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직업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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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윗의 인생 = 내 인생 2. 극한직업 목자 3.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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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인생이 내 인생

샬롬 저는 자유교회에 새롭게 부임하게 된 양휘석 목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각자 다른 자리에서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가족이었습니다.
한 분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고,
한 분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한 분이신 성령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이잖아요?
그렇기에 우린 오늘 처음 만났지만,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었다라고 저는 믿습니다.
옆사람과 함께 이렇게 인사해볼까요?
“보고 싶었습니다.”
(쉬고)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이편 23편 1-2절 말씀입니다.
아마 모두가 잘 아시는 말씀일 것이고 또 암송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설교 할 때 가장 힘든 본문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요.
그럼에도 제가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제 삶을 아니 우리의 삶을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함께 나누며, 감사하는 시간을 갖기 원해서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동일한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쉬고)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어렸을 때 양들을 돌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양들을 세세하게 살폈던 경험, 즉 양들을 위해 대부분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온 마음과 정성을 쏟으시면서 돌보고 계셨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 “양”이다. 라 표현합니다.
여러분 혹시 양이라는 동물에 대해 잘 알고 계신가요?
여러분에게 양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양은 고집이 셉니다. 더러운 동물입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정말 나쁜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양은 마이웨이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데로만 행동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로 돌아서지 않습니다.
바로 앞이 낭떠러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달려가다 떨어져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처럼 양은 평온한 이미지를 가진 동물이 아닙니다. 사고뭉치입니다.
(쉬고)
양이 갖고 있는 특징 중 하나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목자가 돌봐주지 않으면 바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자에게 철저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처럼 주시하지 않으면 바로 길을 잃어버립니다.
혼자 먹지도 못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절대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직 목자의 말에만 반응하며 일어나 움직입니다.
(쉬고)
성경은 우리를 자주 양으로 비유하죠.
저는 어렸을 때 성경을 읽을 때 “강하고 멋진 짐승들도 있는데 왜 굳이 우리를 ‘약한 양’으로 말씀하시지?”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요.
왜 성경은 우리를 강한 짐승으로 표현하지 않고, 고집불통이고 약한 양으로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쉬고)
이사야 53장 6절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
죄송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때론 세상을, 자녀들을, 나의 일을 더 사랑하고 따라갑니다.
나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를 “양”으로 자주 표현합니다.
(쉬고)
말씀드린 것처럼 양은 목자가 없으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를 “양”이라 말합니다.
(5초 쉬고)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릅니다.
여호와에는 “나와 동행하면서 두고 보아야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내 삶에 일하신 하나님을 명확하게 아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나의 구세주로 받아드리게 되셨나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많이 쉬고)
혹시 머리로만 잘 알고 있지는 않은가요?
새벽에 호세아서를 묵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그 어떤 나라보다 하나님에 대해 잘 알았고, 그 분을 향한 지식이 많았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신으로 고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나를 진짜 알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너희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를 아는 지식이 없다.”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저는 이 곳에 계신 모든 동부교회 가족들은 이스라엘과 달리, 머리만큼 가슴으로도, 아니 그 이상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계신다 믿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삶의 희망을 두는 분들임을 믿습니다.
내 삶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헤를 삶과 심령에 새긴 분들이라 믿습니다.
(쉬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된 사람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친밀해질수록 삶이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은 내 이성으로 절대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 등 모든 것을 흔들고 무너뜨리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쉽게 믿어지시나요?
불가능이 없는 신이, 불가능투성이, 아빠 엄마가 돌봐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자원해서, 우리가 구원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의 결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쉽게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모시는 사람은, 겸손해지게 되는 것이죠.
(5초 쉬고)
우리 기도할 때 어떻게 마무리 하죠? 기도의 내용은 달라도 똑같은 고백으로 마무리를 하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저도 때론 주문처럼, 습관처럼 큰 의미를 담지 않고 외웠는데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해보니 이 고백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더라구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문장 안에는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나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삶의 이 지점에 와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기도를 듣고 응답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드리겠습니다.” 라는 나의 겸손의 고백과 선포와 결단이 담겨있더라구요.
(쉬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러한 고백과 무관하게,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시선을 고정하고 많은 시간을 쏟으며 살아갈 때가 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그 고백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신뢰하고 주목하세요.
지금 당장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언젠가 그 고백의 선포를 지킬 우리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거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고백 뒤에 숨겨진 뜻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나는 당신의 백성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삶의 이 지점에 와 있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기도를 듣고 응답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드리겠습니다.”
동부교회 가족들의 고백이 되길 기대하며 소망합니다.
이 고백이 매일의 고백이 되길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을 지키고 보호하고 계시는거에요.

극한직업 목자

바로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말이죠.
2절. “푸른 풀 밭, 쉴만한 물가”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지 이 것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직접은 아니더라도 영상 등으로 양들이 풀을 뜯어 먹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양들이 평온하게 풀을 뜯어 먹기 위해서는 생리상 네 가지 필요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양들은 겁이 굉장히 많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 편안하게 눕지 않습니다.
둘째, 양들간의 경쟁이 끝이 없습니다. 양들간의 서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수시로 이마로 들이 받으며 힘겨루기를 합니다.
셋째, 파리나 기생충으로 인해 굉장히 괴로워 합니다. 작은 파리조차 흔들어 쫓아내지 못합니다.
넷째, 위 세가지를 다 충족해야 풀을 먹습니다. 아주 많이 먹습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습니다.
그래야 양은 평안하다 느낍니다.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동물이 양입니다.
목자는 이 네가지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정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하고, 낮과 밤에 아무리 덥고 추워도 앉아서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쉬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밤 하늘에 뜬 큰 별을 본 사람들이 누구였죠? 목자들이었습니다.
환한 별을 어떻게 볼 수 있었을까요?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앉아서 쉬면서 수다를 떨다 우연히 봤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 늦은 시간에도 잠을 포기한체 자신들의 양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찾아온 천사를 만날 수 있었고, 하늘에 떠 있는 유독 빛나는 별을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쉬고)
이처럼 선한 목자, 참된 목자는 쉴 수 없습니다. 아니 쉬지 않습니다.
양들이 서열 싸움을 시작하면 다른 양들이 풀을 먹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면 크게 상처가 나고 피가 납니다. 그러면 들짐승들이 몰려 옵니다. 그렇기에 목자는 양들 사이를 자주 다니면서 양들을 만지고 안아주면서 “괜찮다” 안심 시켜줍니다.
그렇게 안아주면서 파리나 기생충으로 인해 상처가 나지 않았는가도 살핍니다.
파리나 기생충이 코나 귀로 들어가면 양은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확인을 하고, 상처가 나면 연고를 발라줍니다.
마데카솔 이런 것 없습니다.
양들을 돌보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자연에서 약초들을 가져와 빻고 짓이기면서 약물을 만듭니다.
양들 사이를 거닐면서 안아주고 안심 시켜주고 약을 발라주고, 약을 만들 때 목자들의 머리에는 “풀이 많은 곳이 어디있을까?” 라는 생각 뿐입니다.
나만 양을 키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과 동선이 겹치면 우리 양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겹치지 않는 목초지를 계속해서 찾고 발굴해야 합니다.
찾지 못하거나 어려우면, 먹고 떠날 때 다시 올 것을 염두해서 돌을 가려내고 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씨를 뿌린다고 알아서 자라는 것이 아니겠죠. 목자들은 다시 돌아와서 비료를 주고 수시로 돌보며 풀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돌보는 작업을 합니다.
이처럼 목자는 “나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못합”니다.
(쉬고)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양들은 배가 부르면 우묵하게 파여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치 제가 배가 부르면 “어우 좋다.”라고 하면서 눕는 것처럼 우묵하게 파여진 곳에서 가서 기댑니다. 그리고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양들이 넘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쉬고) 죽습니다.
털이 너무 무거워서 스스로 몸을 뒤집지 못합니다. 그렇게 뒤집어진 체로 오래 두면 근육이 굳고 배에 가스가 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뒤집어진 양을 발견하면 목자는 달려가서 그 무거운 양을 일으켜 세워 굳어진 근육들을 마사지하고, 배에 찬 가스를 내보내기 위해 계속 쓸어내립니다.
(쉬고)
목자에게 양이 한마리만 있을까요?
살리는 동안 다른 양이 뒤집어집니다. 그러면 또 달려가서 일으켜 세우고 마사지를 합니다.
양들이 계속 뒤집어 집니다.
심지어 조금 전에 뒤집어져서 죽을 뻔했던 그 양이 또 우묵한 곳에 가서 기대다가 뒤집어 집니다.
이 것이 무한 반복입니다.
(쉬고)
듣기만 해도 지치지 않으시나요? 양 정말 손이 많이 가죠?
그런데 놀랍게도 (쉬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남았습니다.
(쉬고)
쉴만한 물가. 즉 양들에게도 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양들이 아무 물이나 마시지 않습니다.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나요?
양들은 물살이 거세거나, 빠르게 흐르면 절대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이 막히고 말라도 그 근처로 절대 가지 않습니다.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흐르는 물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양은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아니 안다해도,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드리는 양털 때문에 물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 근처도 가지 않습니다.
(쉬고)
답답하시죠? 양에 대해 나누는 저도 갑갑합니다. (웃음)
(웃기)
그럼 목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에 말씀드린 모든 것들을 하면서, 조용하게 흘러가는 물가를 찾는거에요.
당시에는 구글맵 같은 것이 없잖아요?
목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다른 목자에게 잠시 양들을 맡겨놓고 계속해서 찾으러 다니는거에요.
다윗이 살았던 그 당시의 네게브 지역은, 지금도 그렇지만 물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그 말은 잔잔하게 흐르는 물가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겠죠.
그래서 목자들은 땅을 파기까지 했습니다.
비가 오는 우기철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깊게 파고 거기에 지하 저수조를 만들어서 물을 보관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론 아주 이른 아침 양들을 깨워 이슬이 내린 풀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쉬고)
목자들은 도대체 언제 쉴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 쉴 수나 있는 것일까요?
(반응 살피며 쉬고)
오늘 설교 제목은 극한직업 목자입니다. 어떤가요?
목자 정말 극한직업 아닌가요?
(5초 쉬고)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신다. 라는 고백, 푸른 풀 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의 의미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단 한순간도 한 눈 팔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눈을 고정하고 마음을 쏟고, 우리가 아파하면 약을 만들어 발라주시고, 우리가 걷는 길이 광야와 같은 길이 될까봐 먼저 가서 다 정리하고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1-2절의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 되십니다. 그래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나를 데려가십니다.”라는 어떤 평온함에서 나온 고백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며,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뼛속 깊이까지 느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쉬고)
동부교회 가족 여러분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하며 우리를 돌보고 계실까요?
때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우리에게 왜 이런 사랑과 관심을 쏟고 계실까요?
(쉬고)
우리가 어려움과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불안과 근심의 짐을 짊어지지 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거에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함으로 경험했던 그 기쁨과 자유의 은혜를 과거에 묶어두지 마라.
오늘도 내일도 그 자유의 은혜를 마음 껏 누리며 살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죠.
(5초 쉬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때론 광야처럼 삭막하게 느껴지고,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그 자리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정말로 믿는다면, 내가 겪고 있는 광야는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 됩니다.
24시간 지키고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의 손길을 느끼기에 그 곳은 더 이상 광야가 아니게 됩니다.
(7초 쉬고)
예수님 안에 하나 된 동부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 어떤 고백을 하며 살아오고 계셨습니까?
(10초 쉬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구체적으로 아주 세세하게, 하나도 빼먹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고 계셨음 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쉬고)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쉬고)
예배는 하나님께서 내 삶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고 계셨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푸른 풀밭과 잔잔한 쉴 만한 물가로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이 곳에는 목자 되신 하나님만을 따르길 원하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고 부를 수 있는 푸른 풀 밭과 쉴만한 물가에 우린 지금 모여 있습니다.
(쉬고)
여러분에게 예배는 무엇인가요?
오늘 나의 예배의 태도는 한 주의 내 삶에 달려 있습니다.
“졸리고 따분하고 피곤한 그래서 오는 것이 고민이 되는 시간이 되느냐”
“이 곳이 푸른 풀 밭과 잔잔한 물가가 되느냐”는 한 주의 내 삶에 달려 있습니다.
(쉬고)
예배의 시간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되고,
하나님만이 나의 선한 목자 되십니다. 라는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언어로 감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날과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만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라는 “각자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쉬고)
이번 한 주를 살아 갈 때, 극한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순간도 한 눈 팔지 않고 모든 에너지와 마음과 정성을 나에게 쏟아내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윗의 고백이 동일한 나의 고백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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