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주님

다시 보는 사도신경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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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16-17
이 성경을 읽다 보면 더러 아쉬운 장면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와가 뱀의 유혹을 뿌리쳤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아담이라도 단호하게 선악과의 유혹을 거절했더라면 어땠을까? 다윗이 밧세바를 못 본채하고 참았더라면 어땠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고 “그래, 내가 예수의 제자다. 어쩔래?”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것들이죠.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단연코 예수님의 승천을 꼽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큰 위기가 왔지만, 단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대반전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예언대로 부활하셨고 도망갔던 제자들도 돌아왔으니 이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말처럼 이때야말로 예수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강력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아닙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솔직히 말하자면 ‘어이없이’ 예수님은 제자들만 남겨둔 채 훌쩍 하늘로 떠나버리셨습니다. 아니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시면서 간증집회, 치유집회를 하시면서 “내가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난 예수다”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정말 아쉽게도 예수님은 제자들만 남겨둔 채 훌쩍 떠나버리셨습니다.
교회력을 보면 성탄절이나 부활절, 심지어 성령강림절은 표기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날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찬송가에도 예수님의 탄생이나 죽음, 부활, 재림에 대한 주제는 다 있지만, 승천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어요. 그만큼 우리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한데요.
왜 그러셨을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승천하셨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임종구 목사님은 그분의 책 <기독교강요 핵심 강독>에서 이렇게 주장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주님께서 이 땅에 그대로 계셨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조차 주님께서 대신 다 해 주시길 바랄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주님이 모든 일을 해 주시기만을 기다리는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참 공감이 되었습니다. 제 딸만 보더라도요. 툭하면 엄마한테 심부름을 시켜요. “엄마, 포크 갖다줘. 엄마 리모콘 좀 줘” 직접 가져가라고 하면 “엄마가 포크 쪽에 더 가까이 있잖아” 그러는 거예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석연치가 않아요.
이렇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조차 주님께서 대신 다 해 주시길 바랄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결국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 그것도 백주 대낮에 굳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10a
10a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분명히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장면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1:10b-11
10b 흰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은 주님의 승천을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보여주셨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그것을 올려다보고 있던 제자들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칼빈은 이 장면을 두고 ‘천사의 책망’이라고 불렀는데요. 예수님의 승천과 관련해서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제자들)이 책망을 받은 것은 구름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아 육체적 감각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주님을 육안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더욱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승천 장면을 보여주셨지만, 이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육체적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는 장면을 통하여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발견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승천을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화면)
49문 :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빌3:20; 골3:1)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땅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구하는 영적인 감각을 갖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중심 기둥처럼 우뚝 서 있어야 할 신앙고백 중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신 분’이라는 고백인데요. 이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비밀리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대낮에, 제자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이 500여 명이 될 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들어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8-9 합독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구원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천국의 중심이 되는 하늘 보좌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우편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가장 낮아지심으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높이 올려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높이 들리심을 받은 것이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요? 바로 우리에게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애들아,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복이다.”
제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 우리를 떠나신다고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는 죽어도 주님을 안 떠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니, 너희가 몰라서 그래. 내가 떠나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거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떠나셨고 대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 1:4-5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로마 정권도 물리치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 로마 정권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허락해 주세요. 지금이 그때가 아닙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씀 아닙니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전히 땅의 것을 생각하면서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이제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이렇게 하늘의 것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에 인간의 내비게이션으로는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제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다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덤벙거리고 모순투성이의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이 30년 만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부터 땅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키더라고요. 땅의 것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것을 성령의 역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이스라엘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복음은 아프리카에서도, 시베리아에서도, 남미에서도, 북한 땅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의 시대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떠나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볼 수가 없고 성령님도 영의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을까요? 세상이 볼 수 있는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하나님의 증거는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일까요?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인간은 덤벙거리고 모순투성이지만, 주님의 교회로써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죠. 이제는 우리가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또 사람들을 고치셨죠. 연약한 자들을 도우셨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어려운 곳에 가서 돕고 그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가정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일으켜주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일어나 주님이 원하시는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을 대신 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예수님의 일을 대신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경기도 성남 쪽으로 나가다 보면 규모가 꽤 큰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에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정말 가슴 뛰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망입니다.
저는 교회가 교회다워질 때 세상의 진정한 소망이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이 하계동 땅의 눈물 닦아주는 교회,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사도신경의 고백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기로부터”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부터’라는 의미인데요. 우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왼편에 계시고, 예수님은 오른편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영광과 권능의 위치에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심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그 심판의 내용을 오늘 본문인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을 새번역판으로 함께 보시겠습니다. (화면)
16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다음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살아 있는 자들이고, ‘죽은 자’는 이 땅에 태어났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류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주님의 재림 때에 있을 이 심판을 밤늦게 들어온 자녀를 꾸짖는 정도의 꾸지람 정도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심판의 대상자는 무조건 나쁜 사람들일거라는 인간적인 판단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몰랐던 이순신 장군님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1년 전쯤에 유튜브에 올라왔던 영상인데 조회수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순신 장군께서 구원을 받았냐 안 받았냐’ 하는 것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에 관한 마지막 조항인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함께 나누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이유에 대해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죽었던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거역하는 세상을 심판하시고 벌주신다고 하시는데요. 마가복음 8:38 합독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예수님)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어떤 사람들이 심판의 대상입니까? 첫 번째로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끄러워하다’는 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구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은 그 사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심판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주님이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때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는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면서 양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으로 두십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이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해 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오른편에 있는 양에게는 영생을 약속하시지만, 왼편에 둔 염소와 같은 이들은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죄로 저주를 받아 영원한 벌에 처해진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곧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더라도 이렇게 심판을 받아서 지옥을 가는 경우도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께서 우리의 구주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다시 오실 주님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님을 믿기는 하지만, 착하게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참 조심해서 대답해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무서운 예수님으로 만나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심판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고백을 ”다시 오실 것“ 그런데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으로 고백하며 마칩니다. 하지만 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는 이미, 마지막 궁극의 심판이 실은 구원이 될 것을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끄러운 구원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이나 사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인식 없이 살다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겨우 커트라인을 넘기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거기에 따르는 상급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을 믿지만, 사명을 감당하지도 못하고 준비되지 못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한다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죠.
아프리카의 잠비아에서 선교하시는 조남설 선교사님은 소명을 받기 전에 KBS에서 근무하셨습니다. 몇 년 전 이분이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자신의 근무처였던 KBS 신우회 초청으로 설교를 하셨는데요. 그 설교문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드리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죽음>. 오늘 밤 나에게 죽음이 임한다면, 나는 그 죽음을 정말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 싶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수 없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진지해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아질 것입니다.
한 지방의 천주교 사제들을 위한 묘지 입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동료 사제의 시신을 메고 이 글을 눈으로 읽으며 그 공동묘지를 드나드는 사제들의 삶은 얼마나 진지할까요? 지나온 삶을, 앞으로 남은 삶을 생각하게 하며 얼마나 숙연해지는 글입니까?
공동묘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믿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내일은 내 차례요, 또 그다음 날은 우리 차례인데 무슨 욕심 낼 일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순간까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복음에 주리고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일은 지키고 꼬박꼬박 헌금도 하지만 삶 속에서는 복음의 능력도 없이 거짓된 기쁨으로, 거짓된 평안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상의 것들에는 목숨을 걸면서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내려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정말 희생한 것이 있습니까? 공동묘지 너머의 삶을 바르게 인식한 사람만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언제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기꺼이 희생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라는 말씀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씀도 없지만, 이 말씀처럼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심어 왔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거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각자 다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그 날까지 주어진 소명의 자리에서, 각자 믿음의 경주장에서 매일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기필코 승리하셔서 남은 날이 주님 안에서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기원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평소에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사 한 소절을 읽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 밤이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날이라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어떤 심정으로 사람들과 작별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가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기에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다는 고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예수님 그분을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감당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그럴듯한 건물로만 남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의 새 시대를 여는 하늘 아래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불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러분,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행복한 삶 주일 신앙강좌에 꼭 오셔서 다시 복음을 배우세요. 믿음을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세요. 영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더욱 깨어 기도하며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구원이 아니도록 믿음과 삶의 열매를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땅의 것만을 추구하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고 해도 땅의 것에 함몰되어 하늘의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주어진 자리에서 소명을 갖고 살아가십시오. 이웃을 사랑하고 복을 나누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 바로 그날! 영광과 기쁨 가운데서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실 때, 만일 오늘 밤이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날이라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승천하신 예수님은 심판을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잘 살아오셨겠지만, 한 번 우리의 삶을 다시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게 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 사도신경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길 원합니다.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얻을까? 보다 무엇을 해야 할까?’를 더 고민하며 이 혼탁한 시대에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복음의 능력을 주시옵소서. 깨어서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바로 설 준비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불만족으로 교회가 세상의 소망임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설 준비를 하며 살아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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