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통해 나를 보다

사사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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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인 사람 삼손 2. 구별된 사람 산손 3. 구별된 사람 나와 너 4. 삼손과 나는 똑같다 5. 구별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다 6. 너는 누구냐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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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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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잘 보냈나요? 여러 이유들로 집에서 보내야 했던 분도 있었을 것이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 분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명절 잘 보내고 또 이렇게 예배 시간에 만나니 넘나 좋네요.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요.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 나올 때가 언제에요? 타인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내가 세워놓은 어떠한 기준 그리고 나에 대한 이미지에도 얽매이지 않고 정말 편안한 마음과 자세로 있을 때 있죠? 언제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오나요? 저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괜히 짜증도 내고 큰 소리도 내면서 편안하게, 나답게 있을 수 있는 곳 바로 가정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편안하게 있다가 외출을 하거나 삶의 자리로 나갈때가 되면 우리는 또 나라는 사람의 가면을 쓰고 타인을 의식하면서 스스로를 힘들게 하며 살아가곤 하죠. 왜 그럴 때 있지 않아요? 내가 나의 이미지를 챙기느라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하면서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상황. 경험해본적 있죠? 적어도 한번씩은 있었을거라 생각해요. 왜 그럴 때 상상하면서 싸우잖아요. 머리속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을 세워놓고 내 답답함에 대한 마음을 막 쏟아내고,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하겠지? 상상하면서 나는 또 그에 대한 반박을 하고. 그러면서 그 순간 화내지 못했던 스트레스를 풀어내며 뇌싸움 했던 적 다 있을거라 생각해요. 내가 막 뇌로 싸우고 있을 때 누군가 나에 대해 변호해주거나 혹은 나와 비슷한 상황일 때 자신을 방어하면서 할 말을 하는 사람을 볼 때 통쾌함을 느꼈던 적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제발 있다고 해줘요. 있어야 해요. 그래야 오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단 말이에요. 다 해봤죠? 뇌싸움도 해보고 다른 이를 보면서 대리만족도 하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거에요. 그렇게 타인을 의식하며 나에 대한 이미지를 견고하게 쌓고 그 이미지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약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삶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크게 와닿지 않을 때가 있어요.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지난 주에 들었던 엘리야, 엘리사 등 이런 성경의 인물들은 우리와 좀 괴리감이 있어 보이거든요. 그들도 삶의 어려움과 굴곡이 있었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자세한 것들을 기억하지 않잖아요.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모세 위대한 지도자. 다윗 이스라엘의 넘사벽 왕. 솔로몬 지혜 등등 성경의 인물들을 이야기하면 바로 그들을 설명해주는 수식어도 생각이 나요. 그 수식어 때문에 그들과 나는 다르다 느껴지고, 괜히 괴리감 느끼고 멀게 느껴지곤 해요. 어쩌면 그래서 말씀을 읽고 싶지 않을수도 있겠죠. 내 상황과 삶의 고민 그리고 모습과 공감되지 않는다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사사기에 많은 사사들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을 대신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인들과 싸워 승리를 가져오고 이스라엘에 자유를 주는 여러 사사들이 등장해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인물은요. 그런 사사들 중 한명이에요. 그런데 듣고나면 우리랑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거에요.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아니 어떻게 이런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거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가장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사거든요. 그 사사의 이름은 바로 삼손이에요. 여러분 삼손하면 뭐가 떠올라요? 여자. 머리카락. 힘. 이런 것 떠오르죠?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 삼손인데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게 하나님이랑 상관 없어보이는 여자, 머리카락, 힘 이런 것들이 떠올라요. 사사 맞나 싶을정도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 다 하고 살았던 사람이 바로 삼손이에요.
삼손의 인생을 잘 보면 우리랑 너무너무 비슷해요. 이번주는 제가 다음주는 강도사님이 삼손에 대해 말씀을 나눌 예정인데요. 삼손. 그를 통해 나를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런 삼손과 나 같은 사람에게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 되기를 소망해요.

구별 되었으나..

우리는 수많은 상황을 맞이하면서 살아가요.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선택을 하죠. 그 선택이 옳을 때도 있지만 때론 실수하고 틀릴 때도 있어요. 왜 우리의 선택에 오류가 생기고, 내가 원하는데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한 진짜 답. 정확한 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그저 우리의 경험과 여러 조언들을 통해 조합한, 내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기에 여러 변수가 발생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고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거죠.
“하나님 좀 답을 알려주시지.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도 안해주시고 도대체 뭐야. 그 때 답만 해주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왜 말도 안해주시냐? 진짜 치사하다.” 내 선택에 대한 어려움 혹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이런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우리는 늘 실패하고 넘어지고 좌절해요. 그리고 별 것 아닌 이야기들에 마음이 막 동요하고 감정이 요동칠 때도 있어요.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울기도 해요. 어쩌면 정말 좋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겠죠.
그게 인간이에요. 같은 상황인데 오늘의 나의 컨디션과 기분 상태에 따라 화를 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상처 받아요. 도대체 왜 이럴까? 고민하기도 하죠. 우리의 삶은 늘 이래요.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을 하세요. 불완전한 우리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씀하세요. 불완전한 우리를 먼저 찾아와주시고 구원을 주기 위해 선택해 주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구원을 선물로 얻을 수 있었구요.
이런 면에서 삼손과 우리는 비슷한 점이 참 많아요.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 다르게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거든요.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떤가요?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삼손을 나실인으로 선택하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이 앞으로 불러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은 쉽게 잊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내가 뭔가 어떤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서 얻어낸 구원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이 구원의 의미를 가볍게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더러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데로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매일 상처 받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와 여러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 고백하고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의미는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구별되어진 존재'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잊으라 우리에게 여러 방법으로 설득하고 있거든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은밀하게 우리의 가치관과 신념을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강하게 하나님이 필요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의 설득에 속아 하나님을 잊고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은 없다! 신은 가짜다! 신은 무능하다! 그러니 돈과 명예, 좋은 직장 등에 너의 미래를 걸라! 라고 말해요. 이렇게 말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상한 존재들이에요. 세상이 절대 품을 수 없는 존재들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를 외치는 사람들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셔서 먼저 구별하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지워진 하나님의 흔적을 더 강하게 새기며 살라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이 흔적을 강하게 새기면 새길수록 우리는 더 힘들어져요.
왜냐하면 세상이 외치는 절대 가치는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세상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절대 가치는 ‘그 누구도 믿지마. 오직 너만 믿어.’거든요. 한번 사는 인생 즐겁게 나 자신을 위해 살라고 말해요.
아담과 하와가 지었던 첫 죄가 바로 그거 였잖아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필요 없다. 나는 하나님과 같아 지고 싶다. 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거잖아요. 세상은 마귀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절대 가치는 하나님이 아닌 너라는 사람이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야 너도 할 수 있어. 계속 꼬시고 있어요.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꼬임에 넘어가지 않은, 꼬임에 넘어가서는 절대 안되는 사람들이에요.
삼손도 우리랑 똑같았어요. 나실인에 대한 이야기는 민수기 6장 1-12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나실인은 ‘나지르'라는 히브리어인데, “거룩하게 되는", “구별되어진" 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나실인은 그 공동체 안에서도 구별되어진 존재를 이야기해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살아가고 있으나, 구별되어진 존재, 조금은 다른 존재이죠. 우리처럼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에요. 삼손이 살았던 그 시대는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하고 너무너무 비슷해요. 진짜 소름돋을 정도로비브싯해요.
1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몇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셨다고 나오죠? 40년이죠? 이 40년이라는 기간은요. 사사기에서도 역대급이에요. 40년 다음으로 긴 기간은 드보라와 바락이 있었던 20년 동안의 괴롬힘이었어요. 삼손 이전에는 20년이 가장 긴 고난의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그 2배인 40년 동안 블레셋의 괴롭힘과 억압 속에 이스라엘이 살아가고 있었어요. 이 이야기는요. 이스라엘이 이전보다 더 큰 죄를 하나님 앞에서 범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요. 40년이라는 시간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아요? 하나님을 잊어가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만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처럼요. 하나님이라는 분을 거의 잊도록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다른 사사들을 세우실 때 공통점이 있었어요. 괴롭힘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살려달라 기도할 때, 구원해 달라 요청할 때 사사들이 세워졌거든요? 그런데 삼손 시대는 이런 부르짖음이 없어요. 하나님을 찾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그 삶을 그냥 그대로 받아드리고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갔어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이 너무 달콤했던 거에요. 뭐하러 하나님 앞에 나와 아침 저녁으로 기도해요.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뭐하러 내 시간과 마음을 쏟아요.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 외면하고 살아가면 마음이 편한걸요.
블레셋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들처럼 살아가다보니,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너무 익숙해졌어요. 40년이라는 시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다른 신들 중 하나로 만들었고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마져 빼앗아 가버렸어요. 고통과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드렸어요. 고통에 죄에 무감각해졌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여지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이런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을 보여주셨어요. 그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리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깨어있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그들과 우리를 위해서 구원할 사람을 정해두셨어요. 그들이 살려달라 외치지 않았는데요. 한 사람을 예비하셨어요. 그것도 2절 말씀처럼 “본래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사용하셔서 너희는 나를 잊었으나,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다를 보여주셨어요. 구원자를 주시기로 결정하셨어요. 이 당시에 불임은 신의 징벌이자 저주라 생각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삼손의 어머니를 보며 신에게 저주를 받았다 라고 수근수근 거렸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임신을 했어요. 아기를 가졌어요. 그것도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들을 줄것이다 말하면서, 나실인으로 구별될 것이라 미리 알려줬어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던,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셨고 그들에게 어쩌면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구세주를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기를 나실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세요. 나실인은 보통 세 가지 기본 규정을 가져요. 서원한 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하고 ‘술이든 아니든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마시지 말아야'했고, ‘시체와 접촉을 하면 안됐’어요. 나실인은 자신의 삶을 매일 돌아보고, 조심하면서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구해야만 했어요. 머리를 자르지 않고, 포도나무 열매를 먹지 않고, 시체와 접촉하지 않는 이런 행동들은요. 어떤 목표를 향해 ‘근신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에요. 하나님께 묻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나는 겸손하게 나의 삶을 제한하면서 그분의 ‘답’을 ‘기다린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민수기 6장에 기록된 나실인과 삼손은 좀 달라요. 원래 나실인은 나기 전부터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스스로가 하나님께 서원.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에요. 근신하고 집중하며 하나님의 답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약속을 하고 기간을 정해놓는 것. 그것이 나실인이었어요. 만약 나실인으로 서약한 기간동안 이 세가지 중 하나를 어기면 빨리 정결 예식을 가져야 했어요. 정결 예식을 갖지 않으면 나실인의 삶은 종료되어요.
삼손은 자발적으로 나실인이 되지 않았어요. 비자발적이에요. 태어나니까 나실인으로 살아야 한데요. 삼손은 기한을 정한 일반적은 나실인과 달랐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실인의 삶을 하나님께서 그만 하라 하실 때까지 살아야 했어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라요. 사실 삼손을 보면 나실인이 지켜야 하는 세 가지를 다 어겼거든요? 어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만큼 구별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짜 막 살았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나실인이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나실인이었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어요. 내가 먼저 원해서 구별되지 않았어요. 삼손처럼 앞으로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해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이런 예배와 또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가야해요.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해요. 하지만 우리도 삼손처럼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어요. 어떨 때보면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욕구가 미친듯이 올라올 때도 있어요. 우리가 방황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품고 계셔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별된 사람들이거든요.

마음대로 살아가는 삼손과 우리

나실인. 구별된 사람 삼손은 그 의무를 다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았어요.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들 중 가장 흠이 많은 인물이었어요. 폭력적이고 충동적이고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어요.
그는요.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과 결혼을 해야 했어요. 더군다나 구별되어진 나실인이잖아요? 선택받은 민족과 결혼을 하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가 블레셋 여자를 선택해요. 고집을 부리기 시작해요. “나를 위해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그 여자가 내 눈에 맞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해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살아갔어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사 삼손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삼손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는 자기 눈에 옳은 것을 선택했어요. 하나님이 그것을 악하다 말씀하셔도, 내 눈과 마음에 들면 그 것은 무조건 옳은 것, 맞는 것이었어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사사로 섰을 때에는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과 가까웠어요.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 이스라엘은 사사를 따라 하나님과 멀어졌거든요? 영적 지도자인 삼손이 지금 자신의 눈에 옳은데로 자신의 마음과 방법대로 여자를 막 선택했어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삼손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어요.
삼손은 충동적이에요. 혈기가 올라오면 하고 싶은데로 다 선택하고 일단 지르고 봤어요. 그리고 그 누구의 조언도 말도 듣지 않았어요. 누군가 바른 것, 옳은 것을 알려줘도 듣지 않아요. 왜요? 충동적이기 때문이에요. 감정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별 것 아닌 것에 “화르르르" 불 타올라서 화를 내고 쏘아 붙여요. 하고 싶은데로 멋대로 일을 질러버려요.
요즘 우리 욕 많이 먹잖아요? 교회가 뭐 이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뭐 저래. 이런 이야기도 듣고 개독이라는 말도 들어요. 진짜 너무 마음 아픈 이야기죠.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곰곰히 잘 생각해보면 우리 선배들 때문이에요. 그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아가면서 구별된 척 했기 때문이에요. 그들의 모순적인 행동들이 쌓여서 불신을 만들어냈죠. 그리고 우리 때문이기도 해요.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끌어 갔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끌어갈 힘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부터 헷갈려 하고 있거든요. 세상이 말하는 절대적 가치와 내가 믿는 가치가 완전히 달라서, 내가 믿는 가치를 드러내며 살아가기 힘들거든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면 학교, 직장 내에서의 나의 행동에 제약이 생겨버려요. 사람들이 지켜봐요. 실수라도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래도 돼?’라고 물어요. 그러니 차라리 내가 믿는 예수님을 굳이 드러내지 않기로 해요. 그러다보면? 우리는 세상에 끌려가게 되어 버리는 것이죠.
나무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거든요. 앞으로 점점 더 그런 상황이 생길 것이고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해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고 세상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것으로 결정을 해버린다면 우리는 삼손과 다르지 않을거에요. 구별되었지만 구별된 존재가 맞는지 내가 나를 돌아보며 더 자신없어 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너 도대체 뭐야?

사사기 15장 11절을 보면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가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묻거든요? 세상 속에서 나를 들어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드린 것이에요. 하나님은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며, 가나안 사람들을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라 하셨어요. 그들을 살려두면, 그것이 불씨가 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살려뒀어요. 왜? 가나안 사람들을 통해 농사 짓는 법도 배우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면 자신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의 편안함을 위해 살려뒀어요. 그 결과 가나안 민족 중 하나인 블레셋의 지배를 받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도 문제인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방민족의 지배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제는 그냥 그 삶에 순응하고 있어요. 블레셋의 지배를 받아드리고 마치 그 지배 안에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 보여요. 블레셋의 가치, 풍습, 우상 그들의 도덕적 타락 등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드리고 순응한 삶을 살아가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인지 모르겠어요. 본인들이 땅의 주인인데 지배 받는 삶을 신경쓰지 않아요. 주인처럼 살지 않아요.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빼앗아가는데 그냥 받아드리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블레셋과 다를바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살아가요. 제가 예전에 선교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어요. 중국인이세요? 일본인이세요? 한국인? 이라는 말이었어요. 비슷하거나 같은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닮아 있어요. 그것처럼 이스라엘도 블레셋과 같아졌어요. 선택받은 민족인 것인지,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민족인지 이제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무려 40년 동안.
우리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죠. 혹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겪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면요.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을 떠올리지 못한다면요. 아니 내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언행이 보인다면요. 우리도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들과 같아요. 세상의 지배를 받고, 마귀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죄가 더 익숙해져버렸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삼손 그를 통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에요. 삼손을 통해 내 모습을 보아야 해요.

삼손 너 진짜

삼손이 들릴라라는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해버렸어요. 하나님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삼손을 세우셨는데,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면서 그들과 평화롭게 지내겠다는 모습을 내비쳐요. 그리고 삼손은 부모님의 반대를 무시하고 들릴라에게 청혼하려고 길을 떠나요.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해요.
나실인의 세가지 규정이 있었죠. ‘머리를 자르지 말 것’, ‘술이든 아니든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마시지 말 것’, ‘시체와 접촉을 하지 말것.’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마시지 말 것의 의미는 포도나무 근처도 가지 말라. 포도원에 가지 말라는 것이에요. 청혼하러 가는 길에 보니 포도원을 가로질러가면 빠른거에요. 돌아가지 않기로 해요. 그리고 사자를 만났어요.
사자를 봐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 삼손이었어요. 제가 예전에 선교지에서 한 지역을 여행하던 중 ‘몽키 신전'이라는 곳을 가기 위해 산을 올라가고 있었어요. 반절 정도 올라갔을까요? 갑자기 정말 눈이 빨갛고 침을 질질 흘리는 큰 들개 5마리가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제 앞에서 으르렁 거리며 서더라구요. 그 때 저는 느꼈어요.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개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오늘 내가 여기서 개들에게 물려 죽으면 한국에 계시는 우리 부모님은 내 시체도 찾지 못하겠구나 등의 생각을 하며 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내가 먼저 달려들면서 가방을 휘두르고 한 마리를 발로 차고 도망갈까? 아니면 팔 하나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하나 등등의 상상을 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몽키 신전 쪽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거에요. 신전을 다녀오던 사람이 저를 발견하고 제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타라고 외쳤어요. 저는 그 오토바이를 타고 산 아래로 도망쳐 내려왔는데 내려오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더라구요.
들개 5마리 때문에 저는 죽음을 직감했어요. 그런데 삼손은요? 그와는 비교도 안되는 사자를 만났어요. 일반적이면 도망가거나 피해야 하죠. 근데 삼손은 아기랑 놀듯 사자에게 달려 들었어요. 사자의 입을 오징어 찢듯 죽 찢어 죽였어요. 나실인 세번째 규칙. 시체와 접촉하지 말 것. 이것을 또 어겼어요. 일반적으로 나실인이 시체와 접촉하면 길렀던 머리카락을 자르고 성막을 찾아가 제물을 바치고 8일동안 정결 예식을 치뤄야 했어요. 그런데 삼손은 그것도 하지 않아요. 왜? 지금 청혼하러 가는 길이잖아요. 청혼이 더 급했어요.
그리고 청혼 후 결혼을 약속하고 시간이 흘렀어요. 삼손이 이번에는 결혼을 하기 위해 들릴라에게 가다가, 문뜩 자신이 죽였던 사자가 생각이 났어요. 가다 돌아서서 포도원에 접근해 사자 시체를 찾아갔더니 그 시체에 꿀이 있었던거에요. 솔직히 이거 믿어지나요? 시체에는 구더기와 파리 떼가 있어야 하는데, 벌들이 거기에 꿀을 모아놨데요. 삼손이 봐도 신기한거에요. 지금 두번째와 세번째 규정을 또 어기고 있잖아요. 포도원에 갔고 시체와 접촉을 했어요. 그런데 그는 완전히 그 규정을 무시하기로 마음 먹어요. 시체에 손을 넣고 꿀을 들고 와요. 그리고 부모님에게도 먹였어요.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저도 여러분도 이런 모습들이 있다는 거에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도 그처럼 행동할 때가 많아요.
삼손이요. 결혼을 했어요. 이 때는 결혼하면 신부 집에서 1주일을 보내야 했어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저는 이 때 삼손이 술도 마셨을 것이라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 측의 풍습과 의식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거든요. 예수님이 첫 기적을 보이셨던 혼인 잔치에서도 포도주가 떨어졌었잖아요. 당시에 결혼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어요.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았던 그가 이 일주일동안, 신부측에서 요구하는 술과 그 풍습들을 거절했을리 없어요. 다 들어줬을거에요.
선택의 순간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런 선택의 순간들이 참 많이 와요. 특히 앞으로 정말 많은 자리에서 삼손처럼 술에 관한 문제와 세상의 문화로 인해 여러 어려움과 난처한 상황들이 계속해서 생겨날거에요. 그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요? 블레셋 사람들도 나실인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나실인이 어떤 규정을 지켜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여호와의 영이 함께 해서 여러 기적을 보였던 삼손을 통해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삼손과 함께 하는 것을 그들도 눈으로 봤어요. 그런데 삼손의 행동은 하나님의 사사와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었던거에요. 구별된 존재인데 진짜 구별된게 맞나 싶을 정로도 막 사는 것을 보았어요. 블레셋의 눈으로 보아도 삼손은 하나님의 사사가 아닌 것 같아 보였어요.
저와 여러분은 구별되어진 존재들이에요. 수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들 중 특별히 먼저 선택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되었단 말이에요. 여러분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짓밟히고 무시 당할 수도 있어요.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술에 대해 잠깐 나눠볼까요.레위기 10장 8-11절을 보면요. 하나님께서 아론 대제사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회막에 들어갈 때 마시고 들어가면 ‘죽는다.’ 말씀하세요.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회막에 들어갈 때’라는 단서가 있어요. 그래서 아 평소에는 마셔도 되지만, 그 자리에 나갈때만 마시지 않으면 되는거구나! 라 착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 숨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어요. 회막에 들어갈 때 마시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분별 할 수 있고, 죄와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야 하는 사람들이 술에 취한 상태. 즉 정상적이지 않은 분별력과 정신 상태로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구별한 거룩한 사람들이잖아요.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죠. 술을 마시지 않고 절제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요. 그 구별해주신 목적대로 살아가기 위해서에요.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구원의 감격을 삶으로 드러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보이라. 하나님의 흔적을 새기라 말씀하시기 위해서잖아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록,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알아갈수록 우리의 정신과 생각은 맑아져요.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도 눈도 밝아져요. 그래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만약 우리가 삼손처럼 본능에 따라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긴다면요. 하나님께서 밝혀주고 계시는 빛을 스스로 끄는 것과 같아요. 그냥 세상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흔적을 여러분이 열심히 지우며 살아가는 것과 똑같아요. 술을 마시면 옳고 그름의 판단의 영역이 흐려져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어요. 마치 이스라엘이 40년동안 블레셋사람처럼 살아갔던 것처럼 말이죠.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으로 부름 받았으나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감을 통해 하나님을 욕되게하며 조롱거리가 되도록 했던 삼손과 똑같아지고 말아요. 삼손을 통해 나를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를 통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술 뿐만 아니라 세상문화 등 다른 모든 부분도 돌아봐야 해요. 저와 여러분은 구별되었어요. 구별된 여러분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떠올리고 있나요? 아니면 여러분을 보며 ‘나나 쟤나 똑같네'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우리 최소한 삼손처럼 되지 않기를 바래요. 삼손은 죽기 직전을 제외하고 전 생애를 하나님 이름에 먹칠을 했어요.
어떤 사람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가요?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삼손처럼 하나님을 무시하는 삶 그리고 그 분의 이름에 먹칠 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요. 구별된 사람처럼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요. 지금의 삶에 절대 순응하지 마세요. 블레셋의 모든 것을 받아드려 자신의 모습을 잃어갔던 이스라엘처럼 세상을 그대로 받아드리지 마세요. 스스로 구별된 자의 자리를 걷어차지 마세요. 좀 불편하더라도 여러분의 정체성을 드러내세요.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행동할 때 마음에 거리낌이 생긴다면 과감하게 멈추세요. 예수님 찾으세요. 하지 마세요. 죄와 가까워지지 마세요. 삼손. 그를 통해 나의 모습을 나의 상황을 돌아봐 주세요.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는 한 주 되기를 소망해요. 여러분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말을 통해 구별되어진 존재가 무엇인지 주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해요.
우리 함께 찬양할건데요. 이 찬양의 가사의 의미를 하나 하나 곱씹으면서 찬양했으면 좋겠어요.
“내 주님 살아계시기에 다시 오실 주님 나 알기에" 구별되었으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나를 계속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내 주님 살아계시기에 영원하신 통치 나 믿기에"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 즐거워 보이는 것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겠습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고백하세요.
“내 육신 후패하나 내 눈은 주 바라보리” 우리의 육신은 후패. 점점 쇠약해지다 썩어져 없어져요. 나를 후패하게 만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술과 쾌락 등에 더 이상 내 육신을 맡기지 않겠습니다. 나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나의 눈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 당신을 바라보겠습니다. 선포하세요.
“내 주님 살아 계시기에 그 날에 주와 함께 서리" “내 주님 살아계시기에 그 날에 주님 곁에 서리" 세상 속에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며 수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을 겪겠지만 견디고 참고 이겨내겠습니다. 하나님 곁에 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내가 되겠습니다. 당신 옆에 서는 내가 되겠습니다! 고백하며 선포하며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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