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다시 보는 사도신경➅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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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3
오늘 말씀은 김구 선생님이 남북회담을 위해 38선을 넘으며 지은 시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행여 그 걸음
아무렇게나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초행길인데 함박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마침 눈앞에 나보다 먼저 간 한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는 거예요. 그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지만 막상 발자국을 따라가려고 하니까 또다시 걱정이 앞섭니다. ‘이 발자국이 정말 맞는 길로 인도하는 발자국일까? 혹시 이 발자국의 주인도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안 될 텐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흔히 우리의 인생을 ‘길’로 표현하곤 합니다. 인생길은 앞을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죠. 미지의 길을 걷다 보니 우리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참 많지 않습니까? 자식을 못 나아도 걱정, 나아도 걱정, 커가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취업을 해도 걱정, 못해도 걱정, 자녀가 결혼을 해도 걱정, 못해도 걱정 이게 우리 모습 아닙니까? 가보지를 않았으니 답답하고 염려만 쌓이는 거죠.
그런데 성경은 이런 미지의 인생길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간 발자국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는데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16절),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18절),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25절)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특별한 직분을 맡은 몇몇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려 주시는 것이죠. 이 땅에서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도와줍니다.
지난 5주간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이제 성령에 대하여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셨고,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께서는 이렇게 성자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성령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며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없고 힘도 없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와 은혜로 구원을 선물처럼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선물이 성자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결코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와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거룩한 불만족을 갖고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사명을 찾게 됩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매 주일 드리는 예배가 그냥 눈도장 찍고 돌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 힘을 얻고 소망을 품게 됩니다.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고, 제자들에게는 그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령님은 지금도 모든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서 함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이 질문을 받는 순간 무슨 생각이 먼저 드십니까? 혹시 한숨부터 쉬게 되지 않으신가요?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성령님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게 있는데요. 성령님을 어떤 에너지의 근원이나 힘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뭔가 특별한 힘을 주는 존재라고 여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상한 기도원 같은 곳에 가면 강사 목사님이 (목소리) “성령 받아라” 하면서 뭔가를 던져 주는 흉내를 내면, 모인 사람들이 받아먹는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안 해 보셨어요?)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요한복음 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는데요. 이것은 성령님과 예수님이 동등하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땅값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 5:3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거 아주 무시무시한 장면 아닙니까? 사도들이 가르치던 예루살렘교회에서 한 부부가 밭을 팔아서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자기들이 가지고 나머지만 바친 거예요. 이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문제는 바친 헌금이 밭을 팔고 전부인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베드로는 분명히 그들이 “성령을 속였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4절을 보면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데요. 사도행전 5:4b
4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성령님을 속였다고 했다가 다시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면 처음부터 성령님이 계셨음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데요. 성경의 가장 첫 페이지인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1:1-2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 즉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 104편 3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04:30
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자신이 큰 죄를 범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편 51:11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성령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는 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구약에서도 성령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이토록 분명하게 전해지고 있는가 하면, 신약에 와서는 더욱 명확하고 광범위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떠나시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는데요. 요한복음 14:25-26 합독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은 곧 떠나시겠지만,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하실 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7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자신이 떠나간 후에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곧 오실 성령님에 대해 예고하셨던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제 내가 떠나고 나면 성령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가르치셨고, 사도행전에서는 땅끝까지 이르는 성령의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기독교 박해지수가 가장 높은 북한과 중국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역시 사도 요한이 기록했지만, 사실은 성령님께서 그 당시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교회에 보내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마다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권하는 것이죠.
이렇듯 신약성경 전체가 성령에 대한 가르침으로 충만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에 대해 그렇게 짧게 고백하고 있는데, 성령의 역사가 워낙 크다 보니 이 짧은 시간에 성령님에 대한 교훈을 다 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제가 설교 본문을 성경의 어느 구절로 할 것인가를 두고도 고민이 많이 되었을 정도였거든요.
그렇게 고민스러운 마음으로 오래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2:13 합독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것 첫 번째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사역인데요.
본문 말씀에는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린도전서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인데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을 시인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믿게 하시므로 죄로 죽었던 우리 영혼을 살리셔서 새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약에서 ‘성령’이란 단어가 ‘루아흐’인데, 부는 ‘바람’이라는 뜻도 있고, 성령이란 뜻도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 ‘루아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자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가장 큰 역사는 죽어 있던 것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은 철저하게 절망과 죽음의 나락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의 황폐함 가운데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인도하셔서 환상을 보게 하시는데요. 에스겔 37:4-5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에스겔이 선포했을 때, 마른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더니 뼈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면서 사람의 형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모양에 불과했는데, 10절 말씀을 보니까요. 에스겔 37:10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생기가 들어가니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죽어서 마른 뼈다귀와 같은 인생에 생기가 들어오고 나니까 살아 움직이며 강력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생명’과 연관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종교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지식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예수님께 찾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요?”
그러자 주님께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라고 대답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니고데모에게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7-8 합독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어느 목사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요. 아들을 참 좋아하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유독 ‘교회 가는 것’을 싫어했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심방을 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던지, 아니면 밖에 나가서 들어오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갑자기 아들을 불러서 목사님께 세례를 받고 싶다고 부탁을 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병상에서 세례를 받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러시면서 자기는 먼저 천국에 가니 천국에서 자녀들을 보자고 인사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세례를 집례한 목사님도 가족도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생명’에 대해서는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 두 번째는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13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몸이 되었고….
이 말씀에 보니까, 초대교회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른 민족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게다가, 자유인이나 헬라인이나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즉, 성령께서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된 공동체를 깨려는 그 어떤 시도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있는데요.
바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공동체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우리가 잘 아는 ‘지체의 비유’가 나오는데요. 그 결론이 이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 합독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요. 당시에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는 엄청난 선언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전에는 다른 민족, 다른 신분, 다른 인종과 다른 세대였는데 성령님으로 인해 한 교회로 부르셨다는 고백 아닙니까?
이런 신앙고백은 초대교회에 엄청난 폭발력을 가져왔습니다. 그동안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수지간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2장 1~8절까지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이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여 사람들에게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큰 무리가 각자 자기의 언어로 알아듣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지체들이 하나 되지 못한다면,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활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삶의 규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 되지 못하면서 우리가 성령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부목사로 있었던 새밭교회 권사님 한 분이 계세요. 이분이 미국으로 이민 가신지 지 꽤 오래되셨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분을 말로만 들었지, 사실 잘 모르는 분이에요.
그런데 이분이 작년 10월에 건강검진을 위해 12년 만에 한국에 나오신 거예요. 모처럼 고국에 오셨으니 “권사님,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하고 그 권사님 페이스북에 제가 댓글을 남겼는데, 우리 교회를 꼭 한 번 오시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12년 만에 한국에 오셨으면 만나야 할 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저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정말 수요예배 때 새밭교회 권사님 한 분과 찾아오신 겁니다.
우리 교회 수요예배가 지하 소예배실에서 드리잖아요? 마침 이분이 예배를 참석했다가 계단을 올라가는데, 관절이 안 좋으신지 좀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권사님,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좀 불편하시죠?”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굉장히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가셨거든요.
그러고 그분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셨는데, 바로 며칠 전이에요. 한국시간으로는 밤늦은 시간인데 그 권사님에게 메시지가 하나 도착을 한 거예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제가 하름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갑자기 지하까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계단이 유난히 높고 길게 느껴졌습니다. 연로하신 분들의 편의를 위해 마음을 모아 더 기도하겠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늘 강건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런 연락이 왔습니다. 아니 여러분, 지금 한국에 계시는 분도 아니고 미국에서 12년 넘게 살고 계시는 분이 먼 고국 땅 본인 교회도 아니에요. 남의 교회 지하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뭐가 그리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저랑은 일면식도 없는 분이 굳이 찾아오셔서 본인이 계단을 오르면서 어르신들이 불편하시겠다는 생각이 왜 먼저 들었겠습니까? 왜 다른 교회 기도가 나올까요? 저는 이것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상황에 놓여 있지만, 성령님께서 한 교회로 부르신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그 권사님 개인 ‘나’의 하나님이 아닌 먼 고국 땅의 단지 한 번 방문해서 다녀갔을 뿐인데, 그 교회를 위해 기도가 나오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심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성령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영이십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 예수의 증인들이 태동하였다고 했는데, 그 예수의 증인들이 곧 교회이고 그들이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영이시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이 곧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러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이런 공동체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말씀인데요. 이 말씀에는 “교회의 덕”이라는 문구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4:4-5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2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교회를 세우기 위함인데요. 특별히 바울은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십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합니다.
가장 큰 은사, 즉 모든 성도들이 가장 사모해야 할 은사로 사랑을 강조하는 것도, 사랑이야말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최고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소심해서요. 웬만하면 화를 잘 안 내는데요. 가끔 목사로서 가장 화가 날 때가 있는데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은밀히 침투해서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이죠.
그런가하면 가장 안타까운 분이 누구냐면 교회를 포기하려는 분들입니다. 저는 ‘가나안 성도’같은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교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분이 포기하게끔 만들어진 상황이 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오죽하면 그럴까?’ 마음 한구석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교회는 사람을 많이 모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실망스러운 일이 많습니다. 심지어 목회자에게도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의 중심 주제가 바로 ‘교회’이거든요. 그래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그 교회를 “힘써 지키라”라고 권면하는데 저는 이 말씀이요. “힘써 버티라”라는 말로 들리더라고요. 왜냐하면 버티는 것도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실망을 해도 교회 안에서 실망해야 합니다. 낙심을 해도 교회 안에서 낙심해야 합니다. 비록 실망하고 낙심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버티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처음에 들은 질문에 다시 답을 해야 할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대답이 어려우시다면 이렇게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신다면 이미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성령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못해도 특별한 은사가 없는 것 같아도 성령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그 자리에 있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목마르면 그 자리에 남아 있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은 가만히 있는데 감 떨어지듯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교회, 성령 충만한 남편, 성령 충만한 아내와 자녀가 되려면 우리의 삶을 성령의 빛 가운데 드러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인생의 갈증은 예수님을 만나야 해소될 수 있고, 성도의 갈증은 교회 안에서 성령님으로 채워져야 해소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마다 그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이제 주님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교회를 함께 세워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찬송가 183장 (빈 들에 마른 풀같이)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실 때, 혹시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영혼인 분들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사모하세요.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고 갈망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인 갈증은 성령으로만 채워져야 합니다. 또 하나 ‘주님, 제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령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믿사오며” 사도신경의 이 짧은 문장이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새 생명을 얻었고, 이제 주님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교회를 함께 세워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충만함을 갈망하게 하시고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시옵소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교회를 세워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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