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스러운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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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을 나서는 룻 2.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감 3. 갑자기 보아스 등장 4. 보아스의 은혜 5. 하나님의 일하심 (헤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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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다

룻기 2장 1-1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순간 순간 역사하시며 은혜 주고 계셨음에 감사하는 새벽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제 이주헌 목사님께서 말씀을 나누어 주셨던데로 빵집. 떡집 이라는 이름을 가진 먹을 것이 풍족했던 베들레헴에 기근이 찾아와 먹을 것이 없어지자 나오미의 가정은 모압으로 이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의 법에 따르면 나오미의 가정. 엘리멜렉은 기근과 같은 때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며 구제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멜렉은 말씀에 따라 나누기보다 지키고 자신의 가정만 잘 사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처분하고 모압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모압은 베들레헴보다 고지대였고 당시 베들레헴보다 더 살기 좋은 환경이었거든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7년 후에 돌아와 자신의 것들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2장을 보면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찌어찌 거주할 집은 구했지만, 그것 외에 살아낼 수 있는 방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룻이 선택한 것은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룻이 이삭을 주으러 나가는 것을 결정하기 전에 성경은 한 사람에 대해 먼저 소개합니다. 1절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그들 그리고 살기 위해 이삭을 줍는 일을 하기 전 그 사건 사이에 보아스가 먼저 소개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와 어머니를 따라 온 이방여인 룻의 삶에 보아스라는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룻이 이삭을 줍기 위해 나가며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 이삭을 줍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가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우리 3-4절을 함께 볼까요? 3절을 보면 이삭을 주으러 나간 룻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습니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갔는데 때 마침 밭의 주인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 않나요?
여기에서 사용된 ‘우연히'라는 단어는 만나다와 일어난다는 히브리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원어 그대로 해석을 한다면 룻이 베는 자를 따라 들어간 그 밭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기가 막힌 타이밍. 우연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연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수많은 계획과 상황들 속에 마주하게 되는 시간. 사건입니다.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들어간 룻이 만나게 된 사람은 밭의 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3-4절은 단순하게 룻이 보아스를 만나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 타이밍에 밭에 들어갔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룻이 그 밭에 들어가 만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해 동족들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들의 삶이 어렵고 힘든데도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순간 나오미는 삶의 중대한 결정 때마다 잊고 있었던 하나님을 떠올렸고, 그분께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나오미의 가정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주기 위한 계획을 세워두셨던 것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 선택받은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에 따르면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배제되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룻마져 구원하시며 회복시키시려 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회복 계획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단어가 ‘우연히'입니다. ‘하나님께서 룻과 나오미를 만나주시려 하시는 그 분의 섭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룻을 보아스가 보게 되었습니다. 때 마침 자신의 밭에 돌아온 보아스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룻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에게 혜택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매년 추수철에 밭, 과수원, 포도원에서 곡식과 과일을 수확할 때 어느 정도를 남겨야 했습니다. 과부를 포함한 가난한 자들은 남겨진 것들을 수확하거나 주우면서 추수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섞여진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공동체. 타인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정말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배려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가정은 사랑을 나누고 배려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다른 이를 돌보지 않았던 그들의 가정과 달리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정을 돌보기로 마음 먹습니다.
일하고 있는 자신의 종들을 만나자 보자 보아스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라는 축복을 합니다. 이것은 어떠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보아스가 종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품어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사입니다.
2장 1절에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표현한 것처럼, 보아스가 물질적으로도 풍족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배려할 줄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밭을 돌아보던 보아스는 룻을 발견하고 그녀가 누구인지 묻습니다. 종들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사람이며, 자신들이 곡식을 베고 지나갈 때 떨어지는 것을 줍게 해달라 요청했다.’라 주인에게 이야기 합니다.
곡식을 베는 자를 따라 이삭을 줍겠다는 것의 의미는 떨어지는 것을 바로 줍겠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제가 다녔던 중학교는 봄과 가을이 되면 농번기 방학을 주었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셨기에 저에게는 그저 학교를 쉬는 행복한 날이었지만 농사를 짓는 친구들에게 농번기 방학은 부모님을 도와 씨를 뿌리고 추수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친구들이 씨를 뿌리고 추수 할 때 쉴 시간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직접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농사를 짓는 것을 본 적은 많습니다. 친구들의 부모님은 정말 허리 필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시더라구요.
보아스 밭에서 수확을 하던 일꾼들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정해진 시간 동안 부지런히 곡식을 베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곡식을 베기 시작하면 그 속도는 상당히 빠를 것이 분명합니다.
7절의 말씀처럼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달라’는 말은 일꾼들의 속도를 따라가겠다는 룻의 의지적 결단이기도 합니다. 7절 하반절을 보면 일꾼들이 룻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룻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잠시 쉰 것 외에는 일꾼들의 속도를 따라가며 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룻에 대한 평가는 ‘그녀가 참 성실하다.’였습니다.
성경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에 따라 조심스럽게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룻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처음에는 좋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룻은 타지에서 온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는 모압 족속이기도 했습니다. 힘들 때 자신들을 뒤로한체 도망갔던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색안경 혹은 편견을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았을텐데 하루 정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나오미를 향한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보게 되었고, 결국 ‘성실한 여인'으로 평가를 하게 된 것이죠.
보아스가 룻에 대해 물은 것은 단순히 보지 못했던 젊은 여자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의 성실함을 보아스도 보았기에 종들에게 물어 본 것입니다.
그녀를 향한 종들의 평가와 자신이 바라본 성실한 룻을 보고 보아스는 다가가서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여기서 떠나지도 말라. 그리고 소년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으니, 목 마르거든 가서 소년들이 길러 온 물을 마시라" 라고 말합니다.
보아스의 이러한 호의에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0절입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저는 이 질문을 묵상할 때 마다 룻의 떨리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참 슬픕니다. 하지만 또 그녀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며 감사한 마음도 듭니다.
나오미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만 가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온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10년동안 가정에 있던 남자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녀도 가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오며 고향을 떠났습니다. 고향에 가족들도 다 두고 어머니와 함께 왔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돌아온 베들레헴에서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도 받았습니다.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왔지만 현실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어머니를 섬기기 위해 왔는데 살아낼 방도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런 삶을 살아보았을까요? 남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는 일을 해보았을까요? 자신처럼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삭을 주으러 갔을 때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이질감을 느끼며 마음이 어렵지 않았을까요?
저는 필리핀에 있었을 때 현지 교회의 찬양팀에서 기타로 섬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와 생각이 다른 그 곳에서 찬양팀원으로 섬기는 것은 참 쉽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 그들에게 찬양팀에 들어가도 되는지 물었고 그들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저를 받아 주었습니다.
그들의 모임에 참석을 했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참 뻘쭘했습니다. 그들도 저도 친하지 않으니 어색했고, 그들이 따갈로그로 대화 할 때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일까? 하는 이질감도 느꼈었습니다.
제가 선택해서 갔던 그 곳에서도 저는 마음의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룻은 어떠했을까요? 어머니를 섬기기 위해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나갔던 자리였겠지만 그녀의 마음에도 불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을 알고 있었기에 더 성실하게 일을 했을지도 모르죠.
무엇이 되었든 그녀는 그 어려움과 불편함을 이겨내고 잠시 쉰 것 외에 이삭 줍는 일을 성실하게 했습니다. 그 이삭을 줏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여러 복잡한 마음이 그녀에게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한 두려움과 고민 등의 생각이 있는 그녀 앞에 밭의 주인이 나타나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으라. 아무도 너를 건들지 않을 것이다.”라 말합니다. 어쩌면 룻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밭의 주인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다른 곳으로 가라 쫓아냈으면 이삭을 줍는 일이 앞으로 더 어려워졌을테니까요. 그녀에게 정말 필요했던 말을 밭의 주인 보아스에게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했던 ‘확실한 보호'를 보장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왜 자신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느냐’라고 되묻습니다.
저는 이 룻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과 저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전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고 죄가 가득한 세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고, 세상에서 나의 만족과 필요를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따라갈수록 우리의 마음에 남는 것은 공허함과 자괴감이었습니다. 내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데 이상하게 잘 되지 않고 힘들다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내지 못하자, 다양한 방법과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연히 그 밭을 들어갔던 룻'처럼 하나님은 ‘우연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셨습니다.우연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일하신 하나님 진심'입니다.
그렇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너에게 주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지금도 그 말씀을 온전히 받아드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또 하나님을 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떠올리고 다시 그 앞으로 돌아오려 노력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일어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고, 지친 몸을 이끌고 수요일, 금요일, 주일 예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몸부림과 노력을 다 알고 계십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려 하는 그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신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의 몸부림. 회복을 위한 마음과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날개 아래에 우리를 두고 보호하시며 은혜를 베풀겠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룻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회복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 보호하심 속에 평안함을 누리는 오늘 하루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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