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

다시 보는 사도신경➈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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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7
사도신경의 마지막 세 개의 고백은 사실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믿는 것을 고백했지만, 이제 마지막 세 번의 고백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 즉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아시다시피 ‘죄 사함’이라는 것은, 죄에 대해 용서받고 씻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복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젠가 우리의 인생을 셈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텐데, 우리의 죄가 씻음받지 못한 상태로 그 앞에 선다면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거듭하여 명확하게 밝혀주고 계시는데요.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1장 18절 말씀은 죄악 가운데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1:18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정말 가슴 뛰게 하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사야 53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53:4-6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한 사람을 통해서 이뤄질 것이며,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받는 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아시다시피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온 자 아니었습니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온 자인데, 그는 예수님을 처음 본 날 이렇게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1:29 합독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바로 그분이 하나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즉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의 이 같은 사명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며 사셨을까요? 물론 그렇죠.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28 합독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제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예수님은 ‘이것을 기념하라’ 하시며 교훈을 주시는데요. 떡을 떼시며 이 떡은 많은 사람을 위해 찢기는 자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포도주잔을 돌리시며, 이 잔은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해 흘리는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흘리게 될 자신의 피가 죄 사함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초대 교회에 전한 말씀 안에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입었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요. 고린도후서 5:21 새번역
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모이게 된 것이고요. 우리의 죄는 그분에게로 옮겨지고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복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1장은 죄 사함에 관련하여 굉장히 짧지만, 영광스러운 말씀이 담겨져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7 합독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먼저 ‘속량’이라는 단어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이 말은 ‘종의 신분에서 풀려났다’라는 뜻인데요. 우리가 속량을 받는다는 말은 곧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속량은 곧 죄사함을 뜻하는 것이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심 덕분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노력과 업적이 아닙니다. 찬송가 544장 2절 가사처럼 “힘써도,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럼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을까요? 왜 죄 없는 분을 피 흘리게 하셨을까요? 그것을 7절 전반부에서 답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너무 많으시기 때문이죠. 왜 날 사랑하시나? 그것에 대한 답은 ‘은혜’입니다. 넘치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사랑이 풍성해서 흘러넘쳐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바로 그 풍성한 은혜 때문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7절을 풀어서 쓰면 이렇게 됩니다. (화면)
“우리는 이미 사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지금도 받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 성경에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늘 죄 사함을 받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언젠가는 죄 사함을 받겠지’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 이미 죄 사함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영어 단어로 죄라고 하는 단어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sin, crime, fault’
이 세 가지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아시나요? 이 ‘crime’이라는 것은 범죄를 이야기합니다. 범법행위를 한 것이죠. ‘fault’라는 것은, 고의적이지 않고 실수로 저지른 잘못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굿윌헌팅’이라는 유명한 영화에 명대사가 있죠.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그래서 ‘crime’이나 ‘fault’는 내가 무엇을 잘못한 어떤 형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죄는 이 ‘crime’이나 ‘fault’가 아니라 ‘sin’ 즉 아주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범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짓는 하나하나의 그런 죄의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여러분, 우리가 이 “죄의 용서함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우리들의 고백 선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오늘 이 영광의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용서함을 받음으로 인하여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저에게 평안이 흐릅니다.” 이 고백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진정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crime’이나 ‘fault’ 같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보이지 않는 ‘sin’, 이 본질적인 죄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죄사함을 받아야 하나?’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면서 죄를 전혀 안 짓고 살 수가 있어? 꼭 모든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고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가 그냥 한번 민망하고 말 사안이라면,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라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이 공소시효 같은 게 있어서 세월 지나면 말소되는 것이라면 성경은 죄를 심각하게 다룰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지속적으로 죄 이야기를 하고, 죄를 중대하게 다루는 이유는, 죄는 우리 삶의 가장 큰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암과 같은 질병을 두려워하지만, 성경은 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제대로 처리가 되지 않은 죄가 있을 때, 죄는 우리에게 정말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병에 걸린 사람을 위해 지붕을 뜯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한 중풍병자를 위해 친구들이 지붕을 뜯어 버립니다. 생각해보면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낸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닌데 친구들은 무례함을 무릎 쓰고 지붕을 뜯게 됩니다. 친구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했는지, 집주인도 별말이 없어요. 질병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만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친구의 몸에서 중풍이라는 질병을 뜯어낼 수 있다면 지붕쯤이야 열 번인 들 못 뜯겠습니까? ‘보상해 주면 되지’ 아마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중한 질병보다 죄에 더 주목하시더라고요. 마가복음 2:5
5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왜 이렇게 말씀하시죠? 사람에게 가장 큰 문제는 질병보다 죄라고 믿으시기 때문 아닙니까? 질병이 가져오는 고통이 너무도 잔인하지만, 죄가 초래할 결과는 더 두렵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음이라는 ‘crime’ 범죄를 저질렀어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율법대로 돌로 쳐서 이 여인을 죽일까요? “자, 이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죄를 바라보는 시각이 뭐예요? 죄가 있느냐, 없느냐? 죄의 유무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들어서 이 여인을 죽일 수 있는 이유는 ‘죄의 크기’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여자는 죄가 있고 그 죄가 내 죄보다 더 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죄의 유무, 죄의 크기에 대해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8:7
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건 굉장히 예상치 못한 말씀 아닙니까? 사람들은 죄의 크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들도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찌르셨어요.
“저 나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너에게도 죄가 있다. 그리고 죄의 크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네 속에도 죄성이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탄과 세상은 자꾸 죄의 크기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네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 죄 자체가 얼마나 두렵고 치명적인 것인지를 망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중풍병이 입에 담기도 두려운 재앙인 것처럼 죄가 우리에게 정말로 심각한 사안이라는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 저나 듣고 계시는 여러분 모두가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풍병 같은 질병은 두렵지만, 나의 죄성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져 버린 채 주님의 치유만을 기대하며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범죄자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죄사함을 고백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믿음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를 짓고 예수님 자신을 죽이는 살인자들을 향하여 정죄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왔던 여인을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할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다 떠나자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죄의 문제를 가지고 이 자리에 나왔는데, 예수님께서 “그래 너는 죄인이야! 너는 좀 벌을 받아야 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네가 죄를 짓고 얼마나 힘들었니? 죄로 인하여 너에게 얼마나 많은 무거운 짐이 있었니? 그 죄로 인하여 네가 얼마나 많은 어둠 속에 있었니? 그런데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아.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마”라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선포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정죄함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소망 가운데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는 삶이 우리들의 삶에서 계속 현재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문을 쓰면서요. 제가 이전과는 다르게 유독 진흙탕에 빠진 바퀴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마음이 영 개운하지 않은 거예요. 이틀 정도 그렇게 마음이 심란하기만 한데, 수요일 저녁과 목요일 새벽에 기도하면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저 역시 제 안에 있는 죄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 했던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로마군인 임을 알게 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저는 주님의 은혜도 알고, 능력도 아는 목사잖아요? 주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 그분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신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지난 한 주간 생각해 보니 저 역시 죄의 크기에 대해서만 따지고 있고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거예요. ‘아니, 나 정도면 됐지’ ‘목사인 내가 아무려면 일반 사람들과 같겠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알려면, 그분이 상대하고 있는 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잘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내게서 씻어내고 싶어 하시는 죄라는 것이 얼마나 사악하고 얼마나 씻어내기 어려운 것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그분의 능력을 알 텐데 제가 그걸 잘 모르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생각해 보세요. 다윗의 진짜 대단함은 그의 물맷돌 던지는 실력이 아니라 바로 골리앗이라는 상대를 제대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거인 골리앗의 거대한 덩치와 괴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싸움에 임할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주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알려면, 그분이 상대하고 있는 죄의 깊이와 넓이,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 얻게 될 치명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우리가 구해야 할 기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가 나에게 얼마나 치명적이고 두려운 존재인지를 알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얼마나 위대하고 거대한 일을 하셨는지를 알게 하소서” 우리에게 이런 통회와 자복의 기도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보면, 맥베스의 부인이 아무도 몰래 임금인 자기 남편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지난 다음 맥베스의 부인이 계속해서 손을 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건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일어난 일이기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 부인은 계속 손을 씻고 있습니다. 양심에 찔린 것이죠. 아무리 그 잘못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자기 양심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 피비린내를 씻어 줄 물이나 향수는 없는 것이냐?”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죄로 말미암아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장면 아닙니까?
죄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쉽게 씻겨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죄라 할지라도 우리의 양심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는데, 죄 씻음 없이 선다는 것은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반드시 죄 씻음을 얻어야 우리에게 소망이 생길 텐데, 문제는 우리의 노력과 방법으로는 도무지 죄악이 씻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길은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우리의 죄를 씻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이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을 통해 또 성경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아직도 죄에 눌려 있거나 망각한 자리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죄에 눌려 있는 모습은 사탄이 더 이상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함정일 뿐입니다. 로마서 8:1-2 합독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된 자들입니다. 해방되었으면 해방된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과 4절을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3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4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죄악에 묶여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해방시켜 주셨어요. 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과는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이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병이 들어 병원에 들어갔으면 병 고침을 받고 병원을 나오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병들어서 병 고침이 필요해서 교회에 들어왔으면 이제 하나님 앞에 고침받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도 사람 사는 곳인데, 죄가 있는 게 당연하지! 물이 너무 깨끗하면 물고기가 못 사는 법이야 목사가 너무 거룩하면 성도들이 부담스러워해. 사람을 보면 낙심하니까 사람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모두 죄인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적어도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죄가 있는 게 당연한 공동체’가 아니라 ‘죄를 죽이는 공동체’, ‘죄를 소멸시키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신앙고백 안에 죄를 죽이고 죄를 소멸시키는 공동체의 힘이 다 담겨 있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원래 모습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씻음받고 고침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받게 될 성찬은 바로 그런 확신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기도
이 시간 잠시 두 눈을 감고 오늘 말씀의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성찬식
다함께 일어나셔서 결단의 찬양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결단의 찬양 : 찬송가 620장(1절 + 후렴)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나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모습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오직 우리 죄를 씻겨주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길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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