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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함

마태복음강해, 산상수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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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라.

Notes & Transcripts
제가 이번에 잠시 허리가 팠습니다. 심할 때는 누군가 부축해야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고, 밤에는 뒤척일 때마다 잠에서 깼습니다. 화장실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허리를 써야 하는 일들이 이렇게 많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프다가는 시드니에 당장 못 갈 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평생 이런 고통을 안고 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겁쟁이라서 드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 실제적인 고통과 위험을 직면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뚫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단단히 먹게 되고, 최대한 가능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고통과 직면하지 않고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에게 희망은 ‘현실도피’가 되고 맙니다. 불의한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이 과연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은 사망진단을 받은 영혼에게 율법이라는 처방마저도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각인시키는 도구라는 걸 알게 해주십니다.
1. 변화의 희망, 예수 그리스도!
그럼 무엇이 희망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율법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수소(H2)와 산소(O)가 결합해야 물(H2O)이 완성 되는 것처럼, 율법은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 완성이 되고, 생명 길이 됩니다. 율법의 완성은 바로 복음입니다! 영단번에 속죄제를 드리신 예수님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살아나는 것! 이것이 율법의 절정이요 마침이 됩니다!
그럼, 구원 받으면 끝인가? 아닙니다. 그 때부터 놀라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변화와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새로운 성향을 창조하십니다. 전에 내 성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분노가 일상이고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나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화를 참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를 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화내는 모습이 유치하고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또 어느 때부터는 입에 달고 다니던 욕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조사처럼 늘 말마다 붙어서 사용하던 욕, 대화의 활력을 준다고 생각하던 맛깔스러운 욕들이 저급한 언어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살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죽이고 싶어하는 분노의 실체에 대해 보여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 내 마음에 분노가 있구나! 분노가 사람을 죽이는구나! 누군가를 죽이는 인생이 아니라, 살리는 인생이 되고 싶다! 누군가를 기를 죽이고 밟아주고 싶은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를 살려주고 세워주는 인생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것이죠.
오늘 주제는 예민한 주제입니다.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우리 안에 있는 음란한 실체를 드러내십니다. 저는 말씀을 다 듣고 성령님께서 이런 생각을 우리에게 주시길 바랍니다. ‘아, 내 마음에 음란함이 있구나! 합법을 가장한 간음이 내 안에 있구나! 정결하고 싶다! 주님처럼 순결하고 싶다! 한 영혼을 죽도록 사랑하는 깨끗한 사랑을 하고 싶다!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기 바랍니다! 희망의 빛을 보고 나아가야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 같으나 실은 내 안에 죄악의 암덩어리들을 도려내고 계신 겁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27-28절입니다.
[마 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 간음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분노 자체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바람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힘써 지킨 사람이라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죽이고 싶은 분노를 행동에 옮기지 않은 것은 실제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는 분명히 조금 더 나은 행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간음도 생각은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실행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행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결코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버럭 화를 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겉모양을 보듯이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속이 겉처럼 드러난다면, 마음 속으로 분노 하는 것도 같은 무례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의 속이 겉처럼 다 드러납니다. 살인은 분노에서 오듯, 간음은 음욕에서부터 옵니다. 음욕을 품는 순간 우리는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다 부정한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식욕이 부정한 것이라면, 식욕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면, 어떻게 음식을 먹고 살겠습니까? 수많은 요리와 음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욕망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왜곡된 욕망입니다. 식욕이 좋은 것은 축복이지만, 지나친 식욕 때문에 항상 먹을 것만 생각하고, 모든 관심이 먹는 것에만 가 있고, 늘 먹지 않으면 불안하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지요.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욕 자체는 너무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이성이 만나서 서로 플라토닉한 사랑만 주고 받는다면, 에로스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중요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왜곡된 성욕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왜곡되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고 전문 분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흉내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온갖 미디어와 매체를 통해 마치 성적 자극이 사랑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본능이 사랑이 척도가 됩니다. ‘나는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은 ‘너는 날 더 이상 자극하지 못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섹시하다는 것이 곧 사랑스럽다는 말로 들릴 정도입니다. 모든 성적 타락은 희화화 되었습니다. 이것도 왜곡입니다. 야동을 보는 것이나 음란패설을 즐기는 것은 무용담처럼 주고 받습니다.
성적 타락은 사단의 주요 전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유명한 박수무당인 발람을 고용하여 온갖 저주와 사술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주가 하나도 먹히지 않자 어떤 짓을 합니까? 이스라엘이 스스로 타락하도록 유혹합니다. 모압 여인들, 미디안 여인들을 통해 유혹합니다. 이 일을 통해 염병으로 2만4천명이 죽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모든 타락의 시작은 성적 순결함을 빼앗는 것입니다. 사단의 공격이 너무나 맹렬하여 이 시대는 성적 순결을 지키기에 정말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3. 순결이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진다
사단이 순결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정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기초석이기 때문입니다. 순결을 무너뜨리면 가정이 깨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순결의 문제 후에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 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신명기에 모세가 명한 율법에 이혼법이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주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예민한 주제이지요. 주님은 이혼한 여자들을 정죄하기 위해 하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빙자하여 합법적인 이혼으로 결혼의 서약을 파기하고 정욕을 따라 또 다른 결혼을 일삼는 위선과 이율배반을 꼬집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혼에 대해서는 랍비 ‘샴마이’는 부정한 연고로만 이혼이 가능했다고 주장한 반면, 랍비 ‘힐렐’은 명확한 근거만 있다면 이혼 사유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힐렐 학파에 의하면 아내가 남편의 음식에 양념을 너무 많이 넣었다거나, 음식을 태웠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니 원한다면 얼마나 쉽게 이혼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합법적인 판결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판결하신 것입니다. 그 동기가 순결하지 않은 것이지요. 예수님은 합법적인 율법의 전통 뒤에 숨어 있는 마음의 동기, 마음의 정욕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 율법 제도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결혼이 매우 숭고한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마 19:4-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부부란, 가정이란 단지 케미가 잘 맞는 두 남녀가 만나는 만남이 아닙니다. 이성간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해방구가 아닙니다. 부부란, 가정이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으로 이루는 성스러운 공동체임을 가르치십니다. 신비하게도 두 사람은 결혼으로 한 몸이 됩니다. 둘이 하나요, 하나인데 둘입니다. 약간의 삼위일체의 신비와 비슷한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 신비를 우습게 보는 것이 비극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단순한 이성의 만남 정도로 전락시키는 풍조가 비극입니다. 오늘날 이 가정의 숭고함과 신비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핵심입니다.
4. 순결이 필요한 이유
순결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로운 것들은 모두 순결함을 요구합니다. 금의 순도가 얼마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18k와 24k가 다릅니다. 미켈란젤로나 고흐의 진품은 누구도 손을 댈 수 없게 보호합니다. 누군가 망치나 붓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은 아마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과르네리나 스트라디 바리우스 같은 바이올린은 아무나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할 주인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할 수 없이 가치로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아무렇게나 다뤄지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보석처럼 소중히 다뤄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숨 값이 바로 우리의 가치입니다. 우리의 순결은 아무에게나 주고 허락할 만한 값싼 일용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한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도를 순결한 신부라고 부르십니다.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신부가 신랑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화려한 예복도, 맛있는 음식도, 신나는 잔치도 아닙니다. 순결한 자신입니다. 오직 신랑을 위해 준비된 몸과 마음이 깨끗한 신부! 이것이 신랑에게 가장 큰 선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십니다.
이미 자신을 지킬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결코 그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우리의 기준입니다. 주님은 회개한 자에게 결코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를 문제 삼으면 여기 남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주의 보혈로 우리의 수치스런 과거를 다 덮어주십니다. 우리의 순결은 항상 ‘지금부터’입니다. 이것이 진짜 ‘관용’입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 관용이 아닙니다. 죄인을 용서해주는 사랑, 언제나 다시 순결한 사랑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저는 이런 관용과 사랑이 우리 공동체에 넘쳐 흐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순결한 삶에 도전하도록 도전하십니다.
[마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5. 순결한 삶을 향한 도전
이 말씀은 정말 우리에게 오른 눈을 빼 버리고, 오른 팔을 잘라 버리라는 말씀일까요? 앞에서 저는 주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성향을 창조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게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게 놀라운 변화지요. 그런데 문제는 육신의 습관입니다. 죄의 습관에 오래 길들여져 온 육체, 이 몸이 영적이 소욕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자주 우리는 익숙하던 습관에 내 입과 몸을 내어주지요.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이상 유쾌하지 않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를 성령의 소욕에 내어드려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네 눈을 빼어 내버리고, 네 오른 손을 찍어버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오른 눈, 오른 손은 우리가 내 몸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그 무엇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의 제자는 세상에서 좀 바보 소리 들을 각오해야 합니다. 술 먹는 게 죄입니까? 술 먹으면 천국 못 갑니까? 이건 질문이 잘못 되었습니다. 벌써 술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술 먹는다고 천국 못가는 거 아닙니다. 근데, 문제는 술을 먹으면 자꾸 이상한 짓을 합니다. 욕을 한다든지, 시비를 건다든지, 여자를 밝힌다든지. 어떨 때는 술이 하나님보다 더 좋습니다. 하나님은 위로해주지 않는데 술은 날 위로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럼 그게 아무리 소중하더라도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서요!
내가 오른 손처럼 여기는 것이 골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주식투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걸 다 버려야 천국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은 그걸 주님을 위해서는 과감히 내어 버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라내면 사람들은 우릴 바보처럼 봅니다. 아니 그 좋은 골프를 버리고 일요일에 교회를 나가? 그 좋은 술을 끊어? 물 좋은 나이트, 룸싸롱을 끊어?
그런데, 주님을 위해 아까운 것이 있다면, 그건 정말 주님을 아직 못 만나거나, 주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 눈을 빼어 내고서라도 얻을 만한 분이요, 내 팔을 잘라 내고서라도 만날 만한 분입니다! 낚시의 묘미를 알게 되면 내 오른 팔처럼 사랑했던 아침 잠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크심을 알게 되면 그게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마 5:11-12 말씀을 하는 겁니다. ‘나로 말마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은 슬픈 일이 아니라 기뻐할만한 일이라는 겁니다. 왜요? 천국에서 어마어마한 보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포기하는 욕망, 성령의 소욕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은 천국에서 뿐 아니라 이 생에서도 놀라운 축복으로 돌아올 줄 믿습니다! 우리의 음란한 소욕을 잘라내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향한 투자요, 내 안에서 성령께서 새 일을 행하실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더없이 거룩하고 순결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 지하교회를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중국은 유물사관을 기초한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그들은 진화론적 가치관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성적 순결이나 낙태에 대해 너무나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낙태가 얼마나 큰 죄인지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생명의 신비함을 알기 시작했고, 낙태된 태아들의 사진을 보며, 인간의 탐욕이 빚은 참상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잘 알던 남녀 청년이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둘을 돌려보냈습니다. 두 사람이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경 대학가의 분위기는, 동거가 대세였답니다. 부모들도 일단 살아보고 결혼하라고 권면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과감하게 두 사람에게 진짜 아름다운 결혼을 하려고 한다면 당장 둘이 따로 나가 각각 살고 정식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결혼하고 신혼 살림을 차리라고 충고했습니다. 두 청년은 처음에 당황하고 그 다음에는 분노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교회가 여기 뿐인가? 하지만 둘은 마음을 가라 앉히고 목사님의 권면에 순종하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말씀드리자, 이 두 청년의 진지한 결단을 보고 감명을 받아 기쁘게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저희가 그 교회에 갔을 때 얼마전 그들이 치른 결혼식이라며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전교인이 함께 한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풍조를 따라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 따라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거나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예수따라가는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음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나요? 어떻게 이성을 순전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나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눈을 빼내듯이, 팔을 잘라내듯이 내 육체의 소욕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된 성령의 욕구들에 민감하게 반응하십시오! 그 음성에 더 귀를 기울이세요! 그러면 이 싸움은 이미 끝난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죄로부터 우리를 반드시 자유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순결함이 임할지어다! 아멘!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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