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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본인이 본서의 서문을 쓰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렌드 릭슨 박사의 저술이 마땅히 알려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나 라에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More than Conquerors” 란 제목의 요한계시록 주석이 이나라에 서 출판되어 복음주의 계열에서 많은 사람의 전망과 가르침에 상당한 영 향을 준바 있 다. 고 프레 드 • 밑 벨 (Fred Mitchell) 씨 가 케 즈윅 대 희 (Keswick Convention) 에 서 행 한 마지 막 몇 몇 맷 시 지 가 본서 에 기 초한 것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본 요한복음 주석이 이 시점에서 이 나라에서 유용할 수 있도 록 나와야 할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본인 자신으로 말하면,본인이 읽은 요한복옴 주석 중에서 본서는 가장 만족한 주석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렌 드릭슨 박사는 현대의 모든 사상 동향에 철저하리 만큼 정통하고 있는 저 명한 신약 학자로서 사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이점에서 더 이상 바 람직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전망과 가르침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적이요 보수적이요 복음적이다.
본서에는 탁월한 서론이 있 다. 본서의 서론의 특히 훙미 있는 면모는 저 지*가 각 부분에서 논증한 결과를 종합부분에서 다룬 방식이다. 본서는 동 시 에 절단위 (節單位) 의 주석 이 다. 그리 고 모든 절이 목회 자의 심 장에 서 나오는 뜨거운 신앙심에 푹 잠겨 있다.
여기에, 모든 설교자들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성경학교 인도자들과,“그 것을 먹고 자라게 될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이 있는 것이다. 헨드릭슨 박사의 인도를 따라
이 위대한 복음서의 부귀를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의 생각이 가득 채워지며 그들의 신앙이 활기를 띠게 되고,강화되며,확립되며, 마음 의 감동을 받고 경배하게 되리라. 어쨌든 이것이 나의 체험이기도 하다­이 점은 어느 주석에 대해서나 요구되고 기대되는 것이지만, 아, 현대의 주 석들은 거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절실한 요구인 것이다.
원컨대 본서가 널리 읽혀지고 연구되고, 이미 미국에서 출판된 바 있는 그의 다른 신약성경 주석들이 이 나라에서도 곧 출판될 수있기를기도
한다. 1959년 1월
런든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D.M. 로이드-존즈
— 3 一
목 차
(상)
키 3
저자의 말 7
생 략 부호표 8
斗론: 11
저작자,저작연대,저작장소에 대하여 13
독자와 저 작 목직 49
췌 55
해 58
주제와 구분 95
1—6장 주석
1一6장의 개요 100
1 삼^ 101
2징^ 157
1.
지 177
2.
^ 209
3.
장^ 251
6^- 287
— 5 —
저자의 말
본 주석을 쓴 것은 다음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첫째로,본문올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함이다. 번역은 현대어로, 현대 관 용법에 따라야 하며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 번역은 단순히 의역이 되어서 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본문을 치밀하게 따라가며 강조된 곳이 있을 때 마다 그 뜻을 들어 내야 한다.
둘째로,다른 많은 주석에서 발견되는 서론의 문제점들을 철저하게 논 하기 위함이다. 특히 저작자 문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세째로, 본문올 간단히 분석하며 그 개념과 관계를 취급하기 위함이다. 3장 16절과 같은 중요한 대목들은 다른 대목들보다 더 충분히 취급되어 야 한다.
네째로, 한개의 사상단위를 구성하는 각 대목의 말미에 그 부분 전체에 대한 종합을 기재함으로써 각 대목의 내용을 명백히 나타내기 위함이다. 분석의 뒤에는 항상 종합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주석은 이 두가지를 모 두 포함한다. 그렇지 못하면,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보수적 입장올 변호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이것올 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섯째,최신판 주석올 제시하기 위함이다. 근자에 이르러 신약학 분야 에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본 주제의 어떤 국면에 대하여 중요한 저술 이 가끔 나타났고 기독교 정기 간행물에 훌륭한 기사들이 출간되어 여러 낱말과 구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빛을 던져 주기도 하였다(예를 들어 요 2 : 4, 4: 9). 제 4복음에 자주 나오는 개념들을 취급한 박사 논문들도 나왔다. 이와 같은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었다. 관계서적 목록을 준비하여 뒤에 싣는다(하권).
일곱째,본 복옴에 매우 빈번히 사용된 문법과 구문에 대한 완벽한 개 요를 제시 하기 위 함이 다. 본문주석은 시 종일관해서 문법과 구문상의 중요 겅 을 빠짐없이 언급하되 지 나치 게 많이 다루지는 않았으므로 텔라어 에 능 통하지 못한 독자들도 불편한 점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기록된 아람어 원어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아람어 학설중 가치있는 요소들을 공평히 다루 려고 노력하였다.
이상의 여러 목적이 충분히 성취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초기 저작물에 대한 독자들의 친절한 반응은 필자가 더욱 노력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본복음에 그 분의 사랑이 나타나신바 된 이에 게 영광이 있올지어다. 원럼 •텐드릭슨
생략부호표
서적에는 종지부(period)를 찍었고 정기 간행물에는 종지부를 찍지 않 았다.
1.
서 적
A.R.V. American Standard Revised Version
1.
V. 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2.
D.B.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D.C.G. Hastings, Dictionary of Christ and the Gospels
Gram. N/F. A.T. Robertson,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1.
B.A. Hurlbut, Bible Atlas (.most recent edition)
2.
S.B.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L.N.T. Thayer’s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N.N. Novum Testamentum Graece, edited by D. Eberhard Nestle
and D. Erwin Nestle (most recent editi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S.BK. Strack and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iind Midrasch.
Th.W.N.T. Theologisches Worterbuch zu..i Neueji Testament (edited by G. Kittel)
W.D.B. Westminster Dictionary of the Bible
W.H.A.B. 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le
1.
정기간행물 AJTh American Journal of Theology
ChrC Christian Century
ClW Classical Weekly
CQR Church Quarterly Review
CThM Concordia Theological Monthly
EQ Evangelical Quarte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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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서 론
I- 저작자,저작연대,저작장소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책들 중 가장 경이로운 책이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 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바야흐로 본서를 연구하기 위해 발을 디디려 는 모든 사람의 자세는 이 런 자세가 되 는 것 이 좋겠다. 왜 냐,본서의 증 거 가 참된 것 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의 아들로 믿는 신앙은 이 미 영광의 확인올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제 곧 분명하게 나타 날 것이다.
본서는, 황제 디베료와 분봉왕 헤룻 안디바의 시대에 팔레스타인 땅에 (4:9) 예 수라고 하는 유대 인이 살고 있 었는데 그는 자기 가 만물의 합법적 소유자요, 생명의 떡이요, 생수요, 지•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주려는 선한 목자요,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리실 자 이시요,바로 메시야요,하나님 께 로 가는 길이 요, 신앙과 경 배 의 대 상이 시요,사람이 신 동시에 어 느 의 미 에서든 하나님이심으로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실 수 가 있는 분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본서의 저자가 이런 그의 주장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인 것이다 ! “역사의 예 수”에 대하여 저자는 가장 높은 칭호!: 붙이 고 있다. 그는 그를 하나님의 말씀(Logos)이라고 칭했으며 이 말씀이 아버지의 존전에 거하시며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해 준다. 저자는 대담하게도 심지어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는 첫 절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기가 주장한 그대로의 인물인 것이다. 그는 성 육신 하신 하나님 이신 것이다(1 : 1,14).
이와 같은 주장을 받아 들이 고 이와 같이 놀라운 선언올 하고 있는 저자 는 누구인가? 그는 그가 서술하고 있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살던 외 인인 관계로 그 사이의 거 리 때문에 그의 견해에 차질올 가져온 것은 아닌가? 그가 그 사건들이 있은지 오래 후에 기록한 관계로 이 야기의
“주인공”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이적을 행하는 자로 둔갑을 했으며 전설과 민간전승의 법에 따라 결국 하나의 신(a god)으로 변모된 것 인가? 아니 다. 사실은 그 반대 이 다. 제 4 복음의 저자는 그의 “주인공”과 같은 민족, 혈통, 가정에 속하는 사람의 하나르 나타나 있다. 그는 그와 동 시대 인이 요 목격자로 소개되 어 있는 것 이 다(21 : 24,참조 요일 1 : 1ᅳ4). 그는 주 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전통에 의하면 열 둘의 한 사람이요,열 두 사람 안에 서 도 세 사람 중의 하나였다(막 5 : 37, 9 : 2, 14 : 33). 하지 만 어 느 누가 공관복음의 이 와 같은 기 록에 반대 하고 제 4 복 음의 증거에만 국한하고 싶어한다 해도 그는 본서의 저자가 여기서 최초 의 두 제자의 한 사람(1 : 35,40)으로 간주되 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야 할 것 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21 : 24의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 한 제자가 1 : 35,40의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 한 제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있음직 하지도 않은 견해를 채택하지 아니하는 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제자 중 에서도 본서 저자는 자기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로 나타낸 자인 것이 다(13 : 23).
그보다 예수를 더 잘 알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예수와 날마다 함께 걸 어 다녔으므로 그의 성격상의 견함과 인격상의 단점이 있었다면 그것을 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디-. 모든 밤 중에서도 그 가장 성스러웠던 성만찬날 밤, 그는 그의 품에 의지해 기대어 있었다. 그는 그의 십자가 옆에 서 있었 다. 그는 심지어 그의 무덤에 까지 들어 갔었다(13: 25,19 : 26, 2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4 복음서의 저자로서 그가 그처럼 잘 알고 있던 이 역사의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모든 사람에게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 은 사람은 바로 이 제자인 것이다 ! 그 뿐 아니라 그는 바로 맨 첫 장에 서 다튼 목격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다음과 같이 그들의 생각과 감정 을 나타내었다고 말한 것이다.
안드레,“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빌립,“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나다나엘,“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 금이로소이다”(1 : 41,45,49).
바로 여기에 역시 첫장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증거가 추가되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의 어 린 양이로다 내 가 보고 그가 하나님 의 아들이 심 을 증
거하였노라” (1 : 27,29,34).
전통적 인 견해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 증거의 유효성 올 인정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에 이의가 제기되지 않 는 한 그둘은 지역전에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싸움 자체게 지고 있음을 인정 한다. 고둥비 평은 이 증거를 뒤흔들어 놓을만한 것으로서 무엇을 제 시 하는가 ? 반(反) 보수주의 자들은 제 4 복음서 가 동시 대 인이 며 동시 에 목 격자에 의해 저작될 수 없었다는 것을, 즉 본서가 전설이 말해 주는 대로 나이 많은 사도 요한에 의해서 소아시아에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 게 증명 하려 하는가? 그들의 논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겠다.u
1.
다음 문헌ᅳ본 주제에 대해 기록한 수백에 달하는 저작에서 선택된ᅳ은 비평 가들의 논조와 제 4 복음의 저 작자 문제 와 관련해 서 전동적 인 견해에 집 착하는 사람들이 제시한 대 답올 제공 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지작들에 대하여 감사 를 표하고 싶다.
Albright, W.F.,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Baltimore, 1940, especially pp.298—300.
Andrews, Mary E.t “The Authorship and Significance of the Gospel of John•” JBL 64 (1945). 183-192.
Bacon, B.W., The Fourth Gospel in Research and Debate, New York, 1910.
Bernard, J.H.,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2 vols. (in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New York, 1929.
Burney, C.F., The Aramaic Origin of the Fourth Gospel, Oxford, 1922, especially pp. 126—152.
Dods, M., The Gospel of St. John (in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Reprint Grand Rapids, Michigan (no date), vol. I • especially pp. 655—681.
Gardner-Smith, Percival, St. John and the Synoptic Gospels. Cambridge, 1938.
Godet, F;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translated by T.Dwight), 2 vols., New York 1886.
Goguel, M.t Le Qualrieme &vangile,Paris, 1924.
Goodenough, E.R., “John A Primitive Gospel,”/BL64 (1945), 145—182.
Grosheide, F.W., Johannes (in Kommentaar op het Nie (we Testament), 2 vols., Amsterdam, 1950, especially vol. I, pp. 1—42.
Cl) 사도 요한은 일찍 죽었으므로 제 1 세기 말경 에베소에서 복음을 썼을 리가
없다. 그 증거 는 A.D. 9세기에 살았던 승려 Georgius Hamartolus가 기 록한 연대 기의 사본의 하나인 Codex Coislinianus, Paris 305에는 파피아 스에 의하면 사도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자의 죽음을 죽었다고 진술되
어 있 다. 우리 는 야고보가 헤 롯 아그립 바 1세 에 게 A.D.44년에 (그 후에
는 아님) 죽임올당했으며 베드로가 그보다 오래 산 사실을(행 12장) 안
다. 그런데 만일 요한도 그처럼 일찍 순교 당했다면 그는 제 4 복음을 기
Hoskyns, E.C., The Fourth Gospel,2 vols., London, 1940.
Howard, W.F., The Fourth Gospel in Recent Criticism and Interpreta- tion, London, 1945.
Howard, W.F., Christianity According to St. John, Philadelphia, 1946, especially pp. 11—33; also his review of Hoskyns, The Fourth Gospel, JThS 42(1941), 75—81.
Luthardt, C.E., St. John The Author of the Fourth Gospel, Edinburgh, 1875.
Menoud, P.H., Uevangile de Jean d'apre's les recherches recentSs, Neuchatel and Paris, 1943.
Nunn, H.P.V., “The Fourth Gospel in the Early Church,” EQ 16(1944), 173—191.
Nunn, H.P.V., The Fourth Gospel, An Outline of the Problem and Evidence, London, 1946.
Redlich, E.B., An Introduction to the Fourth Gospel, London 1939.
Roberts, C.H., An Unpublished Fragment of the Fourth Gospel, Manc­hester, 1935.
Robertson, A.T., John, in Word Pictures, New York and London, 1932 vol. V., especially pp. ix—xxvii (introduction).
Robinson, J.A., The Historical Character of St. John,s Gospel, London and New York 1908.
Sanday, W., The Authorship and Historical Character of the Fourth, London, 1872.
Sanday, W., The Criticism of the Fourth Gospel, Oxford, 1905.
Scott, E.F., The Fourth Gospel,Its Purpose and Theology、Edinburgh, 1906.
Strachan, R.H., The Fourth Evangelist^ Dramatist or Historian?, Lon­don, 1925.
Streeter, B.H., The Fourth Gospels, New York, 1925.
Taylor, Vincent, aThe Fourth Gospel and Some Recent Criticism”, in Contemporary Thinking About Jesus (edited by T.S. Kepler), New York, Nashville, 1944, pp. 99—106.
톡• 할 수 없었올 것이다. 그 증거는 본 복음의 저자는 베드로 보다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요 21 : 18-24). 이상이 제 일 논법의 요지이다.
앞에 말한 Codex에서 의미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꼬덕체를 주목 하라).
“도미티안 황제 이후에 네르바(Nerva)가 일년율 다스렸다. 요한을 그 섬에서 다시 불러내어 에베소에 살도록 허락한 것은 그였다. 요한은 그때 까지 살아 있던 열 두 제자 중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이름이 불은 복음서를 제작한 후데 순교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를 친히 알고 있던 히에라볼리스의 감독 파피아스는 그의 두번째 저술인「주님의 말씀」(Oflc/es Of the ion/)에 서 요한이 유대 인들에 게 죽임 을 당했 다고 말하고 있 다. 그의 형 제 C야고보)와 함께 이 렇 게 그는 그리스도의 예언 ‘내가 마시려는 잔올 너희가 마시며 나의 받으 려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을 명백히 성취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
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씀하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매우 박 식 했던 오리 겐은 그의 마태 복음 주석 에 서 도 그가 사도들의 계 승자들에 게 서 받은 지식올 근거로 해서 요한의 순교를 단언했다. 이 외에도 위대한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Parthia가 제비로 말미암아 도마에게 떨어졌고 아시아가 요한에게 떨어졌다. 요한은 에베소에 살다가 죽었다.”
첫째로 이 사본은, 파피아스에 의하면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죽임올 당 했다고 말하고 있고 같은 저자의 다른 사본들은 그가 평안히 잠들었다고 밀: 함을 주목하자.
둘째로 이 기록은 요한과 야고보가 동시에 순교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 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끝으로, 역시 이 증거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에서 돌아온 후에 에베 소에서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가 그의 이름을 지니는 복음서톱 기록한 후어I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다. 즉 비평가들은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입장을 반박하기 위 한 시도에서 전통적 인 견해의 이 요소가 줄잡아 말해도 정확하다고 분명 히 진술해 주는 어면 문서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요한과 야고보의 “순교”와 관련되는 사본이 하나 있는데 (Baroccianus 142) 이 사본은 C. De Boor가 출판했으며 (/Texte und Untersuchuogen
— 17 —
V. 2, p. 170) 제 5세기 초에 이름을 떨친 교희 사가 Philippus Sidetus 의 저작의 개요를 진술하고 있다. 이 사본은 다음과 같은 진술올 포함하 고 있다.
“신학자 요한의 제자이 며 폴리 갑의 친구인 히에 라볼리스의 감독 파피 아 스가 주님의 말씀을 엮은 책 다섯권을 썼다……두번째 책에서 파피아스는 신^자 요한과 그의 형 제 야고보가 유대 인들에 게 죽임 을 당하였다’’고 말한다.
야고보와 요한을 순교자로 함께 기념한 고대 교회 달력들도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J.A. Robinson의 자상한 논증서,The Historical Ch­aracter of St. John’s Gospel, London and New York, 1908, pp. 64— SO• 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도 요한이 극히 늙은 나이에 에베소에서 평화롭게 죽었다는 교회의 보편적 인 전통에 중대한 의 혹을 던질만한 충분한 증거는 없다. 요한과 그 의 형제 야고보가 유대 인들에 게 죽임을 당했다는 진술을 파피아스에게 돌 리는 것은 전거 (典據)가 매우 빈약하다. 만일 파피아스가 정 말 이것을 말 했 다고 하면 이 레 네 오와 유세 비 우스와 파피 아스의 글을 읽은 기타 사람들 이 그것에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 고 이와 같은 진술을 파피아스에게 돌리는 것을 경솔한 해석으로 인한 과 오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 전통에 대한 이 고립된 모순은 간간히 사도를 순교자로 서술한 글에시도 지지를 받을 수 없으며 교회 달력에서 그를 기념한 내용의 논거에서도 지지를 받올 수 없다. ‘증 인,이 란 내 용의 텔라 용어 ‘순교자’란 말이 애 초에 는 그들의 증거를 그들 의 피로 인친 사람들에게 국한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에서 고대 문서들 중에 요한이 란 이름을 가진 여러 사람들올 가끔 흔동한 사실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것은 야고보의 경우에 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파피아스가 “요한과 야고보”라고 말했다면 그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할 가능성도 있었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나 주님 의 형 제 야고보일 가능성 도 있었 다. 요세 부스와 유세비 우스에 의 하면 후 자는 “유대 인들에게 죽임올 당했다.” 우리는 Sidetus가 파피아스를 정확 히 인용하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최소한 알고 있다. 왜 냐, 그 신학자란 칭호가 먼 훗날까지는 사도 요한에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피아 스가 이 말4-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 런 까닭에 전 "인용문”은
의 심 스러 운 모습을 드러 내 기 시 작하는 것 이 다. Sidetus가 정 말 파피 아스의 글을 읽었을까 ? 아니 면 결국 그의 최종의 전거 (典據)는 유세 비우스였는 데 그가 유세비우스의 글올 잘 못 읽은 것일까? 분명코 학적이란 형용사 를 가지고 “지능 정도가 얕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어떤 저자(파피아스로 상 상된)의 와전된 인용문에서一구태 어 인용올 한다면~끌어 낸 추론올(제 4 복음 서의 저작자 문제에 관한) 존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비평 가들은 이 인용문을 어떤 엉터리 역사가의 작품을 최근에 요약한 것에서 찾아 낸 것이다!
교회 달력에 대해서는 초기 칼타고인의 순교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 함되어 있다.
Dec. 25 viii Kal. Jan Domini nostri Jesu Christi, filii Dei.
Dec. 27 vi Kal, Jan. sancti Johannis Baptistae, et Jacobi Apostoli, quern Her odes occidit.
여기서도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기 념되었다. 하지 만 여 기 에 언급된 요 한은 세례 요한인 것이다 ! 고대 수리아의 순교사에 “예루살렘의 사도 요 한과 야고보가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W.M. Ramsay의 진술과 일치한다. 즉 “같은 시기에 살해를 당하지 않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기념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일찌기 죽임올 당했 다는 것을 증거하기에는 우리가 상상하기에 가장 빈약한 증거이다.”이 공 동기념은 열 두 사도 중 뛰어 났던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 였다는 사실과 막 10 : 39에서 발견되는 바 그들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을 잘못 해석한 사 실에 기인한 것 같다.
C2) 이미 A.D. 4세기 초에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을 기록했다는 견해가 거부되 었다는 것. 즉 두 사람의 요한을ᅳ그들 중 둘패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 장로(Pre.s- byter)였다ᅳ말한 파피아스의 문헌에서 한 문장을 인용한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배 척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세비 우스는 이 것 으로부터 요한복음올 쓴 사람은 “장로” 요한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사실상 E. R. Goodenough도 이런 결 론을 내리고 있다. “John A Primitive Gospel,” JBL 64(1945), p. 148.
그러 나 유세 비우스와 관련해서 여 기에 진술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2J 왜
1.
R.P. Casey, “Prof. Goodenough and the Fourth Gospel,” JBL 64(1945), 535-542를 참조하라.
냐, 이 역 사가(Eusebius) 는 “장로” 요한이 (사도 요한과 구별되 는) 본 복 음을 썼다고 말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사도 요한이 복음서 저자 였다는 것울 분명히 믿었던 것이다. 유세 비우스가 가공적 인 인물을 창안해 낸 것은 통탄할 일이라는 것올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T. Zahn의 진술 “그 것을 길게 는할 것도 없이 ‘장로 요한’은 유세 비우스의 비평적, 주석적 열둥성의 산물이 디-’’(T/j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ns Knowledge의 “사도 요한 항목”)와 의견을 함께 한다. 이 사람이 도대체 실제 인물이었음올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도 없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와 같이 애매한 것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 했다. 예를 들어 B.H. Streeter, The Four Gospels, New York, 1925,14장이 그러하다.
유세비 우스를 어 리 둥절하게 한 파피 아스의 진술은 다옴과 같다. “그리 고 내가 이미 장로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해석에 추가하고 잘 기억하려 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나는 그들의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 다수 사람들과 달라서 많이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 는 사람들올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명령을 열거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주께서 믿음올 위해 주신 계명과 진리에서 나온 계명올 반복하는 사 람들을 좋아한다. 그러 나 만일 장로들을 따랐던 어느 누구가 온다면 나는 장로들의 말올 조사하여 안드레 나 베드로나 빌립이나 도마나 야고보,요 한, 마태 나 기타 주님의 제자들이 무엇올 말했는지 그리고 Aristion과 장 로 요한과 주님 의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알아보겠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1, xxxix, 3—4).
파피아스의 이 말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이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두 경우의 언급이 한 사람의 요한 (요한 이서와 삼서로 보 통 알려져 있는 두 신약서신에서 자기를 “장로”라고 부른)올 가리켜 한 말이라는 것이다. 만일 전통에 따라 사도 요한이 고령에 달하도록 살아서 다른 모든 제자들 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에 유의한다면 어째서 파피아스 가 요한을 제자들 구룹에 첫째로 포함시킨 후에 지금 다시 그를 말하고 있는가를, 즉 다른 제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인가를 말했던 그가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두 사람의 요한올 생각하 고 있었는데 그들의 한 사람은 사도였고제 4 복음서의 저자였으며 둘째 사
람(장로:)은 계시록의 저자였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후자(계시록:)의 뇌작자 문제에 있어서 유세비우스는 분명히 Dionysius(200ᅳ265, A.D.)의 영 향 을 받았는데 이 사람의 전통적 인 견해에 반대 한 강력한 논증은 비록 그의 결론과 의견올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세심한 연구를 기우릴 가치가 있다. 그의 결론이 부분적으로는 계 20장에 항상 호소하는 천년왕국설자 들에 대한 그의 혐오감 때문이었던가? 이것에 대해서는 N.B.Stonehouse 의 The Apocalypse in the Early Church p. 151 올 보라. 그러나 우리의 현재의 목적올 위한 질문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제 4 복음을 쓴 것은 누구인가 이 다. 그 대 답은 필자가 방금 인용한 파피 아스의 말에 대 한 그의 논평 에 서 분명해질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고덕체률 주목하라). 즉,
“그가 두번이나 요한의 이름을 계산에 넣었으며 첫번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마태와 다른 사도들과 함께 계산에 넣었지만ᅳ여기의 요한은 전도자를 의기함이 분명하다ᅳ그의 진술을 바꿈으로써 두번째 요한은 사도들 외의 다른 사람들과 합 께 계산에 넣었는데 그의 앞에 Aristion을 기록했고 그를 분명 히 장로라고 불렀다. 이것은 아시아에 같은 이름의 두 사람(요한)이 있었으며 에베소에 여전히 요한의 것 이라고 칭하는 무덤 두 개 가 있다고 말한 사람들의 말이 진실임올 굳게 한다. 이 말은 주목을 요한다. 왜 냐, 두번째 요한(만일 전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이 요한의 이름으로 통하는 계시록을 본 것이 십중 팔구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유세비우스,op.cit., in, xxxix, 5-6).n
그렇다면 유세비우스는 두번째 즉,장로 요한올 계시록의 저자로 간주하 는 셈 이 다. 하지 만 그가 사도 요한을 전도자로 제 4 복음서의 저자로 간주하였다 는 것올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III,xxiv, 5에서도 동일한 신념 올 표시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파피아스에 대한 비평 가들의 이같은 호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실패했다. 비평 가들이 근거 로 삼는 출처는 전통적 인 견해 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3) A.D.170년 경의 소아시아의 이단종파인 ■파는 제 4 복음과 계시록을
Cerinthusm 돌렸다. 이런 까닭에 이렇게 일찍 부터 요한의 저작자 문제가 의심
-2 1-
스러웠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 이 다.3,
이 논증 역 시 요란하게 보이긴 해 도 그처럼 대 단한 것은 못된다. 예수 의 신성과 로고스의 성육신을 크게 선언하는 복음을 Cerinthus에게 돌리 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이 이단자가 부정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신앙조항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교황에게 돌리는 것이 더 낫겠다! Epiphanius가그들에게 Alogi란 이름을 볼일 것올 암시 한 바와 갈이 Alogi파는 로고스(Logos) 복음(요한복음)에 대한 비 논리적인 (illogical) 반대자들이요, 신성하고 인격적 이성(Reason)에 대한 비 이성 적인 (unreasonable) 배척자营이 었 다.
Alogi파의 지론이 비 합리적이긴 하지만 가치 있는 요소 하나를 내포하 고 있었다. 즉 그들의 이름은 최소한 이 종파가 제 4 복옴의 기원이 매우 이 른 시 기 에 발달된 것 을 인정 하였 다는 점 이 다. 전설에 의 하면 요한과 게 린두스 (Cerinthus) 는 동시대 인물이 기 때문이 다. 제 4 복음이 그처 럼 매우 초기의 작품이라면 비평가들은 본 주석의 처음 몇 페이지에 진술한 해걸 할 수 없는 수수께끼에 여전히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1.
본 복음의 기독론은 정도가 너무 높으므로 초대의 제자에 의해 기록되지 않 았畜 것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이것은 논증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결국 논점을 교묘히 피하 는 소치 이 다. 그와 같은 증거 가 전혀 없으니 대 담한 주장이라고나 할까 ?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의 기독론은 그보다 수준이 낮은가?라고. 골 2 : 9나 빌 2 : 6이나 몹시 애를 태우는 롬 9: 5를 읽어보라. 비평가들이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써도 그들은 그리스도 의 신성에 대한 증거문서로써 이 귀절을 제거하는 일에 전혀 성공하지 못 하는 것이 다. 그리 고 공관복음의 기독론은 그 보다 못한가? 마 11 : 27, 28을 읽어 보라.
1.
여기에 기록된 사건音에는 발전이나 전개부분이 없다. 바로 시작부터 예수
3) 예를 들면 M. Goguel, Le QuatrUme Evangile, Paris, 1923 pp. 161,162. 를
보라.
4) E.F. Scott* The Literatur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40 p.
242를 참조하라•
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거의 시작부터 그의 죽음이 설계되어 있었 다. 열둘의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썼으리라고는 믿기 힘들다. 이 외에도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발견되는 것과 정반대이다.
이 논증은 사실을 공평히 다루지 않고 있다. 즉,
1.
제 4 복음에서 뿐 아니라 공관복음에서 도 예수는 바로 시작부터 메시 야로 인정되었다. 공관복음서에 세례 요한이 인정하였고(막 1 : 7,8) 귀신 이 인정 하였고C막 1 : 24,34 3 : 11) 요한복음에서 세 례 요한과 안드레 와 빌립과 나다나엘(1 장)이 인정하였다.
2.
예수를 메시 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다른 어디에서 보 다도 제 4 복음서 에 서 크게 강조된 것 은 저 자가 요 20 : 30, 31에 서 진술된 바와 같이 “너 희로 예수께서 하나님 의 아들 그리스도이 심을 믿게 하려 함 이요”와 같이 저자가 의중에 두고 있던 목적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사실 에서 이상과 같이표현된 목적올 깨 닫게 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올조심스
럽게선택하였다. 그는 자주 공관복음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것올 생 략하
고 있는 것이다. (49p• 를 보라)
1.
만일 예수가정 말 하나님 의 아들 메 시 야요, 그의 奮현이시초부터 경
이와경외를 일으키는 일에 실패 할 수 없는 것이 었다면 (막 1 : 27, 28)“열
둘 중의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썼으리라는 것을 믿기는 어 렵지 않다.”
1.
그렇긴 해도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데에는 발 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자들은 “그의 영광”을 제 1 장에서 보다도 2장11절에서 더 많이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 런 말씀이 2 : 11절 에 진술되 어 있 는가 ? 처 음에 는 메 시 야 직 무에 대 한 제 자들의 개 념 이 아직 어느 정도 세속적이요 국가주의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 하지 만 오천명 을 먹 이 신 이 적 과 관련해 서 예 수께 서 는 자기 가 그와 같은 유의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올 명 백히 보여 주심으로 무리들 의 희망을 산산이 깨뜨려 버리심으로써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는” 사 람들이 많았을 때 (6: 66) 시몬 베 드로가 주님 의 “너 희도 가려 느냐”는 질 문에 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 가 주는 하나님 의 거룩하신 자이신줄 믿고 알았삽나이 다” C6 : 67ᅳ69) 라고 대 답했다. 이 신앙고백은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서 는 분명 히 한 단계 진 보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 뒤에 있었던 되풀이 된 무지와 의
심의 순간들올 제외하진 못하였지만 전진올 보여 준 것은 사실이 다. 제자 들이 고백한 이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신앙고백은 16 : 30에 나타난다. “우 리 가 지금에 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 다리 시지 않 는 줄 아나이 다 이로써 하나님 께로서 나오심올 우리 가 믿삽나이 다. ” 여 기 에는 적어도 한 순간은 대낮의 밝은 빛이 슬픔과 무지의 구름을 통해 비 쳐 나오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를 존재론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아들 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우리 는 “나의 주시 며 나의 하나님 ” (20 : 28) 이 라고 한 도마의 영 광스러 운 외침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하심 (16 : 30올.참조하라)올 계시한 앞의 문맥 (20 : 24ᅳ27)에 비 추어 생 각해 야 한다. 하지 만 20: 29가 보여 주 는 대로 이런 숭배도 완전성은 결여하고 있다. 제 4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 격과 사역에 관한 보다 충분한 지식을 후에 오순절과 그 이후에 주시리라 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 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 희에 게 알리 시 리 라”(16 : 12,13).
방금 인용한 성귀에 비추어 볼 때 요한복음은 발전되고 전개된 복음임이 현저 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성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의 그 클라이 막스는 전도자가 오순절 후기 (後期)의 유리 한 입 장에 서 뒤 를 회 상하며 로 고스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귀걸들,예를 들어 서문d : 1-18) 에서 도달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제 4 복음의 어디서든 ! : 1ᅳ5, 14, 18절 보다 더 수준 높은 기독론은 아무데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귀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다. 이 성귀들이 이 이야 기에 발전이 있었다는 이론을 증명하는데 사용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대로 이 이야기에 발전이 있는 것은 사실이 다. 하지만 분 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 네가지 있는데 a. 예수의 메시야적 의식, b. 그의 자기계 시, c. 제자들의 그의 메시야적 직무와 신성에 대한 인정과 신앙고백, d. 본서 저 자의 신앙.
첫째 메시야적 의식에 대하여 말하면 제 4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어떤 유
의 발전된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다. 본 복음은 예수의 유년기를 서술하지 않고 있음을 유의해 야 한다. 하지 만 만일 공관복음에 따라(눅 2 : 49) 예 수께서 12세 되셨올 때 이미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시라는 사실올 의식하 고 계셨다면 그가 요한복음에서 시초부터 신적 주권으로서 말씀하고 행동 하신 것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놀라운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자기계시로 말하면一이 문제에 대해서 H.N. Ridderbos 의 Zelfopenbaring En Zelfverberging,Kampen, 1946, pp. 66—69와 G.Vos 의 The Self-diFClomre of Jesu-, New York, 1926을 보리ᅳ이 문제 의 난 해 성 은 인정 하고 들어 가야 한다. 공관복옴에 서 는 그의 은폐 성 이 강조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 복음의 목적과 일치해서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가 강조되었다는 것은 분명 하다. 1장과 2장의 (1 : 51-2 : 19) 이 자기 계시는 뒤의 장들에서 처럼 될씬 발전된 것이 아닌 것으로 고려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메시야 직무와 신성을 계시하는 행동 속에 묘사되어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본 교리의 포괄적 의 기는 성 령이 부어지기까지 계 시되지 않았다(16 : 12,13). 이것은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 한 기타 교리 에 있어서도 그러하다(13: 7).
세째 제자들의 신앙고백에 대해 말하면 본 복옴의 기록의 발전에 대해서 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내째 저자의 입장에 대해 서 말하면 이 것은 당연하게도 본서를 일관해서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e.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이려는 계책에 대하여 말하면 제 4 복음서 는 발전과 전개의 사실이 있다. 동시에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가 역사적 전망이라는 크게 유리한 입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올 기억해야 한다. 그 가 기록한 사건들이 있은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시작에서 끝을, 싹(순)에
서 가지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를 죽이려는 경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벳새다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 (5: 18)라고 했을 때 유대 인들이 그가 안 식 일올 깨뜨렸다고 생 각한 직후에 유대지도자들의 마음과 생 각에 떠 올랐 다는 것올 저자는 보게 된 것이다. 초막절기에 이 지도자들은 예수를 체 포하려 했으나 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유산되 었 다(7: 32). 후에 유대 인들
은 그에게 던지려고 돌을 집었던 일도 있다(8: 59). 예수를 처형하기 위
한 산해드린의 정식 희의는 아직도 후의 일이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과 이로 인해 예수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여러가지 계획이 공회에서 획책되 었다(11: 47ᅳ53, 12 : 10,11). 재판이 있었고(18장),예수는 유대 인들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손에 넘기어졌다. 이 모든 것에서 이 이야기는 발전과 전개된 사실올 보여 준다.
1.
공관복음이 증인둘에 의해 기록되었다면(기록에 의거하여),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나 기타 다른 증인이 제 4 복음을 썼을 가능성은 없다. 상이점이 너무 많고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1.
교리상으로 모순이 없다­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에 교리 상의 차이 가 있다는 사실은 아직 증명 되'
지 않았다. 접근방법이 다른 것은사실이 다. 공관복음은 나사렛 선지자인 이 사람 예 수가 메 시 야요 하나님 의 아들이 심 을 나타내며 제 4 복음은 하나님 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것올 가르친다. 이 두 관념 이 아름답게 혼합되 어 있다.
1.
사건들의 개요가 대체로 두 경우 모두 같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두 군데서 모두 소개되었다. 예수께서 두 군데서 모 두 큰 무리에게 말씀하시고 이적올 행하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두 군데 서 오천명을 먹이셨고 물위를 걸으셨으며, 자기를 거절하는 무리들을 물 리치시고 그의 제자들올 가르친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
예수께서 두 군데서 모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셨으며 베다니에 서 성 유 (anointment)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두 군데서 모두 그의 제 자들과 함께 식사에 참여하시며 이와 관련해서 예수께서 배신자인 유다를 지적하 신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두 군데서 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룰 버리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마침내 겟세 마네 에 들어 가신다. 두 군데 서 다 체 포의 기 록과 가야바 앞에 서 의 (요 한복음에서는 안나스와 가야바) 재판이 뒤를 이어 나온다. 동시에 베드 로의 부인과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이 두 군데서 모두 기록 되어 있다. 둘 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과 십자가의 처형과 여인들이 십자가 지심올 바 라본 일과 주께서 부활하신 무덤을 찾아갔던 일올 진술하고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 의 유사성올 두 개의 사상으로 분류하려 는 시도가 가끔 있었다. 즉 요한복음 6장에 포함되어 있는 재료와 18장에서
시작되는 고난주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르지 못하다. 무엇보 다도 요 1 : 32,33절과 막 1 : 10절의 유사점은 현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베다니에서 향유 부은 일과 예루살렘성 입성이 요 12장에 진술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공관복음에서도 발견된다(막 14장 마 21장, 막 11징-,눅 19장). 성 만찬과 성 만찬 강화와 관련된 사건들의 역사적 제 시 가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다. 막 14 •• 12ᅳ18을 참조하라. 따라서 공관복 음과 요한복음이 동일한 성 만찬올 가리 켜 말하는 것 일 개 연성에 대 하여 아직 마음을 닫지 않은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13—17장에서 발견되는 자료 가 공관복음의 구조에 훌륭하게 들어 맞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초기 의 유대 땅에 서 의 사역 (요 2 : 13-4 : 42) 과 후기 유대 땅에 서 의 사역 (요 7 : 1-10 : 42)은 공관복음에 서 발견되 는 것 과 전혀 모순되 지 아니 한 다. 마 23 : 37-39 마저도 유대에서의 광범위한 찬동을 암시하지 않는가? 눅 4 : 44도 최상의 사본의 지지를 받는 독법에 의하면 예수께서 유대 회 당 들에 서 설교하고 계 셨음을 암시 하지 않는가 ? 바리 새 인들과 율법박사들(서 기관들)이 유대에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정통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 는 눅 5 : 17도 참조하라. 그리 고 거 꾸로 요 2 : 12, 4 : 43-54와 6장은 제 4 복음이 갈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올 위한 여지를 남긴다는 것을 보 여주지 않는가.
1.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제 4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과 조금도 모 순되지 않는다-
공관복음은 우리가 다음에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 점에서 제 4 복음과 다르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과 강화에서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 차이점들 은 근본적 인 것 이 아니 다. 요한의 평 판이 좋은 말과 담화의 어 조는 공관 복음의 어조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논증이 유효한 것이라면 그들이 증명해야 하는 것은 공관복음과 제 4 복움과의 모순이지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요한 복음
3 : 3. “예 수께 서 대 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로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营 수 없느니라”
마 18 : 3,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 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 니 하면 하-1님 나라에 둘어 갈 수 없느 니라”
4:3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이 밭을 보라희어져 추수하게 되었 도다”
3 : 35, 10 : 15; 14 : 6, “아버지께서
아-!■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
셨으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
가 아버 지 룰 아는 것 같으니 …… 내 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버지에로 울 자가 없느 니라”
5:8,9, “일어 나 네 자리를 들고 걸 어가라”
5 : 35,36, “요한은 켜서 비취는 둥불
이 라 내 게 는 요한의 증거 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울 얻 은 줄 생 각하고 성 경 을 상고하거 니 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중거하는 것 이로다”
6:20,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6 : 44—46, “나룰 보내 신 아버 지 께 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을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 막 날에 다
막 10:23. “재 물이 있는 자는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마 9 : 37,38, “이 에 제 자들에 게 이 르 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 므로 추수하는 주인에 게 청 하여 추 수할 일군듭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 시니라”
마 11:27,28,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 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 로 계 시 를 받는 자 외 에 는 아버 지률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 거 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내 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막 2 : 9(다른 경 우이 다) “일어 나 네 상율 가지고 걸어 가라”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 한 보다 큰이가 일어 남이 없도다 그러 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 다 크니라”
눅 24:44,45, “모세의 율법 과 선지 자의 글과 시편에 나룰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옴을 연 이 성경올 깨 닫게 하시 고”
막 6:50, “안심 하라 내 니 두려 워 말 라 하시고”
마 11 : 27,28, 위에 인용람.
시 살리 리라 이 는 아버지륜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8 : 12, 12 : 36, “나는 세상의 빛이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자!으라 그리하면 빗의 아들이 되 리라”
1.
: 25, “자기 생명율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 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 생하도류 보존하 리라”
12:27, “지금 내 마옴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 요 아버 지 여 나룰 구원하 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유소서 그러 나 내 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13: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올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 하는 자는 나름 영 접 하는 것 이 요 나를 영 접하는 자는 나룰 보내신 이룰 영접 하는 것이니라” 15 : 20도 찬조하라.
1.
: 38, “내 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 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 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5 : 14-16 “너 희 는 세상의 빛이 라 ……이 같이 너희 빛올 사람 앞에 비 취 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문 리게 하라’’
눅 9 : 24, “누구든지 제 목숨윤 구원 코자 하면 임올 것이요 누구든지 나룰 위하여 제 목숨올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 26 : 37,38,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옴이 심히 고민 하여 죽게 되 었으니 ” 눅 12 : 50도 참조 하라.
마 10 : 24, 40, “제 자가 그 선생 보다 또는 그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 니……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룰 영접 하는 것 이 요 나를 영 접 하는 자는 나 보 내신 이룰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26 : 34, “내 가 진신로 네 게 이 르 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 가 세 번 나륜 부인하리라”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자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 다. 제 4 복 음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요 3 : 3ᅳ5에 기록된 하늘나라 말씀올 하 신 그가 하늘나라 비유를 말씀하셔 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도 이 상한가?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 비유를
말씀하신 그의 입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10 : 27,28 “내 양은 내 음성 올 들으 며 나는 저희를 암며 저희는 나를 따르 느니라 내가 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 를 내 손에 시 예 앗을 자가 없 느니 라”
눅 15: 3ᅳ6, 14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 유로 이르시 되 너 희 중에 어느 사 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혼 아흡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읍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
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
에 와서 그 벗 과 이 웃올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
을 찾았노라 하리라”
d- 기타 사소한 점에 있어서도 제 4 복음이 공관복음과 모순된다는 것은 확증되 지 않았다.
요 13 : 1,29와 18 : 28을 기초로 해서 제 4 복음은 예수께서 규칙적인 시 간에 유월절 만찬올 잡수셨다고(막 14 : 12, 눅 22 : 7) 분명 히 가르치 는 공 관 복음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해 왔다. 하지만 만일 요한복음 13장에 서술 된 성 만찬이 一이 것과 관련해서 매우 특이하게 발생한 많은 사건들과 구별 되 어_니 산월 u일,목요일 저 녁에 먹는 유월절 정 식 성 만찬이 아니 라면 아닌게 아니 라 매우 이상한 일일 것이 다. 사실 “유월절 전에” (1 절)와 이 뒤에 나오는 “저녁 먹는 중” (3절)은 하나의 짝올(Combination) 이루는 것으로써 여기에 지적된 만찬이 유월절 만찬임올 나타내는 것 같다. 이 유월절 민찬이 민수기 28: 16,17과 일치하여 7일간의 축일의 뒤이어 오며 특히 즐거운 유월절 잔치에 (니산월 15일의 Chagigah) 뒤 이어 오는 것 이 라고 주장 할 때 한가지 해결책이18: 28의 마지막 절(Clause)과 관련해
서 암시 된다. 이 해결책의 장점이야 무엇이든 간에 이 해결책은제 4 복
음이매우많은지면을ᅳ5장 ! 一할애하며 대 유월절만찬 전날 밤에 먹는
식 사에 그처 럼중요성을 부여 하는 학설 보다 최 소한더 타당한 것으로 우
리 의 마음올 끄는 것 이 다.
요 19 : 14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데리고 나와 가바다라 하는 장소 에 마련된 재판석에 앉은 것은 제 육시경이었다. 막 15: 25에 의하면 예수 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제 삼시경이었다. 여기에 다시 모순이 있을 필 요가 없다. 라당한 해결책은 이것이다. 즉 요한은 시간올 로마식으로 계 산하고 있으며 시간을 계산할 때 오늘 우리가 계산하는 식으로 자정과 정
오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이 다(D.C.G., art, “Hour”). 이 런 까닭에 그가 “제 육시경”에라고 말 할 때 이것은 오전 6시와 6시 30분 사이의 어느 때를 의미한다. 한편 전도자 마가는 시간을 유대식으로 계산했다. 그러므로 예 수께서 일몰 후 제 3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는 셈이다. 여기에 는 전혀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일단 이 해결 방법이 채택되면 제 4 복음 의 기 타 성 귀 들이 분명 하게 된다. 1:39,4: 6,52,53의 주석 올 보라.
1.
기타 사소한 논증들은 대체로 성격상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상세 하게 반박 할 필요가 없는 것들로써 다음과 같다.
1.
토박이 유대인이었다면 유대인들을 바로 하나님의 원수들로 표현하는 등(5 : 18,7:1,9 : 22) 유대인들에게 그처럼 경멸적으로 비난하는 식으로 쓸 수는 없 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들을 언급 할 때 제 3 인칭을 사용하지 않았 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즉 사도 요한이 본 복음을 썼을 때 유대인들 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국가로서 배척했다. 더구나 본서를 맨 처음으로 읽 올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었다. 저자가 그들을 위 하여 기록하는 가운데 유대 인들을 언급 할 때 제 3 인칭 올 사용했으리 라 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1.
예수의 제자라면 그 지신이 사용한 강화의 문체를 예수의 문체로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예수께서 어디서 끝내셨고 요한이 어디서 시작했는가를(예 를 들어 3 : 16-20 12 : 44-50) 결정 하는 일은 가끔 어 려 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자는 예수 의 사랑하시던 그 제자였다는 사실을 유의해 야 한다. 그는 예수께 매우 가까왔으므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주인 처럼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같은 문체로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
만일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면 그가 복음서를 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둘은 사싱 내용에서 뿐 아니라 언어의 특징에서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로 인정되고 있거니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서 필자의 More Than Cowqmws(필자의 요한계시록 주석) Grand Rap­ids, Mich., 1949, pp. 17—19와 p.37올 보라. 여기서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요한이 에베소에 살며 본 복음서를 쓰고 있는 동안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 저작의 유일의 책임을 지는 사도 요한의 최종 시인을 받아 그의 문체와 어법의 얼마간 영향을 준 조력자들을 거느 리고 있었올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21 : 24를 참조하라. 그가 계시록 을 쓸 때 이 조력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은 두 기록의 언어의 차이에 대한 부분적 설명이 될 수 있겠다(A.T. Roberst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New York and London, 1932, vol. V, p.xix). 어 떻 든 각 책이 쓰여진 형편이 철저히 알려져 있지 않는 한, 계시록올 쓴 사 람은 제 4 복음서를 쓸 수 없었올 것이라는 식의 단정적인 말은 위험하다 (근거가 불확실하다).
비평가들의 논증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하였다.
요한복음이 최후에 기록되었으며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공관복음올 기 록한 목적과 다르다고 간주하므로써 주요 문제가 적어도 크게 해결된 셈 이 다.
본 복음 자체가 제공하는 기록에 의하면 저자는,
CD 유대인 이었다.
1.
이 것은 그의 문체에서 분명 하다. 93p. 를 보라.
2.
동시에 이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철저하게 정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서 귀결된다. 그는 히브리서에 따라 구약 성경과 70인경을 모두 인용 할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 성귀를 보라. 2:17, 10 : 34,35, 12:40, 13 : 18, 17 : 12, 19 : 24,28,36,37.
3.
이것은 그가 유대 (와 사마리 아) 종교의 신앙,특히 메시 야에 관한 신 앙에 언급한 것으로 봐서 확살하다. 1:41,46,49, 4: 25, 6 : 15, 7 : 27, 42, 12 : 34.
4.
이것은 저자가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정치적 상태에 정통하고 있었음 올 보여주는 증거의 뒷받침올 받는다. 4: 9, 7:35, 11:49, 18:13,28, 31,39. 그리고 유대 명 절과 정 결의식에 정 통하고 있었다는 증거의 뒷받침 을 받는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2: 13,23, 6:4,13:1,18:28,5 : 1,초 막절에 대 해 서 는 7 : 2,37,38, 수전절에 대 해서 는 10 : 22,23. 그리 고 3 : 25, 11:55, 12 : 12, 18 : 28,39, 19 : 31도 보라.
5.
이것은 그가 유대 인들의 혼인식과 장례식에 대한 습관을 소개 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한 것올 설명해 준다. 2 : 1-10, 11 : 38,44, 19 : 40.
1.
저자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형에 대해 상세한 지식올 가지고 있다. 1 : 28, 참조 11 : 1, 2 : 1,12, 3 : 23, 4 : 11, 20, 11 : 54, 12 : 21. 특히 예루살렘과 그 근교에 대해,5:2, 9:7, 11 : 18, 18 : 1, 19:17. 그리고 성전에 대해 2 : 14,20, 8 : 2,20, 10 : 22,23, 18 : 1,20.
CS) 저자는 목격자였다. 저자는 목격자로서 사건들이 발생했던 때를 기억 하고 있 었 다. 가끔 정 확한 시 간까지 . 1 : 29,35,39, 2 :1, 3 : 24, 4 : 6,
40,52,53, 6 : 22, 7 : 14, 11:6,12:1,13:1,2,19 : 14,31, 20:1,19, 26.
그는 예수께서 우물 옆에 앉으셨을 때 예수께서 지쳐 있었음을 알았다 (4 : 6). 그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이웃들이 한 말들올 기 억하고 있었 으며 (9 : 8—10), 그 자신이 예수의 찔린 허리에서 솟아 나오는 피와 물을 보았고(19 : 33ᅳ35),그는 베 드로에 게 오른쪽 귀 가 잘린 대 제 사장의 종 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18: 10), 그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18 : 15). 이상의 여 러 사실과 기 타 많은 점들은 저자가 자기 가 기록한 사건 들의 목격자였옴올 명백히 보여 준다.
1.
저자는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저자가 그의 주님과 성만찬에 탕 여했다는 사실은 그가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이어 야 함을 보여 준다(13 : 23). 그의 베드로와의 친밀한 교제(공동생 활) 역 시 이 것올 증명 하는 것으 로 보인다(1 : 35-42, 13 : 23,24, 18 : 15, 16, 20 : 2, 21 : 20 -23). 저자 가 사도들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동과 말과 감정에 대한 그 의 깊은 지식에서도 나타난다. 2:17,22,4:27, 6:19, 12 : 16, 13:22, 28, 21:21. 그리고 만일 그 누군가가 이 모든 경우에서 그들(3제자')의 반응이 본 복옴에 기록되어 있는 바의 제자들이 핵심구롭 (3제자)에 속해 있었는지 분명치 않으며, 따다서 우리가 도출한 추론이 전혀 신빙성이 었 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열 두 제자”룰 분명 히 가리키는 기 타 성 귀들에 주목 할 수 있다(6 : 66-71, 20 : 24—29). 저자는 해 심구 i- 안에서 오고 간 말들올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 그가 핵심구룹의 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1 : 35-51 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자가 안드래와 시몬 베드로와, 빌립 과 나다나엘과 관련해서 진술되어 있움도 주목하라. 그들은 모두 열 두 제 자들이었다.
1.
저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제시한 모든 사실에서 이숄 어 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추론임이 확실하다. 저자가 다른 제자들의 이 름을 말한 반면 요한이 나그의 형 제 야고보를 말할 때는 이렇게 뚜렷 하
게 지적하고 있지않옴올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 사실은의미심장한 것
이며 전자의 신원올 가리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이름을 삭제한 과정 에 따라 저자가 누구인가 ? 라는 질문에 대 한 대 답에 도달하기는 그렇게 어 렵지 않다. 열 두 제자의 이름을 기억하기 쉽게 해주는 옛 시가 하나 있다(마 10 : 2-4, 막 3 : 16-19, 눅 6 : 14ᅳ 16, 행 1 : 13 참조). 즉,
“Peter and Andrew, James and John,
Philip and Bartholomew,
Matthew next and Thomas too,
James theLess and Judas the Greater,
Simon the Zealot and Judas the Traitor.”
제 4 복음 역 시 “열 둘” (6 : 67,70,71, 20: 24)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이 말(열 둘)이 공관복옴과 같은 구룹의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 고 생각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몰 중 누구가 저자였울까?
배신자 유다는 즉각 제거하자. 저자가 그를 가리켜 말할 때는 그의 이름 을 부르니까(6 : 71, 12 : 4, 13 : 2,26,29, 18 : 2,3,5).
21 : 24를 20절과 비교하면 저자는 성만찬 때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었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 었다는 것은 분명 하다. 저자는 베드로와 구별된다. 아직 열 제자가 남아 있다. 여 기서 저자를 밝혀 야 한다.
하지만 마태의 이름은 즉각 배제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과 연관되어 있으니 까. 다음으로 예수의 가장 측근의 친구였던 제 4 복음의 저자(13 : 23) 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열심 당 시몬과 같은 다소 알려지 지 않은 제자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유다(위의 시에 서 “The Greater”라 일컬어진 야고보의 유다,또는 다대오로서 성경에서
“7V롯인이 아닌 유다”라고 한 때는 이 사람을 가리킨다•)와 도마는 제 4 복 음에서 이름이 나와 있다(14 : 5,22). 이것은 이름올 대지 않은 저자와 01 사람들을 분명히 구별한다.
그러면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와 빌립,바돌로메의 이름이 남는다. 요 한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어떻게 데려왔는가를 말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에서 열 두 제자의 명 단에는 빌립과 바돌로메가 항상 함께 진술되 었다. 요한은 바돌로메를 진술한 적이 없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나다나 엘을 진술 한 일이 없다. 이 러므로 요한복음의 나다나엘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바돌로메_나다나엘은 그의 본명 이요 바돌로메는 부자간의 관계를 나타내며 돌마이의 아들이 란 뜻이다一임이 틀림없다(C.E. Macar- tney의 Of Them He Chose Twelve, Philadelphia, 1927, pp. 63, 64를 참 조하라). 만일 본문에서 이름올 대지 않은 제자가 본서를 일관해서 동일 한 인물이라면 우리는 그를 1 : 35-51에서도 만난다. 여 기서 그는 안드레 와(40절) 시몬 베드로와(41,42절) 분명히 구별되며ᅳ베드로의 이름은 2] 장이 제공하는지식을 근거로 하여 이 미 삭제 한 바 있다-빌립 과(43,44절, 나다나엘(바돌로메,45ᅳ51절)로 부터 구별된다.
안드레와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름도 떼면 야고보와 요한만 남는다. 하 지만 베드로는 이미 순교자의 면류관올 얻었지만(19절) 제 4 복음서의 저자 는 본서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24절의 현재시상을 주목하라.) 여전히 살 아서 증거하고 있었음이 21 : 19ᅳ24에서 분명하다. 베드로가 야고보 보다 오래 산 것올 우리가 알므로(행 12장) 야고보가 제 4 복음을 쓸 수 없었 으리 라는 것은 분명 하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남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밟아 온 논증에서 우리는 이 결론이 제 4 복음 자체가 제공한 재료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음을 주목해 야 한다. 공관복음과의 비 교는 우리의 결론을 확인해 준다. 요 1 : 35ᅳ40에 서 제 4 복음서 의 저자 는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의 한 사람이었음을 안다. 다른 두 제자는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였다. 마가복음도 최초의 제자들의 명 단을 가지고 있 다 C1 : 16—20, 29). 이 명 단에 는 이 름이 네 개 나온다. 즉 시 몬과 안드레 라 야고보 요한이다. 두 명 단올 비교해 보면 제 4 복음서의 저자가 세배대 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이 라는 것은 다시 분명 하다.
이 논증의 힘올 피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시도는
21 : 2절에 “다른 제자 둘”(시몬 베드로와 도마,나다나엘,세배대의 아들 들)을 진술한 사실에 집중 하는 수가 많다. 이 “둘”은 12 사람에 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그들의 한 사람이ᅳ장로 요한인 것 같은대ᅳ저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점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있 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제시한 모든 증거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이 외에도 이와 같은 논증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비록 저자가 사 도 요한이 아니고 21 : 2에 언급된 어떤 잘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다 하더 라도 요 21장에 기록된 이 야기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 을 본 목격자였으 며, 예수가 최상적 인 의 미의 하나님 (1 : 1ᅳ 18)이시며, 예수께서 그를 따르 는 자들에게 즉각 하나님의 아들 메시 야로 인정 받았다는 것을 모든 시 대 의 교회에 선언한 목격자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 능한가? 어떻게 이것올 심리적으로 설명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문제에 는 만족 할 만한 해 결책이 오직 한 가지만 있을 뿐이 다. 그것은 예수는 살 로 그가 주장하신 그대로의 신분이며 이 사람들이 그를 증거한 그대로의 신분 즉,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와 그들 의 증거를 진리로 받아들이라. 그러 면 문제는 살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증거 는 제 4 복음 자체로 부터 나온 결론과 일치 한다. 이 처 럼 유세 비 우스는 이 문헌 (제 4 복음서 )을 마음대 로 철저 히 연구 검 토한 후 에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 의심 할 여지없는 이 사도의 저작을 지적합시 다. 그가 쓴 복 음을 맨 먼저 인정합시다. 그것은 하늘 아래 모든 교회에서 읽혀지기 재 문입니다……이처럼 요한은 그의 복음을 펴 나가는 중에 세례 요한이 투욕 되 기 전에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말해 줍니 다. 하지만 다른 세 전도자는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의 사건들을 진술하고 있읍니 다,,C교회시* III권 xxiv,1-13). 이 유명한 교회사가는 제 4 세기 초에 이 런 말을 기 导했다.
그에 앞서 오리 겐은 CAD210ᅳ250에 활약했다 ) 사랑받은 제자 요한이 제 4 복음과 계 시 록을 썼다고 말했 다. 오리 겐은 요한복음에 대 한 주석 에 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 면 복음서는 넷이 되는데 나는 복음서들의 첫 열매 는 귀하(암부로 시우스)가 내 능력에 따라 연구하라고 명 하신 복음 즉 요한복음이 라고 생
각합니 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관한 주석). 같은 문단에 서 그는 제 4 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 요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는 오리 겐에 서 더 거 슬러 올라가 그의 스승인 알택 산드리아의 클레 멘트에 도달 할 수 있다(190-200년에 활약하였다). 그는 한 사람의 요한, 즉 사도요한 만올 알았다. 그는 제 4 복음을 분명히 그에게로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후로 요한은 외적 사실들은 복음서들에서(공관복옴) 이미 명 백히 된 것을 알고 그의 친구들에게 권면올 받으며 성령의 영감읍 받아 영적 복읍 을 지 었다. ”(유세 비우스,교회사 VI, xiv, 7.) 클레멘트는 노년의 사도 요 한에 관한 아름다운 이 야기 하나를 간직 하고 있 었 다. 49p. 를 보라. 클레 멘트는 제 2 세기 중업에 태어나 속사도들에 가장 가까이 접해 있었다. 그 는 상당한 지식 인이 었으며 널리 여 행하였다-
이와 같은 시 기에 터 룰리 안은 제 4 복음올 사도 요한에 게 돌렸다04^1- inst Marcion IV, v).
클레멘트의 동 시 대 인은 이 레 네우스였다. 그는 사도 요한올 잘 알았던 폴리 갑의 생도였다. 폴리갑에 게 가르침올 받았으나 진리 를 잘 못 알았던 Florinus에게 부치는 편지에서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풀로리 누스여, 내 가 조심스럽 게 말하거 니 와 이 런 견해 들은 건전한 교리와는 상관이 없읍니 다. 이런 의견들은 교회와 일치하지 않으며 이 런 의견들을 믿는 사람들올 큰 악에 빠지게 합니다. 교회 밖의 이 단들도 심 지어 이 런 의견들은 감히 선언한 적이 없읍니 다. 우리들 보다 먼저 장로 였으며 사도들올 동반하고 다녔던 사람들은 이 의 견들올 당신에게 전하지 않았읍니 다. 나는 아직 어 린 소년일 때에 동(東)아세 아의 폴리갑의 집에서 당신올 알았읍니다. 그 때 귀하는 왕실의 지체 높은 사람이었고 그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쓰고 있었읍니 다. 나는 최근에 일어 난 일들 보다 그 당시 사건들을 더 분명히 기억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것은 영혼 과 함께 성장하며 영 혼과 함께 결합되어 있으므로 나는 복받은 폴리 갑이 앉아 변론올 벌인 장소 까지도 말할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들어왔다가 나갔으며 그의 생활의 성격과 그의 몸매와 그가 백성들에게 전한 말씀, 그가 어떻게 요한과 기타 주님을 본 사람들과 교제를 말했으며 어떻게 그 가 그들의 말과 그가 그들로 부터 주님에 관해 들은 일들과 그들의 기적,
그들의 가르침올 기 억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폴리 갑이 이것 들올 생명의 말 씀의 목격자로 부터 받았으며 모든 일들을 성경과 일치해서 보고 했는가를 말할 수 있읍니 다. ” (유세 비우스,교회 사, v. XX, 4-7. )
소아시 아에서 고울지방 까지 여 행했고 로마교회와 빈번한 접 촉을 가졌던 이레네우스는 제 4 복음서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을 사도 요한에 게 돌렸다. 사도 요한의 제자의 제자였던 사람으로 부터 온 이 증거 는 그 증거의 힘올 잃을수 없다. 더구나 그의 많은 여행과 그 당시의 온 교회
와의 친밀한 관계때문에 이레네우스가 제 4 복음서에 대해 말한 것은 매
우 의의가 큰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관한 그의 제 언은 교회 의 제 언으로 간주 될 수도 있 다. 유세비 우스의 기 록에 의 하면 그 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주님의 품에 의지해 누워 있던 주님의 제자 요한이 아시아의 에베소에 살고 있을 때 이 복음(제 4 복음)도 내었다.”(교회사, V, viii, 4.)
이레네오마저 복옴이 네개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Against Heresies, III, xi, 8).
불완전한 신약성경 목록인 무라토리 단편집은 빈약한 나전어로 쓰여져 있으며 밀라노 암부르스 도서 관에 서 이 것올 발견한 L.A. 무라토리 (1672ᅳ 1750) 추기경으로 부터 이름을 따왔으며 그 기원올 180—200년에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무라토리 경전은 다음과 같은 글을 포함하고 있다.
“제 4 복음서는제자들 중 한 사람인 요한의 책 이 다. 그의 동료 제자들
과 감독들의 권면에 응하여 그는 ‘나와 삼일간 꼭 붙어 지내세. 그런 다
음 피차에 대하여 계시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서로 말해보세’라고 말 했다. 그날 밤 그들이 총괄적으로 기억했던 것올 그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던 사람은 요한이었음이 사도의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에게 계시되었다. 그러 므로 비 록 각 복음에 있는 사실들로 부터 여 러 가지 다른 발췌물이 나 오긴 했지만 신자들의 신앙에 불화가 없었던 까닭은 그들이 모두 한 성령 의 인도를 받아 그C예수)의 탄생과 수난과 부활과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 와 그의 재림,즉 처음에는 치욕에서 발생한 겸허한 강림이요ᅳ이것은 이 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一재림은 앞으로 올 것인데 왕의 능력과 영광 가 운데 오실 일에 관계되는 모든 일들이 선포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직접 “우리가 둘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 으로 만진바라”라고 말하며 이 일들을 그처 럼 일관해서 인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그가 이처럼 목격 자였올 뿐 아니 라 주님에 대한 놀라운 모든 일들올 그 순서 대로 들은 자 요 말한 자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무라토리 경 전은 행라어 에 서 옮긴 번역물이 요 로마에 서 또는 적어도 로 마 영향력권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의 목적올 위해서 안드 레와 같이 제자들의 한 사람이었던 제자 요한이 여기에 제 4 복음서의 기 자로 서술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중요하다. 본 복음이 생긴 정확 한 양상과 관련되는 그 홍미 있는 이 야기는 전설로 간주해야 한다. 그것 은 본 복음이 나왔을 때까지 다른 제자들이 살아 있었다는 모든 전통과 반대되며 있올 법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런 이유 때문에 이 정황적 인 (Circumstantial) 이 야기로 부터 추론올 도출하는 것은 극히 위 태한 일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일이 저질러 진다. 첫째 “ut recogno- scentibus cunctis Johannes suo nomine cuncta describeret,> (llzi#01 # 괄적으로 기억해 낸 것올 그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던 사람은 요한이었다”)절 의 허두를 때는 말은 이렇게 번역된다. 즉 “그들은 모두 수집가로 행 동하며.” 다옴에, 이 사람들이 모두 수집가들이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 자 신이 본서를 실제로 쓰는 데는 매우 사소한 역할올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끝으로, 전적으로 허구적인 “장로” 요한이 다시 한번 저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적은 것에 너무 많은 것을 기초로 하는 셈이다 ! 무라토리 경전에서 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정 당한 결 론은 180ᅳ200년 경에 로마 교회가(적어도 로마영향력권의 중요한 인물) 게 4 복옴을 사도 요한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폴리크라테스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이 시기에 글올 썼다. 장 소도 의의 가 있으며 시기도 그러하다. 에베소에서 이처 럼 초기에 (거의 19 6년) 여기에 살던 사도 요한에 관한 전언은 생생한 바가 있는 것이다. 폴 리크라테스는 말했다. “내 친척 중 감독이 일곱 사람이고 나는 여덟째이 다”라고. 그는 유월절 논쟁 (부활절은 그 달 14일에 축하 해 야 하는가ᅳ그 날이 무슨 날이든ᅳ아니 면 항상 일요일에 해 야 하는가)에 관해 충고하였 다. 그의 편지에서 그는 요 13 : 25에 대해 언급할 뿐 아니라(적어도 그 문
단에서 확인된 사실에 언급) 에베소의 요한의 체류와 죽음에 대해서도 언 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더구나 주님의 품에 기대어 누웠고 주교관(冠)올 쓴 성직자요 중인이 요 교사가 되었던 요한은 에베소에 영면하고 있다”(Le故r to Victor and the Roman Church concerning the Day of Keeping the Passover, preserved by Eusebius, 교회사,V, xxiv).
유세비 우스에 의 하면 수리 아 안디 옥 사도들의 제 6 대 감독이 었 던 데 오 빌 로는 이 보다 수년 일찍 썼는데 요한올 제 4 복음의 영 감 받은 저자로 명 백히 이름올 밝히고 있다. 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런 까닭에 성문서들은 우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모든 영 감 받은 사 람들의 한 사람인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말하며 처움에 하나님이 혼자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 님 안에 계셨음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7b Autolycus II, xxii).
앞의 글에서 부터 몇가지 사실이 분명해 진다.
C1) 정 통교회 안에 제 4 복음서 저 작자에 대 한 한결 같은 전통이 있는데 이 전통은 제 4세기 초의 유세 비우스로 부터 170-180년에 활약한 데오빌 로에 까지 소급 될 수 있다.
1.
이 한결 같은 전통에 의하면 제 4 복음은 요한이 썼다. 대체로 이 요한은 사도요, 그리스도의 품에 의지해 누웠던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것 까지 분명 하게 되 었 다. 주요 증인들은 유세 비 우스와 오리 겐, 알택산드리 아의 클레멘트,터 툴리안, 이레네우스, 무라토리 경전의 저자와 데오빌로 이다.
2.
이 증인들의 최초의 한 사람인 이레네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의 제자였다. 사도가 저작자라는 전통이 이처 럼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는 추론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C4) 광범한 여행과 온 교회의 신념에 정통하고 있던 이레네우스는 대표
적 증인이라 칭함올 받을 수 있다. 그는 전체 기독교 사회의 신앙올 대 표
했다. 터룰리안과 알택산드리아의 클레맨트, 이레네우스, 데오빌로는 제
2 세 기 마지 막 4반기 에 제 4 복음이 알려 져 있었으며,기 독교권 즉 아프리 카, 소아시아, 이텔리, 고울, 수리아에서 읽혔으며 본서가 잘 알려져 있 던 요한의 저작으로 돌렸음올 보여 준다.
1.
이 한결 같은 초기 전통에서 나온 외증은 제 4 복음 자체에서 나온
내증과 일치한다.
1.
우리가 검토해 온 증거는 세가지 중요한 것올 증명해 준다. 즉,
1.
제 4 복음은 초기로 부터 존재해 있었음에 를림 없다는 것이다. 분명 코 170 년경에 본서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쓴 성문서라 일컬어지고 본 성 복 음이 너무 귀중히 여김올 받은 나머지 사람들이 이를 변호함에서 기꺼이 죽으려고까지 한 어 떤 교리적 입장올 증명 하는 일에 사용되 었을 때 그 기 원은 이보다 시기적으로 더 이른 날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론해도 좋 올 것이다.
b- 본 복음은 그 가치와 권위에 있어 다른 복음서들과 동등(최소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1.
본 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이단으로 구별된 사람들 중에 서 타티안(170년 경 )은 그의 스승이 죽은 후에 이단이 되었는데 그와 Justin Martyr는 제 4복음을 받아들여 이것 올 그의 대관복음CD妨essarow)을 저작 할 때 사용하였다. 사실 타티 안의 책은 제 4 복음의 처음 다섯절로 허두를 시작하고 있다.
140년에서 180년까지 존재했던 발렌티누스 학파의 Heracleon은 심지어 제 4 복음에 대 한 주석 까지 도 썼 다. 역 시 이 학파의 Ptolemy는 본 복옴의 저작올 “그 사도”에게 돌렸다. 제 2 세기 중엽의 말기온은 모든 복옴올 배 척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그 자신의 복음서를 준비하여 그의 출처로써 누가복음의 여기 저기가 절단된 것올 사용하였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의 저자였 다는 것 을 그가 부정 하였 다는 사실은 확인되 지 않았다. 그가 본 복음올 배척한 것은 그가 본서의 저자를 유대교인으로 간주했다 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이 런 결론을 갈 2:9,11-13에 기록된 바
울의 말씀에 기초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말씀을 크게 오해하였다(터룰리 안의 Against Marcion, IV, iii을 참조하라).
이제 강조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즉 만일 이 이단들이 그둘의 가르침이 제 4 복음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본 복음을 사도가 아난 저자에 돌릴 수 만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00—170년 어 간에 활약한 정 통 교회 의 저자들 중에 Justin Martyr 는 (변증서 1,61) 요 3 : 3ᅳ5에서 인용한 것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그는 본 복음에서 많은 표현을 사용하였다(그의 저서 To,》/zo와의 대화 105도 보라 장). 더구나 그의 로고스 교리는 거의 제 4 복음에서 끌어 내 온 것이 확실 하다. 이외에도 Justin의 제자 타티안이 이것을 그의 대관복음 에 포함시켰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파피아스와 폴리갑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미 말한 것을 참조하 기 바란다. 유세 비 우스는 파피 아스가 “제 일 요한 서 신으로 부터 의 인용문 들을 사용하였다”고 말했다(교회사 IV,xxxix, 17). 제 4 복옴올 그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과 관련해서 그 어떤 논증을 이것에 기초 할 수 있는 가 없는가 하는 문제 는一제 4 복음은 요한 서 신과 문체 가 비슷하다_여 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제 4 복음의 정신(spirit)은 익나티우스 서신들(짧은 교정본)의 어느 부분 에서 나 분명하다. 그가 순교하였을 때 (110년 경), 본 복음을 사실상 본 일 이 있으며 그것에 언급한 일이 있다는 것올 절대 확실하게 증명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지금까지로는 가장 자연스런 결론인 것으로 보인 다. 유사점들이 너무 많고 너무 현저하다는 인상을 많은 사람에 게 주었으 므로 이 유사점들이 어떤 모순되는 추론을 정 당화하지 못한다. 이 인유(引 喻)들이 정확인 인용이 아닌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길에 있던 죄수로 부터 그 누가 다른 것올 기대하겠는가? 다음 인 용문은 그 증거를 제공한다.
익나티우스
“왜냐 하면 만일 내가 짧은 시일 안 에 여러분의 감독과 인간적이 아닌 영 적인교제를가졌다면 만물이 하나로 조화를 이둘 수 있도록 교회가 예수 그 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 가 아버지와 연합되이 있듯 그(에수)의- 연 합되 어 있는 여러 분을 내 가 얼 마나 더 복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읍니까?” (에베소 교인들에게 V,i).
“주께서 아버지께 연합되어 있어서 그와 함께 가 아니 고서 는 아무 것 도 아니 하시 며 자기 혼자서 나 사도늘올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 것 처 럼 여러분은 감독과 장로들과 함께가 아니 고시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TO the Magnesions VII, i).
“나는 하나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 의 신■을 원합니 다…그리고 음료로는 그의 피를 원하니 그의 피는 썩지 않 는 사랑인 것입니다”(로마 교인돌에게 VII, iii).
“대저 그것(성령)은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시기 때문입니 다”(빌립보 교인들에게 VII, i).
제 4 복음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 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가 되 게 하려 함은”(17 : 23).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 니’’(5: 19V
“내 살을 먹고 내 피불 마시는 자는 영 생 올 가졌 고 마지 막 날에 내 가 그룰 다시 살리 리 니 내 살은 참된 양식 이 요 내 피 는 참된 음료로다”(6 : 54,55).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나니 성 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 러 하리 라”(3: 8).
만일 요한의 글을 상기시키는 이상의 몇몇 표현과 기타 다른 표현들이 익나티우스가 제 4 복음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제 4 복음의 기원일은 110년 이전의 어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본서가 98년 이 후와 80년 이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는 전래적 신념에 가깝다.
하지만 제 4 복음서 저작 년대에 관한 전래적 신념은 어떤 파피루스 사본의 초기 의 요한복음 단편 (/rap«e«0이 실제로 발견된 데서 강한 확증을 얻었다. 이 사
본은 다른 텔라어 파피루스들과 함께 이짚트에서 발견되었고 John Ryla- nds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중부 이집트의 기독교 사회에서 생 겨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고문서학적 증거를 근거로 할 때 이 파피루스 단편은 제 1 세기 전반시대에 그 지역에서 배포된 사본에 속하는 것임이 확 인되었다. 이 단편은 요한복음 18장의 내용올,종고 있다. 오른 쪽 페이 지에는 31-33절이 왼 쪽 페이지에는 37—38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이 복옴이 제 2 세 기 초기에 중부 이 집트에서 이 미 배 포되 고 있었다면 본서는 그 이전에 저작된 것이 를림없다. 전통에 따라 본 복 음이 기록된 에베소로 부터 이 사본이 배포된 중부 이 집트까지의 거리는 매 우 멀다. 따라서 일부 권위자들은 저작 년대부터 이집트에서의 배포시기 까지는 30년의 시간이 걸렸을 것임올 인정한다. W.F. Allright의 진술은 의 미 심 장하다.
“제 2 세기 초기 때 의 요한복음의 단편과 요한에 게 의존하는, 동시대 의 가경적 복음이 센세이셔 널하게 출판:됨으로써 요한후음올 과격하게도 후 기 저작년대로 잡는 모든 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으며 본 복음이 제 1 세 기 이후에 저작 될 수 없었음을 증명하였다”(Frow Stone Age to Christi­anity, p. 299; 그리고 C.H. Roberts의 Unpublished Fragment of the Fourth Gospel, Manchester, 1935 도 보라).
그러므로 이것은 제 4 복음의 저작일에 대한 전통적 견해가 결국 반박 할 수 없 云 증거의 확증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수적인 입장이 온통 잘못된 것이라 고 오래동간 주장해 온 저 부정적인 비평가들이 크게 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오늘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Volkmar의 외침을 보증(시 인) 할 수 있다. 즉 “제 4 복음의 저작이 제 2 세기 중엽에 이뤄졌다는 비평가들의 논문이 온통 끝장이 났음은 확실한 것이다 ! ”5>
5) 여러 비평가들은 제 4 복음의 저작년대를 이렇게 잡았다. F.C. Baur는 160— 170년, Volkmar는 155년,Zeller와 Scholten은 150년, Hilgenfeld는 130— 140년, Keim 은 130년, Schenkel 은 115—120년,Reuss, Nicolas, Renan Sabatier, Hase는 110—125년, Spott(E.F.)는 95—115년.
PH. Menoud 는 L’ Evangile de Jean d'a pres les recherches recentes, Neuchatel and Paris, 1943,에서 다음과 많이 괄목 할만한 는평으로 결론올 지 었다.
“On peuc dire, sans trop s’avancer, que les defenseurs de l'autenticite johannigue occupent aujourd'hui des positions plus favorables qu’au
더구나 우리가 외증을 갖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제 4 복음이 제 2 세기 초 기에 (그리고 이미 제 1 세기에도) 소아시 아에 이 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 었으므로 소아시아에서 서신들을 쓴 익나티우스가 그것올 읽었올 것은 매 우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
제 2 세기 중간 이전에는 Justin Martyr나 익나티우스나 다른 아무도 본 복음의 저자로 요한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이 사랑 받은 제자와 너무 가까이 지낸 나머지 그의 복음에서 인용하거나 언급함에서 그의 이름올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 다. 이외에도 익 나티우스가 쓴 사도들이란 책은 크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베드로나 바울이 한 것 처럼 그대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였고 나는 죄수(convict)이 다”(Tc? the Romans IV, iii).
그러 므로 제 4 복음의 한 귀절을 연상시 키 는 표현을 사용함에 서 그가 다 욤과 같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 각하면 틀림 없겠다. 즉 다른 사 람이 아닌 진짜 사도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싶어 했올 정도 로 소중히 여겼던 진리에 책임올 진다는 사실이다.
제 4 복음의 초기 저작 년대 를 지지 하는 또 다른 사실 하나는 본 복음이 셈적 어조를 강하게 며고 있다는 것이다(93, 94p.룰 보라).
사도의 저작이라는 가장 초기의 증거는 본 복음 자체에서 발견된다. 하 나님 의 인도를 받은 요한이 처 음 20장을 쓰고 20: 3,31에 서 발견되 는 아 름다운 결론으로 맺었으며,에베소에 있던 또 한 사람의 지도자가 성령의 인도와 사도 요한의 시인올 받아 그의 사랑하는 친구(사도 요한)의 입에 서 들었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21 : 20ᅳ23)란 언급으로 끝을 맺는 아 름다운 이야기를 추가 한 후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이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을 부록으로 달았다.
debut du siecle, par exemple. Car les recherches recentes tendent a ecarter les obstacles que la critique a dresses sur la voie de 1’identification du 'Bien-Aime* avec le fils de Zebedee.w
역시 같은 저자의 저서 “Le probleme johannique,” RThph, 29(1941),236 —256, 30(1942), 155ff;31(1943), 80—1이올 보라.
하지만 1927년에 Vincent Taylor는 제 4 복음과 일부 최근 비평에 있어서의
*전통적 입장의 붕괴”에 대해 말했다. /// 25(1927) 725ᅳ743p.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 거 가 참인줄 아노라” (21: 24).
지금까지 우리는 내증과 외증이 이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음올 살펴 보 았다.
복음서 들에 묘사된 대 로의 요한은 세 베 대 와 살로메 의 아들이 었 다(막 1 : 19,16 : 1,2. 참조 마 27 : 56). 세 베 대 는 사업 이 번영 한, 부유한 어 부였 던 것 같다. 그는 종들을 고용하고 있었다(막 1 : 20). 살로메는 동정 녀 마리아의 자매였다고 생각된다(마 27 : 56, 참조 요 19 : 25). 만일 이것이 사실이 라면 예 수와 요한은 사촌간이 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보통 첫째 로 이름이 나왔으며 둘 중 형이었던 것 같다­사도 요한이 예수를 따르기 전에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만년에 이르러 사도는 그가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고 그의 추종자가 되기로 결심 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때가 제 10시쯤 되었더라’’ 고 했다(1 : 39). 이 처음 만남에 뒤 이어 얼마 후에는 정식 제자가 되기 위한 결정 이 있었다(막 1 : 16 이하, 눅 5 : 10). 그런 다음 한 사람의 사 도로새(마 10 : 2) 예수께 부르심을 받아 직책을 받았다.
요한과 야고보는 가끔 격정을 발하였던 억압된 감정올 가진 사람들이었 던 것 같다. 예수는 그들올 “우뢰의 아들들”(막 3: 17)이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유숙시 키기를 거부했올 때 세베대의 아들들은 울분을 터뜨리며 “주여 우리가 불 을 명 하여 하늘로 쫓아 내 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 나이까”(눅 9 : 54)라고 했다. 요한이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과 을 분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잘못 배태된 말로 표현된 것은 예수 에 대한 그의 사랑이 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긴 하지만 정식 제자는 아니었던 사람에게 요한을 간섭하게 한 것도 역시 예수께 대 한 사랑이 었 다(눅 9 : 49, 50).
그가 자기 친척 으로 구성 된 핵 심 사회(세 제 자)에 속해 있 던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요한의 진짜 겸 손의 표시 이 다. 그가 주님 올 강 렬하게 사랑하긴 했어도 제 4 복음에서 강조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 한 그의 사랑이 아니라 사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 요한은 자기를 “예수께 서 사랑하시 는 제자 C13 : 23)”라고 불렀 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서들에서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이 베드로와 자주 짝지어 다닌 것올 본다(행 3:1, 4 : 19, 8 : 14). 그는 예 수의 부활하신 후에 예 루살렘 교회의 기둥의 하나가 되 었다(갈 2:9행 15 : 6). 그는 유대 전쟁이 발발 될 때 예루살렘을 떠 났음에 틀림 없다. 잔 (T. Zahn)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틴에서 소아시 아로 왔다고 말하면 틀림이 없다. 만일 폴리갑이 그가 죽던 날(155 년 2월 23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86년의 생애를 회상하며,그가 69세에 세례를 받았다면,그리고 만일 그의 개심이 이레네우스에 의하면,Against Heresies III, iii,4) 사도의 사역의 일환이었다면 소아시아로의 이 이거는 유대 전쟁의 발발의 결과로 이날 이전에 있었음에 틀림 없겠다. 그렇다면 60내지 65세 였을 요한은 이로써 그곳에서 기독교적 생활의 양육을 위 하여 30여년간을 헌신할 수 있었을 것 이 다” (T/z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의 “사도 요한” 항에서).
요한은 에 베 소에 수년간 살았다. 하지 만 81—96까지 통치 한 도미티 안 황제 재위기간의 어느 때 그는 밧모섬에 추방되었다. Nerva의 둥극과 함 께 요한은 에베소에 되돌아 올 허락을 받았고 에베소에서 트라얀 황제의 통치가 시작되던 때 즉 98년에 죽었다.
사도가 요한복음을 쓴 장소가 에 베소였다는 전통은 거 의 이구동성으로 주장되 고 있 다(유세 비 우스,교희 사 III,xxiii 1,6,V,viii, 4, xxiv, 알 렉 산드리아의 클레 멘트,W/w Is The Rich Man That Shall Be Saved? XLII, 최근의 문헌에서 이 유력한 전통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 도가 거듭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제 4 복음은 요한이 밧모섬으로 추방되기 전에 쓰였는가? 후에 쓰였는가? 계시록 보다 일찍 쓰였는가 나중 쓰였는가?
본 복음의 저작 년대는 일찌감치 80년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베드로는 21 : 19가 암시 하는 대 로 그의 유업 (상속)을 받았었고 바울도 그의 면류관을 받았었 다.
6) F. Godet, Commentaire sur I'Evangile de Saint Jean, Paris, 1881, vol. I. pp. 354ᅳᅵ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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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소아시아의 사도 요한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이 이 미 쓰여졌고, 제 4 복음의 저자가 그것들을 읽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유대 인들은 교회의 확립된 원수가 되었었다. 예루살렘 함락이 언 급되지 않은 것은 함락 이후 수년이 지난 뒤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편 본 복음 저작연대를 아주 늦게 잡는다면 98년이다. 단 이레네우스와 제롬의 증거가 근거가 되는 경우에 그러하다.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는 트라얀 황제 때까지 요한이 남아 있어서 사도들의 전통의 참된 증인이 되었다”(Against Heresies III, iii, 4).
그러므로 저작연대는 80년과 98년 사이의 어느 때에 있다. 저작연대를 더 정 확하게 더 뚜렷 하게 결정 할 수는 없올까 ? 에 피파니 우스에(제 4 세 기 ) 의 하면 요한은 나이 90세 가 지 나 밧모섬에 서 돌아온 뒤까지 본 복음 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초기 교부들의 저서에서 하 나도 찾아 볼 수 없다. 80년에 월씬 더 가까운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그 이유로써 본 복음의 문체가 성숙된 것이긴 하지만 연로 한 저술가의 것이 아니 란 점을 든다. 이 견해에 진실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 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에서 조심해 야 한다. 만일 사도가 67년에 (바 울이 죽은 해 ) 에 베 소에 왔다면, 그리 고 만일 그가 그때 60세 내 지 65 세가 되어 있었다면(Zalm) 그가 A.D. 80년에는 73세 내지 78세가되었음 이 틀림 없겠다. 그러므로 요한은 어쨌든 “노 저술가”였던 셈이다. 이 문 제는 이렇게도 접근해 볼 수 있겠다. 즉 만일 요한이 예수께서 돌아가셨 을 때의 나이가 25세였다면(A.D. 30년) A.D. 80년경에는 75세였음에 틀 림 없다.
하지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젊었고 강인했다. 알렉산드리 아 의 클레맨트는 그가 밧모에서 돌아온 뒤에도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들의 주 관리인으로서 매우 활동적인 사역을 수행했다고 말하고 있다(W/w Is The Rich Man That Sail Be Saved? XLII). 그렇다면 그는 90세가 넘 었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클레멘트가 방금 인용한 글에서 우리에게 전달 하는 홍미 있는 이야기에 의하여 이렇게 연로한 나이에 도둑의 괴수를 개 심시 킬 수 있었고 “감독둘올 임명 하고 큰 교회들올 정 돈하며 이 리 저리
다닌 그(요한)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 하나를 쓸 수 없었 !'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특히 이 계획이 그의 마음을 오래 동안 사로잡고 있었다면 말이 다. 교회 사는 90세 가 넘도록 매 우 책 임있는 임무들올 가지고서 활발한 사역 을 계속한 사람들의 예를 적지 않게 제공 하지 않는가 !
그럼에도 이와 반대 견해 즉 요한이 본 복음올 맨 처음에 썼다는 즉 그. 가 밧모섬에 추방되기 전에 썼다는 견해, 본서의 저작에 뒤이어 서신들이 쓰여졌다는,그리고 계시록이 맨 마지막에 쓰여졌다는 견해가 계속되어 오면서 호소력 올 가지 고 있 다(Lenski 요한복음 주석 p. 20을 참조하라).
이것은 십중팔구 이 견해가 자연스럽고 논리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아 문제는 어느 쪽으로든 뚜렷이 대답을 할 수 어는 문제이다.
n. 독자와 저작 목적
저자가 본 복음올 집필 할 때 의중에 둔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느 다른 세 복음을 바로 잡기 위한(교정 ) 것이 라고 말한다. 7> 지금까지 이 미 실" 떠본 것올 기초로 할 때 이런 말은 허용 될 수 없다. 공관복음과 제 4 복음 사이 의 진짜 모순은 존재 하지 않는 것 이 다.
그의 목적 은 공관 복음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 는가 ? 이것이 알택 산드 리아의 클레멘트의 진술에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즉 외적 일들올 다룬 복음들이 이미 쓰여졌지만 이것들 보다 더 깊은,영적 배경이 제시되어야 했다. 유세비우스도 이 견해를 변호하고 있다. 비록 다소 다른 의미로서 이긴 하지만, 즉 요한은 다른 사람들이 주지 못한 초기 유대사역 의 기록 을 제 공한다는 것 이 다.
이 설은 사도가 공관복음들을 읽었음올 전제하고 있다. 최소한 그가 세 복음의 내용에 정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옳은 것은 틀림 없 겠다. 이리하여 다른 세 복음에서 발견되는 그처럼 많은 자료가 여기서는 생략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예수의 유아기의 이 야기나 족보,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긴 기록,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시
7) 예를들어 F. Torm. ZNTW 30 (1931) 130.
험의 기록,산상설교,요한이 의심한 이야기,비유,12 제자나 70 제자의 위임 강화,귀신들올 쫓아내거나 문둥이를 고쳐준 이야기,공중 앞에서 물 러 가 제자들에게 만 목회하신 기록81 (A.D.29년 4월에서 10월까지)은 없다.
그런데 공관복움서둘에 의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올 고쳐 주신 일, 사람들을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았던 귀머 거 리 이 고,소경 이 며 벙 어 리인사람(盲®을 고쳐주신 일,사천명을 먹이신 일,베드로의 신앙고 백,변화,간질병 앓던 소년을 고쳐 주신 일 둥둥올 포함하고 있으나 여 기에 종말론적 인 강화,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화를 말씀하신 일, 성만찬을 제정한 기록은 없는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요한의 독자들이 공관복음서들을 요한이 읽었 음을 전제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성귀들도 뚜렷이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다음의 성귀는 진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간히지 아니하였더라” 저자는 세례 요한의 투 옥에 대한 이 야기를 말한 일이 없다. 하지만 마가복음 6장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11 : 2 “이 마리 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 리 털로 주의 발올 씻기 던 자요 병 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 더 라” 이 향유 부은 이 야기 가 제 4 복음의 다음 장(12장)에서 발견된다. 전도자는 독자들이 이 미 막 14: 3ᅳ9의 기사를 읽 었다는 전제 하에(여 기서는 11 : 2) 진행하는 것이 겠지 ?
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이 귀절은 마치 요한이 “물론 여 러 분들은 예 수께 서 가야바 앞에 서 심 문을 받으신 것 올 안다. 여 러 분은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이것올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이것은 다른 전도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다” 라고 말하는둣 들린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요한이 공관복음서들을 읽었음을 전제하였다는 설의 증거가 서는 것이 아님은 우리도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관계 사항올 고 찰해 볼 때 이 것이 십중팔구 를림 없는 것으로 보인다.
1.
7 : 1의 한절을 제외 하고,
2.
P. Gardener-Smith의 St. John and the Synoptic Gospels, Cambrige, 1938은 이 와 반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와 함께 W.F. Howard, Christianity According to Si. Jolni, Philadelphia, 1946, p. 17• 도 보라 Dr. Howard는 Dr. Gardner. Smith의 논증으로 “거의 설득당냈다. ” 하지 만 그는 요한복음과 공관복옴 사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목적에 대한 요한 자신의 진술을 감안 하여 볼 때 (20 : 30,31) 공관복음서들을 보충하는 것은 본서 의 제 일 목적에 대하여 단순히 부수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세례 요한에 관한 그룻된 견해에 대항하는 것이 전도자(요한)의 목적이 었던가?
세례 요한의 세례륜 받은 사람들이 발견된 곳은 요한이 살고 있었고 본 서를 저작한 에베소 바로 여 기 였다는 것은 흥미롭다(행 19 : 3). 그들이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틀림 없다. 이런 까닭에 그들이 이 때 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19 : 5). 사도 요한은 본 복음 에서 세례 요한이 자기를 떠나 그의 주님 올지적하였음과 (1 : 19ᅳ23, 25ᅳ 27,29,36, 3 : 27-36), 사람들이 그에게 신뢰와 확신을 둘 수 있도록 그 가 그 빛을 증거하고 싶어한 것을 반복해서 천명 하고 있다(1 : 7-9).
따라서 세 례 요한에 관한 잘못된 견해 에 대 항하는 일도 제 4복음의 주 요 목적으로 고려될 수 있겠다. 요한복음은 독자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의 초월 적 인 위 대 성 에 집 중하고 있 다(20 : 30, 31).
요한이 게린두스의 고ᅡ오롤 논박하기 위해 본 복음올 쓴 것은 사실인가? 10)
이 이 단자는 예수가 단순히 사람이 며 요생 과 마리 아 사이의 자연 출생 에 의한 아들이 었으나 예수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바르고 지혜로왔으
며,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의 형체로 그 위에 임했으나 그의 수난
당하시 던 밤에 다시 그를 떠 남으로써 고난당하여 죽고,다시 산 것은 그리 스도가 아니라 예수였다고 가르쳤다 (Ireneus, Against Heresies I, xxvi I; Hippolytus, 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 VII, xxi).
게 린두스는 사도 요한의 시 대에 살았다. 이레네우스는 사랑받은 제자 요 한이 에 베 소에 서 목욕하러 갔다가 그 안에 게 린두스가 있는 것 을 알고 목 욕도 하지 않고 목욕탕에서 달려 나오면서 “진리의 원수 게 린두스가 안에
" 이의어떤 관계가 있옴을 인정한다. “마가와 누가의 진술에 대하여 용어상의
어떤 동화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E.R. Goodenough, “John A Primitive
Gospel,” JBL, 64(1945), 145ᅳ 182룰 참조하라. 이런 유의 결론은 대체로 요 한 복음과 공관북옴서들 사이의 “대조”룰 강조한 것에 기 초하고 있다. 하지 만 우리는 둘 사이의 기본 바탕은 걸국 동일하다는 것을 이미 보여준바 있다.
10) 득히 F. Godet의 op.cit., pp. 356—368을 보라.
— 5 1 —
있으니 목욕탕이 무너질까 하니 도망가자”라고 외쳤다는 말올 폴리갑으로 부터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고표如싶 Heresies III, iii,4).
이레네우스는 또 요한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게린두스가 사람들에게 퍼뜨린 잘못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을 뚜렷이 말해 주고 있다04표신»선 Heresies III, xi, 1).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을 쓰면서 게린두스의 잘못을 의중에 두고 있었 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 런 까닭에 그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 스도시요,이 그리스도가 그(예수)에게 들어 가 그와 영속적으로 연합하여 그(예수) 위에 머물러 있었을 뿐 아니라 인성을 입으시고 이 인성을 결코 다시 벗은 일이 없다는 사살을 왜 그가 그처럼 강조했는가를 우리는 설명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레네우스가 제 4 복음의 목적으로 말한 것이 사실임올 인정한다 해도,동시에 이 목적이 그 성격상 종속적이라는 사실 올 강조해 야 한다. 그 성 격 상이 라 함은 소극적 목적 (게린두스의 잘못올 격 파하기 위 한)은 20: 30,31절에 그처 럼 아름답게 진술된 적극적 목적 에 종 속된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로 돌아가 보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 도 이심올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올 힘 입어 생명올 얻 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과 관련해서 확인된 최선의 독법은 “너희로 계속해서 믿고" (TTtCTTeiiTJTC) 임올 주목하자. 신자들의 신앙은 예 수가 사실은 하나님 이 아 니 요 그리 스도는 사실은 육신 속에 들어 오시 지 않았다고(인성올 입 지 않았 다 함) 가르친 게 린두스와 같은 사람들의 잘못으로 손상올 받고 있었 다. 사도는 이런 위험올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올 받아,교회가 그리스도와 관 련된 신앙에 거 하도록 본 복음을 기 록하였다. ⑴
따라서 예수에 대 한 완전한 전기를 쓰는 것이 요한의 목적은 전혀 아나 었다. 그의 전기를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 만일 모든 것올 기록하자면 온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했올 것이기
1.
본 복옴이 신자들의 믿음을 재 확립 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 은 E.N. Harris의 입 장이 기 도 하다. 그의 저서 “Why John Wrote His Gospel,” WE 32(1944) 250,251 을 보라.
때문이다(21 : 25). 그는 신자들이 그들이 받은 교리에 확고히 선 수 있도 록 썼다.
이 목적이 일단 명확히 이해되면 어째서 요한이 이미 발생한 모든 사건 과 그의 모든 말씀 가운데 서 추가된 자료만을 즉 다른 복음에 서 찾아볼 수 없는 자료一주님의 영광을 백일하에 들어내기에 가장 적합한一즉 가장 고 양된 의미에서 그의 메시야 직무와 그의 신성을 선택했는가 하는 이유-!: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을 의중에 두고 다옴의 요한의 기사를 주 목하자. 즉,
1.
가나의 혼인식.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올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올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 11).
2.
니고데모와의 대화. “하나님이 세상올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올 얻게 하려 하심이니 라”(3 : 16).
3.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 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 리 이 다. 예 수께 서 이 르시 되 네 게 말하는 내 가 그로라 하시 니 라” (4 : 25, 26 과 4 : 29, 42도 참조하라) .
4.
벳새 다 못가의 사람올 고쳐 주신 일과 그 이하에 나오는 강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 17). “하나님올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률 하나님과 동둥으로 삼으심이 러라”(5: 18).
5.
오천명올 먹이신 일과 그 이하에 나오는 강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 생 올 얻는 이것이 니 마지 막 날에 내 가 이 를 다시 살리 리 라 하시 니 라” (6 : 40).
6.
수전절에 행하신 생수에 관한 강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훌러 나리 라’’(7 : 37,38).
g- 아브라함의 씨에 관한 강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너희 중에 누가 나룰 죄로 책잡겠느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올 지키면 죽음올 영원히 보지 아니 하리 라”(8 : 36,46, 51).
1.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 주심. “하고 절하는지라”
(9 : 38).
1.
선한 목자에 대한 강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 30). j. 나사로를 살리심.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11 : 40).
k. 제자둘의 발을 씻기심.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올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 을 아시 고” (13 : 3).
1.
다락방 강화와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14: 17장). “내가 곧 길이 요, 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느니 라…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룰 영화롭게 하옵소서” (14: 6, 17:3,5).
m. 고난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 며 나의 하나님 이 시 니 이 다’’ (20 : 28).
제 4 복움에 서 발견되 는 이 상의 모든 자료가 모두 하나님 의 아들 그리 스 도로서의 예수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 목적으로써 교회가 영생올 얻기 위해서 그룰 계속해서 믿도록 하는 것임올 주목하자.
본 복옴에 기록된 이적들 역시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이 리 하여 왕의 신하가 먼 곳:HI서 고침 을 받았으며 (4 : 46 이 하),벳새 다 못 가의 병자가 38년간 허 약한 중에 있었으며 (5: 5),예루살렘 에 서 어 떤 소경 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고(9 : 1), 나사로가 이 미 무덤 에 있은지 나흡 이 되었었다(11:17). (L. Berkhof의 신약개론,Grand Rapids, Michig an, p. 104를 참조하라.)
본 복옴의 독자들은 에베소와 그 부근에 살고 있었다(결국 본서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해 저작된 것이긴 하지만,17 : 20,21을 참조하라). 그들 은 대부분 이방 기독교인들이 었다. 이것은 전도자가 유대인의 습관과 상 태에 대한 말에 설명을 추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2:6, 4:9, 7 : 2, 10:22, 18 : 28, 19 : 31,41,42.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위치한 장소들 의 소재 를 밝힐 때 의 상세함을 덧붙인 이 유를 설명 해 준다. 4:5, 5 : 2, 6:1, 11:1,18, 12 : 1,21.
5 4 一
m•특 징
en 요한복음은 몇 가지를 제외 하고는,유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올 서술하고 있다. 다음 몇 가지는 말구유에서 감람산에 이르기 까지 주님의 지상 생애의 간략한 연대기적 수서로 간주 될 수 있겠다. 즉,
1.
주전 5년 12월에 서 주후 26년 12월 까지 . 준비 기 간. 제 4 복음에 는 이 것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서론 1 : 1ᅳ18을 참조하라.
2.
26년 12월에 서 27년 4월 . 시 작. 요 1 : 19—2 : 12.
3.
27년4월에 서 27년 12월. 초기 유대 지방 사역 . 요 2 : 13-4 : 42.
4.
27년 12월에 서 29년 4월. 갈릴리 대 사역 . 요 4 : 43-6 : 71.
5.
29년 4월에 서 29년 12월. 은거 사역 (4월一10월)과 후기 유대 지방 사* 역 (10월ᅳ12월). 전자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바 없다. 후자에 대 해 서 는 요 7 : 2—10 : 39를 보라.
6.
29년 12월에서30년 4월. 베퇴 아 지방 사역 . 요 10 : 40-12 : 11.
7.
30년 4월,5월 : 수난,부활,승천. 요 12 : 12—21 : 25.
요한복음에 의하면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적으며 은거사
역에 대해서는 거의 없다. 한편 초기와 후기 유대 지방 사역시의 어떤 사* 건들과 강화들은 크게 주목을 요한다. 사실 요한은 위의 도표에서도 나타 나듯이 유대 지방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더 많은 지면을 할당했다. 왜 냐,5장에 진술된 이 적 장면은 유대 이기 때 문이 다. 이 와 마찬가지로 나사 로를 살리신 일이 베뢰아 사역시에 발생한 반면 이 일이 사실은 요한이 살고 싶어한 유대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향유 부은 일 도 예 수께 서 베 뢰 아 사역 에 서 유대 지 방으로(베 다니 ) 돌아와 수난주간의 고난에 들어 가려 하셨던 때에 있었다- 물론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서술 된 사역이 21장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에서 일어 난 것 이 다.
그러 므로 1장과(1 : 28올 보라) 2 : 1—11, 4 : 43-54, 6장,10 : 40-42, 21장에 기 록된 것 을 제 외 하면 모든 것 이 유대 에 서 (사마리 아 4 : 1-42) 일 어 난 것 을 안다. 이 와 같은 장소의 차이 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 에 모순을 구성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미 살펴 본 바와 같다.
C2) 제 4 복은 진술된 사건들의 정확한 시 간과 장소를 나타냄에 있어
공관복옴 보다 필씬 뚜렷하다. 본 복음에 진술된 대명 절을 기 초로 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간을 결정 할 수 있다.
C3) 공관복음에서 발견되는 많은 자료가 여기서는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생 략되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에서 발견되 는 이 야기 의 대 략적 구성은 보유되어 있는 셈이 다. 공관복음 보다 훨씬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었다. 이것은 모두 전도자의 특수 목적과 일치된다. 이것은 요한 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의 모순을 암시하지 않는다.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본 복음을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공 관복음에서 처럼 자주 비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고 정교한 강화 형식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유대에 계시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 씀 하실 때와 역시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가(그리스 도) 비 (非) 비유적 형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셨음을 단순히 의 미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가 갈릴리에서는 비유 형식을 사용하실 수 없었다는 것올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니 다.
C5) 요한복음의 주요 화제는 공관복음에서 처 럼 천국이 아니요 왕 자 신이요,그리스도의 인격이요,그의 신성이 다. 그렇다고 이 차이가 절대 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 해 말씀하신 것으로 소개 되 어 있고(3: 3—5), 역 시 공관복음에 서 그는 그의 신적 인격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이런 까닭에 이것과 관련해서 둘 사이에 모순은 없는 것이다.
1.
위의 (5)와 일치해서 본 복음은 일곱개의 “내가••••••이로노니’,의 복
음이다. “I Am’s”는 다음성귀에서 발견된다. 6:35, 8:12, 10:9,11, 11 : 25, 14 : 6, 15 : 5.
C7) 본 복음은 24시 간도 못되는 짧은 시 간에 일어 난 사건과 강화를 길 게 다루고 있다(13—19).
1.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계시된 다른 많은 진리와 관련해서 C14_
17장) 성령의 오심과 사여의 약속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14: 16,17, 26, 15 : 26, 16 : 13, 14).
1.
제 4 복음의 문체 는 계 시 록의 문체 와 다르지 만 그렇 다고 이 것 이 동 일저자가 이 두 책올 쓸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 다. 이 외에도 그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A.T. Robertson의 진술은 사실이 다. 즉 “계시록은 요한복음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04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New York, 1923, p. 134). 기원법은 두 군데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hm 는 자주 목적절적인 의미로 두 군데서 혼하게 사용되었다. ok도 그러하 다. 동사 는 신약성경의 어느부분에서 보다 두군데서 더 자주 나
온다. 기타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1.
갈한 자를 위한 생수. 요 3 : 37과 계 22 : 17을 비교하라. 주린 자룰 위 한 만나. 요 6 : 49ᅳ51과 계 2 : 17올 대 조하라.
2.
아버지 께 로부터 받은 권위. 요 10 : 18과 계 2 : 27을 대 조하라.
3.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요 1 : 1과 계 19 : 13을 대조하라. 빛이신 그 리스도. 요 1 : 4, 5,7,9 3 : 19, 8 : 12, 9 : 5와 계 22 : 5룰 대조하라. 어 린 양이 신 그리스도. 요 1 : 29와(헬라어 로 如!/6?)와 계 5 : 6 et passim^ 라어 바m'oiO올 대조하라. 신랑이 신 그리스도. 요 3 : 29와 계 19 : 7올 대 조하라.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분. 요 6 : 53ᅳ56과 계 1:5, 5:9, 7 : 14, 12 : 11올 대 조하라.
4.
신부인 교회 . 요 3 : 29와 계 19 : 7, 22 : 17을 대 조하라.
1.
“단순하나 숭고한”이 란 말은 본 복음에 나타난 문체 를 두고 하는 말이 다. 특히 서 론과 다락방 강화에 서 우리 는 매 우 효과적 이 며 참으로 매 혹적인,일종의 리듬의 흐름올 볼 수 있다. 절들(clause)이 서로 대둥작 용을 함으로써 한가지 진리 를 먼저 긍정 적으로 진술하고 그런다음 부정 적 인 진리 가 나오고 혹은 그 순서 가 바뀌 는 둥의 수법 (1 : 3, 14 : 6, 15 : 5, 6, 14 : 18, 15 : 16)과 로고스의 영광스런 은혜를 표현하는 절 하나에 이어 그 를 마땅히 영접해야 할 자들의 배은망덕한 반응을 보여주는 절이 나오는 것하며 (1 : 5,10,11), 무엇보다도 문장들이 용의주도하고 조심올 기울이 긴
했지만 철저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균형 잡혀 있으므로, 반 주제에 이어 주 제가 나오고 간결하고 박력 있는 절 (Clause)들에 이어 긴 문장들이 나오 는 둥둥 이것들이 모두 제 4복음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둘어 주고 있는 것 이다.
서론에서 (1 : 1-18) 절 하나가 주도적 인 단어를 반복하면서 다른 절에 추가됨으로써 문장들이 겹쳐지는 조약돌들 처럼 합쳐져서 주님의 형제였던 야고보서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필자의 Bible Survey, Grand Rapids* Mich., 1949, pp. 329,332를 보라. )
이 리 하여 요 1 : 4ᅳ14에서 우리 는 다음의 것 들을 주목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
1 : 1과 1 :10도 대조하자.
제 4 복음의 특색 있는 말씀들 중에는 다옴 것들도 있다.
aya.TTa.03, aXTjdeta, aXr]0^, a\i]6iv6?, afJ-apria, ayLT]v afirjp, yivwaKdi, SiSoifit, Soia, 0etopeco,ScoT],ala>vio^, 'lovSalo^, Kpiai^, \oyo^r
(xaprvpeoi, opacu, tto.tt\p,irwrrevco, aTjfxelov, aKoria, <f>iX4oi.
요한복옴은 대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즉 빛과 어두움, 영과 육,땅과 하늘,위로부터와 땅에서,생명과 죽음,사랑과 미움,즐거워하다 와 0ft 통하다,근심하다와 의지하다,보는 것과 눈이 머는 것(소경).
IV. 문 법
요한의 문법을 완전히 제시하는 것이 필자의 목적은 아니다. 이 일은 다른 학자들이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E.A. Abbot, Johannine Grammar, London, 1906이다. 문법과 구문상의 중요점들에 대해서는 본문을 주석 할
때 그때 그때 설명하였다. 더구나 이 중요점들은 번역상으로도 중요한 것 이다.
세가지 구문과 관련해서 특별히 말해야할필요를느낀다. 이 세가지 구 문은 요한복음에 매우 자주 나오는 것이다. 조건문장인 iVali 들과 Sti걸 들에 관하여 설명하겠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것들에 대해 별로 말올 하 지 않고 있다. 또 어 떤 주석 가들은ᅳ일류 주석 가들도 일부 포함해서 ᅳ이 구문의 일부에 대해서는 주석을 가했지만 다른 구문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짜 논쟁점이 되고 있는 절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석하 려 들지 않는 일들이 가끔 있다.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즉 주석 에 서 문법의 이모 저모를 모두 주석 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이 기 때문이 다. 주석가가 이 일을 시도한다면 그는 각 복음서에 대하여 주석올 셋트 (Set)로 내놓아야할 판인 것이다.
필자가 추구하는 방법은 바람직하고 권장 할만한 몇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한 세가지 유형의 절(Clause)들 밑에 다시 몇개의 구름과 구 분올 지어 서술하였다. 이 절들이 제기하는 난해 어귀들에는 설명을 붙였 다. 각 절은 해당난에 할당했다. 본 복음에 자주 나오는 절들을 이렇게 처 리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1- 완전성. 이 절들올 모두 구별하려 고 시도해 보았디-. 그러므로 각 절 이 어디에 속하는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1.
지면 절약. 주석을 함에 있어 “이절은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이다. 조건절은 ^와 함께 과거직설법으로 되어있다. 귀결절은 &과 함께 과거 직설법으로 되어있다. 미완료시상이 조건절과 귀결절에 나올 때에는 이 문장이 현재 사실이 아닌 곳올 말하고 있다”는 말을 거듭 거듭 되풀이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조건문과 관련된 일백여개나 되는 이 짧은 문단 (paragraph)과 iVa절과 Sti절과 관련된 수백에 이르는 다른 문단은 보다 간단한 방법을 통해서 그 번거로운 처리 방법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한 다른 주석 내용을 위해 지면을 절약 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제 4 복음올 주석함에 있어 조건문이 영어 번역문에 나올 때 마다 이 조건문은 ID 구롭에 (혹은 IHA1 또는 그것 이 어 떤 구룹에 속 하든) 속한다는 것 을 말해 주는 간단한 각주를 달았다. p. 60—95를 보라. 독자들은 지정된 페이지에서 각 문장이 소속하고 있는 구룹과 항목에 대 한 설명올 보게 될 것이다. 의 의 의미가 즉시 분명 할 때에는 본문
에 특별히 주석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논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거나 기타 이유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면 주석을 가한 페이지에 각주를 달았다- 이 각주들에는 번역문(영역)들이 따르고 있다.
1.
읽기 쉬움. 텔라어에 정 통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라도 수시로 나오는 엘라어 나 전문술어를 개의치 않게 될 것 이 다. 만일 이 런 사람이 어 떤 주석 에서 이런 유(類)의 재료(텔라어나 전문어)룰 너무 많이 발견하게 되면 그 는 절망하여 즉각 포기 해 버 릴것 이 다. 이 런 이 유로 다음에 자주 나오는 문법 재료들을 어느 정도 본문주석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텔 라어를 읽는 독자들은 필자가 완전히 분류하려는 시도를 이해 할 줄 믿는 다. 이것은 공관복음과 예를 둘어 계시록의 유사문법 문제점들을 비교하 는 일 올 용이하게 할 것이다•
제 4 복음서의 조건문장 분류표
주요 조건문 세구룹은 다음과 같다.
I . 간단한 (혹은 제일)조건문
이 경우의 조건은 사실로 간주된다. 그것 이 사실인가 아닌가는 조건문의 형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런 유의 조건에는 ([가 따르며 조건문에는 그 사상이 야 어떻든 직설 법이 사용된다. 이것은 직설법적 개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직설법은 사 실을 주장하기 위 해(혹은 가정 된 사실을) 사용되 기 때 문이 다. 조건절이 부정 인 경우에는 부정사 ^가 사용된다.
이와 같은 조건문의 귀결절은 직설법 현재로 표시되는C13 : 14) 사실의 진술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의문문 직설법일 수도(1 : 25)(거의 모든 경우 메서 현재시상),미래직설법의 예언일 수 도(11 : 12), 명령법의 명령일 C7 : 4)수도 있 다. 따라서 제 4 복음에 서 제 일 구룹에 속하는 조건문은 다 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조건절
귀결절
사실로 가정된 조건, 부정과거
직설법
3 : 12 상반절
사실의 진술,직설법 현재
현재 8 : 39
부정 과거 13 : 14
완료시 상이 지 만뜻은 현재 13 : 17 상반절
재 재 재 현현 현
사실로 가정된 조건,
현재
현재
현재
현재
부정 과거 부정과거
사실로 가정된 조건,
완료 부정 과거 부정과거
사실로 가정된 조건,
현재
현재
현재
현재
현재
현재
부정과거
부정과거
B
직설법
1 : 25 5 : 47
1.
: 23
2.
: 46
1.
: 35,36
18 : 23 하반절
C
직설법
1.
: 12
13 : 32
15 : 20(두번)
D
직설법
7 : 4 10 : 24 10 : 37
10 : 38 상반절 15 : 18 18 : 8
18 : 23 상반절 20 : 15
-6 1 —
설 제래 재 재 재 재 직 현미 현현 현현
예언, 직설법
미래
미래
미래
혹은 금지,직설법
부정 과거
부정과거
현재
현재
현재
부정과거 부정과거 부정 과거
n. 사실에 반대되는(혹은 제 2의 부류으|) 조건문
이 부류의 조건(약속)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가정된다. 조건절은 과거직 설법 동사와 함께 ^가 사용된다. 귀결절은 과거 직설법과 함께 ai시 (대 개) 사용된다. 현재의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은 조건절에서나 귀결절에 서나 미완료시상올 취한다(15 : 19). 과거를 취급하는 사실에 반대되는 조 건문은 조건절에서나 귀결절에서 모두 부정과거나 과거완료를 취한다 (14:7). 하지만 가끔 조건절의 현재시에서 귀결절의 과거시로의 변화나 (14 : 28) 과거에 서 현재 로 변화하는 수도 있다(15 : 22).
조건절에서 부정사는 비ᅵ가 되는데 이것은 여기서 주장되는 것이 사실 에 반대된다는 사실올 감안 할 때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제 2 부류의 조건문의 세 구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A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들이 귀결절의 미완료 직설법과 함께 현재시 ^를 취급한다. 미완료 직설법은 귀결절의 ^과 함께 사용되었다.
5 : 46
8 :19(과거완료이지만 미완료적 의미로)
1.
: 42
2.
: 33
9 : 41
15 : 19
18 : 36
B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들이 귀결절의 부정과거나 과거 완료직설법과 함 께 과거시 ^를 취급한다. 부정과거 또는 과거 완료직설법이 귀결절의 &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 런 문장에서 우ᅪ은 의미상으로는 부정과거로 간주 될 수도 있다. 부정과거형식이 없으니까.
11 : 21
11 : 32
14 : 2
-6 2 —
14 : 7
C
사실에 반대되는 혼합조건문
조건절 귀결절
e으가 &과 함께 또는 없이
미완료로써 과거 완료와 함께
4 : 10
부정과거
미관료와 함께
14 : 28
부정과거
부정과거와 함께
15 : 22
미완료
부정과거와 함께
15 : 24
미완료
미완료와 함께
18 : 30
부정과거
과거완료와 함께
19 : 11
미완료
I- 보다 생생한 미래 또는 제 3 부류의 조건문.
이 제 3 부류의 조건은 사실로 생각되지도 않고 사실과 모순되는 것으 로 생각되지도 않고 틀림없이 미래에 있을 사실로 생각된다. 따라서 조건 문은 가정 법과 함께 사I시 사용된다. 제 4 복음은 이와 같은 유(類)의 조 건절의 약 5분의 3에서 부정 과거 가정 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5분의 2에서는 현재 가정 법올 사용하고 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들 보다 현재 가정법을 크게 즐겨 사용하였다. 예외로서는 조건절에 과거 가정법이 사 용되 었다.
조건절이 부정과거 가정법일 때에는 귀결절은 대체로 미래 직설법이요 어떤 때는 현재 직설법,또 어떤 때는 현재 가정법이나 명령법일 경우도 있다.
조건절이 현재 가정법일 때에는 귀결절은 현재 직설법이 되며 가끔은 미래 직설법 일 때도 있고 몇 개 안되 긴 하지 만 예 외가 눈에 뜨일 때도 있 다.
조건문에서 부정어는 나차이며 이것은 불확실한 양상과 관련해서 예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개 구릅으로,그리고 다시 그것을 몇개 구룰으로 분류한다.
A
보다 생생한 미래 조건문(제 3 부류의 조건문)은 조건절에 부정과거 가
6 3 —
정 법과 함께 ’ecb을 사용하여 동사가 단일 개 념으로 간주되고 있음올 나 eV 낸다.
1
귀결절에서 미래직설법과 함께
3 : 12 하반절
1.
: 43
2.
: 51 8 : 24 8 : 36 8 : 55
1.
: 9
2.
: 40
1.
: 48
2.
: 32
14:3 하반절
1.
: 14
2.
: 10
16:7 상반절 20 : 25
2
조긴절에서 현재 직설법과 함께
7
51
8
31
8
54
2
24
2
47?
3
8
4
3
9
12
— 6 4 —
기 타 8 : 51
1.
: 52
2.
: 22
15 : 7
16:7 상반절 20 : 23 상반절
귀결절
부정과거 가정법
부정과거 가정법
부정과거 가정법
(목적절의 iVct 뒤에)
부정과거 명령법
부정과거 가정법
완료 직설법
B
보다 생생한 미래조건문(제 3 부류의 조건문)은 조건절에서 현재 가정 법 과 함께 사v을 사용하며 동사가 계 속된 동작올 의 미 하는 것 을 나타낸 다.
1
현재
직설법과 함께
5
31
8
14
8
16
9
31
10 1 1
38 하반절
Q
11 11
y
10
13
17 하반절
15
14
21
22 (암시됨)
21
23 (암시됨)
21
25
귀결절의 미래 직설법과 함께
7
12
13
1.
14
17
26 하반절 35 15 23
3
기 타
6: 62 7:37
12 : 26 상반절 20 : 23 하반절
귀결절
귀결절이 공급되어야 함
현재 명령법
현재 명령법
완료 직설법
C
보다 생생한 미래 조건문(제 3 부류의 조건문)은 조건절의 조동사의 도 움올 받는 (periphrastic) 수동완료 가정법과 함께 ’dlv을 사용하여 동사가 아직 강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의 행동을 의미함을 나타낸다.
귀결절
3:27 현재 직설법
6: 65 현재 직설법
제 4 복음서의 tva 절昏의 분류
를 크게 자주 사용한 것은(자주 목적절적 의미로써, 하지만 목적올 뇨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제 4 북음의 특색의 하나이다. ᄄ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단순히Koine(기원 전 5세 기一기원 전 3세기에 사용된 표준 텔라어) 통용어라고 주장하다. 저자는
12) C.F. Burney는 이것을 “본 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라고 했다. The Aramaic Origin of the Fourth Gospelt Oxford, 1922, p. 69.
Koine 통용어를 좋아한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람어의 영향 올 지적하기도 한다. 이 두 요소를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은 의심할 바 없 다. 이 두 요소의 밑 바닥에 또 다른 요소가 있올 가능성은 없을까? 즉 그 어느 언어 의 종합보다 분석 을 더 좋아한, 즉 제 때 에 자체 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편애 (偏愛)가 있올 수는 없올까? 예를 들어 오늘날 부정사 (infinitive) 는 헬라어 에서 얼마 전에 살아진 일 같은 것 이 다.
제 4 복음에서 iVa의 용법에 대 한 독자적 인 연구를 마친 후 우리 는 Dr. Eberhard Nestle과 D. Erwin Nestle 이 편집한 Novwn Testumentum Greece의 본문(20판,1950)에 따라 다음 페이지에서 발견되는 항목(縱段) 에 표로 나타낸 결론에 도달하였다.
항목(縱段) I은 우리 가 살펴 보려 하거 니 와 목적올 표시 하는 iVa 절 전 부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1항목과 기타 항목(縱段)에서 각 경우 를 언급한 다음에 는 시 상과 태 Cvoice, 목적 어 를 가질 수 있으며 이 런 까 닭에 이런 의미의 타동사로 되어 있는 모든 동사에 대하여)를 나타내었고 동사의 법 (mood) 이 iVa에 의 해 소개 되 어 있 다. 본 복음 본문에 문제 의 동사가 iVa를 필연적으로 직 접 따르는 것은 아니 고 그것 Ci'm)에 속대 있 는 것이다. 이처럼 종단C縱段)에 서술되어 있는 14: 3의 둥사는 가 아 니 라 하tc이 다. 동사의 서 술 앞에 부정 사가 올 때 본문에 는 im/x짜가 된 다.
가 목적을 표시 할 경우에는 언제나 그 iVa는 영역성경에서 in urJer //此(•••하기 위하여) 혹은 in order Zo가 된다. iVa가 목적절을 소개하는 좋은 예는 3 : 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in order that(iVa) 하심이니라.”이다.
종단 H A는 a. 주어나C전 문장의 주어 또는 문장 안의 보다 더 큰 절의 주어) b. 주격보어나 c.동격이 나 d. 이상 세개 중 어느 것의 수식어로 기능하 는 모든 iVa절에 대 한 것 을 포함한다.
4: 34의 iVa절은 좋은 예 를 제 공한다. 즉 “나의 양식 은 나를 보내 신 이
의 뜻을 행하며(化 do)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GVa Trot*
Kal TeAetd)CTco).
항목 II B는 a. 목적어 (전문장의 목적어 나 문장 안의 보다 큰 절이 나 심 지어 구〈句〉의) b. 그 동격으로 작용하는 iW절들을 나타낸다.
요구하고 기 도하고(간구하고, 요구하는) 명 령 하고,지시하는 동사돌은 그 목적어로써 iVa절올 취하는 때 가 많다.
이 런 유의 절의 예는 17 : 1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비읍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说^ thou shouldest take) 아니요 오 직 악에 빠지 지 않게 보전하시 기 를 위 함이 니 이 다(Ma소 thou on shouldest
keep, iva aprj<s aA入,tva .
i'rn가 주절이 나 목적 절을 도입 (소개 )할 때 에 는(항목 IIA와 표 B) 보통 that로 영 역되었다. 그외 다른 경우에는 ba절 전체 대신 부정사(infinitive) 가 사용되었다. “in order that”라는 번역은 이같은 절(clause)을 번역할 때 사용된 일이 결코 없다. ba•절 대신 부정 법의 대체가 전혀 당연하다는 것은 1 : 27과 눅 3 : 16올 비교해 볼 때 분명하다. 1 : 27절이 절올 사 용했 을 때 눅 3 : 16은 부정 법 을 사용한 것 이 다. 하지 만 그 내 용은 동일하 다-
항목 EC는 Iva 결과절들을 나타낸다. 가장 명백한 예의 하나는 9 : 2인 데 만일 거기서 ka•에 목적의 효과가 가해진다면 그 의미가 거의 나타나 지 않을 그런 경우이다. 분명코 이 경우에서도 “예정” (pre-ordinance, 사 람의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것)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Tva를 단순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단 순하디-.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Rabbi, who sinned, this man or his parents, so that (iVa) he was born blind?”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 사용되었는 지는 즉시 분명하다. 하지만 훌 륭한 문법학자들과 주석가둘이 반대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들도 있다. 일 부 권위자들(특히 구학파(older school〉의)은 IVa가 심지어 결과절올 도입. 한다는 것올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ba(Latin 어의 ^를 참조히 라)가 신약성경 이외의 후기 텔라어에서 결과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이 말이 신약성경 안에 서는 그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 는 것이다. 결국 언어란 살아 있는,생명을 가진 물건이다. 낱말들의 뜻 을 너무 엄격히 제한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 들은 극단의 반대방향으로 가서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는 귀절들에서 마저 목적을 볼 것을 거부하는 수도 있다(예를 들어 13 : 18). 더구나 그 들은 Iva 결과절들의 목록을 크게 확대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의 의견과 대조적으로, 목적 개념이 본 복음에 두드러져 인다는 사실이 있는 것 이 다. 즉 1 : 7,8, 3 : 17, 5 : 23, 34, 36이 다. 역 시-(여 기 서 는 특히 구속사, 하지만 둘올 분리시킬 수는 없다)는 하나님의 계회과 뜻의 실현으로 간주 되고 있다. 즉 4 : 34, 5 : 30, 6 : 37, 44, 64, 18 : 37, 19 : 28이 다. 그리고 그의 계획에서 구원사의 각 사건이 발생 할 정확한 때 혹은 시간이 지정되 어 있다. 즉 2:4, 7:6,30,8:20, 13:1이다. 본 복음은 이것올 앉은 자리에서(한군데서 쭉)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공편한(편견을 가지지 않 은) 연구생에게는 분명하거니와 처음부터 끝까지 예정론적이다. 이런 까 닭에 우리 는 예 언성 취 의 절에 목적 의 힘 (효과)올 허 용해 야 한다.
목적절과 결과절 사이에 선올 긋기 가 매우 어 려울 때 가 가끔 있다는 것 은 물론 사실이다. 정직한 의견의 차이를 위한 여지는 허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5 : 40, 6:5, 9 : 36, 14 : 29와 같은 경우). 목적과 결과 사이 의 간격올 잇기 위하여 응시된 결과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또 한가지 문제는 한편으로는 명사절들(주어든 목적어,즉 그것들이 항목 IIA에 속하든 항목 IB에 속하든:)과 다른 편으로는 목적절(항목 I ) 사이에 가끔 선올 그어야 할 날카로운 구별이 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다. 우리는 17 : 21의 "에 세개를 모두 절로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첫째와 둘째 것은 목적 절로,세째는 목적 (purpose)으로 간주해 야 하는가? 처음 두 절이 요干 하는(asking) 동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셋째 절 은 형식상 실제와 다르므로 우리가 뒤의 것올 좋아하긴 하지만 앞의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명 한 주석 가들도 있는데 그들은 17 : 22 하반절 과 23절 상반절에 호소하고 있으며 이 두 절에서는 그 내용상 21절의 두
절과 유사한 절들이 대체로 목적절(purpose clauses)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이로부터 결과되는 해석은 우리가 처음 것을 택하든 두번째 것올 택하든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 말한 것을 감한해 볼 때 다음 항목(縱段)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정 확을 기 하기 위 한 정 직 한 접 근책 (approach) 이 상의 것 으로 간주되 어 서 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우리는 다음의 분류가 대체로 정확한 것이 라고 믿는다.
다음의 통계를 주목하라.
목적 iVa 절은(항목 I ) 100개 가 넘는데 비 하여 비(非') 목적 (항목 HA, nB, nc)는 40여개 이다. 이런 까닭에 제 4 복음서에서 목적과 비 목적 iVa의 비 율은 5대 2이다-
전(全) 절 구룹에서 현재 가정 법과(몇개의 조동사의 활용올 받는 완 료가정 법〈perfect periphrastic)) 부정 과거 가정 법의 비율은 2대 1올 조 금 상회한다.
긍정 iVa절 대 부정절Oa /너)의 비율은 7대 1이다. 그 외에 몇개의 혼 합절도 있다(동사 하나는 부정,다른 하나는 긍정,3 : 16이 그런 경우이 다).
1.
목적절
비목적절
A
주 어
:7(b) 부정 과거 능동 가
8 부정과거 능동 가정 19 부정과거 능동 가정 22 부정과거 능동 가정
31 부정과거 수동가
정 법
3 : 15 현재 능동 가정 법
B 목적어 1 : 7(a)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 이 ixaprvpiav^ 설명 한다.
C 결 과
1 : 27 부정 과 거 ’ 능동,가 정 법 이 路。S 룰 설명한다.
2 : 25 부정 과거 능동가정 법 이 Xp^av 을 설명 한다.
T. 목적절
A 주 어
3: 16 부정어,부정과거 중 간태 가정법과 현재 능동 가정법
3: 17(a) 부정과거 (혹은 현재 ) 능동 가정 법 3: 17(b)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3 : 20 부정어,부정과거 수 동 가정 법
1.
: 21 부정과거 수동 가정
1.
: 8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4 : 15 부정어, 현재 가정 법 과 부정어
현재 중간태 가정법
4 : 34 현재 능 동 가정 법 (ᅲ0 iT]crco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동시에 강 한 지지를 받 고있다)과부 정과거 능동, 가정법.
4 : 36 현재 능동 가정 법
H- 비목적절
B
목적어
4 : 47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과 능동 중간태 가 정법.
5:7 부정과거
I. 목적절
I. 비목적절
5:14 부정어,부정과거 중 간태 가정법
5 : 20 현재 능동 가정 법 5 : 23 현재 능동 가정 법 5 : 34 부정 과거 수동 가정 법
5 : 40? 현재 능동 가정 법 6: 5? 부정 과거 능동가정 법
6: 12 부정어, 부정과거 중 간태 가정법
6: 15 부정과거 능동 가정
6 : 28 현재 중간태 가정 법
€ : 30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과 부정과거 능동 가정법
6 : 38 현재 능동 가정 법
ABC 주 어목적어 결 과
능동,가정법이
av6pa)7rov-%^
명한다.
5 : 36 부정 과거 가정법
6:7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6 : 29 현재 능 동 가정법이 toDto를 설명 한다.
6 : 39 부정 어 부정과거 능 동 가정법 혹 은 미래 능동 직설법,부정
I. 목적절
I. 비목적절
1.
: 50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과 부정어 부정과거 능 동 가정 법
7: 3 미래 능동 직설법
1.
: 23 부정 어 부정 과거 수 동 과정 법
7 : 32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8:6 현재 능동 가정법〕
8 : 59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9:3 부정과거 수동 가정법
C
결 과
과거 능동 가 정 법 ᄊ 미 래 능동 직설 법, 이 동사 들은 to{3to 를 설명한다.
6 : 40 현재 능 동 가정법, toGto를 설명 한다.
A 주 어
B
목적어
8 : 56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
9:2 부정 과 거 수동 가정 법
9 : 22 부정 과 거 중간태 가 정법
상 : 36? 부정 과거 능동 가
I. 목적절
A 주 어
정법
9: 39 현재 능동 가정 법 과 부정과거 가정법 10 :10(a)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과부정과거 능동 가 정법
10 : 10(b) 현재 능동 가정
법과 현재 능동
가정법
10 : 17 부정과거
능동
정법
10 : 31 부정 과거
능동
정법
10 : 38 부정 과거
능동
정법과 현재 능동 가정법
11 : 4 부정과거
수동 가정
11 : 11 부정과거
능동
정법
11 : 15 부정과거
능동
정법
11 : 16 부정과거
가정법
11 : 19 부정 과거
중간태
정법
11 : 31 부정 과거
능동
정법
11 : 42 부정과거
능동
정법
11 : 50 부정
비목적절
B C
목적어 결 과
11:37 부정어 부정과거 능동 가정법
—- 7 4 一
I. 목적절
n. 비목적절
11 : 52 부정 과거
능동
정 법
11 : 53 부정 과거
능동
정 법
11 : 55 부정 과거
능동
정 법
12 : 7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OYwflS를 집어 넣어라) 12:9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12:20 부정과거 능동 가 정 법
12 : 35 부정 어 ,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2 : 36 부정 과거 가정 법 12 : 38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A
주 어
과거 가정 법 과 부정어 부 정과거 중간 태 가정법
B
목적어
C
결 과
11:57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12:10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12:23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wpa를 수식한다. 거 의 시상적 효 과를 가진다.
I. 목적절
I. 비목적절
12 : 40 부정 어,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과 부정어 부정과거 능동 가정법과 부정어 부정과거 능동가 정법과 부정어 미래 능 동 직설법
12:42 부정어,부정과거 중간태 가정법 12 : 46 부정 어,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2 : 47(a) 부정 과거 능 동 가정 법
12: 47(b) 부정 과거 능 동 가정 법
13 : 15 현재 능동 가정 법 13:18 부정과거 수동 가 정법
13 : 19 현재 능동 가정 법 13 : 29 부정 과거 능동 가 정법
14 : 3 현재 가정 법 14 : 13 부정 과거 수동 가
ABC 주 어 목적어 결 과
13:1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조pa를 수 식 한다.
13 : 2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3 : 34 현재 눙 동 가정 법, o入•七을 설명한 다.
I. 목적절
I. 비목적절
정 법
14 : 16 현재 가정 법
1.
: 29? 부정과거 능동 가 정 법
14:31 부정과거 능동 가 정법
1.
: 2 현재 능동 가정 법
15 : 11 현재 가정 법 과 부
정과거 수동 가정 법
15 : 17 현재 능동 가정 법 15 : 25 부정과거 수동 가 정법
16:1 부정어,부정과거 가 정 법
ABC 주 어목적어결 과
15 : 8 현재 능동 가정 법,^ TOV- TCO를 수식한다.
15 : 12 현재 능동 가정법 aiV?}를 설명 한다.
15:13 부정과
거 능동 가정법 dydTrr)v 을 설명 한다.
15 : 16(a) 현재 가정 법 과 현재 능동 가정법과 현재 가정법
15 : 16(b) 부
정 과거 능동 가정법
I. 목적절
I. 비목적절
ABC 주 어 목적어 결 과
16: 2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룰 설 명한다. 거의 시상적 효과 를 가진다.
16 : 4 현재 능동 가정 법
16 : 7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
16 : 24 조동사의 활용올 받 는 과거완료 수동 가정법
16 : 30 현재 능 동 가정법
16:32 부정 .
과거 수동 가 정법과 부정 과거 능동 가 정법
1.
: 33 현재 능동 가정 법
2.
: 1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7:2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다 른 사본은 미래 능동 직설법으 로되어 있다). i^ovaiav-^
명한다.
17: 3 현재 능 동 가정법 a-
I. 목s절
n. 비목적절
ABC 주 어 목적어 결 과
쑨재를 설명한 다.
17 : 4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
17: 11 현재 가정법 17: 12 부정과거 수동 가 정 법
17: 13 현재 능동 가정법
17 : 15(a)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7 : 15(b)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7 : 19 조동사의 왕용을 받 는 과거완료 수동 가정 법
17 : 21(a) 현재 가정법
17 : 21(b) 현재 가정법
17 : 21(c) 현재 능동 가정 법 17 : 22 현재 가정 법 17 : 23(a) 조동사의 활용 을 받는 수동 가정 법 17 : 23(b) 현재 능동 가정 법
17 : 24(a) 현재 가정법
17 : 24(b) 현재 능동 가정 법
17 : 26 현재 가정 법
I. 목적절
n. 비목적절
A 주 어
18 : 9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8:28 부정어,부정과거 수동 가정법과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18 : 32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8:36 부정어 부정과거 수동 가정 법
1.
: 37 부정 과거 능동 가 정 법
18 : 39 부정 과거 능동 가 정 법,(JVV修 aa를 설명 한 다 ■
1.
: 4 부정 과거 눙동 가정 법
19 : 16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9 : 24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9 : 28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9 : 31(a) 부정 어 부정 과 거 가정법
19 : 35 현재 능동 가정 법 19 : 36 부정 과거 수동 가
B C
목적어 결 과
19 : 31(b) 부정 과거 가정 법 과 4r•정 가정법
I. 목적절
n. 비목적절
A
주 어
정 법
20 : 31(a) 현재 능동 가정 법
20 : 31(b) 현재 능동 가정 법
요한복음의 절들의 분류
본 복음에서 Sri는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더 자주 나타난다. Srt 에는 원인올 나타내는 용법과 진술적 용법과 낭음조적 용법 둥의 삼대 용법이 있다. 본보기 의 거 의 3분의 2가 원인을 나타내는 용법 이며 평 서문은 절반 조금 넘으며 낭음조는 9분의 1이다. 특히,
1.
원인을 나타내는 (causal) oTt는 for, because, since로 영역할 수 있겠 다. 다음의 항목 I 올 보라•
2.
진술적 Srt는선언하다,증거 하다,말하다,보다,생 각
하다,듣다,기 억하다,안다 둥둥의 동사의 직접 목적 이 되는 절을 도입 (소개)한다. 이와 같은 절은 간접 강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이 용어가 보 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 영역은 새섰이다. 항목 표를 보라. 이 목록 (!)은 엄격히 말해서 진술적 용법이 아닌 몇몇 예도 포함하고 있다(이렇 게 3 : 19는 설명적 보족어적이며 (epexegetical〉, 14 : 22는 결과를 나타내 는 것 같다). 6: 46에서 우리는 생 략법올 보게 되는 것이 틀림 없다. 즉 “I do not mean that,” etc.
1.
낭음조(recitative)의 는 직접 인용올도입한다. 영어에서는 quo­tation mark(“ ”)로 재생된다.
본 복음에서 저자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할 때 그는 “가라사대” (“he said”)란 말씀 뒤에 대체로 3竹를 생 략하였다(18 : 5룰 보라). 다른 사람들의 말올 직접 인용할 때는 그들의 말이 Srt에 의해 도입되었다(1 : 20, 9:9). 하지만 예수께서 그의 이전의 말씀올 인용하시는 것으로 묘사 된 간접 강화의 몇가지 예가 있다(항목 n). 이 때에는 진술적 3자가 사
B C
목적어 결 과
19 : 38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
용되 었다(1 : 50,6 : 36, 8 : 24 둥둥'). 현재 는,A^^v a[xi)v Acyco 뒤에 오 는 oti를 낭음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13〉
지 금까지 의 실례의 대 부분에 서 5Tt의 뚜렷한 의미는 문맥 에 비 추어 볼 때 즉각 분명해진다. 이처럼 8 : 47에서는(37*1 앞에 Sui to{5to가 나오는) 원인을 나타내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말한다,본다와 같은 말들 뒤에 올 때는 진술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음이 대체로 어렵지 않게 구별된 다. 예를 들어 4 : 20을 보라. 1 : 20의 5ti가 낭음조라는 것 과(일인칭에 서 3인칭으로 변화되지 않았음) 4: 51에서는 진술적(이인칭에서 3인칭으로 변 화:)으로 되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가 그 의미에 영향올 주지 않 으면서도 진술조나 낭음조로도 될 수 있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4 : 37. 하지만 5Tl는 가끔 문제를 일으킨다. 다음 내용을 주목하자.
2 : 18,여기서는 Sti의 의미를 재생시키려면 단순한 진술적 that^ 한계 를 넘 어 가야 할 것 같다. 유대 인들은 “네 가 이 런 일을 행하는 것 (새선)을 증명 하기 위해 너는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란 뜻으로 말 했올리가 없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전올 사실상 청결케 하신 사실올 문 제삼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알고 싶어한 것은 그가 어떻게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그가 합법적이며 정당한 이유로써 무엇올 제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원인올 나타내는 Sti를 지적하고 있 디-. 우리는 이렇게 번역한다. “What sign do you show us for doing these things?” (한글 역 은 바르다. )
1.
이 리하여 R.S.V.는 기 타 영역과 보조를 맞추어 5: 24,25의 Sti룰 번역 하지 않고 그대 로 둠으로써 영 어 독자들에 게 5 : 19의 Sti가 없는구문과 5 : 24, 25
의 있는 구문과의 차이를 보여 주지 않고 있다.ay.Tiv AeVw 위에
오는 5n가 엄숙한 도입의 말씀에 이어 나오는 말씀의 다시 시작되는 성격 (resumptive character)올 증'가시 키 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타당한 질문이 디-. 만일 증가시킨다면 주문은 간접 강화의 방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마치 예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 것올 재진술 하시되 이 번에는 그것을 다른 말씀으 로 말유하시는둣, 즉 거기에 새 관념율 추가시키거나 새롭게 강조하여 말씀하 시는둣. 도입하는 말이 Sti와 함께 나타나는 모든 경우에서 이 런 논거를 펼 수 있겠다(3 : 11, 5 : 24.25, 8 : 34, 10 : 7. 13: 21, 16 : 20). N.N•은 » a/n> Aeyco o"oi(혹은 u/ztV)이 나오는 다른 모든 경우에 서 Sti를 생 략하고 쇼디<1 : 51, 3:3,5, 5:19, 6:26,32.47,53, 8 : 51.58, 10:1, 12:24, 13 : 16,20, 1 3 : 38, 14 : 12, 16 : 23. 21 : 18). 하지 만 이 상황은몇 몇 경우의 본문이 쟁점
이 되 고 있다는 사실 때 문에 복잡한 편이 다.
3:7,4 : 27,5 : 28. 텔라어 동사 0a뿌^co는 독립해서 (명사〈목적어〉없 이)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이나 사물의 대격과 함께 인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뒤의 경우로 이해되면(즉 동사가 목적어를 가질 수 있으며 이 목적 어 가 단일어 가 될 수도 있고 절〈clause〉하나를 전체 로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 동사에 뒤 이어 오는 STt가 진술적이라는 것 (하나의 that 절 올 도입하는)을 보기는 어 렵지 않다. 3 : 7과 4 : 27의 동사 사용양식의 경 우 그 동사는 선언하다,증거하다, 말하다 C2항올 보라) 둥둥의 동사와 크 게 다르지 않다. 이 런 동사는 대 체 로 같은 종류의 선행 의 (anticipatory) 진술적 Sti를 취 하는 것 이 다. 그러 므로 3: 7에 서 도 4: 27에 서 도 우리 가 Sti를 “that”로 번역하든 “because”로 번역하든 그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 긴해도 필자는 “that”가 좋다고 본다.
5: 28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여기서 동사(/^)0ai)/xd^ere의 목적어는 절 이 아니라 대명사 toGto이 다. 더구나 toOto는 앞에 나온 것 (선행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여기서 뒤에 일어날 것을 예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뒤에 있을 일을 예기하는 것이라면 예 수께서 는 자기가 그들에게 아직 이르지 않은 것 에 대 해 놀라워 하지 말라고 유 대 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었 던 것 이 되기 때문이 다. 즉 앞으로 있을 육체 부 활과 관련되 는 자세한 일들이다. 이 런 까닭에 1네 eavixaicTC toSto절 (clause)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영역에서는 comma가 오는 것이 옳다. comma에 뒤이어 오는 Sti절은 그 바로 앞의 금지하신 일의 이유를 진술 한다. 따라서 “for”가 바른 번역이다.
3: 19. 여기서 크리소스틈과 기타 주석가들은 룰 원인을 나타내는 의미로 취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귀절들과 비교해 보면一요일 1 : 5, 5 : 9,11, U—OTL7} 설명 적 보족어 (epexegetically)로 사용되 었음이 즉각 나타난다. 즉 선행하는 설명사와 동격으로 사용되어 그것을 설명하는 절 을 도입 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 이 다. 이 런 까닭에 요일 5 : 14는 다음과 같 이 해석할 수 밖에 없다- “And this is the confidence which we have with respect to him that(jiOt because)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lie hears us.”(한글 역은 바르다). 3 : 19도 그 형식에 있어 서는 이와 꼭 같다. Stc는 “that”로 해석해야 한다.
4 : 35C하반절). 여기서는 that로 하든 because로 하든 의미는 모두 바르
다. 그럼 에 도 문맥 (35절 상반절')은 예수께서 “밭을 보라(응시)”라고 말씀 하시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즉 밭들이 희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밭들이 횐 것에 너희 눈올 집중하라고 말씀하시려 한것 처럼 보인다(자연 그대 로의 밭과 대 조해 서). 여 기 서 우리 는 본다는 동사를 직 접 목적어 하나와 목적절 하나와 함께 가진다.
8 : 22. 이와 같은(그리고 11:47) 성귀에는 생 략법 이 사용되 었다. 그러 므로 이 질문올 다음과 같이 풀이 할 수 있다. “Then said the Jews, ‘Will he kill himself?’ They said this because {or since ort) he had sai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유대 인들이 가로되 그 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저가 자결하려는가’라고 말했다”.)
14:2 때문에란 의미의 STt가 여기서 가능하며 이런 뜻임에 틀림없다는 것올 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의 Srt를 진술적인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의견올 같이 하지 않는다. 마치 원인을 나타내 는 뜻은 전혀 문제 밖에 있기라도 하다는 둣. Sti가 진술적인 의미로 해석 될 때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즉,
1.
“그렇지 않으면(즉 나의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Wmt)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that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 이 해석은 예수로 하여금 만일 하늘에 하나님의 자녀들 올 위해 예비된 집들이 없다면 그가 거기에 가서 이런 상황올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가 자기 제자들에게 이 점 에 대 한 자기 계획 올 알려 주리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되 게 한다. 하지 만 이것이 이렇게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즉 예수와 아버지는 요한복음에서 충돌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2.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너 희에게 일렀을 것이 아니 냐?”(“If it were not so, would I have told you that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 이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a. 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이 일올 자기 제자들에 게 언제 말씀하신 일 이 있 는가 ? (즉 그가 그들올 위 한 처 소를 예 비 하러 가시겠다고?)’’란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 처럼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
었을 가능성ᅳ본 복음에는 이런 가르침의 기록이 없다一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개연성 (probability)은 크지 않지만.
1.
OTt=문제의 와,5*n를원인을 나타내는 뜻으로 간주해 야 한다는
입장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 두 견해는 특히 두가지 매 우 중요한 사실올 가르치고 있으며 줄잡아 말해도 최소한 교훈의 뜻이 내 포되어 있다.
1.
아버지의 집에 그의 모든 자녀들을 위해 충분한 자리가 있다.
2.
그리스도의 승천의 목적의 하나는 그가 택하신 자들의 처소와 관련 된 모든 일올 예비하시기 위함이었다.
제 4복음의 Sn절의 분류
I. 원인을 나타 내는 STt 표. 진술조의 5차(주 I. 낭음조의 5하=
=for, because, since 로) =that “ ”
1 : 15 1 : 16 1 : 17
1 : 20
1 : 30
1 : 32
1.
: 34
1.
: 50(상반) 1 : 50(하반)
2.
: 17
1.
: 18
2 : 22
1.
: 25
2.
: 2 3 : 7
3 : II
1.
: 18
3 : 19 3 : 21
-8 5
I. 원인을 나타 내는 I. 진술조의 5rt(주
=for, because, since ^)=that
3 : 23
1.
: 33 4: 1(a)
2.
: 1(b)
4 : 19 4 : 20 4 : 21
4 : 22
4 : 25 4 : 27
4 : 35(b) 4 : 37
4 : 42(b) 4 : 44 4 : 47 4 : 51
1.
: 53
2.
: 6 5 : 15
5 : 16 5 : 18
5 : 27
1- 낭음조의 '6ti=
3 : 28(a) 3 : 28(b)
4 : 17
4 : 35(a)
4 : 39 4 : 42(a)
4:52
5 : 24
5 : 25
-8 6-
I. 원인을 나타내는 oTt
—for, because, since
5 : 28 5 : 30
5 : 38 5 : 39
6 : 26(a) 6 : 26(b)
6 : 38 6 : 41
1.
: 65
2.
: 1
7 : 7(a)
7 : 8
표. 진술조의 주 I. 낭음조의
로^ =that “ ”
5 : 32 5 : 36
5 : 42 5 : 45
6 : 14
C : 15 6 : 22(a)
6 : 22(b)
6 : 24
6 : 36
1.
: 42
6 : 46 6 : 61
1.
: 69
2.
: 7(b)
1.
: 12
7 : 22 — 8 7 —
r/
OTL =
I. 원인을 나타 내는 STl 표. 진술조의 6V1 (주 1L
=for, because, since 로') =that
7 : 23
7 : 26
7 : 29
1.
: 30
7:35(거의 결과를 나 타내는,즉 so that)
7:39
7 : 42
1.
: 52
2.
: 14 8 : 16
1.
: 17
8 : 20 8 : 22
8 : 24(a)
8 : 24(b)
8 : 27 8 : 28
8 : 29
8 : 37(a)
8 : 37(b)
8 : 43 8 : 44(a)
8 : 44(b)
8 : 45 8 : 47
낭음조의
C7 : 40〕
S : 33 S : 34
8 : 48
一 8 8 —
I. 원인을 나타 내는 STt I. 진술조의 Sn(주 m. 낭음조의 sTl=
=for, because, since 로!) =that “ ”
9 :
9 : 16 9 : 17(a)
9 : 9 :
1.
: 22
9
9
9
9
9
9
9
10:4
10:5
1.
: 13 10 : 17 10 : 26 10 : 33
9 : 9(a)
9 : 9(b)
9 : 11
9 : 17(b) 9 : 23
1.
: 41
2.
: 7
54
55
8
18
19
20(a)
20(b)
24
25
29
30
31
32
35
10 : 34
I • 원인을 나타 내는 071
=for, because, since
1.
: 36(b)
2.
: 9
11 : r
1.
:47
2.
: 6(a) 12 : 6(b)
12 : 11 12 : 18
12 : 39
12 : 41
n. 진술조의 Stk주
로') =that
0
38
1
6
1
13
1
15
1
20
1
22
1
24
1
27
1
31(a)
1
31(b)
1
49
1
41
1
42(a)
1
42(b)
1
50
1
51
1
56
2
9
2
12
2
16
2
19
2
34(a)
2
34(b)
I- 낭음조의
tt yy
10 : 36(a) 10 : 41
I • 원인을 나타 내는 OTt
=for, because, since
12 : 49
14 : 2
14 : 12 14 : 17(a) 14 : 17(b) 14 : 19
1.
: 28(c)
2.
: 5
15 : 15(a) 15 : 15(b)
15 : 19 15 : 21
1.
: 27
2.
: 3
D. 진술조의 STt(주
로) =that
IL 낭음조의
50
1
3(a)
3(b)
19
29
35
10
11
13
11
13
21
13
33
14 : 20 14 : 22 14 : 28(a) 14 : 28(b)
14 : 31
15 : 18
15 : 25
t!
OTI —
— 9 1 —
I. 원인을 나타 내는
=for, because, since
16 : 4(b)
16 : 6 16 : 9 16 : 10 16 : 11 16 : 14
16 : 17
16 : 21(a)
16 :27(a)
1.
: 32
2.
: 8(a')
17 : 9 17 : 14
1.
:24
2.
: 2
I. 진술조의 주 I. 낭음조의 5Tl=
로') =that “ ”
16 : 4(a)
16 : 15
6 : 19(a)
6 : 19(b)
16: 20
6 : 21(b)
6 : 26
6 : 27(b)
6 : 30(a)
1.
: 30(b)
7:7
1.
: 8(b)
7 : 8(c)
7:21 7 : 23
7 : 25
18 : 18
19 : 7 19 : 20
1.
: 42
2.
: 29
3.
: 17(a)
제 4 복음서의 헬라어에 대한 아람어의 영향
I. 원인을 나타 내는 on I. 진술조의 Sn(주 H. 낭음조의 5丁t=
—for, because, since 로') =that “ ”
18
20 : 13
20서 문
본인이 본서의 서문을 쓰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렌드 릭슨 박사의 저술이 마땅히 알려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나 라에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More than Conquerors” 란 제목의 요한계시록 주석이 이나라에 서 출판되어 복음주의 계열에서 많은 사람의 전망과 가르침에 상당한 영 향을 준바 있 다. 고 프레 드 • 밑 벨 (Fred Mitchell) 씨 가 케 즈윅 대 희 (Keswick Convention) 에 서 행 한 마지 막 몇 몇 맷 시 지 가 본서 에 기 초한 것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본 요한복음 주석이 이 시점에서 이 나라에서 유용할 수 있도 록 나와야 할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본인 자신으로 말하면,본인이 읽은 요한복옴 주석 중에서 본서는 가장 만족한 주석이라고 말해야 하겠다. 렌 드릭슨 박사는 현대의 모든 사상 동향에 철저하리 만큼 정통하고 있는 저 명한 신약 학자로서 사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이점에서 더 이상 바 람직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전망과 가르침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적이요 보수적이요 복음적이다.
본서에는 탁월한 서론이 있 다. 본서의 서론의 특히 훙미 있는 면모는 저 지*가 각 부분에서 논증한 결과를 종합부분에서 다룬 방식이다. 본서는 동 시 에 절단위 (節單位) 의 주석 이 다. 그리 고 모든 절이 목회 자의 심 장에 서 나오는 뜨거운 신앙심에 푹 잠겨 있다.
여기에, 모든 설교자들과 주일학교 교사들과 성경학교 인도자들과,“그 것을 먹고 자라게 될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말할 수 없이 귀중한 도움이 있는 것이다. 헨드릭슨 박사의 인도를 따라
이 위대한 복음서의 부귀를 찾아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의 생각이 가득 채워지며 그들의 신앙이 활기를 띠게 되고,강화되며,확립되며, 마음 의 감동을 받고 경배하게 되리라. 어쨌든 이것이 나의 체험이기도 하다­이 점은 어느 주석에 대해서나 요구되고 기대되는 것이지만, 아, 현대의 주 석들은 거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절실한 요구인 것이다.
원컨대 본서가 널리 읽혀지고 연구되고, 이미 미국에서 출판된 바 있는 그의 다른 신약성경 주석들이 이 나라에서도 곧 출판될 수있기를기도
한다. 1959년 1월
런든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D.M. 로이드-존즈
— 3 一
목 차
(상)
키 3
저자의 말 7
생 략 부호표 8
斗론: 11
저작자,저작연대,저작장소에 대하여 13
독자와 저 작 목직 49
췌 55
해 58
주제와 구분 95
1—6장 주석
1一6장의 개요 100
1 삼^ 101
2징^ 157
1.
지 177
2.
^ 209
3.
장^ 251
6^- 287
— 5 —
저자의 말
본 주석을 쓴 것은 다음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첫째로,본문올 정확하게 번역하기 위함이다. 번역은 현대어로, 현대 관 용법에 따라야 하며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 번역은 단순히 의역이 되어서 는 안된다. 이와 반대로 본문을 치밀하게 따라가며 강조된 곳이 있을 때 마다 그 뜻을 들어 내야 한다.
둘째로,다른 많은 주석에서 발견되는 서론의 문제점들을 철저하게 논 하기 위함이다. 특히 저작자 문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세째로, 본문올 간단히 분석하며 그 개념과 관계를 취급하기 위함이다. 3장 16절과 같은 중요한 대목들은 다른 대목들보다 더 충분히 취급되어 야 한다.
네째로, 한개의 사상단위를 구성하는 각 대목의 말미에 그 부분 전체에 대한 종합을 기재함으로써 각 대목의 내용을 명백히 나타내기 위함이다. 분석의 뒤에는 항상 종합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주석은 이 두가지를 모 두 포함한다. 그렇지 못하면,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보수적 입장올 변호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이것올 요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여섯째,최신판 주석올 제시하기 위함이다. 근자에 이르러 신약학 분야 에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본 주제의 어떤 국면에 대하여 중요한 저술 이 가끔 나타났고 기독교 정기 간행물에 훌륭한 기사들이 출간되어 여러 낱말과 구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빛을 던져 주기도 하였다(예를 들어 요 2 : 4, 4: 9). 제 4복음에 자주 나오는 개념들을 취급한 박사 논문들도 나왔다. 이와 같은 자료들이 널리 활용되었다. 관계서적 목록을 준비하여 뒤에 싣는다(하권).
일곱째,본 복옴에 매우 빈번히 사용된 문법과 구문에 대한 완벽한 개 요를 제시 하기 위 함이 다. 본문주석은 시 종일관해서 문법과 구문상의 중요 겅 을 빠짐없이 언급하되 지 나치 게 많이 다루지는 않았으므로 텔라어 에 능 통하지 못한 독자들도 불편한 점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기록된 아람어 원어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아람어 학설중 가치있는 요소들을 공평히 다루 려고 노력하였다.
이상의 여러 목적이 충분히 성취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초기 저작물에 대한 독자들의 친절한 반응은 필자가 더욱 노력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본복음에 그 분의 사랑이 나타나신바 된 이에 게 영광이 있올지어다. 원럼 •텐드릭슨
생략부호표
서적에는 종지부(period)를 찍었고 정기 간행물에는 종지부를 찍지 않 았다.
1.
서 적
A.R.V. American Standard Revised Version
1.
V. 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2.
D.B.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to the Old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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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m. N/F. A.T. Robertson,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1.
B.A. Hurlbut, Bible Atlas (.most recent edition)
2.
S.B.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L.N.T. Thayer’s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N.N. Novum Testamentum Graece, edited by D. Eberhard Nestle
and D. Erwin Nestle (most recent edition)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S.BK. Strack and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aus Talmud iind Midrasch.
Th.W.N.T. Theologisches Worterbuch zu..i Neueji Testament (edited by G. Kittel)
W.D.B. Westminster Dictionary of the Bible
W.H.A.B. 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le
1.
정기간행물 AJTh American Journal of Theology
ChrC Christian Century
ClW Classical Weekly
CQR Church Quarterly Review
CThM Concordia Theological Monthly
EQ Evangelical Quarter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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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서 론
I- 저작자,저작연대,저작장소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책들 중 가장 경이로운 책이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 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바야흐로 본서를 연구하기 위해 발을 디디려 는 모든 사람의 자세는 이 런 자세가 되 는 것 이 좋겠다. 왜 냐,본서의 증 거 가 참된 것 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의 아들로 믿는 신앙은 이 미 영광의 확인올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이제 곧 분명하게 나타 날 것이다.
본서는, 황제 디베료와 분봉왕 헤룻 안디바의 시대에 팔레스타인 땅에 (4:9) 예 수라고 하는 유대 인이 살고 있 었는데 그는 자기 가 만물의 합법적 소유자요, 생명의 떡이요, 생수요, 지•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주려는 선한 목자요,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리실 자 이시요,바로 메시야요,하나님 께 로 가는 길이 요, 신앙과 경 배 의 대 상이 시요,사람이 신 동시에 어 느 의 미 에서든 하나님이심으로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실 수 가 있는 분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본서의 저자가 이런 그의 주장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인 것이다 ! “역사의 예 수”에 대하여 저자는 가장 높은 칭호!: 붙이 고 있다. 그는 그를 하나님의 말씀(Logos)이라고 칭했으며 이 말씀이 아버지의 존전에 거하시며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해 준다. 저자는 대담하게도 심지어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는 첫 절에서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기가 주장한 그대로의 인물인 것이다. 그는 성 육신 하신 하나님 이신 것이다(1 : 1,14).
이와 같은 주장을 받아 들이 고 이와 같이 놀라운 선언올 하고 있는 저자 는 누구인가? 그는 그가 서술하고 있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살던 외 인인 관계로 그 사이의 거 리 때문에 그의 견해에 차질올 가져온 것은 아닌가? 그가 그 사건들이 있은지 오래 후에 기록한 관계로 이 야기의
“주인공”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이적을 행하는 자로 둔갑을 했으며 전설과 민간전승의 법에 따라 결국 하나의 신(a god)으로 변모된 것 인가? 아니 다. 사실은 그 반대 이 다. 제 4 복음의 저자는 그의 “주인공”과 같은 민족, 혈통, 가정에 속하는 사람의 하나르 나타나 있다. 그는 그와 동 시대 인이 요 목격자로 소개되 어 있는 것 이 다(21 : 24,참조 요일 1 : 1ᅳ4). 그는 주 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전통에 의하면 열 둘의 한 사람이요,열 두 사람 안에 서 도 세 사람 중의 하나였다(막 5 : 37, 9 : 2, 14 : 33). 하지 만 어 느 누가 공관복음의 이 와 같은 기 록에 반대 하고 제 4 복 음의 증거에만 국한하고 싶어한다 해도 그는 본서의 저자가 여기서 최초 의 두 제자의 한 사람(1 : 35,40)으로 간주되 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야 할 것 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21 : 24의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 한 제자가 1 : 35,40의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 한 제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있음직 하지도 않은 견해를 채택하지 아니하는 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제자 중 에서도 본서 저자는 자기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로 나타낸 자인 것이 다(13 : 23).
그보다 예수를 더 잘 알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예수와 날마다 함께 걸 어 다녔으므로 그의 성격상의 견함과 인격상의 단점이 있었다면 그것을 볼 기회가 충분히 있었디-. 모든 밤 중에서도 그 가장 성스러웠던 성만찬날 밤, 그는 그의 품에 의지해 기대어 있었다. 그는 그의 십자가 옆에 서 있었 다. 그는 심지어 그의 무덤에 까지 들어 갔었다(13: 25,19 : 26, 2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4 복음서의 저자로서 그가 그처럼 잘 알고 있던 이 역사의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모든 사람에게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 은 사람은 바로 이 제자인 것이다 ! 그 뿐 아니라 그는 바로 맨 첫 장에 서 다튼 목격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사람들이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너무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다음과 같이 그들의 생각과 감정 을 나타내었다고 말한 것이다.
안드레,“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빌립,“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나다나엘,“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 금이로소이다”(1 : 41,45,49).
바로 여기에 역시 첫장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증거가 추가되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 의 어 린 양이로다 내 가 보고 그가 하나님 의 아들이 심 을 증
거하였노라” (1 : 27,29,34).
전통적 인 견해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이 증거의 유효성 올 인정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에 이의가 제기되지 않 는 한 그둘은 지역전에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싸움 자체게 지고 있음을 인정 한다. 고둥비 평은 이 증거를 뒤흔들어 놓을만한 것으로서 무엇을 제 시 하는가 ? 반(反) 보수주의 자들은 제 4 복음서 가 동시 대 인이 며 동시 에 목 격자에 의해 저작될 수 없었다는 것을, 즉 본서가 전설이 말해 주는 대로 나이 많은 사도 요한에 의해서 소아시아에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 게 증명 하려 하는가? 그들의 논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겠다.u
1.
다음 문헌ᅳ본 주제에 대해 기록한 수백에 달하는 저작에서 선택된ᅳ은 비평 가들의 논조와 제 4 복음의 저 작자 문제 와 관련해 서 전동적 인 견해에 집 착하는 사람들이 제시한 대 답올 제공 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지작들에 대하여 감사 를 표하고 싶다.
Albright, W.F., From the Stone Age to Christianity, Baltimore, 1940, especially pp.298—300.
Andrews, Mary E.t “The Authorship and Significance of the Gospel of John•” JBL 64 (1945). 183-192.
Bacon, B.W., The Fourth Gospel in Research and Debate, New York, 1910.
Bernard, J.H.,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2 vols. (in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New York, 1929.
Burney, C.F., The Aramaic Origin of the Fourth Gospel, Oxford, 1922, especially pp. 126—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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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guel, M.t Le Qualrieme &vangile,Paris, 1924.
Goodenough, E.R., “John A Primitive Gospel,”/BL64 (1945), 145—182.
Grosheide, F.W., Johannes (in Kommentaar op het Nie (we Testament), 2 vols., Amsterdam, 1950, especially vol. I, pp. 1—42.
Cl) 사도 요한은 일찍 죽었으므로 제 1 세기 말경 에베소에서 복음을 썼을 리가
없다. 그 증거 는 A.D. 9세기에 살았던 승려 Georgius Hamartolus가 기 록한 연대 기의 사본의 하나인 Codex Coislinianus, Paris 305에는 파피아 스에 의하면 사도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자의 죽음을 죽었다고 진술되
어 있 다. 우리 는 야고보가 헤 롯 아그립 바 1세 에 게 A.D.44년에 (그 후에
는 아님) 죽임올당했으며 베드로가 그보다 오래 산 사실을(행 12장) 안
다. 그런데 만일 요한도 그처럼 일찍 순교 당했다면 그는 제 4 복음을 기
Hoskyns, E.C., The Fourth Gospel,2 vols., London, 1940.
Howard, W.F., The Fourth Gospel in Recent Criticism and Interpreta- tion, London, 1945.
Howard, W.F., Christianity According to St. John, Philadelphia, 1946, especially pp. 11—33; also his review of Hoskyns, The Fourth Gospel, JThS 42(1941), 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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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할 수 없었올 것이다. 그 증거는 본 복음의 저자는 베드로 보다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요 21 : 18-24). 이상이 제 일 논법의 요지이다.
앞에 말한 Codex에서 의미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꼬덕체를 주목 하라).
“도미티안 황제 이후에 네르바(Nerva)가 일년율 다스렸다. 요한을 그 섬에서 다시 불러내어 에베소에 살도록 허락한 것은 그였다. 요한은 그때 까지 살아 있던 열 두 제자 중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이름이 불은 복음서를 제작한 후데 순교 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를 친히 알고 있던 히에라볼리스의 감독 파피아스는 그의 두번째 저술인「주님의 말씀」(Oflc/es Of the ion/)에 서 요한이 유대 인들에 게 죽임 을 당했 다고 말하고 있 다. 그의 형 제 C야고보)와 함께 이 렇 게 그는 그리스도의 예언 ‘내가 마시려는 잔올 너희가 마시며 나의 받으 려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을 명백히 성취했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
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씀하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매우 박 식 했던 오리 겐은 그의 마태 복음 주석 에 서 도 그가 사도들의 계 승자들에 게 서 받은 지식올 근거로 해서 요한의 순교를 단언했다. 이 외에도 위대한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의 교회사에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Parthia가 제비로 말미암아 도마에게 떨어졌고 아시아가 요한에게 떨어졌다. 요한은 에베소에 살다가 죽었다.”
첫째로 이 사본은, 파피아스에 의하면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죽임올 당 했다고 말하고 있고 같은 저자의 다른 사본들은 그가 평안히 잠들었다고 밀: 함을 주목하자.
둘째로 이 기록은 요한과 야고보가 동시에 순교를 당했다고 말하고 있 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끝으로, 역시 이 증거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에서 돌아온 후에 에베 소에서 살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그가 그의 이름을 지니는 복음서톱 기록한 후어I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것이다. 즉 비평가들은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서를 기록하였다는 입장을 반박하기 위 한 시도에서 전통적 인 견해의 이 요소가 줄잡아 말해도 정확하다고 분명 히 진술해 주는 어면 문서에 호소한다는 점이다.
요한과 야고보의 “순교”와 관련되는 사본이 하나 있는데 (Baroccianus 142) 이 사본은 C. De Boor가 출판했으며 (/Texte und Untersuchuogen
— 17 —
V. 2, p. 170) 제 5세기 초에 이름을 떨친 교희 사가 Philippus Sidetus 의 저작의 개요를 진술하고 있다. 이 사본은 다음과 같은 진술올 포함하 고 있다.
“신학자 요한의 제자이 며 폴리 갑의 친구인 히에 라볼리스의 감독 파피 아 스가 주님의 말씀을 엮은 책 다섯권을 썼다……두번째 책에서 파피아스는 신^자 요한과 그의 형 제 야고보가 유대 인들에 게 죽임 을 당하였다’’고 말한다.
야고보와 요한을 순교자로 함께 기념한 고대 교회 달력들도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J.A. Robinson의 자상한 논증서,The Historical Ch­aracter of St. John’s Gospel, London and New York, 1908, pp. 64— SO• 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도 요한이 극히 늙은 나이에 에베소에서 평화롭게 죽었다는 교회의 보편적 인 전통에 중대한 의 혹을 던질만한 충분한 증거는 없다. 요한과 그 의 형제 야고보가 유대 인들에 게 죽임을 당했다는 진술을 파피아스에게 돌 리는 것은 전거 (典據)가 매우 빈약하다. 만일 파피아스가 정 말 이것을 말 했 다고 하면 이 레 네 오와 유세 비 우스와 파피 아스의 글을 읽은 기타 사람들 이 그것에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 고 이와 같은 진술을 파피아스에게 돌리는 것을 경솔한 해석으로 인한 과 오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 전통에 대한 이 고립된 모순은 간간히 사도를 순교자로 서술한 글에시도 지지를 받을 수 없으며 교회 달력에서 그를 기념한 내용의 논거에서도 지지를 받올 수 없다. ‘증 인,이 란 내 용의 텔라 용어 ‘순교자’란 말이 애 초에 는 그들의 증거를 그들 의 피로 인친 사람들에게 국한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에서 고대 문서들 중에 요한이 란 이름을 가진 여러 사람들올 가끔 흔동한 사실을 간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것은 야고보의 경우에 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파피아스가 “요한과 야고보”라고 말했다면 그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할 가능성도 있었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나 주님 의 형 제 야고보일 가능성 도 있었 다. 요세 부스와 유세비 우스에 의 하면 후 자는 “유대 인들에게 죽임올 당했다.” 우리는 Sidetus가 파피아스를 정확 히 인용하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최소한 알고 있다. 왜 냐, 그 신학자란 칭호가 먼 훗날까지는 사도 요한에게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피아 스가 이 말4-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 런 까닭에 전 "인용문”은
의 심 스러 운 모습을 드러 내 기 시 작하는 것 이 다. Sidetus가 정 말 파피 아스의 글을 읽었을까 ? 아니 면 결국 그의 최종의 전거 (典據)는 유세 비우스였는 데 그가 유세비우스의 글올 잘 못 읽은 것일까? 분명코 학적이란 형용사 를 가지고 “지능 정도가 얕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어떤 저자(파피아스로 상 상된)의 와전된 인용문에서一구태 어 인용올 한다면~끌어 낸 추론올(제 4 복음 서의 저작자 문제에 관한) 존귀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비평 가들은 이 인용문을 어떤 엉터리 역사가의 작품을 최근에 요약한 것에서 찾아 낸 것이다!
교회 달력에 대해서는 초기 칼타고인의 순교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 함되어 있다.
Dec. 25 viii Kal. Jan Domini nostri Jesu Christi, filii Dei.
Dec. 27 vi Kal, Jan. sancti Johannis Baptistae, et Jacobi Apostoli, quern Her odes occidit.
여기서도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기 념되었다. 하지 만 여 기 에 언급된 요 한은 세례 요한인 것이다 ! 고대 수리아의 순교사에 “예루살렘의 사도 요 한과 야고보가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W.M. Ramsay의 진술과 일치한다. 즉 “같은 시기에 살해를 당하지 않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기념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일찌기 죽임올 당했 다는 것을 증거하기에는 우리가 상상하기에 가장 빈약한 증거이다.”이 공 동기념은 열 두 사도 중 뛰어 났던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 였다는 사실과 막 10 : 39에서 발견되는 바 그들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을 잘못 해석한 사 실에 기인한 것 같다.
C2) 이미 A.D. 4세기 초에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을 기록했다는 견해가 거부되 었다는 것. 즉 두 사람의 요한을ᅳ그들 중 둘패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 장로(Pre.s- byter)였다ᅳ말한 파피아스의 문헌에서 한 문장을 인용한 유세비우스에 의하여 배 척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세비 우스는 이 것 으로부터 요한복음올 쓴 사람은 “장로” 요한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사실상 E. R. Goodenough도 이런 결 론을 내리고 있다. “John A Primitive Gospel,” JBL 64(1945), p. 148.
그러 나 유세 비우스와 관련해서 여 기에 진술된 것은 사실이 아니다. 2J 왜
1.
R.P. Casey, “Prof. Goodenough and the Fourth Gospel,” JBL 64(1945), 535-542를 참조하라.
냐, 이 역 사가(Eusebius) 는 “장로” 요한이 (사도 요한과 구별되 는) 본 복 음을 썼다고 말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는 사도 요한이 복음서 저자 였다는 것울 분명히 믿었던 것이다. 유세 비우스가 가공적 인 인물을 창안해 낸 것은 통탄할 일이라는 것올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T. Zahn의 진술 “그 것을 길게 는할 것도 없이 ‘장로 요한’은 유세 비우스의 비평적, 주석적 열둥성의 산물이 디-’’(T/j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ns Knowledge의 “사도 요한 항목”)와 의견을 함께 한다. 이 사람이 도대체 실제 인물이었음올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도 없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 와 같이 애매한 것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 했다. 예를 들어 B.H. Streeter, The Four Gospels, New York, 1925,14장이 그러하다.
유세비 우스를 어 리 둥절하게 한 파피 아스의 진술은 다옴과 같다. “그리 고 내가 이미 장로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해석에 추가하고 잘 기억하려 는데 주저하지 않겠다. 나는 그들의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 다수 사람들과 달라서 많이 말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말하 는 사람들올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명령을 열거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고 주께서 믿음올 위해 주신 계명과 진리에서 나온 계명올 반복하는 사 람들을 좋아한다. 그러 나 만일 장로들을 따랐던 어느 누구가 온다면 나는 장로들의 말올 조사하여 안드레 나 베드로나 빌립이나 도마나 야고보,요 한, 마태 나 기타 주님의 제자들이 무엇올 말했는지 그리고 Aristion과 장 로 요한과 주님 의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알아보겠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1, xxxix, 3—4).
파피아스의 이 말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이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두 경우의 언급이 한 사람의 요한 (요한 이서와 삼서로 보 통 알려져 있는 두 신약서신에서 자기를 “장로”라고 부른)올 가리켜 한 말이라는 것이다. 만일 전통에 따라 사도 요한이 고령에 달하도록 살아서 다른 모든 제자들 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에 유의한다면 어째서 파피아스 가 요한을 제자들 구룹에 첫째로 포함시킨 후에 지금 다시 그를 말하고 있는가를, 즉 다른 제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인가를 말했던 그가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가 두 사람의 요한올 생각하 고 있었는데 그들의 한 사람은 사도였고제 4 복음서의 저자였으며 둘째 사
람(장로:)은 계시록의 저자였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후자(계시록:)의 뇌작자 문제에 있어서 유세비우스는 분명히 Dionysius(200ᅳ265, A.D.)의 영 향 을 받았는데 이 사람의 전통적 인 견해에 반대 한 강력한 논증은 비록 그의 결론과 의견올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세심한 연구를 기우릴 가치가 있다. 그의 결론이 부분적으로는 계 20장에 항상 호소하는 천년왕국설자 들에 대한 그의 혐오감 때문이었던가? 이것에 대해서는 N.B.Stonehouse 의 The Apocalypse in the Early Church p. 151 올 보라. 그러나 우리의 현재의 목적올 위한 질문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제 4 복음을 쓴 것은 누구인가 이 다. 그 대 답은 필자가 방금 인용한 파피 아스의 말에 대 한 그의 논평 에 서 분명해질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고덕체률 주목하라). 즉
두번이나 요한의 이름을 계산에 넣으었으며
“그가 두번이나 요한의 이름을 계산에 넣었으며 첫번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마태와 다른 사도들과 함께 계산에 넣었지만ᅳ여기의 요한은 전도자를 의기함이 분명하다ᅳ그의 진술을 바꿈으로써 두번째 요한은 사도들 외의 다른 사람들과 합 께 계산에 넣었는데 그의 앞에 Aristion을 기록했고 그를 분명 히 장로라고 불렀다. 이것은 아시아에 같은 이름의 두 사람(요한)이 있었으며 에베소에 여전히 요한의 것 이라고 칭하는 무덤 두 개 가 있다고 말한 사람들의 말이 진실임올 굳게 한다. 이 말은 주목을 요한다. 왜 냐, 두번째 요한(만일 전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이 요한의 이름으로 통하는 계시록을 본 것이 십중 팔구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유세비우스,op.cit., in, xxxix, 5-6).n
그렇다면 유세비우스는 두번째 즉,장로 요한올 계시록의 저자로 간주하 는 셈 이 다. 하지 만 그가 사도 요한을 전도자로 제 4 복음서의 저자로 간주하였다 는 것올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III,xxiv, 5에서도 동일한 신념 올 표시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파피아스에 대한 비평 가들의 이같은 호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실패했다. 비평 가들이 근거 로 삼는 출처는 전통적 인 견해 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3) A.D.170년 경의 소아시아의 이단종파인 ■파는 제 4 복음과 계시록을
Cerinthusm 돌렸다. 이런 까닭에 이렇게 일찍 부터 요한의 저작자 문제가 의심
-2 1-
스러웠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 이 다.3,
이 논증 역 시 요란하게 보이긴 해 도 그처럼 대 단한 것은 못된다. 예수 의 신성과 로고스의 성육신을 크게 선언하는 복음을 Cerinthus에게 돌리 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이 이단자가 부정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신앙조항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루터의 갈라디아 주석을 교황에게 돌리는 것이 더 낫겠다! Epiphanius가그들에게 Alogi란 이름을 볼일 것올 암시 한 바와 갈이 Alogi파는 로고스(Logos) 복음(요한복음)에 대한 비 논리적인 (illogical) 반대자들이요, 신성하고 인격적 이성(Reason)에 대한 비 이성 적인 (unreasonable) 배척자营이 었 다.
Alogi파의 지론이 비 합리적이긴 하지만 가치 있는 요소 하나를 내포하 고 있었다. 즉 그들의 이름은 최소한 이 종파가 제 4 복옴의 기원이 매우 이 른 시 기 에 발달된 것 을 인정 하였 다는 점 이 다. 전설에 의 하면 요한과 게 린두스 (Cerinthus) 는 동시대 인물이 기 때문이 다. 제 4 복음이 그처 럼 매우 초기의 작품이라면 비평가들은 본 주석의 처음 몇 페이지에 진술한 해걸 할 수 없는 수수께끼에 여전히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1.
본 복음의 기독론은 정도가 너무 높으므로 초대의 제자에 의해 기록되지 않 았畜 것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이것은 논증이 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결국 논점을 교묘히 피하 는 소치 이 다. 그와 같은 증거 가 전혀 없으니 대 담한 주장이라고나 할까 ?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의 기독론은 그보다 수준이 낮은가?라고. 골 2 : 9나 빌 2 : 6이나 몹시 애를 태우는 롬 9: 5를 읽어보라. 비평가들이 아무리 열심히 애를 써도 그들은 그리스도 의 신성에 대한 증거문서로써 이 귀절을 제거하는 일에 전혀 성공하지 못 하는 것이 다. 그리 고 공관복음의 기독론은 그 보다 못한가? 마 11 : 27, 28을 읽어 보라.
1.
여기에 기록된 사건音에는 발전이나 전개부분이 없다. 바로 시작부터 예수
3) 예를 들면 M. Goguel, Le QuatrUme Evangile, Paris, 1923 pp. 161,162. 를
보라.
4) E.F. Scott* The Literatur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1940 p.
242를 참조하라•
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거의 시작부터 그의 죽음이 설계되어 있었 다. 열둘의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썼으리라고는 믿기 힘들다. 이 외에도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발견되는 것과 정반대이다.
이 논증은 사실을 공평히 다루지 않고 있다. 즉,
1.
제 4 복음에서 뿐 아니라 공관복음에서 도 예수는 바로 시작부터 메시 야로 인정되었다. 공관복음서에 세례 요한이 인정하였고(막 1 : 7,8) 귀신 이 인정 하였고C막 1 : 24,34 3 : 11) 요한복음에서 세 례 요한과 안드레 와 빌립과 나다나엘(1 장)이 인정하였다.
2.
예수를 메시 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다른 어디에서 보 다도 제 4 복음서 에 서 크게 강조된 것 은 저 자가 요 20 : 30, 31에 서 진술된 바와 같이 “너 희로 예수께서 하나님 의 아들 그리스도이 심을 믿게 하려 함 이요”와 같이 저자가 의중에 두고 있던 목적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사실 에서 이상과 같이표현된 목적올 깨 닫게 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올조심스
럽게선택하였다. 그는 자주 공관복음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것올 생 략하
고 있는 것이다. (49p• 를 보라)
1.
만일 예수가정 말 하나님 의 아들 메 시 야요, 그의 奮현이시초부터 경
이와경외를 일으키는 일에 실패 할 수 없는 것이 었다면 (막 1 : 27, 28)“열
둘 중의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썼으리라는 것을 믿기는 어 렵지 않다.”
1.
그렇긴 해도 예수를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데에는 발 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자들은 “그의 영광”을 제 1 장에서 보다도 2장11절에서 더 많이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 런 말씀이 2 : 11절 에 진술되 어 있 는가 ? 처 음에 는 메 시 야 직 무에 대 한 제 자들의 개 념 이 아직 어느 정도 세속적이요 국가주의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 하지 만 오천명 을 먹 이 신 이 적 과 관련해 서 예 수께 서 는 자기 가 그와 같은 유의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올 명 백히 보여 주심으로 무리들 의 희망을 산산이 깨뜨려 버리심으로써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는” 사 람들이 많았을 때 (6: 66) 시몬 베 드로가 주님 의 “너 희도 가려 느냐”는 질 문에 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 가 주는 하나님 의 거룩하신 자이신줄 믿고 알았삽나이 다” C6 : 67ᅳ69) 라고 대 답했다. 이 신앙고백은 이와 같은 환경 가운데서 는 분명 히 한 단계 진 보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 뒤에 있었던 되풀이 된 무지와 의
심의 순간들올 제외하진 못하였지만 전진올 보여 준 것은 사실이 다. 제자 들이 고백한 이 보다 더 의미심장한 신앙고백은 16 : 30에 나타난다. “우 리 가 지금에 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 다리 시지 않 는 줄 아나이 다 이로써 하나님 께로서 나오심올 우리 가 믿삽나이 다. ” 여 기 에는 적어도 한 순간은 대낮의 밝은 빛이 슬픔과 무지의 구름을 통해 비 쳐 나오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를 존재론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아들 로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우리 는 “나의 주시 며 나의 하나님 ” (20 : 28) 이 라고 한 도마의 영 광스러 운 외침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하심 (16 : 30올.참조하라)올 계시한 앞의 문맥 (20 : 24ᅳ27)에 비 추어 생 각해 야 한다. 하지 만 20: 29가 보여 주 는 대로 이런 숭배도 완전성은 결여하고 있다. 제 4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 격과 사역에 관한 보다 충분한 지식을 후에 오순절과 그 이후에 주시리라 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 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 희에 게 알리 시 리 라”(16 : 12,13).
방금 인용한 성귀에 비추어 볼 때 요한복음은 발전되고 전개된 복음임이 현저 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성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앙고백의 그 클라이 막스는 전도자가 오순절 후기 (後期)의 유리 한 입 장에 서 뒤 를 회 상하며 로 고스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을 표현한 귀걸들,예를 들어 서문d : 1-18) 에서 도달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된다. 제 4 복음의 어디서든 ! : 1ᅳ5, 14, 18절 보다 더 수준 높은 기독론은 아무데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귀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상관이 없다. 이 성귀들이 이 이야 기에 발전이 있었다는 이론을 증명하는데 사용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대로 이 이야기에 발전이 있는 것은 사실이 다. 하지만 분 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 네가지 있는데 a. 예수의 메시야적 의식, b. 그의 자기계 시, c. 제자들의 그의 메시야적 직무와 신성에 대한 인정과 신앙고백, d. 본서 저 자의 신앙.
첫째 메시야적 의식에 대하여 말하면 제 4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어떤 유
의 발전된 사실을 찾아 볼 수 없다. 본 복음은 예수의 유년기를 서술하지 않고 있음을 유의해 야 한다. 하지 만 만일 공관복음에 따라(눅 2 : 49) 예 수께서 12세 되셨올 때 이미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시라는 사실올 의식하 고 계셨다면 그가 요한복음에서 시초부터 신적 주권으로서 말씀하고 행동 하신 것으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놀라운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자기계시로 말하면一이 문제에 대해서 H.N. Ridderbos 의 Zelfopenbaring En Zelfverberging,Kampen, 1946, pp. 66—69와 G.Vos 의 The Self-diFClomre of Jesu-, New York, 1926을 보리ᅳ이 문제 의 난 해 성 은 인정 하고 들어 가야 한다. 공관복옴에 서 는 그의 은폐 성 이 강조된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 복음의 목적과 일치해서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가 강조되었다는 것은 분명 하다. 1장과 2장의 (1 : 51-2 : 19) 이 자기 계시는 뒤의 장들에서 처럼 될씬 발전된 것이 아닌 것으로 고려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메시야 직무와 신성을 계시하는 행동 속에 묘사되어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본 교리의 포괄적 의 기는 성 령이 부어지기까지 계 시되지 않았다(16 : 12,13). 이것은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 한 기타 교리 에 있어서도 그러하다(13: 7).
세째 제자들의 신앙고백에 대해 말하면 본 복옴의 기록의 발전에 대해서 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내째 저자의 입장에 대해 서 말하면 이 것은 당연하게도 본서를 일관해서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e.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죽이려는 계책에 대하여 말하면 제 4 복음서 는 발전과 전개의 사실이 있다. 동시에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가 역사적 전망이라는 크게 유리한 입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올 기억해야 한다. 그 가 기록한 사건들이 있은지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시작에서 끝을, 싹(순)에
서 가지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를 죽이려는 경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벳새다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 (5: 18)라고 했을 때 유대 인들이 그가 안 식 일올 깨뜨렸다고 생 각한 직후에 유대지도자들의 마음과 생 각에 떠 올랐 다는 것올 저자는 보게 된 것이다. 초막절기에 이 지도자들은 예수를 체 포하려 했으나 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유산되 었 다(7: 32). 후에 유대 인들
은 그에게 던지려고 돌을 집었던 일도 있다(8: 59). 예수를 처형하기 위
한 산해드린의 정식 희의는 아직도 후의 일이었다. 나사로를 살리신 일과 이로 인해 예수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 여러가지 계획이 공회에서 획책되 었다(11: 47ᅳ53, 12 : 10,11). 재판이 있었고(18장),예수는 유대 인들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손에 넘기어졌다. 이 모든 것에서 이 이야기는 발전과 전개된 사실올 보여 준다.
1.
공관복음이 증인둘에 의해 기록되었다면(기록에 의거하여),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나 기타 다른 증인이 제 4 복음을 썼을 가능성은 없다. 상이점이 너무 많고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1.
교리상으로 모순이 없다­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에 교리 상의 차이 가 있다는 사실은 아직 증명 되'
지 않았다. 접근방법이 다른 것은사실이 다. 공관복음은 나사렛 선지자인 이 사람 예 수가 메 시 야요 하나님 의 아들이 심 을 나타내며 제 4 복음은 하나님 의’ 아들이 성육신 하신 것올 가르친다. 이 두 관념 이 아름답게 혼합되 어 있다.
1.
사건들의 개요가 대체로 두 경우 모두 같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두 군데서 모두 소개되었다. 예수께서 두 군데서 모 두 큰 무리에게 말씀하시고 이적올 행하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두 군데 서 오천명을 먹이셨고 물위를 걸으셨으며, 자기를 거절하는 무리들을 물 리치시고 그의 제자들올 가르친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
예수께서 두 군데서 모두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셨으며 베다니에 서 성 유 (anointment)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두 군데서 모두 그의 제 자들과 함께 식사에 참여하시며 이와 관련해서 예수께서 배신자인 유다를 지적하 신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두 군데서 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그룰 버리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마침내 겟세 마네 에 들어 가신다. 두 군데 서 다 체 포의 기 록과 가야바 앞에 서 의 (요 한복음에서는 안나스와 가야바) 재판이 뒤를 이어 나온다. 동시에 베드 로의 부인과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이 두 군데서 모두 기록 되어 있다. 둘 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과 십자가의 처형과 여인들이 십자가 지심올 바 라본 일과 주께서 부활하신 무덤을 찾아갔던 일올 진술하고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 의 유사성올 두 개의 사상으로 분류하려 는 시도가 가끔 있었다. 즉 요한복음 6장에 포함되어 있는 재료와 18장에서
시작되는 고난주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르지 못하다. 무엇보 다도 요 1 : 32,33절과 막 1 : 10절의 유사점은 현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베다니에서 향유 부은 일과 예루살렘성 입성이 요 12장에 진술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은 공관복음에서도 발견된다(막 14장 마 21장, 막 11징-,눅 19장). 성 만찬과 성 만찬 강화와 관련된 사건들의 역사적 제 시 가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다. 막 14 •• 12ᅳ18을 참조하라. 따라서 공관복 음과 요한복음이 동일한 성 만찬올 가리 켜 말하는 것 일 개 연성에 대 하여 아직 마음을 닫지 않은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13—17장에서 발견되는 자료 가 공관복음의 구조에 훌륭하게 들어 맞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초기 의 유대 땅에 서 의 사역 (요 2 : 13-4 : 42) 과 후기 유대 땅에 서 의 사역 (요 7 : 1-10 : 42)은 공관복음에 서 발견되 는 것 과 전혀 모순되 지 아니 한 다. 마 23 : 37-39 마저도 유대에서의 광범위한 찬동을 암시하지 않는가? 눅 4 : 44도 최상의 사본의 지지를 받는 독법에 의하면 예수께서 유대 회 당 들에 서 설교하고 계 셨음을 암시 하지 않는가 ? 바리 새 인들과 율법박사들(서 기관들)이 유대에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정통하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 는 눅 5 : 17도 참조하라. 그리 고 거 꾸로 요 2 : 12, 4 : 43-54와 6장은 제 4 복음이 갈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올 위한 여지를 남긴다는 것을 보 여주지 않는가.
1.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은 제 4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과 조금도 모 순되지 않는다-
공관복음은 우리가 다음에 지적한 바와 같이 여러 점에서 제 4 복음과 다르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과 강화에서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 차이점들 은 근본적 인 것 이 아니 다. 요한의 평 판이 좋은 말과 담화의 어 조는 공관 복음의 어조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평가들의 논증이 유효한 것이라면 그들이 증명해야 하는 것은 공관복음과 제 4 복움과의 모순이지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요한 복음
3 : 3. “예 수께 서 대 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로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营 수 없느니라”
마 18 : 3, “진실로 너희에게 이 르노 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 니 하면 하-1님 나라에 둘어 갈 수 없느 니라”
4:35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이 밭을 보라희어져 추수하게 되었 도다”
3 : 35, 10 : 15; 14 : 6, “아버지께서
아-!■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
셨으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
가 아버 지 룰 아는 것 같으니 …… 내 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버지에로 울 자가 없느 니라”
5:8,9, “일어 나 네 자리를 들고 걸 어가라”
5 : 35,36, “요한은 켜서 비취는 둥불
이 라 내 게 는 요한의 증거 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울 얻 은 줄 생 각하고 성 경 을 상고하거 니 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중거하는 것 이로다”
6:20,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
6 : 44—46, “나룰 보내 신 아버 지 께 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을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 막 날에 다
막 10:23. “재 물이 있는 자는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마 9 : 37,38, “이 에 제 자들에 게 이 르 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 므로 추수하는 주인에 게 청 하여 추 수할 일군듭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 시니라”
마 11:27,28,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 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 로 계 시 를 받는 자 외 에 는 아버 지률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 거 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내 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막 2 : 9(다른 경 우이 다) “일어 나 네 상율 가지고 걸어 가라”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 한 보다 큰이가 일어 남이 없도다 그러 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 다 크니라”
눅 24:44,45, “모세의 율법 과 선지 자의 글과 시편에 나룰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옴을 연 이 성경올 깨 닫게 하시 고”
막 6:50, “안심 하라 내 니 두려 워 말 라 하시고”
마 11 : 27,28, 위에 인용람.
시 살리 리라 이 는 아버지륜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8 : 12, 12 : 36, “나는 세상의 빛이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자!으라 그리하면 빗의 아들이 되 리라”
1.
: 25, “자기 생명율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 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 생하도류 보존하 리라”
12:27, “지금 내 마옴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 요 아버 지 여 나룰 구원하 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유소서 그러 나 내 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13: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올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 하는 자는 나름 영 접 하는 것 이 요 나를 영 접하는 자는 나룰 보내신 이룰 영접 하는 것이니라” 15 : 20도 찬조하라.
1.
: 38, “내 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 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 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 5 : 14-16 “너 희 는 세상의 빛이 라 ……이 같이 너희 빛올 사람 앞에 비 취 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문 리게 하라’’
눅 9 : 24, “누구든지 제 목숨윤 구원 코자 하면 임올 것이요 누구든지 나룰 위하여 제 목숨올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 26 : 37,38,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옴이 심히 고민 하여 죽게 되 었으니 ” 눅 12 : 50도 참조 하라.
마 10 : 24, 40, “제 자가 그 선생 보다 또는 그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 니……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룰 영접 하는 것 이 요 나를 영 접 하는 자는 나 보 내신 이룰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26 : 34, “내 가 진신로 네 게 이 르 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 가 세 번 나륜 부인하리라”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자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 다. 제 4 복 음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요 3 : 3ᅳ5에 기록된 하늘나라 말씀올 하 신 그가 하늘나라 비유를 말씀하셔 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도 이 상한가?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 비유를
말씀하신 그의 입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10 : 27,28 “내 양은 내 음성 올 들으 며 나는 저희를 암며 저희는 나를 따르 느니라 내가 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 를 내 손에 시 예 앗을 자가 없 느니 라”
눅 15: 3ᅳ6, 14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 유로 이르시 되 너 희 중에 어느 사 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혼 아흡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읍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
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
에 와서 그 벗 과 이 웃올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
을 찾았노라 하리라”
d- 기타 사소한 점에 있어서도 제 4 복음이 공관복음과 모순된다는 것은 확증되 지 않았다.
요 13 : 1,29와 18 : 28을 기초로 해서 제 4 복음은 예수께서 규칙적인 시 간에 유월절 만찬올 잡수셨다고(막 14 : 12, 눅 22 : 7) 분명 히 가르치 는 공 관 복음과 모순된다는 주장을 해 왔다. 하지만 만일 요한복음 13장에 서술 된 성 만찬이 一이 것과 관련해서 매우 특이하게 발생한 많은 사건들과 구별 되 어_니 산월 u일,목요일 저 녁에 먹는 유월절 정 식 성 만찬이 아니 라면 아닌게 아니 라 매우 이상한 일일 것이 다. 사실 “유월절 전에” (1 절)와 이 뒤에 나오는 “저녁 먹는 중” (3절)은 하나의 짝올(Combination) 이루는 것으로써 여기에 지적된 만찬이 유월절 만찬임올 나타내는 것 같다. 이 유월절 민찬이 민수기 28: 16,17과 일치하여 7일간의 축일의 뒤이어 오며 특히 즐거운 유월절 잔치에 (니산월 15일의 Chagigah) 뒤 이어 오는 것 이 라고 주장 할 때 한가지 해결책이18: 28의 마지막 절(Clause)과 관련해
서 암시 된다. 이 해결책의 장점이야 무엇이든 간에 이 해결책은제 4 복
음이매우많은지면을ᅳ5장 ! 一할애하며 대 유월절만찬 전날 밤에 먹는
식 사에 그처 럼중요성을 부여 하는 학설 보다 최 소한더 타당한 것으로 우
리 의 마음올 끄는 것 이 다.
요 19 : 14에 의하면 빌라도가 예수를 데리고 나와 가바다라 하는 장소 에 마련된 재판석에 앉은 것은 제 육시경이었다. 막 15: 25에 의하면 예수 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제 삼시경이었다. 여기에 다시 모순이 있을 필 요가 없다. 라당한 해결책은 이것이다. 즉 요한은 시간올 로마식으로 계 산하고 있으며 시간을 계산할 때 오늘 우리가 계산하는 식으로 자정과 정
오에서 시작하였다는 것이 다(D.C.G., art, “Hour”). 이 런 까닭에 그가 “제 육시경”에라고 말 할 때 이것은 오전 6시와 6시 30분 사이의 어느 때를 의미한다. 한편 전도자 마가는 시간을 유대식으로 계산했다. 그러므로 예 수께서 일몰 후 제 3시경에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하는 셈이다. 여기에 는 전혀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일단 이 해결 방법이 채택되면 제 4 복음 의 기 타 성 귀 들이 분명 하게 된다. 1:39,4: 6,52,53의 주석 올 보라.
1.
기타 사소한 논증들은 대체로 성격상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상세 하게 반박 할 필요가 없는 것들로써 다음과 같다.
1.
토박이 유대인이었다면 유대인들을 바로 하나님의 원수들로 표현하는 등(5 : 18,7:1,9 : 22) 유대인들에게 그처럼 경멸적으로 비난하는 식으로 쓸 수는 없 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들을 언급 할 때 제 3 인칭을 사용하지 않았 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즉 사도 요한이 본 복음을 썼을 때 유대인들 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국가로서 배척했다. 더구나 본서를 맨 처음으로 읽 올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었다. 저자가 그들을 위 하여 기록하는 가운데 유대 인들을 언급 할 때 제 3 인칭 올 사용했으리 라 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1.
예수의 제자라면 그 지신이 사용한 강화의 문체를 예수의 문체로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예수께서 어디서 끝내셨고 요한이 어디서 시작했는가를(예 를 들어 3 : 16-20 12 : 44-50) 결정 하는 일은 가끔 어 려 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자는 예수 의 사랑하시던 그 제자였다는 사실을 유의해 야 한다. 그는 예수께 매우 가까왔으므로 예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주인 처럼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와 같은 문체로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
만일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면 그가 복음서를 썼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둘은 사싱 내용에서 뿐 아니라 언어의 특징에서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로 인정되고 있거니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서 필자의 More Than Cowqmws(필자의 요한계시록 주석) Grand Rap­ids, Mich., 1949, pp. 17—19와 p.37올 보라. 여기서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요한이 에베소에 살며 본 복음서를 쓰고 있는 동안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 저작의 유일의 책임을 지는 사도 요한의 최종 시인을 받아 그의 문체와 어법의 얼마간 영향을 준 조력자들을 거느 리고 있었올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21 : 24를 참조하라. 그가 계시록 을 쓸 때 이 조력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은 두 기록의 언어의 차이에 대한 부분적 설명이 될 수 있겠다(A.T. Roberst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New York and London, 1932, vol. V, p.xix). 어 떻 든 각 책이 쓰여진 형편이 철저히 알려져 있지 않는 한, 계시록올 쓴 사 람은 제 4 복음서를 쓸 수 없었올 것이라는 식의 단정적인 말은 위험하다 (근거가 불확실하다).
비평가들의 논증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하였다.
요한복음이 최후에 기록되었으며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공관복음올 기 록한 목적과 다르다고 간주하므로써 주요 문제가 적어도 크게 해결된 셈 이 다.
본 복음 자체가 제공하는 기록에 의하면 저자는,
CD 유대인 이었다.
1.
이 것은 그의 문체에서 분명 하다. 93p. 를 보라.
2.
동시에 이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철저하게 정 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서 귀결된다. 그는 히브리서에 따라 구약 성경과 70인경을 모두 인용 할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 성귀를 보라. 2:17, 10 : 34,35, 12:40, 13 : 18, 17 : 12, 19 : 24,28,36,37.
3.
이것은 그가 유대 (와 사마리 아) 종교의 신앙,특히 메시 야에 관한 신 앙에 언급한 것으로 봐서 확살하다. 1:41,46,49, 4: 25, 6 : 15, 7 : 27, 42, 12 : 34.
4.
이것은 저자가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정치적 상태에 정통하고 있었음 올 보여주는 증거의 뒷받침올 받는다. 4: 9, 7:35, 11:49, 18:13,28, 31,39. 그리고 유대 명 절과 정 결의식에 정 통하고 있었다는 증거의 뒷받침 을 받는다. 유월절에 대해서는 2: 13,23, 6:4,13:1,18:28,5 : 1,초 막절에 대 해 서 는 7 : 2,37,38, 수전절에 대 해서 는 10 : 22,23. 그리 고 3 : 25, 11:55, 12 : 12, 18 : 28,39, 19 : 31도 보라.
5.
이것은 그가 유대 인들의 혼인식과 장례식에 대한 습관을 소개 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한 것올 설명해 준다. 2 : 1-10, 11 : 38,44, 19 : 40.
1.
저자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형에 대해 상세한 지식올 가지고 있다. 1 : 28, 참조 11 : 1, 2 : 1,12, 3 : 23, 4 : 11, 20, 11 : 54, 12 : 21. 특히 예루살렘과 그 근교에 대해,5:2, 9:7, 11 : 18, 18 : 1, 19:17. 그리고 성전에 대해 2 : 14,20, 8 : 2,20, 10 : 22,23, 18 : 1,20.
CS) 저자는 목격자였다. 저자는 목격자로서 사건들이 발생했던 때를 기억 하고 있 었 다. 가끔 정 확한 시 간까지 . 1 : 29,35,39, 2 :1, 3 : 24, 4 : 6,
40,52,53, 6 : 22, 7 : 14, 11:6,12:1,13:1,2,19 : 14,31, 20:1,19, 26.
그는 예수께서 우물 옆에 앉으셨을 때 예수께서 지쳐 있었음을 알았다 (4 : 6). 그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의 이웃들이 한 말들올 기 억하고 있었 으며 (9 : 8—10), 그 자신이 예수의 찔린 허리에서 솟아 나오는 피와 물을 보았고(19 : 33ᅳ35),그는 베 드로에 게 오른쪽 귀 가 잘린 대 제 사장의 종 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며 (18: 10), 그는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18 : 15). 이상의 여 러 사실과 기 타 많은 점들은 저자가 자기 가 기록한 사건 들의 목격자였옴올 명백히 보여 준다.
1.
저자는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저자가 그의 주님과 성만찬에 탕 여했다는 사실은 그가 열 두 제자의 한 사람이어 야 함을 보여 준다(13 : 23). 그의 베드로와의 친밀한 교제(공동생 활) 역 시 이 것올 증명 하는 것으 로 보인다(1 : 35-42, 13 : 23,24, 18 : 15, 16, 20 : 2, 21 : 20 -23). 저자 가 사도들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동과 말과 감정에 대한 그 의 깊은 지식에서도 나타난다. 2:17,22,4:27, 6:19, 12 : 16, 13:22, 28, 21:21. 그리고 만일 그 누군가가 이 모든 경우에서 그들(3제자')의 반응이 본 복옴에 기록되어 있는 바의 제자들이 핵심구롭 (3제자)에 속해 있었는지 분명치 않으며, 따다서 우리가 도출한 추론이 전혀 신빙성이 었 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열 두 제자”룰 분명 히 가리키는 기 타 성 귀들에 주목 할 수 있다(6 : 66-71, 20 : 24—29). 저자는 해 심구 i- 안에서 오고 간 말들올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 그가 핵심구룹의 난 사람이었다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1 : 35-51 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제자가 안드래와 시몬 베드로와, 빌립 과 나다나엘과 관련해서 진술되어 있움도 주목하라. 그들은 모두 열 두 제 자들이었다.
1.
저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제시한 모든 사실에서 이숄 어 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런 추론임이 확실하다. 저자가 다른 제자들의 이 름을 말한 반면 요한이 나그의 형 제 야고보를 말할 때는 이렇게 뚜렷 하
게 지적하고 있지않옴올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 사실은의미심장한 것
이며 전자의 신원올 가리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이름을 삭제한 과정 에 따라 저자가 누구인가 ? 라는 질문에 대 한 대 답에 도달하기는 그렇게 어 렵지 않다. 열 두 제자의 이름을 기억하기 쉽게 해주는 옛 시가 하나 있다(마 10 : 2-4, 막 3 : 16-19, 눅 6 : 14ᅳ 16, 행 1 : 13 참조). 즉,
“Peter and Andrew, James and John,
Philip and Bartholomew,
Matthew next and Thomas too,
James theLess and Judas the Greater,
Simon the Zealot and Judas the Traitor.”
제 4 복음 역 시 “열 둘” (6 : 67,70,71, 20: 24)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이 말(열 둘)이 공관복옴과 같은 구룹의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 고 생각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몰 중 누구가 저자였울까?
배신자 유다는 즉각 제거하자. 저자가 그를 가리켜 말할 때는 그의 이름 을 부르니까(6 : 71, 12 : 4, 13 : 2,26,29, 18 : 2,3,5).
21 : 24를 20절과 비교하면 저자는 성만찬 때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었던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 었다는 것은 분명 하다. 저자는 베드로와 구별된다. 아직 열 제자가 남아 있다. 여 기서 저자를 밝혀 야 한다.
하지만 마태의 이름은 즉각 배제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다른 복음과 연관되어 있으니 까. 다음으로 예수의 가장 측근의 친구였던 제 4 복음의 저자(13 : 23) 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열심 당 시몬과 같은 다소 알려지 지 않은 제자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유다(위의 시에 서 “The Greater”라 일컬어진 야고보의 유다,또는 다대오로서 성경에서
“7V롯인이 아닌 유다”라고 한 때는 이 사람을 가리킨다•)와 도마는 제 4 복 음에서 이름이 나와 있다(14 : 5,22). 이것은 이름올 대지 않은 저자와 01 사람들을 분명히 구별한다.
그러면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와 빌립,바돌로메의 이름이 남는다. 요 한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어떻게 데려왔는가를 말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에서 열 두 제자의 명 단에는 빌립과 바돌로메가 항상 함께 진술되 었다. 요한은 바돌로메를 진술한 적이 없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나다나 엘을 진술 한 일이 없다. 이 러므로 요한복음의 나다나엘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바돌로메_나다나엘은 그의 본명 이요 바돌로메는 부자간의 관계를 나타내며 돌마이의 아들이 란 뜻이다一임이 틀림없다(C.E. Macar- tney의 Of Them He Chose Twelve, Philadelphia, 1927, pp. 63, 64를 참 조하라). 만일 본문에서 이름올 대지 않은 제자가 본서를 일관해서 동일 한 인물이라면 우리는 그를 1 : 35-51에서도 만난다. 여 기서 그는 안드레 와(40절) 시몬 베드로와(41,42절) 분명히 구별되며ᅳ베드로의 이름은 2] 장이 제공하는지식을 근거로 하여 이 미 삭제 한 바 있다-빌립 과(43,44절, 나다나엘(바돌로메,45ᅳ51절)로 부터 구별된다.
안드레와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름도 떼면 야고보와 요한만 남는다. 하 지만 베드로는 이미 순교자의 면류관올 얻었지만(19절) 제 4 복음서의 저자 는 본서가 처음 출판되었을 때 (24절의 현재시상을 주목하라.) 여전히 살 아서 증거하고 있었음이 21 : 19ᅳ24에서 분명하다. 베드로가 야고보 보다 오래 산 것올 우리가 알므로(행 12장) 야고보가 제 4 복음을 쓸 수 없었 으리 라는 것은 분명 하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남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밟아 온 논증에서 우리는 이 결론이 제 4 복음 자체가 제공한 재료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음을 주목해 야 한다. 공관복음과의 비 교는 우리의 결론을 확인해 준다. 요 1 : 35ᅳ40에 서 제 4 복음서 의 저자 는 그리스도의 최초의 제자들의 한 사람이었음을 안다. 다른 두 제자는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였다. 마가복음도 최초의 제자들의 명 단을 가지고 있 다 C1 : 16—20, 29). 이 명 단에 는 이 름이 네 개 나온다. 즉 시 몬과 안드레 라 야고보 요한이다. 두 명 단올 비교해 보면 제 4 복음서의 저자가 세배대 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이 라는 것은 다시 분명 하다.
이 논증의 힘올 피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시도는
21 : 2절에 “다른 제자 둘”(시몬 베드로와 도마,나다나엘,세배대의 아들 들)을 진술한 사실에 집중 하는 수가 많다. 이 “둘”은 12 사람에 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그들의 한 사람이ᅳ장로 요한인 것 같은대ᅳ저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점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있 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제시한 모든 증거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이 외에도 이와 같은 논증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비록 저자가 사 도 요한이 아니고 21 : 2에 언급된 어떤 잘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다 하더 라도 요 21장에 기록된 이 야기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 을 본 목격자였으 며, 예수가 최상적 인 의 미의 하나님 (1 : 1ᅳ 18)이시며, 예수께서 그를 따르 는 자들에게 즉각 하나님의 아들 메시 야로 인정 받았다는 것을 모든 시 대 의 교회에 선언한 목격자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 능한가? 어떻게 이것올 심리적으로 설명 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문제에 는 만족 할 만한 해 결책이 오직 한 가지만 있을 뿐이 다. 그것은 예수는 살 로 그가 주장하신 그대로의 신분이며 이 사람들이 그를 증거한 그대로의 신분 즉,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와 그들 의 증거를 진리로 받아들이라. 그러 면 문제는 살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증거 는 제 4 복음 자체로 부터 나온 결론과 일치 한다. 이 처 럼 유세 비 우스는 이 문헌 (제 4 복음서 )을 마음대 로 철저 히 연구 검 토한 후 에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자, 의심 할 여지없는 이 사도의 저작을 지적합시 다. 그가 쓴 복 음을 맨 먼저 인정합시다. 그것은 하늘 아래 모든 교회에서 읽혀지기 재 문입니다……이처럼 요한은 그의 복음을 펴 나가는 중에 세례 요한이 투욕 되 기 전에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말해 줍니 다. 하지만 다른 세 전도자는 세례 요한의 투옥 이후의 사건들을 진술하고 있읍니 다,,C교회시* III권 xxiv,1-13). 이 유명한 교회사가는 제 4 세기 초에 이 런 말을 기 导했다.
그에 앞서 오리 겐은 CAD210ᅳ250에 활약했다 ) 사랑받은 제자 요한이 제 4 복음과 계 시 록을 썼다고 말했 다. 오리 겐은 요한복음에 대 한 주석 에 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 면 복음서는 넷이 되는데 나는 복음서들의 첫 열매 는 귀하(암부로 시우스)가 내 능력에 따라 연구하라고 명 하신 복음 즉 요한복음이 라고 생
각합니 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관한 주석). 같은 문단에 서 그는 제 4 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 요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는 오리 겐에 서 더 거 슬러 올라가 그의 스승인 알택 산드리아의 클레 멘트에 도달 할 수 있다(190-200년에 활약하였다). 그는 한 사람의 요한, 즉 사도요한 만올 알았다. 그는 제 4 복음을 분명히 그에게로 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최후로 요한은 외적 사실들은 복음서들에서(공관복옴) 이미 명 백히 된 것을 알고 그의 친구들에게 권면올 받으며 성령의 영감읍 받아 영적 복읍 을 지 었다. ”(유세 비우스,교회사 VI, xiv, 7.) 클레멘트는 노년의 사도 요 한에 관한 아름다운 이 야기 하나를 간직 하고 있 었 다. 49p. 를 보라. 클레 멘트는 제 2 세기 중업에 태어나 속사도들에 가장 가까이 접해 있었다. 그 는 상당한 지식 인이 었으며 널리 여 행하였다-
이와 같은 시 기에 터 룰리 안은 제 4 복음올 사도 요한에 게 돌렸다04^1- inst Marcion IV, v).
클레멘트의 동 시 대 인은 이 레 네우스였다. 그는 사도 요한올 잘 알았던 폴리 갑의 생도였다. 폴리갑에 게 가르침올 받았으나 진리 를 잘 못 알았던 Florinus에게 부치는 편지에서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풀로리 누스여, 내 가 조심스럽 게 말하거 니 와 이 런 견해 들은 건전한 교리와는 상관이 없읍니 다. 이런 의견들은 교회와 일치하지 않으며 이 런 의견들을 믿는 사람들올 큰 악에 빠지게 합니다. 교회 밖의 이 단들도 심 지어 이 런 의견들은 감히 선언한 적이 없읍니 다. 우리들 보다 먼저 장로 였으며 사도들올 동반하고 다녔던 사람들은 이 의 견들올 당신에게 전하지 않았읍니 다. 나는 아직 어 린 소년일 때에 동(東)아세 아의 폴리갑의 집에서 당신올 알았읍니다. 그 때 귀하는 왕실의 지체 높은 사람이었고 그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쓰고 있었읍니 다. 나는 최근에 일어 난 일들 보다 그 당시 사건들을 더 분명히 기억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어릴 때 배운 것은 영혼 과 함께 성장하며 영 혼과 함께 결합되어 있으므로 나는 복받은 폴리 갑이 앉아 변론올 벌인 장소 까지도 말할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들어왔다가 나갔으며 그의 생활의 성격과 그의 몸매와 그가 백성들에게 전한 말씀, 그가 어떻게 요한과 기타 주님을 본 사람들과 교제를 말했으며 어떻게 그 가 그들의 말과 그가 그들로 부터 주님에 관해 들은 일들과 그들의 기적,
그들의 가르침올 기 억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폴리 갑이 이것 들올 생명의 말 씀의 목격자로 부터 받았으며 모든 일들을 성경과 일치해서 보고 했는가를 말할 수 있읍니 다. ” (유세 비우스,교회 사, v. XX, 4-7. )
소아시 아에서 고울지방 까지 여 행했고 로마교회와 빈번한 접 촉을 가졌던 이레네우스는 제 4 복음서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이 복음을 사도 요한에 게 돌렸다. 사도 요한의 제자의 제자였던 사람으로 부터 온 이 증거 는 그 증거의 힘올 잃을수 없다. 더구나 그의 많은 여행과 그 당시의 온 교회
와의 친밀한 관계때문에 이레네우스가 제 4 복음서에 대해 말한 것은 매
우 의의가 큰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관한 그의 제 언은 교회 의 제 언으로 간주 될 수도 있 다. 유세비 우스의 기 록에 의 하면 그 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주님의 품에 의지해 누워 있던 주님의 제자 요한이 아시아의 에베소에 살고 있을 때 이 복음(제 4 복음)도 내었다.”(교회사, V, viii, 4.)
이레네오마저 복옴이 네개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Against Heresies, III, xi, 8).
불완전한 신약성경 목록인 무라토리 단편집은 빈약한 나전어로 쓰여져 있으며 밀라노 암부르스 도서 관에 서 이 것올 발견한 L.A. 무라토리 (1672ᅳ 1750) 추기경으로 부터 이름을 따왔으며 그 기원올 180—200년에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무라토리 경전은 다음과 같은 글을 포함하고 있다.
“제 4 복음서는제자들 중 한 사람인 요한의 책 이 다. 그의 동료 제자들
과 감독들의 권면에 응하여 그는 ‘나와 삼일간 꼭 붙어 지내세. 그런 다
음 피차에 대하여 계시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서로 말해보세’라고 말 했다. 그날 밤 그들이 총괄적으로 기억했던 것올 그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던 사람은 요한이었음이 사도의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에게 계시되었다. 그러 므로 비 록 각 복음에 있는 사실들로 부터 여 러 가지 다른 발췌물이 나 오긴 했지만 신자들의 신앙에 불화가 없었던 까닭은 그들이 모두 한 성령 의 인도를 받아 그C예수)의 탄생과 수난과 부활과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 와 그의 재림,즉 처음에는 치욕에서 발생한 겸허한 강림이요ᅳ이것은 이 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一재림은 앞으로 올 것인데 왕의 능력과 영광 가 운데 오실 일에 관계되는 모든 일들이 선포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직접 “우리가 둘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 으로 만진바라”라고 말하며 이 일들을 그처 럼 일관해서 인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그가 이처럼 목격 자였올 뿐 아니 라 주님에 대한 놀라운 모든 일들올 그 순서 대로 들은 자 요 말한 자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무라토리 경 전은 행라어 에 서 옮긴 번역물이 요 로마에 서 또는 적어도 로 마 영향력권에서 생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우리의 목적올 위해서 안드 레와 같이 제자들의 한 사람이었던 제자 요한이 여기에 제 4 복음서의 기 자로 서술되어 있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중요하다. 본 복음이 생긴 정확 한 양상과 관련되는 그 홍미 있는 이 야기는 전설로 간주해야 한다. 그것 은 본 복음이 나왔을 때까지 다른 제자들이 살아 있었다는 모든 전통과 반대되며 있올 법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런 이유 때문에 이 정황적 인 (Circumstantial) 이 야기로 부터 추론올 도출하는 것은 극히 위 태한 일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일이 저질러 진다. 첫째 “ut recogno- scentibus cunctis Johannes suo nomine cuncta describeret,> (llzi#01 # 괄적으로 기억해 낸 것올 그의 이름으로 말해야 했던 사람은 요한이었다”)절 의 허두를 때는 말은 이렇게 번역된다. 즉 “그들은 모두 수집가로 행 동하며.” 다옴에, 이 사람들이 모두 수집가들이었기 때문에 사도 요한 자 신이 본서를 실제로 쓰는 데는 매우 사소한 역할올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끝으로, 전적으로 허구적인 “장로” 요한이 다시 한번 저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적은 것에 너무 많은 것을 기초로 하는 셈이다 ! 무라토리 경전에서 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정 당한 결 론은 180ᅳ200년 경에 로마 교회가(적어도 로마영향력권의 중요한 인물) 게 4 복옴을 사도 요한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폴리크라테스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이 시기에 글올 썼다. 장 소도 의의 가 있으며 시기도 그러하다. 에베소에서 이처 럼 초기에 (거의 19 6년) 여기에 살던 사도 요한에 관한 전언은 생생한 바가 있는 것이다. 폴 리크라테스는 말했다. “내 친척 중 감독이 일곱 사람이고 나는 여덟째이 다”라고. 그는 유월절 논쟁 (부활절은 그 달 14일에 축하 해 야 하는가ᅳ그 날이 무슨 날이든ᅳ아니 면 항상 일요일에 해 야 하는가)에 관해 충고하였 다. 그의 편지에서 그는 요 13 : 25에 대해 언급할 뿐 아니라(적어도 그 문
단에서 확인된 사실에 언급) 에베소의 요한의 체류와 죽음에 대해서도 언 급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더구나 주님의 품에 기대어 누웠고 주교관(冠)올 쓴 성직자요 중인이 요 교사가 되었던 요한은 에베소에 영면하고 있다”(Le故r to Victor and the Roman Church concerning the Day of Keeping the Passover, preserved by Eusebius, 교회사,V, xxiv).
유세비 우스에 의 하면 수리 아 안디 옥 사도들의 제 6 대 감독이 었 던 데 오 빌 로는 이 보다 수년 일찍 썼는데 요한올 제 4 복음의 영 감 받은 저자로 명 백히 이름올 밝히고 있다. 그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이 런 까닭에 성문서들은 우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모든 영 감 받은 사 람들의 한 사람인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말하며 처움에 하나님이 혼자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 님 안에 계셨음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7b Autolycus II, xxii).
앞의 글에서 부터 몇가지 사실이 분명해 진다.
C1) 정 통교회 안에 제 4 복음서 저 작자에 대 한 한결 같은 전통이 있는데 이 전통은 제 4세기 초의 유세 비우스로 부터 170-180년에 활약한 데오빌 로에 까지 소급 될 수 있다.
1.
이 한결 같은 전통에 의하면 제 4 복음은 요한이 썼다. 대체로 이 요한은 사도요, 그리스도의 품에 의지해 누웠던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것 까지 분명 하게 되 었 다. 주요 증인들은 유세 비 우스와 오리 겐, 알택산드리 아의 클레멘트,터 툴리안, 이레네우스, 무라토리 경전의 저자와 데오빌로 이다.
2.
이 증인들의 최초의 한 사람인 이레네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의 제자였다. 사도가 저작자라는 전통이 이처 럼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는 추론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C4) 광범한 여행과 온 교회의 신념에 정통하고 있던 이레네우스는 대표
적 증인이라 칭함올 받을 수 있다. 그는 전체 기독교 사회의 신앙올 대 표
했다. 터룰리안과 알택산드리아의 클레맨트, 이레네우스, 데오빌로는 제
2 세 기 마지 막 4반기 에 제 4 복음이 알려 져 있었으며,기 독교권 즉 아프리 카, 소아시아, 이텔리, 고울, 수리아에서 읽혔으며 본서가 잘 알려져 있 던 요한의 저작으로 돌렸음올 보여 준다.
1.
이 한결 같은 초기 전통에서 나온 외증은 제 4 복음 자체에서 나온
내증과 일치한다.
1.
우리가 검토해 온 증거는 세가지 중요한 것올 증명해 준다. 즉,
1.
제 4 복음은 초기로 부터 존재해 있었음에 를림 없다는 것이다. 분명 코 170 년경에 본서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쓴 성문서라 일컬어지고 본 성 복 음이 너무 귀중히 여김올 받은 나머지 사람들이 이를 변호함에서 기꺼이 죽으려고까지 한 어 떤 교리적 입장올 증명 하는 일에 사용되 었을 때 그 기 원은 이보다 시기적으로 더 이른 날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론해도 좋 올 것이다.
b- 본 복음은 그 가치와 권위에 있어 다른 복음서들과 동등(최소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1.
본 복음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이단으로 구별된 사람들 중에 서 타티안(170년 경 )은 그의 스승이 죽은 후에 이단이 되었는데 그와 Justin Martyr는 제 4복음을 받아들여 이것 올 그의 대관복음CD妨essarow)을 저작 할 때 사용하였다. 사실 타티 안의 책은 제 4 복음의 처음 다섯절로 허두를 시작하고 있다.
140년에서 180년까지 존재했던 발렌티누스 학파의 Heracleon은 심지어 제 4 복음에 대 한 주석 까지 도 썼 다. 역 시 이 학파의 Ptolemy는 본 복옴의 저작올 “그 사도”에게 돌렸다. 제 2 세기 중엽의 말기온은 모든 복옴올 배 척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그 자신의 복음서를 준비하여 그의 출처로써 누가복음의 여기 저기가 절단된 것올 사용하였다. 하지만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의 저자였 다는 것 을 그가 부정 하였 다는 사실은 확인되 지 않았다. 그가 본 복음올 배척한 것은 그가 본서의 저자를 유대교인으로 간주했다 는 사실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이 런 결론을 갈 2:9,11-13에 기록된 바
울의 말씀에 기초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 말씀을 크게 오해하였다(터룰리 안의 Against Marcion, IV, iii을 참조하라).
이제 강조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즉 만일 이 이단들이 그둘의 가르침이 제 4 복음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본 복음을 사도가 아난 저자에 돌릴 수 만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하려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100—170년 어 간에 활약한 정 통 교회 의 저자들 중에 Justin Martyr 는 (변증서 1,61) 요 3 : 3ᅳ5에서 인용한 것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그는 본 복음에서 많은 표현을 사용하였다(그의 저서 To,》/zo와의 대화 105도 보라 장). 더구나 그의 로고스 교리는 거의 제 4 복음에서 끌어 내 온 것이 확실 하다. 이외에도 Justin의 제자 타티안이 이것을 그의 대관복음 에 포함시켰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파피아스와 폴리갑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미 말한 것을 참조하 기 바란다. 유세 비 우스는 파피 아스가 “제 일 요한 서 신으로 부터 의 인용문 들을 사용하였다”고 말했다(교회사 IV,xxxix, 17). 제 4 복옴올 그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과 관련해서 그 어떤 논증을 이것에 기초 할 수 있는 가 없는가 하는 문제 는一제 4 복음은 요한 서 신과 문체 가 비슷하다_여 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제 4 복음의 정신(spirit)은 익나티우스 서신들(짧은 교정본)의 어느 부분 에서 나 분명하다. 그가 순교하였을 때 (110년 경), 본 복음을 사실상 본 일 이 있으며 그것에 언급한 일이 있다는 것올 절대 확실하게 증명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지금까지로는 가장 자연스런 결론인 것으로 보인 다. 유사점들이 너무 많고 너무 현저하다는 인상을 많은 사람에 게 주었으 므로 이 유사점들이 어떤 모순되는 추론을 정 당화하지 못한다. 이 인유(引 喻)들이 정확인 인용이 아닌 것은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로마로 순교하러 가는 길에 있던 죄수로 부터 그 누가 다른 것올 기대하겠는가? 다음 인 용문은 그 증거를 제공한다.
익나티우스
“왜냐 하면 만일 내가 짧은 시일 안 에 여러분의 감독과 인간적이 아닌 영 적인교제를가졌다면 만물이 하나로 조화를 이둘 수 있도록 교회가 예수 그 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 가 아버지와 연합되이 있듯 그(에수)의- 연 합되 어 있는 여러 분을 내 가 얼 마나 더 복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읍니까?” (에베소 교인들에게 V,i).
“주께서 아버지께 연합되어 있어서 그와 함께 가 아니 고서 는 아무 것 도 아니 하시 며 자기 혼자서 나 사도늘올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 것 처 럼 여러분은 감독과 장로들과 함께가 아니 고시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됩니다” (TO the Magnesions VII, i).
“나는 하나님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 의 신■을 원합니 다…그리고 음료로는 그의 피를 원하니 그의 피는 썩지 않 는 사랑인 것입니다”(로마 교인돌에게 VII, iii).
“대저 그것(성령)은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시기 때문입니 다”(빌립보 교인들에게 VII, i).
제 4 복음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 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가 되 게 하려 함은”(17 : 23).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 니’’(5: 19V
“내 살을 먹고 내 피불 마시는 자는 영 생 올 가졌 고 마지 막 날에 내 가 그룰 다시 살리 리 니 내 살은 참된 양식 이 요 내 피 는 참된 음료로다”(6 : 54,55).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나니 성 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 러 하리 라”(3: 8).
만일 요한의 글을 상기시키는 이상의 몇몇 표현과 기타 다른 표현들이 익나티우스가 제 4 복음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제 4 복음의 기원일은 110년 이전의 어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본서가 98년 이 후와 80년 이전에는 쓰여지지 않았다는 전래적 신념에 가깝다.
하지만 제 4 복음서 저작 년대에 관한 전래적 신념은 어떤 파피루스 사본의 초기 의 요한복음 단편 (/rap«e«0이 실제로 발견된 데서 강한 확증을 얻었다. 이 사
본은 다른 텔라어 파피루스들과 함께 이짚트에서 발견되었고 John Ryla- nds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중부 이집트의 기독교 사회에서 생 겨난 것일 가능성이 있다. 고문서학적 증거를 근거로 할 때 이 파피루스 단편은 제 1 세기 전반시대에 그 지역에서 배포된 사본에 속하는 것임이 확 인되었다. 이 단편은 요한복음 18장의 내용올,종고 있다. 오른 쪽 페이 지에는 31-33절이 왼 쪽 페이지에는 37—38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이 복옴이 제 2 세 기 초기에 중부 이 집트에서 이 미 배 포되 고 있었다면 본서는 그 이전에 저작된 것이 를림없다. 전통에 따라 본 복 음이 기록된 에베소로 부터 이 사본이 배포된 중부 이 집트까지의 거리는 매 우 멀다. 따라서 일부 권위자들은 저작 년대부터 이집트에서의 배포시기 까지는 30년의 시간이 걸렸을 것임올 인정한다. W.F. Allright의 진술은 의 미 심 장하다.
“제 2 세기 초기 때 의 요한복음의 단편과 요한에 게 의존하는, 동시대 의 가경적 복음이 센세이셔 널하게 출판:됨으로써 요한후음올 과격하게도 후 기 저작년대로 잡는 모든 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으며 본 복음이 제 1 세 기 이후에 저작 될 수 없었음을 증명하였다”(Frow Stone Age to Christi­anity, p. 299; 그리고 C.H. Roberts의 Unpublished Fragment of the Fourth Gospel, Manchester, 1935 도 보라).
그러므로 이것은 제 4 복음의 저작일에 대한 전통적 견해가 결국 반박 할 수 없 云 증거의 확증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수적인 입장이 온통 잘못된 것이라 고 오래동간 주장해 온 저 부정적인 비평가들이 크게 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오늘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Volkmar의 외침을 보증(시 인) 할 수 있다. 즉 “제 4 복음의 저작이 제 2 세기 중엽에 이뤄졌다는 비평가들의 논문이 온통 끝장이 났음은 확실한 것이다 ! ”5>
5) 여러 비평가들은 제 4 복음의 저작년대를 이렇게 잡았다. F.C. Baur는 160— 170년, Volkmar는 155년,Zeller와 Scholten은 150년, Hilgenfeld는 130— 140년, Keim 은 130년, Schenkel 은 115—120년,Reuss, Nicolas, Renan Sabatier, Hase는 110—125년, Spott(E.F.)는 95—115년.
PH. Menoud 는 L’ Evangile de Jean d'a pres les recherches recentes, Neuchatel and Paris, 1943,에서 다음과 많이 괄목 할만한 는평으로 결론올 지 었다.
“On peuc dire, sans trop s’avancer, que les defenseurs de l'autenticite johannigue occupent aujourd'hui des positions plus favorables qu’au
더구나 우리가 외증을 갖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제 4 복음이 제 2 세기 초 기에 (그리고 이미 제 1 세기에도) 소아시 아에 이 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 었으므로 소아시아에서 서신들을 쓴 익나티우스가 그것올 읽었올 것은 매 우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
제 2 세기 중간 이전에는 Justin Martyr나 익나티우스나 다른 아무도 본 복음의 저자로 요한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이 사랑 받은 제자와 너무 가까이 지낸 나머지 그의 복음에서 인용하거나 언급함에서 그의 이름올 말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 다. 이외에도 익 나티우스가 쓴 사도들이란 책은 크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베드로나 바울이 한 것 처럼 그대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였고 나는 죄수(convict)이 다”(Tc? the Romans IV, iii).
그러 므로 제 4 복음의 한 귀절을 연상시 키 는 표현을 사용함에 서 그가 다 욤과 같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 각하면 틀림 없겠다. 즉 다른 사 람이 아닌 진짜 사도만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싶어 했올 정도 로 소중히 여겼던 진리에 책임올 진다는 사실이다.
제 4 복음의 초기 저작 년대 를 지지 하는 또 다른 사실 하나는 본 복음이 셈적 어조를 강하게 며고 있다는 것이다(93, 94p.룰 보라).
사도의 저작이라는 가장 초기의 증거는 본 복음 자체에서 발견된다. 하 나님 의 인도를 받은 요한이 처 음 20장을 쓰고 20: 3,31에 서 발견되 는 아 름다운 결론으로 맺었으며,에베소에 있던 또 한 사람의 지도자가 성령의 인도와 사도 요한의 시인올 받아 그의 사랑하는 친구(사도 요한)의 입에 서 들었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21 : 20ᅳ23)란 언급으로 끝을 맺는 아 름다운 이야기를 추가 한 후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이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을 부록으로 달았다.
debut du siecle, par exemple. Car les recherches recentes tendent a ecarter les obstacles que la critique a dresses sur la voie de 1’identification du 'Bien-Aime* avec le fils de Zebedee.w
역시 같은 저자의 저서 “Le probleme johannique,” RThph, 29(1941),236 —256, 30(1942), 155ff;31(1943), 80—1이올 보라.
하지만 1927년에 Vincent Taylor는 제 4 복음과 일부 최근 비평에 있어서의
*전통적 입장의 붕괴”에 대해 말했다. /// 25(1927) 725ᅳ743p.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 거 가 참인줄 아노라” (21: 24).
지금까지 우리는 내증과 외증이 이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음올 살펴 보 았다.
복음서 들에 묘사된 대 로의 요한은 세 베 대 와 살로메 의 아들이 었 다(막 1 : 19,16 : 1,2. 참조 마 27 : 56). 세 베 대 는 사업 이 번영 한, 부유한 어 부였 던 것 같다. 그는 종들을 고용하고 있었다(막 1 : 20). 살로메는 동정 녀 마리아의 자매였다고 생각된다(마 27 : 56, 참조 요 19 : 25). 만일 이것이 사실이 라면 예 수와 요한은 사촌간이 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보통 첫째 로 이름이 나왔으며 둘 중 형이었던 것 같다­사도 요한이 예수를 따르기 전에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만년에 이르러 사도는 그가 예수를 처음으로 만났고 그의 추종자가 되기로 결심 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때가 제 10시쯤 되었더라’’ 고 했다(1 : 39). 이 처음 만남에 뒤 이어 얼마 후에는 정식 제자가 되기 위한 결정 이 있었다(막 1 : 16 이하, 눅 5 : 10). 그런 다음 한 사람의 사 도로새(마 10 : 2) 예수께 부르심을 받아 직책을 받았다.
요한과 야고보는 가끔 격정을 발하였던 억압된 감정올 가진 사람들이었 던 것 같다. 예수는 그들올 “우뢰의 아들들”(막 3: 17)이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이 그를 유숙시 키기를 거부했올 때 세베대의 아들들은 울분을 터뜨리며 “주여 우리가 불 을 명 하여 하늘로 쫓아 내 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 나이까”(눅 9 : 54)라고 했다. 요한이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과 을 분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잘못 배태된 말로 표현된 것은 예수 에 대한 그의 사랑이 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긴 하지만 정식 제자는 아니었던 사람에게 요한을 간섭하게 한 것도 역시 예수께 대 한 사랑이 었 다(눅 9 : 49, 50).
그가 자기 친척 으로 구성 된 핵 심 사회(세 제 자)에 속해 있 던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요한의 진짜 겸 손의 표시 이 다. 그가 주님 올 강 렬하게 사랑하긴 했어도 제 4 복음에서 강조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 한 그의 사랑이 아니라 사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 요한은 자기를 “예수께 서 사랑하시 는 제자 C13 : 23)”라고 불렀 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서들에서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요한이 베드로와 자주 짝지어 다닌 것올 본다(행 3:1, 4 : 19, 8 : 14). 그는 예 수의 부활하신 후에 예 루살렘 교회의 기둥의 하나가 되 었다(갈 2:9행 15 : 6). 그는 유대 전쟁이 발발 될 때 예루살렘을 떠 났음에 틀림 없다. 잔 (T. Zahn)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틴에서 소아시 아로 왔다고 말하면 틀림이 없다. 만일 폴리갑이 그가 죽던 날(155 년 2월 23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86년의 생애를 회상하며,그가 69세에 세례를 받았다면,그리고 만일 그의 개심이 이레네우스에 의하면,Against Heresies III, iii,4) 사도의 사역의 일환이었다면 소아시아로의 이 이거는 유대 전쟁의 발발의 결과로 이날 이전에 있었음에 틀림 없겠다. 그렇다면 60내지 65세 였을 요한은 이로써 그곳에서 기독교적 생활의 양육을 위 하여 30여년간을 헌신할 수 있었을 것 이 다” (T/z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의 “사도 요한” 항에서).
요한은 에 베 소에 수년간 살았다. 하지 만 81—96까지 통치 한 도미티 안 황제 재위기간의 어느 때 그는 밧모섬에 추방되었다. Nerva의 둥극과 함 께 요한은 에베소에 되돌아 올 허락을 받았고 에베소에서 트라얀 황제의 통치가 시작되던 때 즉 98년에 죽었다.
사도가 요한복음을 쓴 장소가 에 베소였다는 전통은 거 의 이구동성으로 주장되 고 있 다(유세 비 우스,교희 사 III,xxiii 1,6,V,viii, 4, xxiv, 알 렉 산드리아의 클레 멘트,W/w Is The Rich Man That Shall Be Saved? XLII, 최근의 문헌에서 이 유력한 전통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시 도가 거듭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제 4 복음은 요한이 밧모섬으로 추방되기 전에 쓰였는가? 후에 쓰였는가? 계시록 보다 일찍 쓰였는가 나중 쓰였는가?
본 복음의 저작 년대는 일찌감치 80년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베드로는 21 : 19가 암시 하는 대 로 그의 유업 (상속)을 받았었고 바울도 그의 면류관을 받았었 다.
6) F. Godet, Commentaire sur I'Evangile de Saint Jean, Paris, 1881, vol. I. pp. 354ᅳᅵ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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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소아시아의 사도 요한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이 이 미 쓰여졌고, 제 4 복음의 저자가 그것들을 읽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유대 인들은 교회의 확립된 원수가 되었었다. 예루살렘 함락이 언 급되지 않은 것은 함락 이후 수년이 지난 뒤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편 본 복음 저작연대를 아주 늦게 잡는다면 98년이다. 단 이레네우스와 제롬의 증거가 근거가 되는 경우에 그러하다.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에는 트라얀 황제 때까지 요한이 남아 있어서 사도들의 전통의 참된 증인이 되었다”(Against Heresies III, iii, 4).
그러므로 저작연대는 80년과 98년 사이의 어느 때에 있다. 저작연대를 더 정 확하게 더 뚜렷 하게 결정 할 수는 없올까 ? 에 피파니 우스에(제 4 세 기 ) 의 하면 요한은 나이 90세 가 지 나 밧모섬에 서 돌아온 뒤까지 본 복음 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초기 교부들의 저서에서 하 나도 찾아 볼 수 없다. 80년에 월씬 더 가까운 연대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그 이유로써 본 복음의 문체가 성숙된 것이긴 하지만 연로 한 저술가의 것이 아니 란 점을 든다. 이 견해에 진실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 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에서 조심해 야 한다. 만일 사도가 67년에 (바 울이 죽은 해 ) 에 베 소에 왔다면, 그리 고 만일 그가 그때 60세 내 지 65 세가 되어 있었다면(Zalm) 그가 A.D. 80년에는 73세 내지 78세가되었음 이 틀림 없겠다. 그러므로 요한은 어쨌든 “노 저술가”였던 셈이다. 이 문 제는 이렇게도 접근해 볼 수 있겠다. 즉 만일 요한이 예수께서 돌아가셨 을 때의 나이가 25세였다면(A.D. 30년) A.D. 80년경에는 75세였음에 틀 림 없다.
하지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젊었고 강인했다. 알렉산드리 아 의 클레맨트는 그가 밧모에서 돌아온 뒤에도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들의 주 관리인으로서 매우 활동적인 사역을 수행했다고 말하고 있다(W/w Is The Rich Man That Sail Be Saved? XLII). 그렇다면 그는 90세가 넘 었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클레멘트가 방금 인용한 글에서 우리에게 전달 하는 홍미 있는 이야기에 의하여 이렇게 연로한 나이에 도둑의 괴수를 개 심시 킬 수 있었고 “감독둘올 임명 하고 큰 교회들올 정 돈하며 이 리 저리
다닌 그(요한)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 하나를 쓸 수 없었 !'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특히 이 계획이 그의 마음을 오래 동안 사로잡고 있었다면 말이 다. 교회 사는 90세 가 넘도록 매 우 책 임있는 임무들올 가지고서 활발한 사역 을 계속한 사람들의 예를 적지 않게 제공 하지 않는가 !
그럼에도 이와 반대 견해 즉 요한이 본 복음올 맨 처음에 썼다는 즉 그. 가 밧모섬에 추방되기 전에 썼다는 견해, 본서의 저작에 뒤이어 서신들이 쓰여졌다는,그리고 계시록이 맨 마지막에 쓰여졌다는 견해가 계속되어 오면서 호소력 올 가지 고 있 다(Lenski 요한복음 주석 p. 20을 참조하라).
이것은 십중팔구 이 견해가 자연스럽고 논리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아 문제는 어느 쪽으로든 뚜렷이 대답을 할 수 어는 문제이다.
n. 독자와 저작 목적
저자가 본 복음올 집필 할 때 의중에 둔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느 다른 세 복음을 바로 잡기 위한(교정 ) 것이 라고 말한다. 7> 지금까지 이 미 실" 떠본 것올 기초로 할 때 이런 말은 허용 될 수 없다. 공관복음과 제 4 복음 사이 의 진짜 모순은 존재 하지 않는 것 이 다.
그의 목적 은 공관 복음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 는가 ? 이것이 알택 산드 리아의 클레멘트의 진술에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즉 외적 일들올 다룬 복음들이 이미 쓰여졌지만 이것들 보다 더 깊은,영적 배경이 제시되어야 했다. 유세비우스도 이 견해를 변호하고 있다. 비록 다소 다른 의미로서 이긴 하지만, 즉 요한은 다른 사람들이 주지 못한 초기 유대사역 의 기록 을 제 공한다는 것 이 다.
이 설은 사도가 공관복음들을 읽었음올 전제하고 있다. 최소한 그가 세 복음의 내용에 정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옳은 것은 틀림 없 겠다. 이리하여 다른 세 복음에서 발견되는 그처럼 많은 자료가 여기서는 생략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예수의 유아기의 이 야기나 족보,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한 긴 기록,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시
7) 예를들어 F. Torm. ZNTW 30 (1931) 130.
험의 기록,산상설교,요한이 의심한 이야기,비유,12 제자나 70 제자의 위임 강화,귀신들올 쫓아내거나 문둥이를 고쳐준 이야기,공중 앞에서 물 러 가 제자들에게 만 목회하신 기록81 (A.D.29년 4월에서 10월까지)은 없다.
그런데 공관복움서둘에 의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올 고쳐 주신 일, 사람들을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았던 귀머 거 리 이 고,소경 이 며 벙 어 리인사람(盲®을 고쳐주신 일,사천명을 먹이신 일,베드로의 신앙고 백,변화,간질병 앓던 소년을 고쳐 주신 일 둥둥올 포함하고 있으나 여 기에 종말론적 인 강화,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화를 말씀하신 일, 성만찬을 제정한 기록은 없는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요한의 독자들이 공관복음서들을 요한이 읽었 음을 전제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성귀들도 뚜렷이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다음의 성귀는 진술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간히지 아니하였더라” 저자는 세례 요한의 투 옥에 대한 이 야기를 말한 일이 없다. 하지만 마가복음 6장에는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11 : 2 “이 마리 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 리 털로 주의 발올 씻기 던 자요 병 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 더 라” 이 향유 부은 이 야기 가 제 4 복음의 다음 장(12장)에서 발견된다. 전도자는 독자들이 이 미 막 14: 3ᅳ9의 기사를 읽 었다는 전제 하에(여 기서는 11 : 2) 진행하는 것이 겠지 ?
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이 귀절은 마치 요한이 “물론 여 러 분들은 예 수께 서 가야바 앞에 서 심 문을 받으신 것 올 안다. 여 러 분은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이것올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이것은 다른 전도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다” 라고 말하는둣 들린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요한이 공관복음서들을 읽었음을 전제하였다는 설의 증거가 서는 것이 아님은 우리도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관계 사항올 고 찰해 볼 때 이 것이 십중팔구 를림 없는 것으로 보인다.
1.
7 : 1의 한절을 제외 하고,
2.
P. Gardener-Smith의 St. John and the Synoptic Gospels, Cambrige, 1938은 이 와 반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와 함께 W.F. Howard, Christianity According to Si. Jolni, Philadelphia, 1946, p. 17• 도 보라 Dr. Howard는 Dr. Gardner. Smith의 논증으로 “거의 설득당냈다. ” 하지 만 그는 요한복음과 공관복옴 사
그럼에 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목적에 대한 요한 자신의 진술을 감안 하여 볼 때 (20 : 30,31) 공관복음서들을 보충하는 것은 본서 의 제 일 목적에 대하여 단순히 부수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세례 요한에 관한 그룻된 견해에 대항하는 것이 전도자(요한)의 목적이 었던가?
세례 요한의 세례륜 받은 사람들이 발견된 곳은 요한이 살고 있었고 본 서를 저작한 에베소 바로 여 기 였다는 것은 흥미롭다(행 19 : 3). 그들이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틀림 없다. 이런 까닭에 그들이 이 때 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행 19 : 5). 사도 요한은 본 복음 에서 세례 요한이 자기를 떠나 그의 주님 올지적하였음과 (1 : 19ᅳ23, 25ᅳ 27,29,36, 3 : 27-36), 사람들이 그에게 신뢰와 확신을 둘 수 있도록 그 가 그 빛을 증거하고 싶어한 것을 반복해서 천명 하고 있다(1 : 7-9).
따라서 세 례 요한에 관한 잘못된 견해 에 대 항하는 일도 제 4복음의 주 요 목적으로 고려될 수 있겠다. 요한복음은 독자들의 주의를 그리스도의 초월 적 인 위 대 성 에 집 중하고 있 다(20 : 30, 31).
요한이 게린두스의 고ᅡ오롤 논박하기 위해 본 복음올 쓴 것은 사실인가? 10)
이 이 단자는 예수가 단순히 사람이 며 요생 과 마리 아 사이의 자연 출생 에 의한 아들이 었으나 예수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바르고 지혜로왔으
며,세례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의 형체로 그 위에 임했으나 그의 수난
당하시 던 밤에 다시 그를 떠 남으로써 고난당하여 죽고,다시 산 것은 그리 스도가 아니라 예수였다고 가르쳤다 (Ireneus, Against Heresies I, xxvi I; Hippolytus, The Refutation of All Heresies VII, xxi).
게 린두스는 사도 요한의 시 대에 살았다. 이레네우스는 사랑받은 제자 요 한이 에 베 소에 서 목욕하러 갔다가 그 안에 게 린두스가 있는 것 을 알고 목 욕도 하지 않고 목욕탕에서 달려 나오면서 “진리의 원수 게 린두스가 안에
" 이의어떤 관계가 있옴을 인정한다. “마가와 누가의 진술에 대하여 용어상의
어떤 동화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E.R. Goodenough, “John A Primitive
Gospel,” JBL, 64(1945), 145ᅳ 182룰 참조하라. 이런 유의 결론은 대체로 요 한 복음과 공관북옴서들 사이의 “대조”룰 강조한 것에 기 초하고 있다. 하지 만 우리는 둘 사이의 기본 바탕은 걸국 동일하다는 것을 이미 보여준바 있다.
10) 득히 F. Godet의 op.cit., pp. 356—368을 보라.
— 5 1 —
있으니 목욕탕이 무너질까 하니 도망가자”라고 외쳤다는 말올 폴리갑으로 부터 들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고표如싶 Heresies III, iii,4).
이레네우스는 또 요한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게린두스가 사람들에게 퍼뜨린 잘못을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을 뚜렷이 말해 주고 있다04표신»선 Heresies III, xi, 1).
사도 요한이 제 4 복음을 쓰면서 게린두스의 잘못을 의중에 두고 있었 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이 런 까닭에 그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 스도시요,이 그리스도가 그(예수)에게 들어 가 그와 영속적으로 연합하여 그(예수) 위에 머물러 있었을 뿐 아니라 인성을 입으시고 이 인성을 결코 다시 벗은 일이 없다는 사살을 왜 그가 그처럼 강조했는가를 우리는 설명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레네우스가 제 4 복음의 목적으로 말한 것이 사실임올 인정한다 해도,동시에 이 목적이 그 성격상 종속적이라는 사실 올 강조해 야 한다. 그 성 격 상이 라 함은 소극적 목적 (게린두스의 잘못올 격 파하기 위 한)은 20: 30,31절에 그처 럼 아름답게 진술된 적극적 목적 에 종 속된다. 우리는 이제 이 문제로 돌아가 보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 도 이심올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올 힘 입어 생명올 얻 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과 관련해서 확인된 최선의 독법은 “너희로 계속해서 믿고" (TTtCTTeiiTJTC) 임올 주목하자. 신자들의 신앙은 예 수가 사실은 하나님 이 아 니 요 그리 스도는 사실은 육신 속에 들어 오시 지 않았다고(인성올 입 지 않았 다 함) 가르친 게 린두스와 같은 사람들의 잘못으로 손상올 받고 있었 다. 사도는 이런 위험올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올 받아,교회가 그리스도와 관 련된 신앙에 거 하도록 본 복음을 기 록하였다. ⑴
따라서 예수에 대 한 완전한 전기를 쓰는 것이 요한의 목적은 전혀 아나 었다. 그의 전기를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즉 만일 모든 것올 기록하자면 온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했올 것이기
1.
본 복옴이 신자들의 믿음을 재 확립 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 은 E.N. Harris의 입 장이 기 도 하다. 그의 저서 “Why John Wrote His Gospel,” WE 32(1944) 250,251 을 보라.
때문이다(21 : 25). 그는 신자들이 그들이 받은 교리에 확고히 선 수 있도 록 썼다.
이 목적이 일단 명확히 이해되면 어째서 요한이 이미 발생한 모든 사건 과 그의 모든 말씀 가운데 서 추가된 자료만을 즉 다른 복음에 서 찾아볼 수 없는 자료一주님의 영광을 백일하에 들어내기에 가장 적합한一즉 가장 고 양된 의미에서 그의 메시야 직무와 그의 신성을 선택했는가 하는 이유-!: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을 의중에 두고 다옴의 요한의 기사를 주 목하자. 즉,
1.
가나의 혼인식.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올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올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 11).
2.
니고데모와의 대화. “하나님이 세상올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올 얻게 하려 하심이니 라”(3 : 16).
3.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 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 리 이 다. 예 수께 서 이 르시 되 네 게 말하는 내 가 그로라 하시 니 라” (4 : 25, 26 과 4 : 29, 42도 참조하라) .
4.
벳새 다 못가의 사람올 고쳐 주신 일과 그 이하에 나오는 강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 17). “하나님올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률 하나님과 동둥으로 삼으심이 러라”(5: 18).
5.
오천명올 먹이신 일과 그 이하에 나오는 강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 생 올 얻는 이것이 니 마지 막 날에 내 가 이 를 다시 살리 리 라 하시 니 라” (6 : 40).
6.
수전절에 행하신 생수에 관한 강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훌러 나리 라’’(7 : 37,38).
g- 아브라함의 씨에 관한 강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너희 중에 누가 나룰 죄로 책잡겠느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올 지키면 죽음올 영원히 보지 아니 하리 라”(8 : 36,46, 51).
1.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쳐 주심. “하고 절하는지라”
(9 : 38).
1.
선한 목자에 대한 강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 30). j. 나사로를 살리심.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 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11 : 40).
k. 제자둘의 발을 씻기심.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올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 을 아시 고” (13 : 3).
1.
다락방 강화와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14: 17장). “내가 곧 길이 요, 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느니 라…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룰 영화롭게 하옵소서” (14: 6, 17:3,5).
m. 고난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 며 나의 하나님 이 시 니 이 다’’ (20 : 28).
제 4 복움에 서 발견되 는 이 상의 모든 자료가 모두 하나님 의 아들 그리 스 도로서의 예수가 중심이 되고 있으며 그 목적으로써 교회가 영생올 얻기 위해서 그룰 계속해서 믿도록 하는 것임올 주목하자.
본 복옴에 기록된 이적들 역시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이 리 하여 왕의 신하가 먼 곳:HI서 고침 을 받았으며 (4 : 46 이 하),벳새 다 못 가의 병자가 38년간 허 약한 중에 있었으며 (5: 5),예루살렘 에 서 어 떤 소경 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고(9 : 1), 나사로가 이 미 무덤 에 있은지 나흡 이 되었었다(11:17). (L. Berkhof의 신약개론,Grand Rapids, Michig an, p. 104를 참조하라.)
본 복옴의 독자들은 에베소와 그 부근에 살고 있었다(결국 본서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해 저작된 것이긴 하지만,17 : 20,21을 참조하라). 그들 은 대부분 이방 기독교인들이 었다. 이것은 전도자가 유대인의 습관과 상 태에 대한 말에 설명을 추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2:6, 4:9, 7 : 2, 10:22, 18 : 28, 19 : 31,41,42.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위치한 장소들 의 소재 를 밝힐 때 의 상세함을 덧붙인 이 유를 설명 해 준다. 4:5, 5 : 2, 6:1, 11:1,18, 12 : 1,21.
5 4 一
m•특 징
en 요한복음은 몇 가지를 제외 하고는,유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올 서술하고 있다. 다음 몇 가지는 말구유에서 감람산에 이르기 까지 주님의 지상 생애의 간략한 연대기적 수서로 간주 될 수 있겠다. 즉,
1.
주전 5년 12월에 서 주후 26년 12월 까지 . 준비 기 간. 제 4 복음에 는 이 것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서론 1 : 1ᅳ18을 참조하라.
2.
26년 12월에 서 27년 4월 . 시 작. 요 1 : 19—2 : 12.
3.
27년4월에 서 27년 12월. 초기 유대 지방 사역 . 요 2 : 13-4 : 42.
4.
27년 12월에 서 29년 4월. 갈릴리 대 사역 . 요 4 : 43-6 : 71.
5.
29년 4월에 서 29년 12월. 은거 사역 (4월一10월)과 후기 유대 지방 사* 역 (10월ᅳ12월). 전자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바 없다. 후자에 대 해 서 는 요 7 : 2—10 : 39를 보라.
6.
29년 12월에서30년 4월. 베퇴 아 지방 사역 . 요 10 : 40-12 : 11.
7.
30년 4월,5월 : 수난,부활,승천. 요 12 : 12—21 : 25.
요한복음에 의하면 갈릴리 사역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적으며 은거사
역에 대해서는 거의 없다. 한편 초기와 후기 유대 지방 사역시의 어떤 사* 건들과 강화들은 크게 주목을 요한다. 사실 요한은 위의 도표에서도 나타 나듯이 유대 지방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더 많은 지면을 할당했다. 왜 냐,5장에 진술된 이 적 장면은 유대 이기 때 문이 다. 이 와 마찬가지로 나사 로를 살리신 일이 베뢰아 사역시에 발생한 반면 이 일이 사실은 요한이 살고 싶어한 유대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향유 부은 일 도 예 수께 서 베 뢰 아 사역 에 서 유대 지 방으로(베 다니 ) 돌아와 수난주간의 고난에 들어 가려 하셨던 때에 있었다- 물론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서술 된 사역이 21장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에서 일어 난 것 이 다.
그러 므로 1장과(1 : 28올 보라) 2 : 1—11, 4 : 43-54, 6장,10 : 40-42, 21장에 기 록된 것 을 제 외 하면 모든 것 이 유대 에 서 (사마리 아 4 : 1-42) 일 어 난 것 을 안다. 이 와 같은 장소의 차이 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사이 에 모순을 구성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미 살펴 본 바와 같다.
C2) 제 4 복은 진술된 사건들의 정확한 시 간과 장소를 나타냄에 있어
공관복옴 보다 필씬 뚜렷하다. 본 복음에 진술된 대명 절을 기 초로 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기간을 결정 할 수 있다.
C3) 공관복음에서 발견되는 많은 자료가 여기서는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생 략되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에서 발견되 는 이 야기 의 대 략적 구성은 보유되어 있는 셈이 다. 공관복음 보다 훨씬 새로운 자료가 추가되었다. 이것은 모두 전도자의 특수 목적과 일치된다. 이것은 요한 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의 모순을 암시하지 않는다.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본 복음을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공 관복음에서 처럼 자주 비유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고 정교한 강화 형식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유대에 계시며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 씀 하실 때와 역시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가(그리스 도) 비 (非) 비유적 형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셨음을 단순히 의 미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가 갈릴리에서는 비유 형식을 사용하실 수 없었다는 것올 보여 주는 것은 결코 아니 다.
C5) 요한복음의 주요 화제는 공관복음에서 처 럼 천국이 아니요 왕 자 신이요,그리스도의 인격이요,그의 신성이 다. 그렇다고 이 차이가 절대 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 해 말씀하신 것으로 소개 되 어 있고(3: 3—5), 역 시 공관복음에 서 그는 그의 신적 인격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이런 까닭에 이것과 관련해서 둘 사이에 모순은 없는 것이다.
1.
위의 (5)와 일치해서 본 복음은 일곱개의 “내가••••••이로노니’,의 복
음이다. “I Am’s”는 다음성귀에서 발견된다. 6:35, 8:12, 10:9,11, 11 : 25, 14 : 6, 15 : 5.
C7) 본 복음은 24시 간도 못되는 짧은 시 간에 일어 난 사건과 강화를 길 게 다루고 있다(13—19).
1.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계시된 다른 많은 진리와 관련해서 C14_
17장) 성령의 오심과 사여의 약속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14: 16,17, 26, 15 : 26, 16 : 13, 14).
1.
제 4 복음의 문체 는 계 시 록의 문체 와 다르지 만 그렇 다고 이 것 이 동 일저자가 이 두 책올 쓸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 다. 이 외에도 그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된다. A.T. Robertson의 진술은 사실이 다. 즉 “계시록은 요한복음과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04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New York, 1923, p. 134). 기원법은 두 군데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hm 는 자주 목적절적인 의미로 두 군데서 혼하게 사용되었다. ok도 그러하 다. 동사 는 신약성경의 어느부분에서 보다 두군데서 더 자주 나
온다. 기타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1.
갈한 자를 위한 생수. 요 3 : 37과 계 22 : 17을 비교하라. 주린 자룰 위 한 만나. 요 6 : 49ᅳ51과 계 2 : 17올 대 조하라.
2.
아버지 께 로부터 받은 권위. 요 10 : 18과 계 2 : 27을 대 조하라.
3.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요 1 : 1과 계 19 : 13을 대조하라. 빛이신 그 리스도. 요 1 : 4, 5,7,9 3 : 19, 8 : 12, 9 : 5와 계 22 : 5룰 대조하라. 어 린 양이 신 그리스도. 요 1 : 29와(헬라어 로 如!/6?)와 계 5 : 6 et passim^ 라어 바m'oiO올 대조하라. 신랑이 신 그리스도. 요 3 : 29와 계 19 : 7올 대 조하라.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분. 요 6 : 53ᅳ56과 계 1:5, 5:9, 7 : 14, 12 : 11올 대 조하라.
4.
신부인 교회 . 요 3 : 29와 계 19 : 7, 22 : 17을 대 조하라.
1.
“단순하나 숭고한”이 란 말은 본 복음에 나타난 문체 를 두고 하는 말이 다. 특히 서 론과 다락방 강화에 서 우리 는 매 우 효과적 이 며 참으로 매 혹적인,일종의 리듬의 흐름올 볼 수 있다. 절들(clause)이 서로 대둥작 용을 함으로써 한가지 진리 를 먼저 긍정 적으로 진술하고 그런다음 부정 적 인 진리 가 나오고 혹은 그 순서 가 바뀌 는 둥의 수법 (1 : 3, 14 : 6, 15 : 5, 6, 14 : 18, 15 : 16)과 로고스의 영광스런 은혜를 표현하는 절 하나에 이어 그 를 마땅히 영접해야 할 자들의 배은망덕한 반응을 보여주는 절이 나오는 것하며 (1 : 5,10,11), 무엇보다도 문장들이 용의주도하고 조심올 기울이 긴
했지만 철저할 정도로 자연스럽고 균형 잡혀 있으므로, 반 주제에 이어 주 제가 나오고 간결하고 박력 있는 절 (Clause)들에 이어 긴 문장들이 나오 는 둥둥 이것들이 모두 제 4복음을 그토록 아름답게 만둘어 주고 있는 것 이다.
서론에서 (1 : 1-18) 절 하나가 주도적 인 단어를 반복하면서 다른 절에 추가됨으로써 문장들이 겹쳐지는 조약돌들 처럼 합쳐져서 주님의 형제였던 야고보서의 수법을 연상시킨다. (필자의 Bible Survey, Grand Rapids* Mich., 1949, pp. 329,332를 보라. )
이 리 하여 요 1 : 4ᅳ14에서 우리 는 다음의 것 들을 주목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
1 : 1과 1 :10도 대조하자.
제 4 복음의 특색 있는 말씀들 중에는 다옴 것들도 있다.
aya.TTa.03, aXTjdeta, aXr]0^, a\i]6iv6?, afJ-apria, ayLT]v afirjp, yivwaKdi, SiSoifit, Soia, 0etopeco,ScoT],ala>vio^, 'lovSalo^, Kpiai^, \oyo^r
(xaprvpeoi, opacu, tto.tt\p,irwrrevco, aTjfxelov, aKoria, <f>iX4oi.
요한복옴은 대조법이 많이 사용되었다. 즉 빛과 어두움, 영과 육,땅과 하늘,위로부터와 땅에서,생명과 죽음,사랑과 미움,즐거워하다 와 0ft 통하다,근심하다와 의지하다,보는 것과 눈이 머는 것(소경).
IV. 문 법
요한의 문법을 완전히 제시하는 것이 필자의 목적은 아니다. 이 일은 다른 학자들이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E.A. Abbot, Johannine Grammar, London, 1906이다. 문법과 구문상의 중요점들에 대해서는 본문을 주석 할
때 그때 그때 설명하였다. 더구나 이 중요점들은 번역상으로도 중요한 것 이다.
세가지 구문과 관련해서 특별히 말해야할필요를느낀다. 이 세가지 구 문은 요한복음에 매우 자주 나오는 것이다. 조건문장인 iVali 들과 Sti걸 들에 관하여 설명하겠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것들에 대해 별로 말올 하 지 않고 있다. 또 어 떤 주석 가들은ᅳ일류 주석 가들도 일부 포함해서 ᅳ이 구문의 일부에 대해서는 주석을 가했지만 다른 구문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짜 논쟁점이 되고 있는 절에 대해서는 조금도 주석하 려 들지 않는 일들이 가끔 있다. 그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즉 주석 에 서 문법의 이모 저모를 모두 주석 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일이 기 때문이 다. 주석가가 이 일을 시도한다면 그는 각 복음서에 대하여 주석올 셋트 (Set)로 내놓아야할 판인 것이다.
필자가 추구하는 방법은 바람직하고 권장 할만한 몇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한 세가지 유형의 절(Clause)들 밑에 다시 몇개의 구름과 구 분올 지어 서술하였다. 이 절들이 제기하는 난해 어귀들에는 설명을 붙였 다. 각 절은 해당난에 할당했다. 본 복음에 자주 나오는 절들을 이렇게 처 리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1- 완전성. 이 절들올 모두 구별하려 고 시도해 보았디-. 그러므로 각 절 이 어디에 속하는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1.
지면 절약. 주석을 함에 있어 “이절은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이다. 조건절은 ^와 함께 과거직설법으로 되어있다. 귀결절은 &과 함께 과거 직설법으로 되어있다. 미완료시상이 조건절과 귀결절에 나올 때에는 이 문장이 현재 사실이 아닌 곳올 말하고 있다”는 말을 거듭 거듭 되풀이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조건문과 관련된 일백여개나 되는 이 짧은 문단 (paragraph)과 iVa절과 Sti절과 관련된 수백에 이르는 다른 문단은 보다 간단한 방법을 통해서 그 번거로운 처리 방법을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요한 다른 주석 내용을 위해 지면을 절약 할 수도 있다.
이런 까닭에 제 4 복음올 주석함에 있어 조건문이 영어 번역문에 나올 때 마다 이 조건문은 ID 구롭에 (혹은 IHA1 또는 그것 이 어 떤 구룹에 속 하든) 속한다는 것 을 말해 주는 간단한 각주를 달았다. p. 60—95를 보라. 독자들은 지정된 페이지에서 각 문장이 소속하고 있는 구룹과 항목에 대 한 설명올 보게 될 것이다. 의 의 의미가 즉시 분명 할 때에는 본문
에 특별히 주석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논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거나 기타 이유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면 주석을 가한 페이지에 각주를 달았다- 이 각주들에는 번역문(영역)들이 따르고 있다.
1.
읽기 쉬움. 텔라어에 정 통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라도 수시로 나오는 엘라어 나 전문술어를 개의치 않게 될 것 이 다. 만일 이 런 사람이 어 떤 주석 에서 이런 유(類)의 재료(텔라어나 전문어)룰 너무 많이 발견하게 되면 그 는 절망하여 즉각 포기 해 버 릴것 이 다. 이 런 이 유로 다음에 자주 나오는 문법 재료들을 어느 정도 본문주석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텔 라어를 읽는 독자들은 필자가 완전히 분류하려는 시도를 이해 할 줄 믿는 다. 이것은 공관복음과 예를 둘어 계시록의 유사문법 문제점들을 비교하 는 일 올 용이하게 할 것이다•
제 4 복음서의 조건문장 분류표
주요 조건문 세구룹은 다음과 같다.
I . 간단한 (혹은 제일)조건문
이 경우의 조건은 사실로 간주된다. 그것 이 사실인가 아닌가는 조건문의 형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런 유의 조건에는 ([가 따르며 조건문에는 그 사상이 야 어떻든 직설 법이 사용된다. 이것은 직설법적 개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직설법은 사 실을 주장하기 위 해(혹은 가정 된 사실을) 사용되 기 때 문이 다. 조건절이 부정 인 경우에는 부정사 ^가 사용된다.
이와 같은 조건문의 귀결절은 직설법 현재로 표시되는C13 : 14) 사실의 진술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의문문 직설법일 수도(1 : 25)(거의 모든 경우 메서 현재시상),미래직설법의 예언일 수 도(11 : 12), 명령법의 명령일 C7 : 4)수도 있 다. 따라서 제 4 복음에 서 제 일 구룹에 속하는 조건문은 다 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조건절
귀결절
사실로 가정된 조건, 부정과거
직설법
3 : 12 상반절
사실의 진술,직설법 현재
현재 8 : 39
부정 과거 13 : 14
완료시 상이 지 만뜻은 현재 13 : 17 상반절
재 재 재 현현 현
사실로 가정된 조건,
현재
현재
현재
현재
부정 과거 부정과거
사실로 가정된 조건,
완료 부정 과거 부정과거
사실로 가정된 조건,
현재
현재
현재
현재
현재
현재
부정과거
부정과거
B
직설법
1 : 25 5 : 47
1.
: 23
2.
: 46
1.
: 35,36
18 : 23 하반절
C
직설법
1.
: 12
13 : 32
15 : 20(두번)
D
직설법
7 : 4 10 : 24 10 : 37
10 : 38 상반절 15 : 18 18 : 8
18 : 23 상반절 20 : 15
-6 1 —
설 제래 재 재 재 재 직 현미 현현 현현
예언, 직설법
미래
미래
미래
혹은 금지,직설법
부정 과거
부정과거
현재
현재
현재
부정과거 부정과거 부정 과거
n. 사실에 반대되는(혹은 제 2의 부류으|) 조건문
이 부류의 조건(약속)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가정된다. 조건절은 과거직 설법 동사와 함께 ^가 사용된다. 귀결절은 과거 직설법과 함께 ai시 (대 개) 사용된다. 현재의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은 조건절에서나 귀결절에 서나 미완료시상올 취한다(15 : 19). 과거를 취급하는 사실에 반대되는 조 건문은 조건절에서나 귀결절에서 모두 부정과거나 과거완료를 취한다 (14:7). 하지만 가끔 조건절의 현재시에서 귀결절의 과거시로의 변화나 (14 : 28) 과거에 서 현재 로 변화하는 수도 있다(15 : 22).
조건절에서 부정사는 비ᅵ가 되는데 이것은 여기서 주장되는 것이 사실 에 반대된다는 사실올 감안 할 때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제 2 부류의 조건문의 세 구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A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들이 귀결절의 미완료 직설법과 함께 현재시 ^를 취급한다. 미완료 직설법은 귀결절의 ^과 함께 사용되었다.
5 : 46
8 :19(과거완료이지만 미완료적 의미로)
1.
: 42
2.
: 33
9 : 41
15 : 19
18 : 36
B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들이 귀결절의 부정과거나 과거 완료직설법과 함 께 과거시 ^를 취급한다. 부정과거 또는 과거 완료직설법이 귀결절의 &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 런 문장에서 우ᅪ은 의미상으로는 부정과거로 간주 될 수도 있다. 부정과거형식이 없으니까.
11 : 21
11 : 32
14 : 2
-6 2 —
14 : 7
C
사실에 반대되는 혼합조건문
조건절 귀결절
e으가 &과 함께 또는 없이
미완료로써 과거 완료와 함께
4 : 10
부정과거
미관료와 함께
14 : 28
부정과거
부정과거와 함께
15 : 22
미완료
부정과거와 함께
15 : 24
미완료
미완료와 함께
18 : 30
부정과거
과거완료와 함께
19 : 11
미완료
I- 보다 생생한 미래 또는 제 3 부류의 조건문.
이 제 3 부류의 조건은 사실로 생각되지도 않고 사실과 모순되는 것으 로 생각되지도 않고 틀림없이 미래에 있을 사실로 생각된다. 따라서 조건 문은 가정 법과 함께 사I시 사용된다. 제 4 복음은 이와 같은 유(類)의 조 건절의 약 5분의 3에서 부정 과거 가정 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5분의 2에서는 현재 가정 법올 사용하고 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들 보다 현재 가정법을 크게 즐겨 사용하였다. 예외로서는 조건절에 과거 가정법이 사 용되 었다.
조건절이 부정과거 가정법일 때에는 귀결절은 대체로 미래 직설법이요 어떤 때는 현재 직설법,또 어떤 때는 현재 가정법이나 명령법일 경우도 있다.
조건절이 현재 가정법일 때에는 귀결절은 현재 직설법이 되며 가끔은 미래 직설법 일 때도 있고 몇 개 안되 긴 하지 만 예 외가 눈에 뜨일 때도 있 다.
조건문에서 부정어는 나차이며 이것은 불확실한 양상과 관련해서 예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개 구릅으로,그리고 다시 그것을 몇개 구룰으로 분류한다.
A
보다 생생한 미래 조건문(제 3 부류의 조건문)은 조건절에 부정과거 가
6 3 —
정 법과 함께 ’ecb을 사용하여 동사가 단일 개 념으로 간주되고 있음올 나 eV 낸다.
1
귀결절에서 미래직설법과 함께
3 : 12 하반절
1.
: 43
2.
: 51 8 : 24 8 : 36 8 : 55
1.
: 9
2.
: 40
1.
: 48
2.
: 32
14:3 하반절
1.
: 14
2.
: 10
16:7 상반절 20 : 25
2
조긴절에서 현재 직설법과 함께
7
51
8
31
8
54
2
24
2
47?
3
8
4
3
9
12
— 6 4 —
기 타 8 : 51
1.
: 52
2.
: 22
15 : 7
16:7 상반절 20 : 23 상반절
귀결절
부정과거 가정법
부정과거 가정법
부정과거 가정법
(목적절의 iVct 뒤에)
부정과거 명령법
부정과거 가정법
완료 직설법
B
보다 생생한 미래조건문(제 3 부류의 조건문)은 조건절에서 현재 가정 법 과 함께 사v을 사용하며 동사가 계 속된 동작올 의 미 하는 것 을 나타낸 다.
1
현재
직설법과 함께
5
31
8
14
8
16
9
31
10 1 1
38 하반절
Q
11 11
y
10
13
17 하반절
15
14
21
22 (암시됨)
21
23 (암시됨)
21
25
귀결절의 미래 직설법과 함께
7
12
13
1.
14
17
26 하반절 35 15 23
3
기 타
6: 62 7:37
12 : 26 상반절 20 : 23 하반절
귀결절
귀결절이 공급되어야 함
현재 명령법
현재 명령법
완료 직설법
C
보다 생생한 미래 조건문(제 3 부류의 조건문)은 조건절의 조동사의 도 움올 받는 (periphrastic) 수동완료 가정법과 함께 ’dlv을 사용하여 동사가 아직 강하게 계속되고 있는 과거의 행동을 의미함을 나타낸다.
귀결절
3:27 현재 직설법
6: 65 현재 직설법
제 4 복음서의 tva 절昏의 분류
를 크게 자주 사용한 것은(자주 목적절적 의미로써, 하지만 목적올 뇨현하기 위해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제 4 북음의 특색의 하나이다. ᄄ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것이 단순히Koine(기원 전 5세 기一기원 전 3세기에 사용된 표준 텔라어) 통용어라고 주장하다. 저자는
12) C.F. Burney는 이것을 “본 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라고 했다. The Aramaic Origin of the Fourth Gospelt Oxford, 1922, p. 69.
Koine 통용어를 좋아한 것을 보여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람어의 영향 올 지적하기도 한다. 이 두 요소를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은 의심할 바 없 다. 이 두 요소의 밑 바닥에 또 다른 요소가 있올 가능성은 없을까? 즉 그 어느 언어 의 종합보다 분석 을 더 좋아한, 즉 제 때 에 자체 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편애 (偏愛)가 있올 수는 없올까? 예를 들어 오늘날 부정사 (infinitive) 는 헬라어 에서 얼마 전에 살아진 일 같은 것 이 다.
제 4 복음에서 iVa의 용법에 대 한 독자적 인 연구를 마친 후 우리 는 Dr. Eberhard Nestle과 D. Erwin Nestle 이 편집한 Novwn Testumentum Greece의 본문(20판,1950)에 따라 다음 페이지에서 발견되는 항목(縱段) 에 표로 나타낸 결론에 도달하였다.
항목(縱段) I은 우리 가 살펴 보려 하거 니 와 목적올 표시 하는 iVa 절 전 부에 대한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1항목과 기타 항목(縱段)에서 각 경우 를 언급한 다음에 는 시 상과 태 Cvoice, 목적 어 를 가질 수 있으며 이 런 까 닭에 이런 의미의 타동사로 되어 있는 모든 동사에 대하여)를 나타내었고 동사의 법 (mood) 이 iVa에 의 해 소개 되 어 있 다. 본 복음 본문에 문제 의 동사가 iVa를 필연적으로 직 접 따르는 것은 아니 고 그것 Ci'm)에 속대 있 는 것이다. 이처럼 종단C縱段)에 서술되어 있는 14: 3의 둥사는 가 아 니 라 하tc이 다. 동사의 서 술 앞에 부정 사가 올 때 본문에 는 im/x짜가 된 다.
가 목적을 표시 할 경우에는 언제나 그 iVa는 영역성경에서 in urJer //此(•••하기 위하여) 혹은 in order Zo가 된다. iVa가 목적절을 소개하는 좋은 예는 3 : 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in order that(iVa) 하심이니라.”이다.
종단 H A는 a. 주어나C전 문장의 주어 또는 문장 안의 보다 더 큰 절의 주어) b. 주격보어나 c.동격이 나 d. 이상 세개 중 어느 것의 수식어로 기능하 는 모든 iVa절에 대 한 것 을 포함한다.
4: 34의 iVa절은 좋은 예 를 제 공한다. 즉 “나의 양식 은 나를 보내 신 이
의 뜻을 행하며(化 do)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GVa Trot*
Kal TeAetd)CTco).
항목 II B는 a. 목적어 (전문장의 목적어 나 문장 안의 보다 큰 절이 나 심 지어 구〈句〉의) b. 그 동격으로 작용하는 iW절들을 나타낸다.
요구하고 기 도하고(간구하고, 요구하는) 명 령 하고,지시하는 동사돌은 그 목적어로써 iVa절올 취하는 때 가 많다.
이 런 유의 절의 예는 17 : 1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비읍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说^ thou shouldest take) 아니요 오 직 악에 빠지 지 않게 보전하시 기 를 위 함이 니 이 다(Ma소 thou on shouldest
keep, iva aprj<s aA入,tva .
i'rn가 주절이 나 목적 절을 도입 (소개 )할 때 에 는(항목 IIA와 표 B) 보통 that로 영 역되었다. 그외 다른 경우에는 ba절 전체 대신 부정사(infinitive) 가 사용되었다. “in order that”라는 번역은 이같은 절(clause)을 번역할 때 사용된 일이 결코 없다. ba•절 대신 부정 법의 대체가 전혀 당연하다는 것은 1 : 27과 눅 3 : 16올 비교해 볼 때 분명하다. 1 : 27절이 절올 사 용했 을 때 눅 3 : 16은 부정 법 을 사용한 것 이 다. 하지 만 그 내 용은 동일하 다-
항목 EC는 Iva 결과절들을 나타낸다. 가장 명백한 예의 하나는 9 : 2인 데 만일 거기서 ka•에 목적의 효과가 가해진다면 그 의미가 거의 나타나 지 않을 그런 경우이다. 분명코 이 경우에서도 “예정” (pre-ordinance, 사 람의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것)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Tva를 단순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단 순하디-.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Rabbi, who sinned, this man or his parents, so that (iVa) he was born blind?”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 사용되었는 지는 즉시 분명하다. 하지만 훌 륭한 문법학자들과 주석가둘이 반대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들도 있다. 일 부 권위자들(특히 구학파(older school〉의)은 IVa가 심지어 결과절올 도입. 한다는 것올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ba(Latin 어의 ^를 참조히 라)가 신약성경 이외의 후기 텔라어에서 결과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이 말이 신약성경 안에 서는 그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 는 것이다. 결국 언어란 살아 있는,생명을 가진 물건이다. 낱말들의 뜻 을 너무 엄격히 제한하는 것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 들은 극단의 반대방향으로 가서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는 귀절들에서 마저 목적을 볼 것을 거부하는 수도 있다(예를 들어 13 : 18). 더구나 그 들은 Iva 결과절들의 목록을 크게 확대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의 의견과 대조적으로, 목적 개념이 본 복음에 두드러져 인다는 사실이 있는 것 이 다. 즉 1 : 7,8, 3 : 17, 5 : 23, 34, 36이 다. 역 시-(여 기 서 는 특히 구속사, 하지만 둘올 분리시킬 수는 없다)는 하나님의 계회과 뜻의 실현으로 간주 되고 있다. 즉 4 : 34, 5 : 30, 6 : 37, 44, 64, 18 : 37, 19 : 28이 다. 그리고 그의 계획에서 구원사의 각 사건이 발생 할 정확한 때 혹은 시간이 지정되 어 있다. 즉 2:4, 7:6,30,8:20, 13:1이다. 본 복음은 이것올 앉은 자리에서(한군데서 쭉)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공편한(편견을 가지지 않 은) 연구생에게는 분명하거니와 처음부터 끝까지 예정론적이다. 이런 까 닭에 우리 는 예 언성 취 의 절에 목적 의 힘 (효과)올 허 용해 야 한다.
목적절과 결과절 사이에 선올 긋기 가 매우 어 려울 때 가 가끔 있다는 것 은 물론 사실이다. 정직한 의견의 차이를 위한 여지는 허용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5 : 40, 6:5, 9 : 36, 14 : 29와 같은 경우). 목적과 결과 사이 의 간격올 잇기 위하여 응시된 결과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또 한가지 문제는 한편으로는 명사절들(주어든 목적어,즉 그것들이 항목 IIA에 속하든 항목 IB에 속하든:)과 다른 편으로는 목적절(항목 I ) 사이에 가끔 선올 그어야 할 날카로운 구별이 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겠다. 우리는 17 : 21의 "에 세개를 모두 절로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첫째와 둘째 것은 목적 절로,세째는 목적 (purpose)으로 간주해 야 하는가? 처음 두 절이 요干 하는(asking) 동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셋째 절 은 형식상 실제와 다르므로 우리가 뒤의 것올 좋아하긴 하지만 앞의 것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명 한 주석 가들도 있는데 그들은 17 : 22 하반절 과 23절 상반절에 호소하고 있으며 이 두 절에서는 그 내용상 21절의 두
절과 유사한 절들이 대체로 목적절(purpose clauses)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이로부터 결과되는 해석은 우리가 처음 것을 택하든 두번째 것올 택하든 크게 다르지 않다-
이상 말한 것을 감한해 볼 때 다음 항목(縱段)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정 확을 기 하기 위 한 정 직 한 접 근책 (approach) 이 상의 것 으로 간주되 어 서 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우리는 다음의 분류가 대체로 정확한 것이 라고 믿는다.
다음의 통계를 주목하라.
목적 iVa 절은(항목 I ) 100개 가 넘는데 비 하여 비(非') 목적 (항목 HA, nB, nc)는 40여개 이다. 이런 까닭에 제 4 복음서에서 목적과 비 목적 iVa의 비 율은 5대 2이다-
전(全) 절 구룹에서 현재 가정 법과(몇개의 조동사의 활용올 받는 완 료가정 법〈perfect periphrastic)) 부정 과거 가정 법의 비율은 2대 1올 조 금 상회한다.
긍정 iVa절 대 부정절Oa /너)의 비율은 7대 1이다. 그 외에 몇개의 혼 합절도 있다(동사 하나는 부정,다른 하나는 긍정,3 : 16이 그런 경우이 다).
1.
목적절
비목적절
A
주 어
:7(b) 부정 과거 능동 가
8 부정과거 능동 가정 19 부정과거 능동 가정 22 부정과거 능동 가정
31 부정과거 수동가
정 법
3 : 15 현재 능동 가정 법
B 목적어 1 : 7(a)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 이 ixaprvpiav^ 설명 한다.
C 결 과
1 : 27 부정 과 거 ’ 능동,가 정 법 이 路。S 룰 설명한다.
2 : 25 부정 과거 능동가정 법 이 Xp^av 을 설명 한다.
T. 목적절
A 주 어
3: 16 부정어,부정과거 중 간태 가정법과 현재 능동 가정법
3: 17(a) 부정과거 (혹은 현재 ) 능동 가정 법 3: 17(b)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3 : 20 부정어,부정과거 수 동 가정 법
1.
: 21 부정과거 수동 가정
1.
: 8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4 : 15 부정어, 현재 가정 법 과 부정어
현재 중간태 가정법
4 : 34 현재 능 동 가정 법 (ᅲ0 iT]crco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동시에 강 한 지지를 받 고있다)과부 정과거 능동, 가정법.
4 : 36 현재 능동 가정 법
H- 비목적절
B
목적어
4 : 47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과 능동 중간태 가 정법.
5:7 부정과거
I. 목적절
I. 비목적절
5:14 부정어,부정과거 중 간태 가정법
5 : 20 현재 능동 가정 법 5 : 23 현재 능동 가정 법 5 : 34 부정 과거 수동 가정 법
5 : 40? 현재 능동 가정 법 6: 5? 부정 과거 능동가정 법
6: 12 부정어, 부정과거 중 간태 가정법
6: 15 부정과거 능동 가정
6 : 28 현재 중간태 가정 법
€ : 30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과 부정과거 능동 가정법
6 : 38 현재 능동 가정 법
ABC 주 어목적어 결 과
능동,가정법이
av6pa)7rov-%^
명한다.
5 : 36 부정 과거 가정법
6:7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6 : 29 현재 능 동 가정법이 toDto를 설명 한다.
6 : 39 부정 어 부정과거 능 동 가정법 혹 은 미래 능동 직설법,부정
I. 목적절
I. 비목적절
1.
: 50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과 부정어 부정과거 능 동 가정 법
7: 3 미래 능동 직설법
1.
: 23 부정 어 부정 과거 수 동 과정 법
7 : 32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8:6 현재 능동 가정법〕
8 : 59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9:3 부정과거 수동 가정법
C
결 과
과거 능동 가 정 법 ᄊ 미 래 능동 직설 법, 이 동사 들은 to{3to 를 설명한다.
6 : 40 현재 능 동 가정법, toGto를 설명 한다.
A 주 어
B
목적어
8 : 56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
9:2 부정 과 거 수동 가정 법
9 : 22 부정 과 거 중간태 가 정법
상 : 36? 부정 과거 능동 가
I. 목적절
A 주 어
정법
9: 39 현재 능동 가정 법 과 부정과거 가정법 10 :10(a)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과부정과거 능동 가 정법
10 : 10(b) 현재 능동 가정
법과 현재 능동
가정법
10 : 17 부정과거
능동
정법
10 : 31 부정 과거
능동
정법
10 : 38 부정 과거
능동
정법과 현재 능동 가정법
11 : 4 부정과거
수동 가정
11 : 11 부정과거
능동
정법
11 : 15 부정과거
능동
정법
11 : 16 부정과거
가정법
11 : 19 부정 과거
중간태
정법
11 : 31 부정 과거
능동
정법
11 : 42 부정과거
능동
정법
11 : 50 부정
비목적절
B C
목적어 결 과
11:37 부정어 부정과거 능동 가정법
—- 7 4 一
I. 목적절
n. 비목적절
11 : 52 부정 과거
능동
정 법
11 : 53 부정 과거
능동
정 법
11 : 55 부정 과거
능동
정 법
12 : 7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OYwflS를 집어 넣어라) 12:9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12:20 부정과거 능동 가 정 법
12 : 35 부정 어 ,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2 : 36 부정 과거 가정 법 12 : 38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A
주 어
과거 가정 법 과 부정어 부 정과거 중간 태 가정법
B
목적어
C
결 과
11:57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12:10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12:23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wpa를 수식한다. 거 의 시상적 효 과를 가진다.
I. 목적절
I. 비목적절
12 : 40 부정 어,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과 부정어 부정과거 능동 가정법과 부정어 부정과거 능동가 정법과 부정어 미래 능 동 직설법
12:42 부정어,부정과거 중간태 가정법 12 : 46 부정 어,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2 : 47(a) 부정 과거 능 동 가정 법
12: 47(b) 부정 과거 능 동 가정 법
13 : 15 현재 능동 가정 법 13:18 부정과거 수동 가 정법
13 : 19 현재 능동 가정 법 13 : 29 부정 과거 능동 가 정법
14 : 3 현재 가정 법 14 : 13 부정 과거 수동 가
ABC 주 어 목적어 결 과
13:1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조pa를 수 식 한다.
13 : 2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3 : 34 현재 눙 동 가정 법, o入•七을 설명한 다.
I. 목적절
I. 비목적절
정 법
14 : 16 현재 가정 법
1.
: 29? 부정과거 능동 가 정 법
14:31 부정과거 능동 가 정법
1.
: 2 현재 능동 가정 법
15 : 11 현재 가정 법 과 부
정과거 수동 가정 법
15 : 17 현재 능동 가정 법 15 : 25 부정과거 수동 가 정법
16:1 부정어,부정과거 가 정 법
ABC 주 어목적어결 과
15 : 8 현재 능동 가정 법,^ TOV- TCO를 수식한다.
15 : 12 현재 능동 가정법 aiV?}를 설명 한다.
15:13 부정과
거 능동 가정법 dydTrr)v 을 설명 한다.
15 : 16(a) 현재 가정 법 과 현재 능동 가정법과 현재 가정법
15 : 16(b) 부
정 과거 능동 가정법
I. 목적절
I. 비목적절
ABC 주 어 목적어 결 과
16: 2 부정과 거 능동 가정 법, 룰 설 명한다. 거의 시상적 효과 를 가진다.
16 : 4 현재 능동 가정 법
16 : 7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
16 : 24 조동사의 활용올 받 는 과거완료 수동 가정법
16 : 30 현재 능 동 가정법
16:32 부정 .
과거 수동 가 정법과 부정 과거 능동 가 정법
1.
: 33 현재 능동 가정 법
2.
: 1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7:2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다 른 사본은 미래 능동 직설법으 로되어 있다). i^ovaiav-^
명한다.
17: 3 현재 능 동 가정법 a-
I. 목s절
n. 비목적절
ABC 주 어 목적어 결 과
쑨재를 설명한 다.
17 : 4 부정 과거 능동 가정법
17: 11 현재 가정법 17: 12 부정과거 수동 가 정 법
17: 13 현재 능동 가정법
17 : 15(a)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7 : 15(b)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7 : 19 조동사의 왕용을 받 는 과거완료 수동 가정 법
17 : 21(a) 현재 가정법
17 : 21(b) 현재 가정법
17 : 21(c) 현재 능동 가정 법 17 : 22 현재 가정 법 17 : 23(a) 조동사의 활용 을 받는 수동 가정 법 17 : 23(b) 현재 능동 가정 법
17 : 24(a) 현재 가정법
17 : 24(b) 현재 능동 가정 법
17 : 26 현재 가정 법
I. 목적절
n. 비목적절
A 주 어
18 : 9 부정 과거 능동 가정 법
18:28 부정어,부정과거 수동 가정법과 부정과거 능동 가정 법
18 : 32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8:36 부정어 부정과거 수동 가정 법
1.
: 37 부정 과거 능동 가 정 법
18 : 39 부정 과거 능동 가 정 법,(JVV修 aa를 설명 한 다 ■
1.
: 4 부정 과거 눙동 가정 법
19 : 16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9 : 24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9 : 28 부정 과거 수동 가
정 법
19 : 31(a) 부정 어 부정 과 거 가정법
19 : 35 현재 능동 가정 법 19 : 36 부정 과거 수동 가
B C
목적어 결 과
19 : 31(b) 부정 과거 가정 법 과 4r•정 가정법
I. 목적절
n. 비목적절
A
주 어
정 법
20 : 31(a) 현재 능동 가정 법
20 : 31(b) 현재 능동 가정 법
요한복음의 절들의 분류
본 복음에서 Sri는 다른 어느 곳에서 보다 더 자주 나타난다. Srt 에는 원인올 나타내는 용법과 진술적 용법과 낭음조적 용법 둥의 삼대 용법이 있다. 본보기 의 거 의 3분의 2가 원인을 나타내는 용법 이며 평 서문은 절반 조금 넘으며 낭음조는 9분의 1이다. 특히,
1.
원인을 나타내는 (causal) oTt는 for, because, since로 영역할 수 있겠 다. 다음의 항목 I 올 보라•
2.
진술적 Srt는선언하다,증거 하다,말하다,보다,생 각
하다,듣다,기 억하다,안다 둥둥의 동사의 직접 목적 이 되는 절을 도입 (소개)한다. 이와 같은 절은 간접 강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이 용어가 보 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 영역은 새섰이다. 항목 표를 보라. 이 목록 (!)은 엄격히 말해서 진술적 용법이 아닌 몇몇 예도 포함하고 있다(이렇 게 3 : 19는 설명적 보족어적이며 (epexegetical〉, 14 : 22는 결과를 나타내 는 것 같다). 6: 46에서 우리는 생 략법올 보게 되는 것이 틀림 없다. 즉 “I do not mean that,” etc.
1.
낭음조(recitative)의 는 직접 인용올도입한다. 영어에서는 quo­tation mark(“ ”)로 재생된다.
본 복음에서 저자가 예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할 때 그는 “가라사대” (“he said”)란 말씀 뒤에 대체로 3竹를 생 략하였다(18 : 5룰 보라). 다른 사람들의 말올 직접 인용할 때는 그들의 말이 Srt에 의해 도입되었다(1 : 20, 9:9). 하지만 예수께서 그의 이전의 말씀올 인용하시는 것으로 묘사 된 간접 강화의 몇가지 예가 있다(항목 n). 이 때에는 진술적 3자가 사
B C
목적어 결 과
19 : 38 부정 과 거 능동 가정 법
용되 었다(1 : 50,6 : 36, 8 : 24 둥둥'). 현재 는,A^^v a[xi)v Acyco 뒤에 오 는 oti를 낭음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13〉
지 금까지 의 실례의 대 부분에 서 5Tt의 뚜렷한 의미는 문맥 에 비 추어 볼 때 즉각 분명해진다. 이처럼 8 : 47에서는(37*1 앞에 Sui to{5to가 나오는) 원인을 나타내는 의미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말한다,본다와 같은 말들 뒤에 올 때는 진술적 용법으로 사용되었음이 대체로 어렵지 않게 구별된 다. 예를 들어 4 : 20을 보라. 1 : 20의 5ti가 낭음조라는 것 과(일인칭에 서 3인칭으로 변화되지 않았음) 4: 51에서는 진술적(이인칭에서 3인칭으로 변 화:)으로 되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가 그 의미에 영향올 주지 않 으면서도 진술조나 낭음조로도 될 수 있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4 : 37. 하지만 5Tl는 가끔 문제를 일으킨다. 다음 내용을 주목하자.
2 : 18,여기서는 Sti의 의미를 재생시키려면 단순한 진술적 that^ 한계 를 넘 어 가야 할 것 같다. 유대 인들은 “네 가 이 런 일을 행하는 것 (새선)을 증명 하기 위해 너는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란 뜻으로 말 했올리가 없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전올 사실상 청결케 하신 사실올 문 제삼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알고 싶어한 것은 그가 어떻게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그가 합법적이며 정당한 이유로써 무엇올 제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원인올 나타내는 Sti를 지적하고 있 디-. 우리는 이렇게 번역한다. “What sign do you show us for doing these things?” (한글 역 은 바르다. )
1.
이 리하여 R.S.V.는 기 타 영역과 보조를 맞추어 5: 24,25의 Sti룰 번역 하지 않고 그대 로 둠으로써 영 어 독자들에 게 5 : 19의 Sti가 없는구문과 5 : 24, 25
의 있는 구문과의 차이를 보여 주지 않고 있다.ay.Tiv AeVw 위에
오는 5n가 엄숙한 도입의 말씀에 이어 나오는 말씀의 다시 시작되는 성격 (resumptive character)올 증'가시 키 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타당한 질문이 디-. 만일 증가시킨다면 주문은 간접 강화의 방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마치 예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 것올 재진술 하시되 이 번에는 그것을 다른 말씀으 로 말유하시는둣, 즉 거기에 새 관념율 추가시키거나 새롭게 강조하여 말씀하 시는둣. 도입하는 말이 Sti와 함께 나타나는 모든 경우에서 이 런 논거를 펼 수 있겠다(3 : 11, 5 : 24.25, 8 : 34, 10 : 7. 13: 21, 16 : 20). N.N•은 » a/n> Aeyco o"oi(혹은 u/ztV)이 나오는 다른 모든 경우에 서 Sti를 생 략하고 쇼디<1 : 51, 3:3,5, 5:19, 6:26,32.47,53, 8 : 51.58, 10:1, 12:24, 13 : 16,20, 1 3 : 38, 14 : 12, 16 : 23. 21 : 18). 하지 만 이 상황은몇 몇 경우의 본문이 쟁점
이 되 고 있다는 사실 때 문에 복잡한 편이 다.
3:7,4 : 27,5 : 28. 텔라어 동사 0a뿌^co는 독립해서 (명사〈목적어〉없 이)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이나 사물의 대격과 함께 인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뒤의 경우로 이해되면(즉 동사가 목적어를 가질 수 있으며 이 목적 어 가 단일어 가 될 수도 있고 절〈clause〉하나를 전체 로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 동사에 뒤 이어 오는 STt가 진술적이라는 것 (하나의 that 절 올 도입하는)을 보기는 어 렵지 않다. 3 : 7과 4 : 27의 동사 사용양식의 경 우 그 동사는 선언하다,증거하다, 말하다 C2항올 보라) 둥둥의 동사와 크 게 다르지 않다. 이 런 동사는 대 체 로 같은 종류의 선행 의 (anticipatory) 진술적 Sti를 취 하는 것 이 다. 그러 므로 3: 7에 서 도 4: 27에 서 도 우리 가 Sti를 “that”로 번역하든 “because”로 번역하든 그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 긴해도 필자는 “that”가 좋다고 본다.
5: 28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여기서 동사(/^)0ai)/xd^ere의 목적어는 절 이 아니라 대명사 toGto이 다. 더구나 toOto는 앞에 나온 것 (선행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여기서 뒤에 일어날 것을 예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뒤에 있을 일을 예기하는 것이라면 예 수께서 는 자기가 그들에게 아직 이르지 않은 것 에 대 해 놀라워 하지 말라고 유 대 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었 던 것 이 되기 때문이 다. 즉 앞으로 있을 육체 부 활과 관련되 는 자세한 일들이다. 이 런 까닭에 1네 eavixaicTC toSto절 (clause)은 그 자체로서 완전하며 영역에서는 comma가 오는 것이 옳다. comma에 뒤이어 오는 Sti절은 그 바로 앞의 금지하신 일의 이유를 진술 한다. 따라서 “for”가 바른 번역이다.
3: 19. 여기서 크리소스틈과 기타 주석가들은 룰 원인을 나타내는 의미로 취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귀절들과 비교해 보면一요일 1 : 5, 5 : 9,11, U—OTL7} 설명 적 보족어 (epexegetically)로 사용되 었음이 즉각 나타난다. 즉 선행하는 설명사와 동격으로 사용되어 그것을 설명하는 절 을 도입 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 이 다. 이 런 까닭에 요일 5 : 14는 다음과 같 이 해석할 수 밖에 없다- “And this is the confidence which we have with respect to him that(jiOt because)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lie hears us.”(한글 역은 바르다). 3 : 19도 그 형식에 있어 서는 이와 꼭 같다. Stc는 “that”로 해석해야 한다.
4 : 35C하반절). 여기서는 that로 하든 because로 하든 의미는 모두 바르
다. 그럼 에 도 문맥 (35절 상반절')은 예수께서 “밭을 보라(응시)”라고 말씀 하시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즉 밭들이 희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 밭들이 횐 것에 너희 눈올 집중하라고 말씀하시려 한것 처럼 보인다(자연 그대 로의 밭과 대 조해 서). 여 기 서 우리 는 본다는 동사를 직 접 목적어 하나와 목적절 하나와 함께 가진다.
8 : 22. 이와 같은(그리고 11:47) 성귀에는 생 략법 이 사용되 었다. 그러 므로 이 질문올 다음과 같이 풀이 할 수 있다. “Then said the Jews, ‘Will he kill himself?’ They said this because {or since ort) he had said, 'Where I am going, you cannot come.’”(“유대 인들이 가로되 그 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저가 자결하려는가’라고 말했다”.)
14:2 때문에란 의미의 STt가 여기서 가능하며 이런 뜻임에 틀림없다는 것올 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설명하였다. 여기의 Srt를 진술적인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의견올 같이 하지 않는다. 마치 원인을 나타내 는 뜻은 전혀 문제 밖에 있기라도 하다는 둣. Sti가 진술적인 의미로 해석 될 때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즉,
1.
“그렇지 않으면(즉 나의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Wmt)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If it were not so, I would have told you that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 이 해석은 예수로 하여금 만일 하늘에 하나님의 자녀들 올 위해 예비된 집들이 없다면 그가 거기에 가서 이런 상황올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이며 그럴 경우 그가 자기 제자들에게 이 점 에 대 한 자기 계획 올 알려 주리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되 게 한다. 하지 만 이것이 이렇게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즉 예수와 아버지는 요한복음에서 충돌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2.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너 희에게 일렀을 것이 아니 냐?”(“If it were not so, would I have told you that I go to prepare a place for you?”) 이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그리고 a. 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이 일올 자기 제자들에 게 언제 말씀하신 일 이 있 는가 ? (즉 그가 그들올 위 한 처 소를 예 비 하러 가시겠다고?)’’란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 처럼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 있
었을 가능성ᅳ본 복음에는 이런 가르침의 기록이 없다一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개연성 (probability)은 크지 않지만.
1.
OTt=문제의 와,5*n를원인을 나타내는 뜻으로 간주해 야 한다는
입장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 두 견해는 특히 두가지 매 우 중요한 사실올 가르치고 있으며 줄잡아 말해도 최소한 교훈의 뜻이 내 포되어 있다.
1.
아버지의 집에 그의 모든 자녀들을 위해 충분한 자리가 있다.
2.
그리스도의 승천의 목적의 하나는 그가 택하신 자들의 처소와 관련 된 모든 일올 예비하시기 위함이었다.
제 4복음의 Sn절의 분류
I. 원인을 나타 내는 STt 표. 진술조의 5차(주 I. 낭음조의 5하=
=for, because, since 로) =that “ ”
1 : 15 1 : 16 1 : 17
1 : 20
1 : 30
1 : 32
1.
: 34
1.
: 50(상반) 1 : 50(하반)
2.
: 17
1.
: 18
2 : 22
1.
: 25
2.
: 2 3 : 7
3 : II
1.
: 18
3 : 19 3 : 21
-8 5
I. 원인을 나타 내는 I. 진술조의 5rt(주
=for, because, since ^)=that
3 : 23
1.
: 33 4: 1(a)
2.
: 1(b)
4 : 19 4 : 20 4 : 21
4 : 22
4 : 25 4 : 27
4 : 35(b) 4 : 37
4 : 42(b) 4 : 44 4 : 47 4 : 51
1.
: 53
2.
: 6 5 : 15
5 : 16 5 : 18
5 : 27
1- 낭음조의 '6ti=
3 : 28(a) 3 : 28(b)
4 : 17
4 : 35(a)
4 : 39 4 : 42(a)
4:52
5 : 24
5 : 25
-8 6-
I. 원인을 나타내는 oTt
—for, because, since
5 : 28 5 : 30
5 : 38 5 : 39
6 : 26(a) 6 : 26(b)
6 : 38 6 : 41
1.
: 65
2.
: 1
7 : 7(a)
7 : 8
표. 진술조의 주 I. 낭음조의
로^ =that “ ”
5 : 32 5 : 36
5 : 42 5 : 45
6 : 14
C : 15 6 : 22(a)
6 : 22(b)
6 : 24
6 : 36
1.
: 42
6 : 46 6 : 61
1.
: 69
2.
: 7(b)
1.
: 12
7 : 22 — 8 7 —
r/
OTL =
I. 원인을 나타 내는 STl 표. 진술조의 6V1 (주 1L
=for, because, since 로') =that
7 : 23
7 : 26
7 : 29
1.
: 30
7:35(거의 결과를 나 타내는,즉 so that)
7:39
7 : 42
1.
: 52
2.
: 14 8 : 16
1.
: 17
8 : 20 8 : 22
8 : 24(a)
8 : 24(b)
8 : 27 8 : 28
8 : 29
8 : 37(a)
8 : 37(b)
8 : 43 8 : 44(a)
8 : 44(b)
8 : 45 8 : 47
낭음조의
C7 : 40〕
S : 33 S : 34
8 : 48
一 8 8 —
I. 원인을 나타 내는 STt I. 진술조의 Sn(주 m. 낭음조의 sTl=
=for, because, since 로!) =that “ ”
9 :
9 : 16 9 : 17(a)
9 : 9 :
1.
: 22
9
9
9
9
9
9
9
10:4
10:5
1.
: 13 10 : 17 10 : 26 10 : 33
9 : 9(a)
9 : 9(b)
9 : 11
9 : 17(b) 9 : 23
1.
: 41
2.
: 7
54
55
8
18
19
20(a)
20(b)
24
25
29
30
31
32
35
10 : 34
I • 원인을 나타 내는 071
=for, because, since
1.
: 36(b)
2.
: 9
11 : r
1.
:47
2.
: 6(a) 12 : 6(b)
12 : 11 12 : 18
12 : 39
12 : 41
n. 진술조의 Stk주
로') =that
0
38
1
6
1
13
1
15
1
20
1
22
1
24
1
27
1
31(a)
1
31(b)
1
49
1
41
1
42(a)
1
42(b)
1
50
1
51
1
56
2
9
2
12
2
16
2
19
2
34(a)
2
34(b)
I- 낭음조의
tt yy
10 : 36(a) 10 : 41
I • 원인을 나타 내는 OTt
=for, because, since
12 : 49
14 : 2
14 : 12 14 : 17(a) 14 : 17(b) 14 : 19
1.
: 28(c)
2.
: 5
15 : 15(a) 15 : 15(b)
15 : 19 15 : 21
1.
: 27
2.
: 3
D. 진술조의 STt(주
로) =that
IL 낭음조의
50
1
3(a)
3(b)
19
29
35
10
11
13
11
13
21
13
33
14 : 20 14 : 22 14 : 28(a) 14 : 28(b)
14 : 31
15 : 18
15 : 25
t!
OTI —
— 9 1 —
I. 원인을 나타 내는
=for, because, since
16 : 4(b)
16 : 6 16 : 9 16 : 10 16 : 11 16 : 14
16 : 17
16 : 21(a)
16 :27(a)
1.
: 32
2.
: 8(a')
17 : 9 17 : 14
1.
:24
2.
: 2
I. 진술조의 주 I. 낭음조의 5Tl=
로') =that “ ”
16 : 4(a)
16 : 15
6 : 19(a)
6 : 19(b)
16: 20
6 : 21(b)
6 : 26
6 : 27(b)
6 : 30(a)
1.
: 30(b)
7:7
1.
: 8(b)
7 : 8(c)
7:21 7 : 23
7 : 25
18 : 18
19 : 7 19 : 20
1.
: 42
2.
: 29
3.
: 17(a)
제 4 복음서의 헬라어에 대한 아람어의 영향을 받아서 말이죵.
I. 원인을 나타 내는 on I. 진술조의 Sn(주 H. 낭음조의 5丁t=
—for, because, since 로') =that “ ”
18
20 : 1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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