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할 능력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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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해석할 능력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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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해석할 능력이 없음.
(2018.9.9요코하마 온누리교회 주일예배-서 현 목사)
본문: 창41:1-13
주제: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해야 회복이 일어난다.

1. 서론-정보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인.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정보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정보는 지식입니다.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함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은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력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력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지식 이면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통찰력과 영성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들이 사회의 리더였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가졌습니다. 사회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그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사람들이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쪽에 있는 대학교 도서관 자료도 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만 아니라 핸드폰을 통해서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제는 지식과 정보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사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핸드폰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대신,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정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정보가 없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신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없는데, 의미를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성경의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지 못합니다.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책은 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지 않습니다. 지식은 있지만, 바르게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등장합니다.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 해석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정보는 있습니다.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입니다.

2. 본문

1) 바로가 본 두 개의 꿈.

창41:1-4 를 읽어 주십시오.
그로부터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나일 강가에 서 있었는데/아름답게 생긴 살진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와 갈대풀을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그 뒤에 흉측하고 마른 암소 일곱 마리가 뒤따라 강에서 올라와 강둑에서 이 소들 옆에 서 있었습니다./흉측하고 마른 암소들이 아름답게 생긴 살진 암소 일곱 마리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2년이 지났습니다. 2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시간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건을 기록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사건이 중요합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2년 뒤, 갑자기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가 꿈을 꾼 것입니다. 바로는 두 번 꿈을 꿉니다. 하지만 꿈의 의미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창41:1-4 는, 첫 번째 꿈의 내용입니다. 이 꿈은 매우 이상합니다. 바로가 나일 강가에 서 있었습니다. 암소 일곱 마리가 강에서 올라왔습니다. 그 소는 아름다웠습니다. 소가 아름답다니 이상하지요? 그만큼 건강하고 좋은 소였습니다. 이 소들이 풀을 먹는데, 흉측하고 마른 소 일곱 마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소를 잡아먹습니다. 두 종류의 소가 등장합니다. 한쪽은 아름답습니다. 한쪽은 흉측합니다. 나쁘고 사악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쪽은 살졌습니다. 한쪽은 말랐습니다. 둘을 대조합니다. 마른 소가 살진 소를 잡아먹습니다. 소가 육식을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소가 소를 먹었습니다.
바로는 이상했지만 다시 잤습니다. 두 번째 꿈을 꿉니다. 이번에는 이삭이 보였습니다. 마른 이삭 일곱 개가 굵은 이삭 일곱 개를 먹었습니다. 창41:7 를 읽어 주십시오.
그리고 마른 이삭들이 토실토실하고 굵은 이삭 일곱 개를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바로는 두 번 꿈을 꿉니다. 두 꿈 모두 이상합니다. 내용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합니다.

2)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음.

바로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해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로는 지혜 있는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창41:8 를 읽어 주십시오.
아침에 바로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가 사람을 보내 이집트의 모든 마술사들과 지혜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자기가 꾼 꿈을 말해 주었는데 그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로가 부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본문에 기록된 마술사는, 예언자를 의미합니다.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혜자들은 다른 말로는 ‘기술자’, ‘전문가’를 의미합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학자입니다. 즉, 바로는 세상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 영적인 전문가들을 모두 불렀습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다는 히브리어는 ‘사파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로는 정보를 기록했습니다. 자신이 꾼 꿈을 기록하고 남겼습니다. 그 정보를 전문가들이 분석합니다. 소가 등장합니다. 이삭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정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릅니다. 그들은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해석합니까? 그들도 해석을 못합니다.
이집트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풍요로운 농업이 가능했습니다. 나일강은 이집트를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나일강을 다스리는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이 호루스입니다. 호루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립니다. 그것이 바로입니다. 즉, 바로는 나일강의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집트의 왕이 된 것입니다. 바로의 꿈에 나일강이 등장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암소는 무엇일까요? 호루스의 어머니가 ‘아이시스’라는 신인데, 이 신은 자주 암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영적인 전문가, 기술자들은 모두 이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왜 어머니가 일곱이나 있는가? 왜 서로 잡아먹는가?입니다. 이삭은 왜 등장하는가?입니다. 지식은 있습니다. 전문가입니다. 영적인 일의 전문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정보는 있습니다. 지식은 있습니다. 검색만 하면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투브를 보면 수많은 영상이 있습니다. 뉴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팩트 책크’ ‘사실 확인’등을 합니다. 그러나, 그 확인이 진짜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어떤 신문을 받았습니다. 온누리신문처럼 만들었습니다. 인터넷 방송 광고도 있었습니다. GCNTV였습니다. CGNTV가 아닙니다. 내용을 보니 어느 이단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3) 술 맡은 사람이 요셉을 기억하다.

아무도 바로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전문가가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꿈을 꾼 바로 본인도 어떤 의미인지 모릅니다. 모두 절망 가운데 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술 맡은 관원장입니다. 창41:9 를 읽어 주십시오.
그때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에야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제 잘못이 생각났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살아났습니다. 요셉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을 잊었습니다. 2년이나 잊었습니다. 그의 양심이 찔렸습니다. 그는 “제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잘못이라는 말은 ‘헷’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실수하고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악한 행동, 법을 어긴 심각한 죄’를 의미합니다. 그가 요셉을 잊은 것이 심각한 죄임을 고백합니다. 바로의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바로 그 때, 그는 요셉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셉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꿈을 해석할 사람을 잊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법적인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무도 해석하지 못할 때,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합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해석하지 못할 때, 세상의 종교가 해석하지 못할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떠올립니다. 회개함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뤄집니다. 마술사가 아니라, 전문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야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학생 때 일입니다.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이 끝난 후, 친구들끼리 서로 논쟁합니다. “1번 문제의 답은 3번이다!” “아니다, 4번이다” 격렬하게 이야기합니다. 선생님이 답을 발표했습니다. 답은 2번이었습니다. 똑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격렬하게 논쟁해도, 정답을 모릅니다. 그 결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 정답이라고 하자” 그것이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너의 말도 맞고, 나의 말도 맞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해서 지식을 얻으면 해결할 수 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해결할 수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영적인 일들을 경험하면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세상이 오랜 시간동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죄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 기준이 서로 다릅니다. 그 결과 해석이 모두 다릅니다. “모두 전문가니, 모두의 말이 다 맞다고 합시다”라고 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해석할 때, 철학자의 말도, 불교의 말도, 과학자의 말도, 모두 다 맞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회개하며 요셉을 생각한 것처럼, 우리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3. 결론-회개를 통한 지혜를 사모하라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12년 동안 피가 흐르는 병에 걸려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치료를 못했습니다. 많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문제를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치유되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86세이신 위암 환자였습니다. 병원에서는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이 세상을 떠나도,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갑자기 이야기를 들으니 좀... 다음에요.” 그러나 시간이 없습니다. 의식이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구원받아야 합니다.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축복하고,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 주고 기도할 때, “아멘!”하셨습니다. 웃는 얼굴이 너무 밝았습니다.
여러분, 많은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죽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다른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 해결은 회개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찾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문제 가운데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보고, 새로운 일을 기대하십시오. 아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요셉이 등장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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