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다시 보는 사도신경➇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5 views
Notes
Transcript
에베소서 4:16
다들 아시다시피 ‘교회(敎會)’라는 한자어는 ‘가르칠 교(敎)’를 사용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원도 산골 예수원에서 한국 교회를 향하여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던지시던 대천덕 신부께서는 교회의 ‘교’자를 가르칠 교(敎)‘가 아닌 ’사귈 교(交)‘로 바꾸어서 부르자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교회는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이기도 하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귐의 모임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신약의 원어로는 ’에클레시아‘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바깥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교회에 대해 왜 ’가르칠 교(敎)‘를 썼을까요? 신약 원어에도 없는,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명칭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의 시대상을 비추어 짐작해보면, 배움이 적었던 시절, 교회에서 주로 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사는 가르치고, 성도들은 배우고, 이게 당시 교회 생활의 전부 아니었습니까? 또한 배움을 중요시하는 우리 민족의 특성과 결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천덕 신부께서는 왜 사귈 교(交) 교회를 주장하셨을까요? 가르침과 배움 속에 신앙 지식은 더해졌지만, 사랑이 식어진 현신을 안타까워하면서, 초대 교회가 보여주었던 공동체성을 회복하자는 취지 아니었을까요?
그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봐야할 사도신경의 고백이 대천덕 신부님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성도 사이에는 따뜻한 교제와 사귐이 있어야 하고, 그게 진정한 교회라는 고백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도신경의 이 마지막 부분을 읽고 또 읽으면서 저어게 어떤 깨달음을 주시는 거예요. 제가 사도신경의 일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자! 이 고백을 이렇게 바꿔보면 좋겠습니다. ‘성령을 믿으면 거룩한 공교회가 되는 것, 성도가 교제하는 것, 죄를 용서받는 것,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같은 급의 이야기구나’라고 말이죠.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성도의 교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앙의 아주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 그거 만나서 함께 차를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친교를 나누는 시간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제 성도의 교제를 신앙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 성도의 교제를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과 같은 급으로 고백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신앙고백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룩한 공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본질적으로 볼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자들이 예수님께 접붙임이 되어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맺는 교제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같은 교회 사람들끼리 모여 차 마시며 다과를 나누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통은 그런 종류의 인간적인 교제가 아니라 훨씬 더 큰 개념입니다. 바로 예수님과의 신비한 연합이 전제되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우리와 같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만,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부분을 ‘땅에 있는 성도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인들과의 교제’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교제’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아마 한 번쯤은 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코이노니아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인데요. 그래서 ‘친교, 사귐, 교제, 참여, 연보’ 등 굉장히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단어가 바로 이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런데 이 ‘코이노니아’라는 명사에 동사형이 있습니다. 바로 ‘코이노네오’라고 하는데, 이 동사의 뜻이 뭐냐면, ‘공동체를 형성하다, 동업자가 되다, 공유하다, 참여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코이노네오’는 관계를 맺는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사이에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제 즉 코이노니아가 있으려면 우선 우리 각자가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없으면 그분의 백성인 다른 사람과도 진정성이 있는 사랑의 관계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5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자막)
문 55. “성도의 교제”를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첫째, 신자는 모두 또한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신자는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는 ‘거룩함을 입은 무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잘라낼 것은 잘라낸 구별된 무리들입니다. 구별되어 하나님께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죠.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는 순간, 이미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 아닙니까? 우리를 ‘거룩한 사람’ 즉 성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이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우선시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서야 하는 것이고요. 또한 나와 너, 우리의 관계가 바로 만들어져가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어서 관계를 끊어 버리거나 외면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 있는 벽돌 한 장을 가지고 서로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나와 너, 우리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의 교제는 먼저 예수님과의 신비한 연합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고 하나님과의 가장 큰 교제의 시간이 바로 예배인 것이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고 특히 성찬을 통해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한 가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은혜와 은사를 나누는 섬김을 통해 교제하게 됩니다. 성실한 예배,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일, 물질을 구제하며 나누는 일 등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지속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동호회나 친목 모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교회의 목적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그리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것, 성도의 교제는 바로 이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4장 16절의 말씀은 여러 측면에서 성도의 교제에 대한 핵심가치를 깨닫게 해 주는데요. 에베소서 4:16 합독
16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언뜻 읽으면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장의 구조도 복잡한 것 같고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그러나 이 한 구절 안에 공동체에 대한 정말 중요한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먼저 에베소서 말씀은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연결된 공동체’라고 설명합니다. ‘그에게서’ 즉 그리스도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즉 머리 되신 그분과 연결되고 또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된 공동체라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이 공동체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리더는 예수님 한 분이시라는 거죠. 담임목사도 아니고 당회도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성품, 그분의 말씀, 그분의 가르침과 가치관으로 주님의 공동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주님의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공동체는 예수님에게 연결되어 세워져가는 동시에 예수님께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성도들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서로를 의지하고 돕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서로를 의지하고 돕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는 공동체라고 해도 그 안에 속해 있는 각각의 사람이 보이겠지만, 주님께는 이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로 보입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고 또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 끝에서만 볼 수 있는 세쿼이아 나무라는 세계적인 거목이 있습니다. 이 나무는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그 위용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어마어마한데요. (사진-3장)
가장 큰 나무는 2천 5백 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무의 길이가 높이가 약 84m 건물로 따지면 25층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높이입니다. 여러분, 25층 정도 되는 나무가 서 있으려면 뿌리가 얼마나 깊고 튼튼해야 하겠습니까? 그 크기만 보자면 뿌리도 엄청 깊게 내리고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나무를 연구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 나무의 뿌리가 깊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뿌리가 깊지 않은데 어떻게 바람이 많이 부는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수백 년에 걸쳐 그토록 거대한 나무로 자랄 수가 있었을까요? 비밀은 뿌리의 모양에 있다고 하는데요. 깊지 않은 그 뿌리들이 서로 다 엉켜 있기 때문에 수백 년간 태풍에도 끄떡없었다고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세쿼이아 나무처럼 거대한 나무는 절대로 홀로 서 있을 수가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바람이 많고 지진이 많은 지역에서는 더더욱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서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서로 엉켜 함께 서 있는 것이죠. 서로 엉켜있어서 서로를 지지해주고 함께 의지하는 것, 거기서 바로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서 4:12 합독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쉽게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 연결해 주셨습니다. 서로 엉키게 해 주셔서 세상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 흔들리지 않는 교회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같이 기도하고, 같이 예배하고, 같이 말씀을 보고, 같이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주님의 공동체로 서게 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귀가 한 사람은 무너뜨려도 기도로 묶여 있는 수십 명, 수백 명의 공동체는 흔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와 장년 세대가 기도 짝꿍으로 묶이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견고한 뿌리를 먼저 내린 장년 세대가 아직 뿌리가 약한 다음 세대와 서로 엉켜서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흔들리고 넘어지려고 할 때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공동체의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로서 제 목표는요. 적어도 우리 하름교회 안에서는 혼자 우는 분이 계시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은 함께 웃고 즐거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함께 웃을 수도 즐거워할 수도 없는 분이 계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에서의 진정한 사귐은 바로 눈물의 사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흘리는 눈물, 성도의 아픔을 보면서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진정한 사귐의 눈물인 것이죠.
우리 하름의 성도들 모두가 서로 엉키면서 함께 의지할 때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게 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공동체를 세우는 또 하나의 원동력은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함께 자라가는 것, 여기서 공동체의 원동력이 나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해석해 보니까 “모든 파트가 자기 일을 함으로써(as each part does its work)”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파트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면서 자라는 공동체라는 뜻 아닙니까? 몸이 건강해지려면 각 파트가 건강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몸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내 역할을 감당해야 나도 살고 이 공동체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각 지체의 역할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움직이려면 각 사람들이 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려면 인도자와 설교자가 필요하고, 찬양대가 있어야 하고, 봉사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용주의적으로만 이해하면 신앙고백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만 주신 말씀이라면 굳이 사도신경에 담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용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던 계획입니다. 에베소서 2:10 합독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들 아닙니까?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선한 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공동체로 일어나게 하시려고 처음부터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며,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지체라면,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역할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 각자 할 일이 있기 때문이죠. 교회에 목회자를 허락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4:11-12 합독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러분, 저 같은 목회자가 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맡기기 위함 아닙니까?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믿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를 지탱해주고 세워주는 원동력이 저 같은 목회자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성도의 교제에 대해 핵심적인 가치 한 가지를 말하는데요. 오늘 본문 마지막 즈음을 보세요. 16절 후반부
“....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사랑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되라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에게 달란트도 있고, 열정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열정도 많고 은사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 때문에 망가지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죠.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오래 참지 못하고,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준다고 하는데 덮어주지 못해서 망가진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한일서 4장에는 사랑에 대한 놀라운 말씀이 있는데요. 요한일서 4:12 합독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다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미완성인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미완성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만세 전부터 택하시고 그분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주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부족한 사랑입니까?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죄로 가득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이 어떻게 미완성입니까?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가지고 계신 사랑에 대한 계획이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릴레이 경주와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시작하셨지만, 예수님께서 다음 바통을 잡고 뛰셔야만 했고 그 뒤를 성령께서 바통을 잡고 또 뛰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 한 번 더 바통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바통을 받아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달려감으로써 하나님이 계획하신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교회는 사랑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지탱해 주는 것은 열정이나 은사가 아닙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은 단지 고백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나는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는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미들이 우리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의 적용점을 드리고 싶은데요. 첫 번째는 성도의 교제는 함께 행하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셔서 “너희들 나를 위해서 좀 기도해다오”라고 부탁을 하시는데요. 그런데 이 세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고 세 번씩이나 오셨는데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참 한심한 제자들 아닙니까? 웬만한 스승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애들아,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히실 때도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굳이 갈릴리호숫가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데리고 또 함께 가십니다.
여러분, 나와 함께 한 교회를 섬기고 같은 목장이나 신도회에서 활동하는 분이 내 수준에 못 미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교제한다는 것은 그들이 모두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목회의 모터가 “함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입니다. 혼자 빨리 가는 것보다 함께 천천히 가는 게 훨씬 건강하고 멀리 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도의 교제는 함께 사귀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 사귀는 가운데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를 가든지 반드시 그 교회의 소그룹에 참여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일날 예배 한 번 드린 것으로는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그 교제가 성도들 간의 교제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당신의 교회에 예배에 나오는 숫자보다 소그룹에 나오는 숫자가 절반에 못 미친다면 당신의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소비자 문화센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소비자문화센터와 공동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소비자 문화센터에도 사람들은 많이 모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에게 필요한 취미나 기술을 배우러 가는 것 아닙니까?
교회도 기도가 부족하면 기도학교, 상담이 부족하면 상담학교에 등록해서 강의를 듣는다면 점점 교회가 소비자문화센터로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강의도 필요하지만, 결국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지 만나지 않는지가 소그룹이 살아있는 공동체와 소비자문화센터를 나누는 기준이 될 것이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가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까? 소비자문화센터가 되길 원하십니까?
인격과 인격이 만나지 않으면 좋은 강의 듣고 깔끔하게 집에 와서 개인의 경건에 힘쓰면 됩니다. 그러나 인격과 인격이 만나게 되면 그리 깔끔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서 사람이 성장하려면 사랑받을 수 없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랑으로 성장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죠.
목장 모임이나 양육과 훈련, 신도회 모임 같은 소그룹 모임을 통해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저 사람을 통해 확인하게 되고, 내가 주님께 받지 못한 것을 저 사람을 통해 채움으로써 역시 서로가 함께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에 있었던 교회에서 목장 모임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 목장 모임에 가야 할 이유를 모르시겠다는 거예요. 본인이 볼 때는 쓸데없는 얘기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을 드렸어요. “성도님, 그러면 가셔서 성도님이 좋은 말씀을 나누어 주세요. 주일에 받은 은혜를 나누어 주시고 부족한 부분은 이렇게 해보자고 격려해 주시면 되잖아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이번 3월부터 매달 마지막 주일은 점심 드시고 목장별로 모이는 목장주일로 지키게 될 텐데요. 목장섬김이들이 어디서 몇 시에 모이자고 연락을 주시면 한 달에 한 번은 같이 모여 주세요. 조금 나랑 안 맞는 것 같고 어색하셔도 가셔서 다른 분들 신앙의 여정도 들어보시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시간을 가져 보세요. 인격과 인격이 만나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누려 보세요. 성도의 교제라는 바통을 이어받아 그 역할을 감당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저는 교회를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아래서 탄생한 가족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시길,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것처럼 그때부터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셔야 정성껏 모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십자가 아래에서 가족이 탄생한 것입니다.
교회는 때로는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고,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조차도 주님이 피 흘려 구원하신 주님의 영적 가족입니다. 나도 못나고 너도 부족하지만, 주님 때문에 서로 엉켜있어서 서로를 인정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곳, 이것이 바로 교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하름교회가 바로 그런 성도의 교제가 넘치는 하늘 아래 아름다운 교회로 더욱 세워져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후 찬양 : 이런 교회되게 하소서
❙합심기도
이제 우리 함께 기도하실 때, 주님, 우리 하름교회가 십자가 아래에서 탄생한 가족이길 원합니다. 함께 행하게 하시고 함께 사귀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영적인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배에 참여한 나부터가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합심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단지 친한 교우들끼리 모여서 다과 나누면서 친분 쌓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고 그 온전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말씀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 하름교회가 사랑이 우리 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양의 가사처럼 사랑의 불꽃이 활짝 피어나 날마다 사랑에 빠지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함께 행하고 함께 사귀는 십자가 아래에서 탄생한 영적 가족공동체로서 더욱 서로 엉켜져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함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성장해 가길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