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2새벽]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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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459 누가 주를 따라
본문 요 12:24-33 (신p.168)
사랑이 풍성하신 주님, 우리에게 하루를 허락하시고 하루가 시작하는 이 시간 단잠에서 깨게 하시고 일어날 힘을 주시며 예배당에 출입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을 주시며 기도하는 자리로 부르셨사오니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옵고, 그 말씀 붙들고 결단하게 하여 주시길 간구합니다. 특별히 주님, 우리가 더욱 우리보다 앞서가신 주님을 닮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주님을 좇을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을 주시어 그 말씀 따라 주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서론]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Antonin-Gilbert Sertillanges)라는 저자는 그의 책 '공부하는 삶'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자신을 단련해 가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마치 운동선수가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처럼 공부하는 사람도 그런 삶을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공부하는 삶이란 단지 지성의 단련만을 말하지 않는다. 꾸준히 공부하기 위하여 신체와 성품도 단련하라고 말한다. 건강한 신체는 건강한 지성을 만들고, 건강한 지성은 공부의 효율을 높인다. 반면에 병든 신체는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그로 인해 성격이 변하며 결국 사유하는 방식까지도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공부하는 삶을 위해 삶 전체를 재구성하라고 강력히 권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시며, 이제는 이 땅의 유한한 것들로부터 눈을 들어 영원한 것들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성을 부여받았다. 비록 잠시 잠깐 이 땅을 살아가지만 이 땅과 결코 섞일 수 없는, 동화될 수 없는, 언제라도 그 구별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존재로 살아가며, 장차 들어갈 영원한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아주 극명하게 나타난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본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죽음과 생명에 관한 역설적인 교훈을 말씀하신다. 먼저 24절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바로 거기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을 땅에 심으면 그것이 자라서 수십, 수백 알의 밀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그렇게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많고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떨어짐과 바로 그곳에서 죽음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역설적인 교훈을 말씀하시는데, 25절을 보시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말씀하신다. 자기 생명을 지키고 아끼며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지금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말라는 것인가? 가볍게 여기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자기 생명에 대한 태도가 핵심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의 유한한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 즉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자가 영원을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셨다.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도전하신다. 26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시라’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 혹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할 때 보통 하나님께 찬송하며, 설교를 듣고, 기도하는 일반적인 예배의 한 장면을 생각한다. 물론 맞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하며 베푸신 은혜를 날마다 노래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예배를 올려드리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핵심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곤 한다.
그러나 여러분, 이 논리를 바꾸어 말한다면, 우리가 진정 예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정 앞서가신 예수를 쫓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 각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닮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열심히 예배의 자리에 참석해도, 내가 아무리 교회 울타리 안에 있어도, 내가 아무리 교회의 제도와 문화권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주님을 섬기는 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이다. 주님을 섬기는 자는 주님을 좇아가는 자이다. 주님을 섬기는 자가 주님의 제자이다.
우리 주님은 어떠한 길을 걸어가셨는가? 한 알의 밀알이 되셔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고, 그곳에서 죽으셔서 많은 열매를 맺으셨다.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기부인의 모범을 보이셨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수모와 희생에 대하여,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이와 같이 죽임당하시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고 오해하곤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죽으시면 모든 게 끝난다는 식으로 쉽게 생각한다. 그들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주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다. 당연히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주님께 있어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님도 괴로워하셨다. 고난의 쓴잔 받기를 고통스러워하셨다. 그래서 27절처럼 예수님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라고 탄식하셨다. 만일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셨더라면 십자가를 외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단호하게 십자가를 지셨다. 그로 인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영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이미 영광을 받으셨고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응답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은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응답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이 모든 사건들이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광경을 보고 듣고 있던 제자들을 위한 것이고, 또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전해받은 모든 세대의 교회를 위한 것이며, 바로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쉽게 떠올리던 영광이란, 전쟁에서 승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가운데 행진하는 장군의 모습이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고 택하신 백성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다만 예수님의 승리와 심판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던 방식과 달랐다. 십자가에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달려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이 준비하고 계시는 승리이고 세상 임금들에 대한 심판이셨다. 이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신비이지만, 우리는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결국 이 땅의 수많은 족속들을 주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신 사실을 알고 있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셨을 때에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영광을 얻으셨다.제자들은 주께서 장차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때에 그 좌우편에 앉기 위해 서로 다툼과 논쟁을 벌였다. 이를 위해 서로 시기와 질투를 하였고, 청탁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제자들은 높아지길 원했고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길 바랬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 ‘창끝’이라는 영화를 통해 알려진 짐 엘리엇 이라는 선교사가 있다. 그의 나이 27살, 에콰도르 아우카 인디언의 창과 도끼로 순교를 당했다. 아주 젊고 유능했던 청년의 순교를 세상 사람들은 불필요한 재능낭비로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훗날 에콰도르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가 선교를 준비하며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진정 지혜로운 자는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하여 곧 사그러들 것들을 포기하는 사람, 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 땅의 것들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약속되고 예비된 영원한 면류관을 받기 위하여 이 땅의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지금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들이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과 포기와 내려놓음이 필요하다. 주님은 세상의 눈에는 실패와 좌절과 패배의 길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고, 이것이 진정한 승리와 영광의 길임을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이 땅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께서 앞서 가신 그 길로 따라오라고 요구하신다. 바로 그 주님께서 26절 말씀처럼 ‘나를 따르라’고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촉구하신다. 이 강력한 부르심에 ‘예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응답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이 강력한 부르심에 내가 그간 움켜쥐고 있던 썩어질 것들을 포기하며 영원한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이 강력한 부르심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가진 것이나 나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아낌없이 올려드릴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한다.

[결론]

말씀의 결론이다. 설교의 서론에서 말씀드렸는데 학자 세르티앙주는 공부하는 삶을 위하여 삶 전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우고자 하는 학생에게 있어서 공부하는 삶은 그의 목표이자 과정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고,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신 길을 쫓아 나아가길 원하는 모든 신자들도 동일하다. 주님이 몸소 보이신대로 이 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야 한다. 여전히 높은 곳에서 사람들의 존경어린 시선 받길 즐기고, 그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져 땅으로 떨어지길 주저한다면 이는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이라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땅에 떨어진 바로 그 곳에서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면, 자기 부인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드러내고 나를 주장한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이라 할 수 없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양문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강력하게 권고하시는 이 말씀을 들으시길 바란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을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의 삶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영원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썩어질 것들을 포기하는 우리의 매일의 과정들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오로지 단 하나의 목표, 주님을 따라가는 삶, 주님을 닮아가는 삶, 주님의 제자된 삶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우리의 삶 전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여러분의 삶을 되돌아보자.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를지 여부를 고민 중이진 않는가? 그 좁고 협착한 자기 부인의 길을 걷기보다 영광의 대로를 걷기를 더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분명 내가 땅에 떨어져야 하는데 여전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처럼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말씀을 기억하며 이 시간 간절하게 기도하자.
주님, 주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앞서가신 주님을 따라 가지 못했던 나임을 고백합니다. 여전히 땅에 떨어지길 두려워했던 나임을 고백합니다. 여전히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온갖 탐욕에 눈이 멀어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고 썩어질 것들만 움켜쥐기에 혈안이었던 나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는 주님의 명령을 새겨 듣습니다. 앞서가신 주님을 쫓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몸 아끼지 않고 내어주사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주님처럼, 나도 땅에 떨어지고, 나도 죽기를 소망합니다. 썩어질 것들에서 눈을 돌이켜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온전히 붙들어 주옵소서. 이러한 제목으로 간절하게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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