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

다시 보는 사도신경➂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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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2
한 사람의 일생을 요약하여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 주로 어떤 일을 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곳곳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셨는가보다, 어떤 상황에 놓이셨는가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조금 독특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정리할 뿐인데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면)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렇듯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무엇을 하셨느냐보다 어떠한 처지에 있었느냐를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즉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신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생을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그려 볼 수 있는데요. (화면)
마치 V자 모양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왼쪽에서 점점 낮아졌다가 오른쪽으로 점점 높아지는 모양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되셔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 처하시는 과정은 예수님이 낮아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낮아지신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 땅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과정은 예수님이 높아지시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예수님이 낮아지셨다가 높아지는 삶을 사셨을까요? 바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생애를 사셨는지를 꽤 많은 문장을 할애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봐야 할 첫 번째 문장이 바로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본질상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혹시 성육신이라고 할 때 이 ‘성’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성’자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많죠. 성전, 성령, 성도 등 여기서 사용하는 ‘성’이라는 한자는 거룩할 ‘성(聖)’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전, 거룩한 영,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그래서 성육신의 ‘성’자를 거룩하다는 의미로 생각해서 성육신을 ‘거룩한 육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한마디로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 인간과는 다른 거룩한 육체일 거라는 생각이죠. 하지만 여기서 쓰인 ‘성’자는 거룩한 ‘성’이 아니라 이룰 ‘성(成)’입니다. ‘육신을 이루셨다’, ‘육신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육체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신 채로 인간을 입고 오신 사건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매년 성탄절이 되면 온 세상은 ‘아기’ 예수를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 예수님보다는 그냥 귀여운 아기여서 좋아할까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아기로 태어나셨을까요? 바로 어른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거나 아예 천사의 모습으로 오시면 안 되었습니까? 그 답을 위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사실인데요.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예수님은 우리 대신 이 사망의 벌을 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냥 하나님으로만 이 세상에 오셨다면 죽을 수가 없으셨을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래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것이죠. 이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죽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운연 교수님이 쓴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이라는 책을 보면 성육신에 대해 이렇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는 죽음을 경험할 수가 없고, 사람만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야 했다. 우리 대신 ‘죽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 그래서 사람이면서 하나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한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사람이기는 한데, 자기도 죄인이라면 그 죄 때문에 자기 벌 받기도 벅차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시게 되면 아담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벌을 받으실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 대신 ‘죽기 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시려면 자기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우리 인류처럼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아담이기에 예수님은 우리처럼 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육신하신 이유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벌을 받으시기 위해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벌을 받을 몸이 필요하셨습니다.
둘째, 그러면 왜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셔야만 했습니까? 그분이 ‘죄인’이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사람으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죄인입니다. 죄인은 자기 죄를 감당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게 태어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도신경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요. 한 사람은 앞서 살펴본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로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고요. 또 다른 한 사람은 빌라도로서 반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 양극단의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빌라도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성경에 보니까 빌라도가 로마 총독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을 보면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나름 애를 많이 썼거든요. 이 빌라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누가복음 23:14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또 20절에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또 22절에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자, 이렇게 예수님을 어떻게든 놓아주려고 애를 많이 썼던 인물이 이 빌라도인데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군중들의 압박 때문에 자기 살자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그런 비극적인 인물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듯 빌라도라는 인물이 악하기도 하지만, 제가 볼 때 이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근시안적인 인물이에요. 그 예루살렘 백성들이 예수님을 풀어주면 민란을 일으킬 것 같으니까 나 하나 살자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내몰았던 좁은 시야를 가진 인물 아닙니까? 반면에 마리아를 보자고요. 마리아는 누가복음 1장 38절에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게 마리아 입장에서는 얼마나 위험한 순종인지 여러분들 잘 아시잖아요? 처녀가 임신을 했으니 약혼자였던 요셉으로부터 버림받을 확률이 100%이고요. 사람들에게 들키면 간음죄로 돌에 맞아 죽을 판입니다. 당장 눈에 보기에 너무도 위험한 선택이지만, 마리아는 넓은 시야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빌라도와 마리아를 보면 이 성경구절이 떠오르는데요. 누가복음 17:33 합독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한 사람은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좁은 시야를 가지고 행동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요. 또 다른 한 사람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지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내 앞에 놓인 두 갈래의 길 즉, 마리아가 걸어간 길이 있고 빌라도가 걸어간 길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죠? 우리 모두가 빌라도처럼 근시안적인 길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넓은 시야의 길을 선택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숙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생의 기간동안 예수님이 하셨던 수많은 일들 기적을 베푸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수많은 병자를 고쳐내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등, 복음서의 내용 대부분이 거의 그런 것들인데, 이게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거예요. 그냥 다 빼고 나시고 고난을 받아서 못 받게 죽으시고 이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 한 줄 더 넣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런 내용들은 다 뺐을까요?
이 질문을 통해 우리 역시 마리아가 아닌 빌라도처럼 좁은 시야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데요.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하면 거북선과 임진왜란이 떠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순신 장군께서 자기 부하 밥 한 끼 사준 것을 그분의 특징으로 생각할 수가 없잖아요? 또 ‘세종대왕’하면 훈민정음, 한글 반포가 떠올라야 하는데, ‘세종대왕께서 육식을 좋아하셨더라’ 이런 것이 떠오르면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적을 베푸시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적 기사를 베푸신 것은, 이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이라는 이 세 가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보조로 쓰여진 도구일 뿐인데,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 이적 기사를 베풀어 달라고 계속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우리가 지금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스스로 아주 명확하게 밝혀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 합독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러분, 예수 믿어서 병이 떠나고 잘 먹고 잘 살고 부자 되고 이것은 다 별책부록 같은 것입니다. 왜 이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 이것 때문이에요.
제가 강아지를 참 좋아하거든요. 저랑 제 딸은 어떻게든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데, 워낙 저희 집에 계시는 내무부장관께서 강아지 키우는 것을 반대해서 못 키우고 있기는 한데요. (도대체 저 집에 내무부장관이 누구냐? 궁금해하지 마세요. 제가 모시고 사는 분 있어요.)
여러분, 제가 아무리 강아지를 좋아하고 어떻게든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요. 그러나 저는 강아지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강아지는 인간보다 하등한 동물 아닙니까? 그래서 싫어요. 저는 강아지보다 더 월등한 인간으로 사는 게 좋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육신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여러분들도 아무리 강아지가 사랑스럽다고 해서 강아지가 되고 싶은 분은 안 계시잖아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셨다는 이게 제가 개가 되었다는 이야기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나시고’ 이 자체가 사실 고난이에요.
그다음에 고난 당하시고 이게 또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자체가 번영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유혹했던 길이 번영의 길이에요. “오병이어 기적 잘 했다. 이제 왕이 되어라.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보아라. 나를 숭배하면 이 나라를 다 주겠다. 천사 좀 동원해 봐라” 이게 다 번영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다 거부하셔서 고난의 길을 가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분의 삶에 맨 마지막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9번에 이런 질문과 답이 있습니다. (화면)
질문 : 예수님께서 다른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그리고 답이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확신을 줍니다.
여기에 보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의 죽음이라고 했는데, 이게 뭘 의미하느냐면 신명기 21장 22~23절을 보십시오. (화면)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은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흉악한 짓을 저지른 자들을 이제 사형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시체가 남잖아요? 바로 그 시체를 성 밖으로 끌어내서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한 마디로 ‘이 자가 죽을 짓을 한 인간이어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사형시켰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왜 나무에 매달아 놓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죽을 짓을 저지른 이 인간을 육신의 형벌을 가하여 죽였는데 하나님께서도 이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도 형벌을 내려 주시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영혼에 대해서도 저주를 내려주시라는 의미로 나무에 매단다는 것이죠.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화형을 당하시거나 참수형이 아닌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으셨는지를 아시겠죠?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통당할 때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방황할 때 주님이 달리신 이 십자가의 그늘아래에 나가서 엎드려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에 감격해야 하는데, 저도 이 목사 생활을 15년 넘게 하다 보니까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에 대해 직업적으로 선포하고 저부터가 너무 메말라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고 우리 성도님들도 이 십자가의 감동과 은혜가 회복될 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부흥과개혁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어린이 성경이야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나에게 한 번만 엎드려 경배하면 내가 이 온 세상을 주겠다“고 말하고, 주님은 이 사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게 되거든요. 그 <어린이 성경이야기>에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마귀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요! 그저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되지요.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순종하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 고난당하고 죽으시게 될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잘 알았어요.“
비록 아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한 성경이지만요. 아주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광야시험의 요지가 사탄이 ‘쉬운 구원’을 예수님께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고통스럽게 죽지 않더라도 쉬운 구원이 가능한 길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셨어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눅22:42)“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두려워하고, 떨고, 고통스러워하고, 피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신성을 가진 분께조차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이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 일이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 ‘쉬운 구원’의 길이 있다면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가요? 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도 사탄의 요구를 듣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저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사탄에게 고개 한 번만 숙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데 얼마나 매혹적인 구원입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고통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는 길’ 외에는 인류를 향한 구원의 방법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맛보신 고통, 곧 ‘쉬운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 ‘고통스러운 구원의 길로서’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내(주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16:24)“ 따르라고 하셨던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육신하신 하나님만이 감당하고 이기실 수 있는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쉬운 구원’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만이 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찬송가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 2절 가사가 참 부담스러웠거든요?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제가 가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요. 요즘 고백하기 진짜 힘든 가사는 3절이었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여러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요. 그 ”멸시 천대 십자가“는 이미 주님이 다 지고 가셨다는 거예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그냥 죄 많은 인간들을 또 홍수로 다 쓸어버리시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쉬운 방법을 두고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코 쉬운 구원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사도신경에서의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의 의미라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길 원하는데요.
바로 ‘내 삶에서 이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풍랑을 잠잠케 하심,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 이것은 별책부록일 뿐이에요. 우리의 믿음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 그래서 오늘 본문인 갈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다시 보십시오. 합독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마이클 고먼이라는 분이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을 보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원어로 잘 설명했더라고요. 원래는 이런 내용입니다. (화면)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여기를 원어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러니까 다시 말해이렇게 번역하는 게 문맥상 더 낫다는 거예요. 이분의 번역대로 화면을 한 번 보시죠. (화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다시말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뭘 강조하고 싶은지 다 아시겠죠? 여러분, 위기 중에 있는 제자들 때문에 풍랑을 잠잠케 해주신 사건이 여러분이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 사건은 머리에서 지우셔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달콤함이 십자가를 의지하시는 데 방해가 된다면 역시 머리에서 지우셔야 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쉼표) 그러니까 다시 말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기독교의 핵심은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이에요.
그런데 세상의 이념은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데올로기는 ‘내가 좀 살아야 하니까 네가 좀 죽어줘야겠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논리를 갖다 맞추는 데 진짜 중요한 핵심을 모르니까 성경 몇 구절 인용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게 세상의 이념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을 다 몰라도요. 이 사도신경의 핵심은 잘 알자고요.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어떤 종교는 자기 수양을 통해 높이 올라간 신을 믿는 종교도 있습니다. 오르고 또 올라서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간 신을 믿는 종교도 있습니다. 저는 설령 그런 신이 있더라도 그렇게 어려운 신보다는 우리 주님을 믿을 것입니다. 저보다 더 높이 올라간 신보다, 저를 위해 제 곁으로 내려오셔서 고난받으시고 대신 죽으신 그 주님을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저를 사랑하는 진정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이제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아, 올해도 사순절이 시작되는구나’ 이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십자가를 대하면 안 되잖아요? 비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저와 함께 그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 보시지 않겠습니까? 올해 사순절은 그렇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사순절 묵상집 바로 구입하시고요. 이번 사순절에는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맡길 것은 맡기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십자가를 지세요. 그분의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믿음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보혈을 지나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는데요. 저처럼 목사가 되고 신앙생활 오래 하다 보니까 십자가의 사랑이 돌처럼 굳어버린 분들 혹시 안 계신가요? 주님의 보혈을 통해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멸시천대 십자가는 이미 주님이 다 이루셨어요. 다 지셨어요. 우리는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올해 사순절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이 가슴 깊이 새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이런 마음을 담아 간절한 마음으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자기에게 굴복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쉬운 구원을 추구하라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멸시천대 십자가는 다 주님이 지셨음에도 우리에게 그 십자가를 맡길까 봐 보혈을 통해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는 연약한 심령들이 있지는 않은지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을 더 깊이 가슴에 새기며 이번 사순절을 보내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십자가 중심으로 바뀌게 하시고 우리 믿음의 중심이 십자가와 부활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각성하는 사순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예수님의 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심과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을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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