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회를 믿습니다

다시 보는 사도신경➆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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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20-22
80년대 히트했던 유행가 중에 가수 이광조 씨가 부른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다들 아시죠? (잠깐 부르기) 날 잡아서 제대로 한 번 불러야 하는데…. 아무튼 이런 노래죠.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있는 것처럼, 목사인 저에게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교회’입니다.
노래의 가사처럼 저에게 있어서 교회는 늘 가까이 있지만, 때로는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와도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 느껴지는 쾌감처럼 저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바로 교회이기도 하죠.
언젠가 한 청년이 저에게 ‘목사님,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라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니까 쉽게 답을 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제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잘 알고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는 사람인데, 오히려 잘 알아서 쉽게 대답을 못했던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에게 “야구가 뭡니까?”라고 물었는데, “야구? 저쪽에서 폼 잡고 공 던져서 이쪽에 방망이 들고 치고, 담장 넘어가면 와! 그러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대답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정말 야구를 아는 사람일까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평생 야구와 함께 살아온 한 어느 감독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글쎄, 야구가 뭘까요?” 오히려 되물을지도 모릅니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잘 알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죠. 저에게 교회가 꼭 그렇게 쉽게 답하지 못할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의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이 고백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과연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회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성령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많이 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나는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왠지 생소하고 낯설기만 하지 않습니까?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이 고백은 성령님에 대한 고백 다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고백 다음에는 성도 간의 교제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위치에 유념해야 하는데요. 교회에 관한 신앙은 성령님에 대한 신앙의 일부분이라는 뜻 아닙니까?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교회를 이끄시는 성령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교회‘라고 하면 건물로서의 교회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교회’라는 이름 안에 모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이 더 본질적이기 때문이죠. 여러분들에게 그림 하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화면-오베르교회)
이 그림을 처음 보셨더라도 그림의 화풍을 보시면 누가 그린 것인지 금방 아실 겁니다.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인 <오베르교회>입니다. 고흐 특유의 강렬한 붓터치와 색감이 돋보이는 그런 작품이죠. 이 오베르교회는 지금도 실제 존재하는 교회로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견고한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잘 보세요. 교회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화려하게 대비된 색깔들은 더 강렬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리고 하늘은 너무 짙고 푸르러서 무거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어떤 유기체와 같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 또한 오늘 본문을 통해 교회를 하나의 살아있는 몸으로 비유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믿는다‘ 라고 고백할 때는 건물로서의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생명이 있는 공동체와 그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그냥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이 고백 앞에 시대적인 질문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는 과연 어떤 곳입니까?‘ ’어떤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가 될까요?‘ ’오늘날의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임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반 일리히‘라는 교육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시대에 학교는 많은데 교육이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고 학생은 많은데 제자가 없고 집은 많은데 가정이 없고 교회는 많은데 성전이 없고 목사는 많은데 목자가 없고 교인은 많은데 성도가 없는 시대이다.”
여러분,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무언가 형태는 많은데 그 본체가 없다는 말 아닙니까? 형식은 있는데 본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세군의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는 교회의 가장 큰 위협은 성령이 없는 신앙,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죄사함, 거듭남이 없는 구원, 지옥이 없는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앙과 그 본질이 위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도신경에는 그 본질을 ’거룩함‘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 거룩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카데쉬‘인데, ’자르다‘는 뜻입니다. 즉 거룩함은 잘라서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구별되다라고 하는데요. 죄와 구별되고 세상과 구별되고 악한 것과 구별되는 것 이것이 거룩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자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 백성들도 거룩하길 원하신 것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가 어떻게 거룩할 수 있을까요? 보통 거룩하다고 하면, 뭔가 조용하고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고흐가 그린 오베르교회처럼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예배당에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일까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고 뭔가 기품있는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거룩한 교회일까요?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 모세가 광야에서 40년간 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던 중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게 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죠. 출애굽기 3:5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지금 모세가 밟고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거룩한 땅일까요? 원래 처음부터 거룩하게 구별된 땅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사람 아닙니까? 지금 밟고 있는 땅도 수도 없이 신을 신고 밟고 다녔을 것입니다. 그럼 왜 그때는 거룩한 땅이 아니었고 지금은 거룩한 땅이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곳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거룩해진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있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라는 말 아닙니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사람,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교회가 거룩할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교회인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방법과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된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가치관대로, 즉 성경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워낙 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다니엘과 같이 세상과 구별되어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남성잡지인 <에스콰이어>의 편집자인 제이콥스는 미국 뉴욕에 사는 유대인이자 불가지론자입니다. 불가지론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제이콥스가 한 가지를 결심하는데요.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1년을 살아보자‘ 정말로 그렇게 1년을 산 뒤에요. 「미친 척하고 성경대로 살아본 1년」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분이요. 정말 진지하게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먼저 16권의 성경을 구입한 뒤에 한 달 동안 하루 5시간씩 집중해서 성경을 읽고 그러면서 실천해야 할 말씀을 일일이 찾아서 컴퓨터에 입력을 했대요. 그렇게 정리한 실천 목록이 무려 7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또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100권이 넘는 참고 도서를 읽고, 영적 자문위원단까지 구해서 도움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뒤에 드디어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는 날 아침부터 문제가 발생한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으려고 하는데 옷부터 말썽입니다. 레위기 19장에는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폴리에스테르와 면 혼방 티셔츠부터 벗고 자기 옷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혼방이 아닌 옷이 거의 없잖아요? 그런데도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세세하게 지키면서 1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이콥스는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아무도 신호를 지키지 않는 맨해튼 거리에서 꿋꿋이 신호등을 지키고, 거짓말을 안 하려고 노력하고, 수입의 십일조를 아시아 지역의 고아들을 위한 자선단체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일에 감사하기 시작한 거예요. 전에는 특별한 일에만 감사했는데, 지금은 모든 일상에 감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 말씀대로 살자는 것은 제이콥스처럼 문자 그대로 지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엄숙하고 장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잘라낼 것을 잘라내는 사람입니다. 악한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 땅에서 보여야 할 거룩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교회에 대한 고백은 ’공교회‘입니다. ‘공교회‘라는 말이 매우 낯설기만 하실 것입니다. 공교회를 영어로 ’Catholic Church’(가톨릭교회)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 로마에 천주교 가톨릭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Catholic’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공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일까요? 교회는 교회인데 세상의 어떤 차이나 차별을 넘어서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조직과 모임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조직에 들어가려면 특별한 자격 조건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상류층을 중심으로 회원제로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특별한 자격 조건이 없습니다. 부요한지, 가난한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지,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는 각 사람의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식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사람을 위한 예식이며 공동체 앞에 그렇게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찬식 또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살과 피를 통해 한 몸 공동체임을 믿는 거룩한 교제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선민사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자신들만 구원받는 백성이라고 여겨서 자기 민족 외에는 다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은 불결한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것 아닙니까?
이런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완전히 깨버린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허무셨다고 말씀하고 있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들이 나누어 놓은 잘못된 담을 헐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한 것 아닙니까? 교회에서는 어떤 차별이나 구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직업 때문에 더 좋은 대우를 받거나, 반대로 더 나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출신 지역으로 아웅다웅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공교회는 교회 안에서의 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열려있는 보편적인 교회, 우주적인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사도신경에서의 ’Catholic Church’를 ‘Universal Church’(세계적인 교회)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는 교회의 현실이 이 고백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거룩하지도 보편적이지도 못하는 교회를 향하여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이 사도신경의 고백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의미로 고백해야 하는 것일까요? 정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교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고백이 틀리지 않았고 이 시대의 꼭 필요한 매우 중요한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보편적인 교회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를 쓴 사도 바울은 그가 들렀던 곳마다 교회를 세웠던 사람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나 초대교회의 모든 사도들은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디자인이며 꿈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원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해서요. ‘불러내다, 뽑아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따로 세운 사람들,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뽑아내서 하나님께로 나오게 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에 함께 있는 백성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신앙고백 할 때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하름교회가 ‘하늘 아래 아름다운 교회’라는 말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아름다운 교회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교회에 대한 중요성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믿는 자들 가운데도 꼭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됐지 꼭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필요는 없다고 강하게 도전하는 분들이시죠.
어쩌면 지상의 교회에 실망해서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귀찮은 것이 싫고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모습은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신 디자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약 교회가 단순히 건물을 의미하는 거라면 굳이 교회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부르셔서 세우신 공적인 모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교회를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2:20-22 합독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디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퉁잇돌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과 연결된 건물로서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져가는 것입니다. 함께 지어져 가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교회로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한 지체로 서 있다는 것을 따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세워가는 보편적인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처음 보았던 고흐의 그림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림)
이 그림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두 갈래의 갈림길이 보이고 그 갈림길은 교회의 정문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즉 이 그림은 고흐가 교회의 뒤쪽을 바깥에서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듯이 우리는 이 그림 속의 여인처럼 각각 다른 마음으로 교회를 향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록 고흐가 교회 밖으로 나와 하나의 건물로서의 교회를 그렸지만,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면 어떨까요?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저에게 질문했던 그 청년의 질문에 이제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해 저는 단 한 글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꿈’ 교회는 꿈입니다. 교회를 안다는 것은 벅차오르는 가슴으로 교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벅차오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입니다. 대형 교회가 큰 교회가 아니라 교회다운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교회라면 큰 덩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만 찌운 교회는 빨리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하름교회가 살만 찌우려는 비만인 교회가 아니라 고흐의 그림 속 교회처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되어 성령의 역사가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Universal Church’ 세계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마다 모두 한 몸, 하나의 교회 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등 개 교회가 있었고 그들 각각의 교회의 모습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교회란 ‘전 세계적인, 한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이란 뜻입니다. 아프리카나 김경미 선교사님이 계시는 인도 땅에서 선교사님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세워진 교회와 우리 하름교회가 하나의 교회, 같은 주님을 섬기는 한 교회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에 벽돌 한 장씩을 갖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그 마음의 벽돌로 어떤 분은 나와 하나님 사이를, 나와 다른 이들 사이를, 또 교회와 세상을 막는 담장을 쌓는 벽돌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그 벽돌을 나와 하나님 사이를, 나와 너 사이를, 교회와 세상을, 우리 하름교회와 세계 교회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드는 벽돌로도 사용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벽돌은 어떻게 사용되길 원하십니까? 우리 하름교회가 진정으로 하늘아래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위해 오늘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 대한 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런 말씀 드렸죠? 꿈이 없는 교회가 가장 불쌍한 교회라고요.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공동체이며 동시에 세계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계속 그 거룩성을 지켜가면서 또한 세계 교회를 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벽돌로 다리를 만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디 우리 하름교회가 이 하계동 땅에 성령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야긴과 보아스로 더욱 강건하여져서 세계 교회 사역에 벽돌 하나를 올려놓는 마음으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이런 교회되게 하소서(소리엘)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실 때, 주님, 우리 하름교회가 교회다운 교회 되길 원합니다.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세상과 구별되어 한 몸 이루는 거룩한 교회 되길 원합니다. 더불어 세계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공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작은 벽돌 하나로도 다리를 놓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꿈을 갖게 하옵소서. 우리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주님, 이 고백이 하늘아래 아름다운 교회인 우리 하름의 모든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때로는 세상을 향해 다리를 놓다보면 손해볼 때도 있고 상처 받을 때도 있지만, 주님 우리 하름교회가 이 하계동 땅을 거룩으로 물들일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구별 되어지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길 원합니다. 더불어 그 고흐가 그린 그림 속 교회처럼 갈라졌던 두 길이 하나로 모아지고 교회가 꿈틀거리고 살아있는 것처럼 건물만 남는 교회가 아니라, 야긴과 보아스의 하나님과 함께 역동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비록 작은 벽돌하나 같지만,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서 다리를 놓는 섬김과 헌신이 기쁨이 되어 열매 맺는 우리 하름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거룩한 교회 공동체로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길 다짐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위에, 김경미 선교사님의 귀한 선교 사역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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