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보조 자료들인 신앙, 신학, 서적과 주석 그리고 성경 사전이나 다양한 성경의 번역본을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측면에서 새번역 성경은 여러분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영어를 배우신 분들은 다양한 영어 성경 번역본을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아울러 성경의 진리를 이미 우리보다 먼저 발견하여 책으로 남긴 다양한 신앙, 신학, 주석류의 책들을 찾아 보는 것도 성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토마스 트러헌은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없는 것처럼, 잘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만큼 우리는 바르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우리 신앙에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할 수 없다는 측면을 생각해 볼 때 그 두 개념은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우리의 신앙은 건강한 신앙 인격을 형성하여 행동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부분적이지만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6장 1절 말씀을 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신다?”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입니다. 그 동기는 무엇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대표되는 속성이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이 사랑에 버금가는 또 다른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공의의 하나님’이라고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찢으시고 치시는 것은 벌을 내리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의 속성만 있는 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바로 잡으시기 위한 ‘공의’의 속성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벌을 내리시는 궁극적 이유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데 있기 때문에 찢으시고 치신 이후에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되게 행동할 때 앗수르 라는 나라를 들어서 그들을 매질 하셨고, 남 유다 백성들에게는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들어서 매질하셨습니다. 왜그러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떻게 서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바르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한국 영화중에 엄청난 흥행을 한 영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친구’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유오성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자신이 깡패가 된 것을 후회하는 발언을 합니다. 만약 자신이 어렸을 때 했던 나쁜 행동들을 누군가가 지적을 해주었고, 자신의 뺨이라도 한 대 때려주었다면 자신은 아마도 지금처럼 이런 깡패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참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환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사랑은 끌어 안아 줄 뿐 아니라 잘 못된 점도 깨닫도록 훈계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셔서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죄를 씻어주신 사건이 바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끌어 안아 주시겠다는 사랑을 보여 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을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 하셨습니다. 손목과 발목에 굴은 대못이 박히셨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 했고, 수십키로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골로다로 향하셔야 했고, 허리에는 창이 관통하여 물과 피를 쏟으셔야 하는 심판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훈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하나님께 매를 맞고 계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인생의 험난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모르겠다며 날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이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인줄을 깨달아 알도록 하시기 위해 한시적으로는 우리에게 ‘환란’을 허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은 때로는 우리를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분명 때가 이르며 ‘도록 낫게 하실 것이고,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6장 2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신학자들은 호세아의 이 말씀이 사흘째 예수님을 부활시킨 사건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그 만큼 호세아에 등장하는 ‘삼일 만에 회복시킨다’는 이 표현이 구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신약의 ‘부활’을 상징하는 놀라운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 비록 호세아 시대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구약의 많은 말씀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 호세아서의 ‘삼일 만에 회복시킨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삼일 만에 우리를 일으킨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어떠한 죄악도 그리고 상처도 치료, 회복하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수르와 바벨론에 멸망 당하여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백성들도 회복시키실 수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제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7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사의 왕이었던 고레스를 들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침략을 통해 역사에서 사라졌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1948년 회복하시어 현재까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같은 인생 막장을 연출한 사람들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에게 없는 것을 있게 부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 바로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그와 같이 알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실 뿐 아니라 어느 곳에도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그 분이 없는 곳은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디서 재림하실지 고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능력으로 세상에 재림하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구주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곳곳에 편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이 계신 장소가 ‘그리심 산’이란 특정한 곳으로 한 정된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잘 못된 지식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친히 그 여인의 잘 못된 지식을 수정해주시기 위해 이와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1-22절 말씀입니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라는 표현에서 그 사마리아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어디든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실하심이란 'Faithful'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한결같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랬다저랬다 그 마음이 갈대와 같이 요동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고, 악인은 그 분의 신실하심으로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욥기 36장6절 말씀입니다.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시며 고난 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말씀은 그 분은 하신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장 3절 말씀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서 새벽에 어김없이 출현하는 ‘새벽 빛’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새벽은 반드시 지나가고 정확한 때에 새벽을 밝히는 빛이 출현하듯 하나님도 한결 같은 그 ‘신실함’으로 그의 일들을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분은 가을비와 봄비처럼 때에 따라 한결 같이 악인에게도 그리고 선인에게도 그 비를 내려주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한결 같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시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한결 같이 사랑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태양 빛 앞에서 한 순간 사라지는 이슬과도 같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은 변덕이 많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지는 작심 3일일 때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에 반해 하나님이 신실하실 수 있는 것은 그 분은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17절 말씀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신실함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대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특성과 성품을 깨달아 알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하지 않고 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그 종교 활동은 생명을 살리는 예배 생활, 신앙생활, 성화를 이루는 삶이 될 수 없고 형식과 의식에 매이는 종교생활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3.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하고 성령님을 통해 바르게 깨달아진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해야 합니다. 만약 이와 같은 과정이 생략 된다면 우리는 형식과 의식에
목을 매는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그런 종교인의 예배와 삶은 하나님께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셨던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애의 원어는 우리가 잘 아는 ‘헤세드’입니다. 이를 번역하면 ‘친절, 인자, 자비’인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는 그 당시 형식과 의식적인 종교행위에 반하여 사용됐습니다. 즉 이 인애는 관계적인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고. 제사와 번제는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벽예배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기도 행위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찬양의 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관계를 통해 그 분을 잘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관계를 통해
그 분을 지적으로, 경험적으로 잘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성령을 통해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무적으로 대하지 않고, 관계적으로 인애를 가지고 우리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아내를 잘 아는 만큼 아내는 저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내를 아는 만큼 저는 제 방법대로가 아닌 아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찮가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아는 만큼 우리의 방법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더 많이 알게 되시는 하루, 그로 인해 인애, 사랑을 가지고 그 분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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