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고 그리스도를 얻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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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 기쁨은 육신의 유익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의로만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다. 3. 그리스도를 얻은 자들이 누리는 참 기쁨은 성령으로 예배하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Notes
Transcript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마틴 로이드 존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영국에서 활동했던 의사 출신의 목사님인데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로 불렸던 분입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생전에 설교 중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 번 잘 들어보세요. “사람들이 교회 밖에 머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놀라운 진리를 믿고 있고, 붙잡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기쁨의 원천을 가진 사람들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문제들과 이해하기 힘든 일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어떤가요? 이 말에 동의가 되시나요? 저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죠.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무의식중에 살펴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랑 뭐가 다르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나보다 나은 게 뭐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합니다. 그런데 우선 결과를 놓고 보면, 그들은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회당에 전혀 들어오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고요. 요즘엔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무언가 나랑 확실히 다르다면,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 할 텐데,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거죠. 똑같이 돈, 명예, 권세에 목을 매며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얼굴에 기쁨이 없습니다. 주일에 하루 교회당에 머무는 동안에는 기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은 볼 수 없죠. 평소 일터와 집에서 보는 게 전부니까요. 그런데 그 일상의 모습에선 기쁨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회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기쁨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포함된 빌립보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기쁨”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라’(χαρά)가 다섯 번, “기뻐하라, 함께 기뻐하라”는 동사가 열한 번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첫 절인 3:1도 어떻게 시작하고 있나요?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어떻게 해야 빌립보 성도들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겠지요. 이것은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에 쓴 편지로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깨달아, 주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요? 참 기쁨은 육신의 유익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그는 좋은 배경과 조건을 타고났습니다. 율법에 맞게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죠. 이스라엘 족속이며,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을 배출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한 히브리 교육을 받았습니다. 헬라 문화와 언어에 물들지 않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살면서도 많은 것들을 성취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엄격하게 지켰죠.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정통과 순결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타고난 유익과 성취한 유익들로 인해, 율법에 비추어 볼 때 흠 없이 온전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7절에 보면,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이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8절 마지막에는 배설물로 여겼다고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을까요? 이전에 즐기고 누렸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탁월한 유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익은 8절과 9절에서 말하듯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얻어서 그분과 연합되어 마지막 날까지 붙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는 것이죠.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때에, 그분과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 유익을 10절과 11절에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을 알아서,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이 최고의 유익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유익이 바울로 하여금 세상 자랑거리들을 해로 여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죄로 물든 바울의 인생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는데, 자신에게 있는 육신적인 것들은 그리스도를 얻는 데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 칼빈 선생은 인생을 풍랑 중에 있는 배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에는 배 안에 있는 것들이 아무리 귀하고 중요해도, 사람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바다로 던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풍파 가운데 있는 인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으려면, 이 세상에 좋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깊은 죄의 바다 한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는 우리를 건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새 생명을 얻어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이러한 참 기쁨은 육신의 유익들로는 도무지 누릴 수 없습니다. 돈, 명예, 권세 등 육신의 유익들은 이 땅 위에서만 누릴 수 있는 유한한 것들이지요. 그런데 그것들을 얻는 과정이 매우 고단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설사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지키려면 또 엄청난 힘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켜냈다 한들, 거기서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유익을 찾아 나서게 돼 있습니다. 육신의 유익이 주는 만족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유익을 좇는 삶은, 참 기쁨에 도달하기는커녕 참 기쁨을 시작도 못 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무한반복입니다.
여러분,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에게도 세상적으로 자랑할 만한 육신의 유익들이 있습니다. 그 유익이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건강한 몸일 수도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환경 혹은 명문 가문일 수도 있지요. 우리가 살면서 얻은 돈이나 명예, 권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여기고 계십니까? 배설물과 쓰레기처럼 여기시나요? 아니면 귀중한 보배처럼 여기십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시지는 않나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쉬워서, 내 자녀들에게만큼은 다 해주고 싶은 마음에 기를 쓰고 노력하시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바울의 간증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의 유익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유익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육신의 유익이 절대 줄 수 없는 참 기쁨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의 자랑거리들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육신의 유익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어서, 참 기쁨을 누리는 자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의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인 의로움의 기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의로움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주어졌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주의적 율법 교사들입니다. 바울이 2절에 표현한 대로, 그들은 여기 저기 들쑤시며 진리를 더럽히는 “개들”이었습니다. 말로만 율법을 강조하고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악한 일꾼들”이었습니다. 육체적 할례를 주장하는 “가짜 할례당”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를, 은혜가 아닌 공로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획득한 의를 강조한 것이죠. 그들은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통당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처럼 복음을 훼손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들에게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심한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의 의는 율법으로부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계약,” “제 1마카비서,” “희년서”라는 유대교 문헌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완벽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시절에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종교적 모델이었죠.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내세우는 아브라함을 직접 예로 들어서 반박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의 복을 얻은 시점이 할례 받은 후가 아니라 할례받기 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롬4:10). 바울 사도의 논증대로, 할례는 의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할례는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의를 재확인하는 표징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골로새서 2:11에 따르면, 이것은 육신의 몸을 벗어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이지요.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진정한 할례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아무런 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한다고 해서 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밖에 있는 의로움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는 의로움입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의로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해주시는 의로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육신의 유익들을 바라보며 너무 흐뭇해하지 마세요. 돈, 명예, 권세로는 예수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헌금이나 봉사와 같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함으로써 자꾸 내 의를 쌓으려는 잘못된 생각과 행동도 이제 그만 멈추셔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종교 중독일 뿐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의로만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고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얻은 자들이 누리는 참 기쁨이 무엇일까요? 성령으로 예배하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했습니다. 여기 “봉사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라트류오(λατρεύω)는 본래 “섬긴다,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꼭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예배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즉 성령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 참 할례 받은 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런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서는 이와 같이 참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라는 찬양 잘 아시죠? 그 찬양의 3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 찬양처럼, 그리스도를 얻은 자는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의 평안함으로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배합니다. 세상 자랑과 육신의 유익, 나의 의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주님만 보이고 주님만 자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제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각자의 삶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예배하시나요? 혹시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예배하시진 않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예수 안에서만 자랑하고 육신을 신뢰하지 않으시나요? 혹시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고 그것들을 자랑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고 자신만만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을 얻으면 그분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성령으로 예배하고 예수만을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참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 우리에게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했던 설교 일부를 잠시 언급했었죠. 사람들이 교회 밖에 머무는 이유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참 기쁨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참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쁨은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을 위해서도 정말 중요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고, 그분을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은혜의 선물이지요. 억만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선물입니다. 그런 선물을 받아놓고도 왜 자꾸 육신적인 것들에서 기쁨을 찾으시나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고 거룩하게 바꿔주셨습니다. 그 의와 거룩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예배하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며, 육신을 신뢰하지 않음으로써 참 기쁨을 계속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주일 하루만 교회당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가운데 기쁨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일주일에 단 하루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 자랑과 육신의 유익들을 다 버릴지라도,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으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루하루가 기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그리스도를 얻는 기쁨, 이 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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