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다시 보는 사도신경➉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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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42-44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40명의 인물을 선별해 가지고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책인데요.
저는 이 책에서 사마천이 남긴 명언이 하나가 저에게 참 인상이 깊었더라고요. 이런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 그러면서 그 책에서는 진시황을 소개하는데요. 이 진시황은 서른아홉 살에 천하를 통일한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는 죽음을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전 세계로 사신을 보내서 불로초를 찾도록 했는데, 결국 그가 몇 살에 죽었는지 아십니까? 나이 50에 사망하고 맙니다. 그 사인이 수은 중독이었대요. 수은이면 독성물질이잖아요? 아이러니하게도 불로장생에 대한 욕망 때문에 평소에 즐겨 먹던 수은 때문에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우리도 이런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많은데요. ‘인생 뭐 있어?’ 하면서 쾌락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노력하면 뭐 하나? 죽으면 끝인데’하는 허무주의에도 빠질 수가 있습니다. 다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 아닙니까?
성경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세 가지 종류로 말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 죽음은 잘 아시다시피 육체의 죽음입니다.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죠.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다 죽음이 찾아옵니다. 죽음에는 순서도 없고 장소도 없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책에 죽음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글이 있었는데요. 죽을 ‘사(死)’의 한자를 하나하나씩 파자하면 한일(一)자에 저녁 석(夕) 자, 비수 비(匕)자, 즉 ‘한밤에 비수처럼 날아오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예요. 죽음은 한밤중에 날아온 비수와 같이 피할 수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도 여러분과 제가 살아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루하루씩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처럼 50년을 살았다고 하면 50년만큼 죽은 것이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않으면 살기는 살아도 무의미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가하면 두 번째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영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덴버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시는 정성욱 교수께서 잘 설명해 주셨는데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 죽음이란, 육체적으로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하여 사람의 영혼이 죽어버리는 죽음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영혼이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을 영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을 잘 들어보세요.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로 살아간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생물학적으로만 살아 있을 뿐이다.”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다들 잘 아시겠죠? 살아는 있는데,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상태 이게 바로 영적인 죽음이라는 것 아닙니까?
마지막 세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 있는데요. 바로 영원한 죽음입니다. 요한계시록 20:14-15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영원한 죽음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죄인이 부활한 후에 영원한 불못 즉 지옥에 던져지는 죽음이 바로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가장 무섭고 두려운 죽음 아닙니까? 진시황이 두려워해야 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이요. 이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과 영영 이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희곡 지옥 편을 보면 지옥의 입구에 쓰여있다는 그 유명한 대사가 “이곳에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아닙니까?
어찌 생각해보면 인생 참 허망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차피 죽을 거면 열심히 살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별스럽게 고상하게 살아가면서 남 눈치 볼 일도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죽을 인생이고 썩을 육신이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요. 그게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우리 인생의 종착지가 아니에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요11:25)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학계에서 가장 많이 비난받고 있는 이슈 중의 하나가 오늘 주제인 ‘부활과 영생’인데요. 영국의 BBC뉴스에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국은 기독교 국가이며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영국 기독교인 중에 25% 즉 네 명 중 한 명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네 명 중 한 명은 부활은 매우 비과학적이고 성경은 잘못되었다고 응답을 한 것이죠.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것은요.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심리학 교수이자 생물 냉동학 재단의 설립자였던 제임스 베드포드라는 분은요. 세계 최초의 냉동보존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왜 냉동보존 인간이 되었을까요? 바로 부활하기 위해서죠.
우리가 잘 아는 월트 디즈니를 비롯해서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냉동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부활이 없다고들 하지만, 이렇듯 지식층이나 부유층을 중심으로 점점 더 부활에 대한 열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10주간 이 사도신경 시리즈를 통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 그리고 죄사함에 이어 이제 드디어 오늘 마지막으로 어디까지 오게 되었냐면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이 고백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알고들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제자가 한 명 있죠. 바로 도마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도마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봐야겠어.” 그것을 아신 주님은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요. 사도신경에는 부활은 부활인데, 몸의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임스 베드포드라든지 월트 디즈니도 훗날 몸의 부활을 기대하고 냉동보존 인간으로 있는 것 아닙니까?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 왜 하필 몸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냥 다시 사는 것 그게 그것 같은데 왜 몸이 다시 사는 걸 강조했을까요?
장애를 가지고 살던 분이 내 몸이 부활할 때 장애를 가진 몸 그대로 부활한다면 그것이 축복일까요? 나이가 많이 들어 몸이 다 늙고 희어지고 마른 상태로 부활한다면 그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분은 몸의 부활 때문에 장기 기증을 안 하신 분을 봤습니다. 장기 없이 부활하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먼저 답을 말씀드릴게요. 부활의 날에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는데, 그 몸은 지금과 동일한 몸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데, 정말 기대해도 좋은 변화입니다. 안심하고 장기 기증하셔도 됩니다. 이에 대해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을 다시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새번역)
42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43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합독] 44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뭔지 아시겠죠? 몸의 부활을 입는 날, 우리는 죽음을 모르는 몸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에는 하나씩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살아있지만 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비천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자연적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못 알아본 것도, 요한복음에서 갈릴리로 귀향한 제자들이 부활하셔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못 알아본 것도 부활하신 주님의 외모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입니다.
그래서 이왕 새로운 몸으로 변화해서 부활시켜 주실거라면, 저는 조인성이나 강동원 같은 외모로 부활시켜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임영웅이 나을까요? 너무 욕심이겠죠?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중에 비천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자연적인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부활한다는 이 진리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장애를 입은 분들, 평생 지병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분들, 연로하셔서 거동이 어려워 현장에서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모든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위로의 말씀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몸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죽어 몸이 땅에 묻히고 영혼만 하늘로 올라간다는 사실이 매우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처음 창조하실 때,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존재로 짓지 않으셨기 때문인데요. 창세기 2:7 합독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은 먼저 흙으로 빚어졌습니다. 이것이 ‘육체’죠. 그러나 성경은 이를 두고 아직 ‘사람’이라고 부르질 않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육체에 ‘생기’가 불어 넣어졌어요. 이 생기가 바로 ‘영’입니다. ‘영’은 하나님의 숨이며 기운입니다. 이 영이 흙으로 빚어져서 사실은 점토 인형과 다를 바가 없는 육체에 불어넣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생령’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 흙으로 된 존재에 하나님의 숨이 불어 넣어진 상태를 비로소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모두 마치면 영혼은 몸을 떠나 하늘로 가고, 몸만 땅에 묻히거나 납골당에 안치되지 않습니까? 사실은 이게 비정상적이라는 거예요. 죄가 만들어낸 뼈아프고 애통한 현실 아닙니까? 영과 육은 하나라는 측면에서 ‘몸의 부활’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2절 말씀에는 “피조물이 지금, 모두 함께 탄식하고 고통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데요. 그 탄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23절 말씀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3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의 영혼만 속량 즉 구원받는 게 아니라,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하십니다. 물론 천국에 먼저 가 있는 영혼들은 완전한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있어요. 바로 몸의 속량 즉, 몸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혼이 속량함을 받았어도, 아직도 몸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위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봤습니다. ‘천국의 영혼들은 영혼만 있기 때문에 축구나 등산을 할 수 없고, 낚시도 다닐 수 없겠구나’ ‘땀 흘리고 마시는 시원한 콜라 한 잔의 청량감도 경험할 수 없겠구나’ 왜냐하면 이것들은 오직 육체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장차’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영혼과 육체 모두가 완전한 상태로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것의 의미는요. 단순히 안 죽고 오래 산다는 것이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고백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자! 이게 무슨 말씀인지 설명해 드릴게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인간들의 삶의 패턴이 비슷하게 쭉 열거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먼저 6절부터 보시면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이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 이 패턴이 바로 그 다음 구절에도 나옵니다. 9절.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 이게 인간의 생애를 쭉 반복하면서 열거하는데, 이 패턴이요. 에녹에게 와서 달라집니다. 21절부터 보세요.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같은 패턴이죠? 그런데 23절.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의 패턴인데, 에녹에 와서는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가 아니라 “살았더라” 이게 23절인데, 무슨 말인가 봤더니 그다음 24절에 보니까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이 있지 아니하더라
이 패턴이 이해가 되십니까? “낳았고 낳았으며 죽었더라”의 패턴을 깨뜨리고 “낳았고 낳았으며 살았더라”로 바뀐 에녹의 특징은 단 하나에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반해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 안에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의 기쁨,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행의 기쁨 이 감격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오늘 이 사도신경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 두 가지의 적용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영원한 나라의 상급 준비하기입니다. 저를 함께 따라 하시겠습니까? “영원한 나라의 상급 준비하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처럼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시다가 순교하신 분들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믿음을 고백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살았느냐에 따라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상급’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21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지금 상황이 어때요? 주인이 멀리 떠나면서 자기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산 자와 게으르게 산 자를 청산하는 장면 아닙니까? 그런데 충성된 자에게는 어떤 말씀을 하세요?
“내가 너를 인정한다. 너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너에게 갑절의 달란트를 주겠다.”
이제 주님의 나라에서 갑절로 더 영광스럽게 사역하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믿는 자들이 다 가는 곳이지만, 그 상급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이 오늘 내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주를 섬겼느냐에 따라 영원히 사는 그 나라에서 우리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50년을 살았든, 70년을 살았든 우리는 그 세월만큼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기 전에 나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주님 앞에서 잘 살아오고 있었는가? 게으르지 않고 충성된 종이었는가?’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처럼 언젠가는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며 어떻게 사느냐는 너무도 중요한 사실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는 주님의 일에 힘쓰기입니다. 역시 함께 따라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일에 힘쓰기”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부르는데요. 그 결론이 이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 합독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을 믿는 것과 이 말씀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이 말은 단지 “우리가 부활할 것이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지금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나의 목회 철학은 내가 섬기는 성도들로 하여금 나보다 천국에서 상을 더 많이 받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철학 아닙니까? 여러분, 저도요. 진심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저 역시 여기 계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천국에서 저보다 더 많은 상을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눈빛이신데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 한 가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자들의 삶이 이 땅에서 어떠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잘 감당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털처럼 가벼운 죽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해 드린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죽음에 저항하지 말고 삶에 저항하라”“삶이 죽음을 결정한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뭐 피시방이 있습니까? 무슨 스마트폰이 있습니까? 무조건 친구들하고 밖에서 놀아야만 했잖아요? 한겨울에도 해질 때까지 동네 골목에서 막 놀다 보면 손 다 갈라지고 넘어져서 피가 나기도 하고 제가 가장 많이 했던 게 구슬치기하고 땅따먹기였거든요. “이게 내 땅이고 저만큼만 네 땅이야” 아직도 생각나는 게 친구 녀석이랑 그 동생까지 저한테 덤벼가지고 막 싸우고 그랬었는데요.
그러다가도 어둑어둑해지면 엄마가 “훈아, 밥 먹어라”하고 부르면 뭐 땅따먹기고 뭐고 그냥 발로 쓱쓱 닦고 막 집으로 달려가던 추억 다 있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60년이든, 80년이든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이유는요. 지금 이 땅에서 땅따먹기하라는 게 아닙니다.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땅따먹기를 안 하죠. 왜? “이제 그만 와라” 아버지가 부르시면 끝이거든요. 진짜 상급은 이 땅에서 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거든요. 그래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주님의 일에 힘쓰라는 말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저를 한 번만 더 따라 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땅은 / 할 일이 있어서 / 남아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 찬송가의 가사 잘 아시잖아요? 찬송가 492장 (부르기)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2절] “눈물 골짜기 더듬으면서 나의 갈길 다간 후에 주의 품안에 내가 안기어 영원토록 살리로다”
[후렴 가사 불러주기]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길이 살리”
땅따먹기 하시느라 얼마나 세상 짐이 많으십니까? 그 짐을 내려놓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빛난 면류관 받아 쓰고서 “주와 함께 길이 살리” 에녹처럼 “낳았고 낳았으며 살았더라”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우리 이 감격스러운 부활주일에 이 찬송가의 가사를 생각하시면서 박수치면서 힘차게 함께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 1,2절 부른 후에 멘트 ]
여러분, 시간이 많이 갔지만, 우리가 한 번 더 이 찬양을 부를텐데요. 이제 내일이면 벌써 2024년도도 4월입니다. 한 해가 참 긴 것 같지만, 누가 그러시더라고요. 세월 가는 것이 나이만큼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일까요? 끝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찬송가가 장례식장에서만 불려서는 안 되잖아요?
이제 3절부터 함께 부르실텐데요. [가사 불러주기] “나의 가는 길 멀고 험하며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곤한 나의 몸 쉴 곳 없어도 복된 날이 밝아오리”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중에 이제 막 결혼하셔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 또 초등학교 중학교 어린 자녀를 둔 3, 40대 젊은 분들, 다들 멀리 사시는데, 이렇게 절기 예배라도 와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땅따먹기만 하다 인생 끝내면 안 되잖아요? 영원한 상급이 있음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할 일을 찾아보세요. [일어나서]
우리 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3절과 4절 힘차게 박수치며 찬양 부르겠습니다.
❙합심기도
오늘 말씀 기억하면서 “주님. 제가 너무 힘듭니다. 나름대로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이때까지 살아왔는데, 뭐 이룬 것도 없는 것 같고 몸은 너무 아프고 하루 하루가 버겁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땅에 발 디딛고 산다고 해서 이 땅에만 집착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지 모르는데 땅따먹기하다가 인생 마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고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준비하게 하시고 주의 일에 힘쓰게 하셔서 훗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품에 안아주시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통성으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마침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인생이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아니길 원합니다. 그 오랜 세월을 예수를 믿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고 몸은 아프고 하루 하루가 버겁기만 하더라도 몸의 부활과 영생이 있음을 믿고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을 찾으며 영원한 상급을 기대하며 주의 일에 힘쓰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 젊은 3,40대 청장년 교우들을 붙드셔서 이 땅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사명을 발견하게 하시고 지금의 삶이 훗날 어떤 죽음인지를 결정함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축도)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나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영원한 나라의 상급을 준비하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기를 다짐하는 우리 성도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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