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2022년 여름수련회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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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택의 순간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 2. 화려한 허울 넘어 진짜 현실을 보라. 3. 가짜 믿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4.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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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제 오늘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일들이 여전히 꿈처럼 느껴져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우리 수련회 왔어요. 진짜 실화인가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쉽지 않은 발걸음들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고 즐겁고 또 감사해요.
지난 이틀 어땠나요? 수련회를 통해 많이 교제하고 쉬고 있죠?
여러분 우리 한 가지만 약속해요. 말씀도 말씀이지만, 기도시간에 정말 최선을 다하기를.
여름수련회까지 3년이나 걸렸어요.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돼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매일 매일 부어지고 있었고, 지금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건 절대 부정할 수 없어요.
하지만 수련회만의 은혜가 분명히 있어요. 이 때만큼 우리가 집중해서 말씀을 나누고 내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날이 1년에 몇번 없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우리 정말 이 시간 귀하게 여겨요. 부족한 저를 통해 여러분에게 선포되어지는 그 하나님의 말씀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를 바래요. 기도할 때 내일은 없는 심정으로 매달리기로 약속해요.
오늘과 내일의 예배와 그 기도가 여러분을 살릴 것이고, 22년의 남은 날들을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여러분의 발걸음을 지탱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될거에요.
그러한 수련회의 시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택의 순간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늘 우리는 세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살펴볼거에요.
첫째. 다니엘의 세 친구에요.
3년의 교육이 끝났어요. 그리고 그들은 각자 높은 자리에 올라 바벨론을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 섰어요.
목숨을 걸고 선을 지켰던 것이 무색할만큼 그들은 바벨론에 녹아들어 그들의 통치 속에 살아가기 시작했어요.
다니엘과 세친구는 세상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 갔어요. 바벨론이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세뇌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세상이 바라던데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흔적이 희미해져 가고 있어요. 세상은 하나님의 흔적이 희미해진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흔적을 완전히 지우기를 원해요. 그래야 하나님을 잊게 되니까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아예 생각이 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바벨론이 원하는 완벽한 세뇌가 되는거에요.
제가 필리핀에 있었을 때 영어 튜터가 있었어요.
그 분은 연세가 좀 있었는데 엄청난 프라이드가 있었던 분이에요. 그분은 필리핀 국립대학을 나오셨는데요.
7-80년대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더 잘살던 시대에 필리핀 국립대학을 가셨던 분이었어요. 지금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못살게 되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 대학이 우리나라의 서울대보다도 세계 순위가 높았었어요.
어느 날 제가 영어 공부가 너무 싫어서 질문을 했어요. 질문하면 그 분이 답을 해야 하고 그 시간이 길수록 수업시간에 나갈 진도가 줄어드니까 잔머리를 굴린거죠.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줄여보고자, 그녀가 나온 필리핀 국립대학 U.P에 대해 물었어요.
“그 곳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랬더니 그녀가 안경을 쓱 내리고 저를 한 2-30초간 쳐다보더니,
“넌 못 가. 절대 못 가. 네버네버” 라고 하는거에요.
아니 저도 제가 거기 못가는거 아는데, 못간다고 하면서 네버 네버 하니까 갑자기 약이 오르는거에요.
“내가 가면 어떻게 할거냐고!” 했더니 그 분이 저를 또 빤히 쳐다보는거에요. 아마 ‘아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겠죠.
그리고 “너 따갈로그 할 줄 알아?”라고 묻더라구요.
그녀가 저에게 “넌 못 가. 절대 네버”라고 한 것은 제가 영어를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따갈로그를 원어민처럼 해야하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필리핀은 잘 살지 못하는 나라죠.
그래서 U.P를 나온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해요.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나눠야 해요.
그래서 그들을 일깨워야 하고, 필리핀이 앞으로 잘 살수 있도록 바닥부터 다지는 일들을 해요.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죠.
그들이 원하는데로 국립대학 졸업생들이 살아왔다면 지금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어 있을거에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왜 그럴까요? 그들은 참 좋은 취지를 갖고 교육을 하고 공부하는데 왜 그 나라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배운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에요.
교육 받은데로 살지 않고 자신만, 나만 잘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그들의 교육 취지와는 다른 결과를 맺어가고 있는 것이죠.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 역시 이렇게 변해갈 가능성이 있었어요.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 해도, 고위직 관리가 되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세상 편하게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물론 바벨론 사람들에게 눈치밥도 먹고 또 차별 대우도 받았겠지만 그들의 위치는 대놓고 무시 당할 그런 자리가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지금은 장성했고 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졌어요.
필리핀 국립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처음에 고향에 돌아가서 정말 최선을 다해 나누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거에요. 자신들이 베풀면 베풀수록 사람들이 깨어나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일을 하지 않게 되었데요.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자꾸 주고, 자신들에게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주니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이죠.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상대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또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한다면 현타가 올 것이고 더 이상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변해간거에요. 자신들의 인맥과 교육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어요. 결국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다니엘과 세친구도 변해갈 수 있는 순간들이 분명 많았을거에요.
모두가 자신들을 말과 행동에 주목해요. 귀찮을 정도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또 그들이 믿는 신을 무시해요.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을 점점 더 힘들고 어렵게 만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세상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버리라고, 망해가는 그 종교에서 탈출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을 버리는 선택을 하도록 정말 무섭게 몰아쳐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세상을 향해 절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해요. 세상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없다고 이야기 해요.
여러분. 혹시 여분의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나요?
저부터 말하면, 전 웹툰을 자주 봐요. 요즘엔 의리로 보던 웹툰들을 많이 끊어내고 있긴 한데, 웹툰을 볼 때가 있어요.
여러분은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군요. 우리가 하고 있던 그
여가 시간의 일들 속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었나요?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있었나요?
없었다면요. 우리는 다니엘과 세친구에게 다가갔던 그 세상의 계략. 유혹에 나도 모르게 넘어갔다는 것을 말해요. 이미 세상의 수많은 신들에게 절하고 있었던 것이에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세상에 모든 것들을 다 신격화 시켜요. 돌맹이도, 개구리도, 파리도 심지어 미국에는 베이컨교가 있데요.
돼지가 죽어서 우리를 위해 베이컨이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해서 예배하고 숭배하는 베이컨교가 있데요.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요. 모든 것들을 신격화 시키는 세상에 관점에서 보면요. 저와 여러분이 여가 시간에 하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은 죄다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도록 만드는 우상이에요.
우리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아닌 그 우상을 향해 마음을 주고 있었고 엎드려 절하고 있었어요.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을 만들기 시작해요.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요. 그리고 사람들이 절하도록 해요. 이 신상이 세워졌던 그 땅이 혹시 어딘지 아는 사람있나요? 있으면 제가 커피 쿠폰 쏠게요.
만든 신상이 어느 땅에 세워졌을까요? 맞아요. 시날 땅이에요. 바벨탑이 쌓여던 장소. 그 자리에 신상을 세웠어요.
왜 바벨탑을 그 자리에 세웠을까요. 왜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신상을 거기에 세웠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전략을 발견할 수 있어요.
세상을 대표하는 바벨론은요. 인본주의에요.
인간이 최고이고, 인간이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깔려 있어요.
인간이 최고이기 때문에 신은 필요 없어요. 신은 그저 나를 돕고 서포팅하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에요.
내가 최고에요. 내가 신의 자리에 올라가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인간의 교만의 집합체가 바벨탑이었고, 이 신상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여가 시간에 하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 나의 마음과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었던,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우상이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잊도록 하거나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세상의 가치들을 이야기 해요.
그에 비해 예루살렘은? 신본주의에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 신본주의에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절대 같이 갈 수 없어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해요.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사람들이에요.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겠어요.
하나님을 바라는 모습, 하나님을 믿고 걸어가는 그 결단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해요.
바벨론은. 세상은 자신의 힘의 강함과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바벨탑이 쌓여 졌던 그 자리에 신상을 세웠어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해요. 신상에 절하고 말고를 떠나서 보는 순간 그 크기와 아름다움 그리고 웅장함에 압도되는거에요.
가능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가고 싶은 장소가 있어요.
인도의 타지마할과 겐지스 강이에요.
사실 저는 타지마할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유명하니까 한 번 가봐야지 하고 갔어요.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도착을 해서 표를 샀어요. 그리고 생각없이 타지마할을 보러 들어가는데요.
들어가는 문부터 어마어마 해요. 근데 그 어마어마한 문에 저 멀리 타지마할이 보이는데요.
너무 너무 예뻐요.
문을 들어가서 눈에 타지마할이 눈에 꽉 차는 순간요. 저도 모르게 “와…”하고 말문을 잊지 못했어요.
타지마할이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그 곁에 갈 수록 크고 아름다움 그리고 웅장함에 어떤 말을 할수가 없더라구요.
그 건물 자체만으로 압도당하고 주눅 들어버린거죠.
지금 시날 땅에 세워진 그 신상이 그랬어요.
보는 것만으로 나라는 사람이 보잘 것 없다 여기게 만들어주는, 나는 쭈구리구나 싶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주는 신상이 딱 섰어요. 왕이 명령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숙연해지면서 절하게 생겼어요. 그리고 명령이 떨어져요.
악기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모두. 바짝. 엎드리라”
“엎드리지 않으면, 절하지 않으면, 경외를 표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
느부갓네살은 지금 세상 진지해요. 완전 엄근진 그 자체에요. 나랑 똑같이 생긴 신상이 세워졌어요.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와요. 그리고 사람들이 그앞에 엎드려 절 할 거에요. 얼마나 기대가 됐겠어요.
“짜식들아. 너희가 이렇게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아냐? 나 때문이야. 내가 있기 때문에 너네가 잘 먹고 잘 사는거다.”
“바벨론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감사해라.”
“나 좀 쩌네”
자의식 과잉 상태였을게 분명해요.
여러분 생각해봐요.
우리가 수련회 끝나고 교회로 돌아갔는데 교회 로비에 여러분의 모습을 닮은 동상이 딱 서있다고 생각해봐요.
물론 극혐에 생각하고 싶지도 않겠지만요.
여러분의 모습을 딴 동상이 있고 그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OOO”이라고 써있다고 생각봐요.
처음에는 부끄럽고 민망하겠죠. 하지만 곧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고 고민하다가 게시물로도 올리겠죠.
그리고 자랑스러워하게 될거에요.
별 거 하지 않은 우리를 기리는 동상이 서는 것만으로도 진짜 기분이 이상할텐데, 느부갓네살은 실제로 강한 왕이었고 많은 것을 이루어냈어요. 그런 그가 신상을 세워올렸어요. 좋아서 미쳤을거에요. 진짜 매일 매일 봤을거에요.
사람들이 엎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죠? 다 느부갓네살의 업적을 인정하고 그에게 리스펙을 보인다는 거잖아요.
길을 걷던 사람들이 악기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바로 엎드려요. 타지에 살다 올라 와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가 엎드리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엎드렸을거에요. 아무도 서있는 사람 없어요. 있어서는 절대 안돼요.
모든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신상 앞에 엎드려요. 세상이 보여주는 강함에 엎드렸어요. 그들이 하는 그 행위는 우상숭배죠. 그런데요.
여러분 미안하지만 그들의 엎드림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던 나를 보여주는거에요.
우상숭배는 다른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과 사랑을 쏟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우상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요.
모든 시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떠나고 잊고 우상을 따른 이유가 뭐겠어요. 그만큼 우상이 매력이 있다는거에요.
모두가 그것을 사랑하고 따라가게 되는 것에는 매력적이고 우리를 유혹할만큼 매혹적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은. 우상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존채처럼 다가와요.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우상들은 사람이 만들었거든요.
나의 필요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 줄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거든요.
신상 앞에 엎드렸던 이들의 모습은 우상숭배자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을 믿으나, 삶에 작은 부분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지 몰라요.
모두가 우상 앞에 절하고 있는 그 때 서있던 세 사람이 있었어요. 진짜 깡이 좋죠. 모두가 다 바짝 엎드려 있는데, 음악이 들려오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고 그냥 서 있어요.
솔직히 눈 딱 한번 감고 절하면 끝이에요. 지금의 이 편안한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어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사실 신상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그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내가 사는 나라의 대통령. 나에게 명령을 하고 또 월급을 주고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 앞에 고개 한번 숙인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 대통령이 있으니까, 식민지 백성인 내가 좋은 직업도 갖고,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 수 있는 것이잖아요.
양심에 찔리겠지만, 그냥 우상숭배가 아니다 생각하면서, 내 상사 앞에 머리를 숙인다 생각하면 되는 일이에요.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거에요.
솔직히 그렇잖아요. 누가 알아요. 그냥 한번 쓱 고개 숙여버리면 끝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잘 버티고 살아 오기는 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기도 전에 먼저 그들이 죽을 수도 있었어요. 언제 그 일하심이 일어날지 1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미안하지만, 절하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그 왕의 명령에서 살아남지 못할 가능성이 거의 100%에요. 하나님이 구원해주실 것을 절대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과 삶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어요.
구해주지 않으셔도 괜찮다. 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상에 숭배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마음으로 버텼어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았지만, 안전장치도 없지만 그들은 절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바로 끌려 왕 앞에 갔어요. 그리고 왕이 물어요.
“세상에 어떤 신이 내 손에서 너희를 구해줄 수 있을까?”
왕은 지금 자신있어요. 바벨론 왕을 방해할만큼 강한 신이 없다는 오만함이 그에게 깔려 있어요. 세상의 신들이 와도 바벨론 왕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는 엄청난 자신감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죠.
세 친구들은 풀무불에 던져져요.
잠시 영상을 하나 보고 올게요.
삼겹살이 몇초만에 익었죠?
세 친구가 들어간 그 곳은요. 이 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뜨거움이 있는 곳이었어요. 그들은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 죽을만큼 말도 안되는 뜨거운 불이었어요.
그런 불 속에 그들이 살아나왔어요. 그들과 함께 하는 한 존재가 그 안에 있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그 안에서 살아 나오게 될 것을 절대 알지 못했어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죽기로 했을 뿐이에요.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불 때문에 죽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그 모습을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풀무불 속에 던져 졌는데 다치지 않고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도 안되는 기적이 일어났어요.

화려한 허울 너머, 진짜 현실을 간파하라

두번째, 느부갓네살을 이어 왕이 된 벨사살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연회를 열어요. 진짜 미친듯이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어요.
제가 20살 때 대학교 오티를 강원도에서 했는데요.
전 그 때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저희 과가 모여있는 방에 소주와 맥주가 배달되기 시작하는데요.
내 모든 입학금과 등록금이 아니, 모든 신입생의 입학-등록금이 몰빵 된 것 같은 양의 소주와 맥주가 방에 쌓이기 시작을 했어요.
이걸 먹는다고? 미쳤네. 라고 생각했는데요. 그게 3일동안 먹는 술의 양이 아니었어요. 매일 매일 그만한 술이 방에 쌓였어요.
저만 빼고 모두가 다 꽐라가 되서 울고 토하고 소리 지르고, 토목과는 겨울에 밖에서 웃통 벗고 구르고 있고 진짜 문화 충격이었어요.
술을 많이 마시면 사람이 이렇게도 되는구나를 거기에서 봤던 것 같아요.
지금 벨사살 왕의 잔치는요. 제가 본 그 등록금 몰빵 술과 달랐어요. 세계 최강대국의 왕이 사람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하는데, 대충 마시고 먹었겠어요?
제가 대학생일 때, 친구들이 저를 술자리에 많이 불렀어요.
일단 술을 마시지 않으니까 저에게 지들 지갑을 맡기더라구요. 그리고 자기들이 취하면 택시에만 태워서 집에 보내달라고 하더라구요.
술 안주 맛있더라구요. 저야 뭐 개꿀이죠. 마음대로 안주도 시키고 음료수도 시켜서 배터지게 먹다가, 애들 취하면 하나씩 집에 태워 보내고 그러고 전 집에 가고 그랬어요.
근데 진짜 웃긴게 뭔지 아세요?
저는 술 안마시는데요. 제가 제일 먼저 취하는거에요. 얼굴이 먼저 빨개지고 눈이 풀려버리는거에요.
그래서 애들이 저보고 솔직히 말하라고, 너 사이다 마신다고 하고 소주 마신거 아니냐고 엄청 뭐라고 했었어요. 전 그 때 알았어요.
“아 나란 놈은 알쓰구나. 그 냄새만으로도, 분위기만으로도 취하는 놈이구나” 그 때 알았어요.
벨사살은 어마어마한 양의 알콜을 때려 부었어요. 그리고 분위기에 취해가요.
모두가 벨사살 앞에서 얼마나 기분 좋은 말만 해댔겠어요. 칭찬하는 그 말만 듣던 벨사살이 맛탱이가 가기 시작하면서, 막말을 하기 시작해요.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온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물들을 다 가져오라고 해요. 그리고 거기에 술을 부어 마시기 시작해요.
이것은요.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다 가져와! 라고 한 그런 술주정이 아니에요. 벨사살의 이러한 모습은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마음을 대변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 웃기지 말라 그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내가 과학으로 증명해줄게”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그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내가 논리적으로 설명해줄게”
“하나님도 똑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해!”
벨사살은 지금 하나님을 “내 아래 있다. 인간인 나보다 못한 신이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는거에요.
과거 시날 땅에서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반역의 깃발을 꽂으며 독립을 선언하려 했던 그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죠.
세상. 바벨론의 최대 목표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시키는거에요.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넘어, 완전 독립을 시키고 “내가 최고야”라는 자의식을 심어주는 것.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불로 끌고 가는 것이 바벨론의 최대 목표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절대 쉽지 않아요.
지속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영적 전쟁이 미친듯이 펼쳐지고 있어요.
수련회까지 온 여러분을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거센 공격과 그것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압도하는 무쌍을 찍고 계시는 예수님의 영적전쟁이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어요.
여러분 전쟁에 중립은 없어요.
예수님 편에 서느냐 아니면 세상의 편에 서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 선택지는 없어요.
가운데를 선택하는 것은, 여차하면 좋아보이는 곳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치사한 사람의 모습일 뿐이에요.
예수님 편에 서면 힘들어질거에요. 지금보다 더 어렵고 힘든 삶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바벨론을 선택한다면요. 정말 편안해질거에요. 걱정도 근심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게 될거에요.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멋대로 살아가도 그 누구도 여러분을 터치하지 않을거에요.
여러분이 예수님 편에 서면,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나를 적대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될 거에요. 여러분의 믿음을 사정없이 후려칠거에요. 넘어뜨릴거에요.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수록 우리 삶은 지금보다 어려워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해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영적전쟁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니까요.

가짜 믿음으로는 끝까지 못 버틴다.

지난 주일 이단 특강 때 이단들의 특징에 대해 나눴었죠.
무엇이 이단이라고 했죠? 인풋. 들어가는 것 시작은 같아요. 하지만 아웃풋 나오는 결과가 달라요.
이단은 이미테이션이에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품질이 그럴듯한데, 속은 완전 엉터리가 이미테이션 가짜에요.
고2 때 중국으로 단기선교를 다녀왔었어요.
선교를 하고 마지막 날 자유시간을 주셔서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시계를 발견하게 되었어요.
저는 시계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아니 근데 그 날따라 그 시계가 너무 갖고 싶은거에요. 그래서 없는 돈 있는 돈 다 털어서 샀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여줬더니, 같이 갔던 형이 “이거 진짜 비싼 시계야!”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완전 어깨가 쫙 올라갔어요. 그리고 자랑스럽게 손목에 차고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진짜 엄청 예쁘고 시간도 잘 맞는 시계였어요.
그런데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시계가 멈춰버렸어요. 분명 이거 비싼 시계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멈춘거에요. 아 약이 없나보다 생각해서 시계 약을 갈러 갔어요. 약을 갈아주는 분이 저를 보더니
“이거 중국에서 사왔지?”라고 하시는거에요. 맞다고 했더니, 이거 짝퉁이라서 고쳐도 곧 고장나니까 버리라고, 약 갈면 약 가는 돈만 아깝다고 하는거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진짜 같았는데, 속이 엉터리였던 가짜. 이미테이션이었던 것이죠.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진짜였지만, 잘 아는 사람이 보니 가짜가 티가 바로 났어요.
우리의 믿음이 그래요. 나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가짜인지를 정확히 가려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가려낼 수 있는 아니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우리에게 있었어요.
바로 지난 2년 반. 코로나 때의 모습이에요.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저는 목사이지만 나의 믿음은 정말 형편없고 쓰레기와 같았다는 것을 느꼈어요.
목사라고 불리다보니 제 믿음이 좋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번도 교회 공동체를 떠난 적 없고, 늘 찬양팀과 같이 예배의 중심에 있었고, 리더의 자리에만 있었으니까 믿음이 참 좋은 청년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요. 코로나가 딱 터지니까요. 모이지 못하고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그것을 예배로 올리기 시작하니까요. 저의 믿음이 보이기 시작하는거에요.
제가 맡은 부서 친구들을 위해 유튜브도 시작하고 영상도 찍고 편집하고 올리고 정말 분주하게 살았어요. 그 분주함의 정말 좋은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저에게 들려왔어요.
코로나 기간이지만, 코로나가 아니었을 때 보다 더 많이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이야기,
아이들이 영상을 통해 함께 성경을 읽게 되었고,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변했다는 긍정적인 피드백들을 들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현타가 왔어요.
정작 제 자신이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그 분에게 공급받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사역을 정말 사역으로, 열심으로만 하고 있었음이 깨달아지는 순간, 내 열심과 달림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라는 현타가 왔어요.
“아 진짜 내 믿음은 쓰레기다. 내가 먼저 넘쳐 흐르는 공급을 받고,
그 것을 토대로 나눠야하는데, 내 힘으로 나누고 있었구나.”
“모든 긍정적인 피드백 앞에 내가 믿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어요.
여러분은 어땠나요?
집단 속에 있었을 때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여요.
집단을 벗어나 나 혼자 서게 되었을 때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했나요?
우리는 가짜 믿음이 판을 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자 우리 수련회 주제 말씀 갈라디아서 1장 6-7절에는요. 다른 복음이 언급되고 있어요.
여러분이 가진 믿음이 진짜인데, 그것이 가짜라고 의심하도록 만드는 다른 복음우리 주위에 넘쳐 흘러요.
유대교를 믿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느 날
“내가 이 말을 할까 말까 진짜 많이 고민했는데, 너를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말하는거야.
잘 들어봐. 너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 믿음 가졌지? 그래 잘했어.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사실 충분하지 않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있잖아,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이 아니잖아. 그치? 그런데 너는 복을 받아야 하잖아. 그래서 말하는거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과 복을 받고 싶다면 너가 해야 하는 것이 있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해. 쉽지?”
예수님을 믿고 갖게 된 그들의 믿음이 가짜라고 속삭이기 시작해요. 가짜 믿음으로는 구원도 복도 받을 수 없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불안에 휩쌓이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율법을 듣고 지키고 할례를 받아요.
진짜 믿음이 한순간에 가짜 믿음으로 둔갑해버렸고, 가짜 믿음 때문에 하나님에게 멀어졌어요.
그들은 할례를 보며 그리고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요. 그들은 가짜에 속아 진짜를 스스로 놓쳐버리는 실수를 저질러요.
다시 모인 이 자리. 마음 껏 기도할 수 있는 이 곳에서 우리는 나의 믿음을 반드시 돌아보아야 해요.
성경에 보면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있죠. 여러분 이 가라지 비유의 진짜 의미는요.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분별하라. 가짜 믿음을 가진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고대 로마에는요. 내가 진짜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늦은 밤에 원수의 밀밭에 가서 가라지를 뿌리고 도망쳤어요.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이게 밀인지 가라지인지 몰라요. 가라지가 올라와서 종들이 밭으로 나가서 가라지를 뽑으려고 할 때, 주인은 뽑지 말라고 해요. 왜냐하면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자칫하면 진짜 밀까지 뽑아 올려 그 해의 농사를 망쳐버릴 수 있거든요.
원수의 밭에 가라지를 심는 것이 사회의 큰 문제였어요. 특히 농부에게 큰 골칫거리였어요.
그래서 고대 로마에는, 원수의 밭에 가라지를 뿌린 사람의 행위를 강하게 처벌하는 법까지 있었어요.
사탄은 이 방법을 고대 로마시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어요. 이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거든요.
하나님의 밀밭. 진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가라지를 심어버려요.
농부가 가라지 때문에 농사가 위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을거 아니에요.
그 때는 이미 늦은거에요. 되돌릴 수 없어요.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없어요.
우리도 똑같아요. 우리가 나의 믿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고, 내 진짜 믿음을 가짜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체 살아가면요. 끝이에요.
내 힘으로 그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요. 밀밭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렸던 것처럼, 우리는 무엇이 믿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될거에요.
우리는 패배할거에요. 질거에요. 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진짜였던 나의 믿음이 가짜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거든요.
위기의 순간에 힘들 때 믿음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이미 가짜화가 되어버린 나의 진짜 믿음의 알맹이가 사라져 버렸거든요.
여러분 밤 주워다 쪄 먹어봤어요?
겉으로 봤을 때 깨끗한 밤이요. 쪄서 먹으려고 반을 딱 까면요. 그 안에 애벌레가 들어있을 때가 있어요.
겉은 진짜 너무 멀쩡한데, 안은 이미 애벌레가 다 파먹어서 텅 비어버렸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지금 내 믿음을 점검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것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세상의 이야기에 마음을 쏟고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다른 복음으로 부터 마음을 지켜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겉만 신앙인일뿐 속은 텅빈 강정이 되고 말거에요.
여러분 야구 좋아하죠? 여러분은 야구 어느 팀을 응원하나요?
저는 한화에요. 보살이라 불리는 한화팬이에요. 한화를 버리고 싶은데 버려지지가 않아요. 미저리처럼 자꾸 마음이 남아서 한화를 응원하게 되더라구요.
한화가 처음부터 이렇게 못난 팀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나름의 전성기도 있었고 가을 야구도 해봤던 팀이에요. 류현진이 미국으로 가고 진정한 암흑기가 찾아왔을 때 김성근 감독이 한화로 왔어요.
그 때 한화팬들은 환호성을 질렀어요. 이제 한화도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펑고도 미친듯이 치고 빡씬 훈련을 하면서 팀이 변해갈 것이라 생각했어요. 경기에 나갔을 때 여전히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전처럼 미리 포기하지는 않았어요.
8회 이후에도 집중력을 발휘하는 팀으로 변하가기 시작을 했어요. 첫 시즌에는 별로 였지만 그래도 다음 시즌이 기대되는 팀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실수 한번 하면 지옥의 펑고를 맞아야 했기 때문에, 실수도 줄여나가며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그게 끝이었어요.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짤렸어요. 그 이후에 한화는 반등하는 듯 했지만 결국 똑같아졌어요.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급속도로 무너졌어요. 프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전술 능력도 떨어졌고, 심지어 주장은 라커룸에서 난동까지 부리고 있어요.
지옥의 훈련도 그들을 바꾸지 못했어요. 전 솔직히 한화 구단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이 팀이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싶어요. 이들도 답답하겠죠. 하지만 이상하게 바뀌지 않아요.
그들이 이상함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거에요.
가져왔던 습관들과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장착 하려 하니까 너무 어렵고 잘 안되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예수님을 믿고 우리는 삶의 태도와 형태가 바뀌었어요.
나에게 익숙했던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이전에 편했던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마음대로 편하게 살아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세상에서 뒤쳐지는 것 같아 보이고, 자꾸 지는 것처럼 내가 나약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세상에서 보란듯이 그리스도인답게 잘 살아보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아요.
매일 실패하고 넘어지는 나를 보면서 작아지기 시작했고, 영적 전투에서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고 싶은데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믿음 앞에 갈팡질팡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 것이 저와 여러분의 현실이고 지금의 모습이에요.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세가지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았어요.
풀무불에 들어간 세친구의 이야기, 자신을 높였던 벨사살 왕 그리고 다른 복음에 마음을 빼았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풀무불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첫번째 방법을 알려주고 있어요.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세 친구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하나있어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결단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믿음의 선포가 있어야 해요.
그들이 풀부물에서 살아날 것을 알았을까요?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살아나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어요. 죽어도 괜찮다였어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내 목숨은 포기할 수 있었어요.
유대인인 그들이 바벨론에서 살아가며, 바벨론사람 처럼 살아가는 것이 너무 지겨워서 질려서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서 차라리 죽여라! 이렇게 죽으면 순교다! 라는 생각에 절하지 않고 버틴 것이 아니에요.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이 살고 죽는 것은 의미가 없었어요.
곧 죽어도, 그들에겐 하나님이 전부였어요.
그 신상을 세운 느부갓네살에게도 하나님이 전부였던 때가 있었어요.
다니엘 2장 47절을 보면요. 그가 모든 대신들 앞에서 “하나님은 모든 신들의 신이며, 모든 왕의 주재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한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을 것처럼 행동했어요.
하지만 변화되지 않았어요. 그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어요.
그가 정말 하나님을 인정했다면, 그런 신상을 세우지 않았을거에요.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곧 잊었어요.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모든 대신들도 사람들도 하나님을 잊었어요.
심지어 엎드려 무릎을 꿇은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도 있었어요.
그들은 우상 앞에 엎드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어요.
왜? 세상의 분위기가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세친구는 세상의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절하지 않았어요.
그들에게는 분명한 선이 있었거든요. 어렸을 때 채소를 먹으며 지켰던 그 선보다 더 크고 강해지고 분명해진 선.
“나는 OOO에 절하지 않겠다!”라는 확실한 선포의 선이 있었거든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선포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 우선’의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이에요. 우상 숭배를 거부하려면요. 또렷한 시각을 가져야 해요.
지난 주에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했죠. 말씀이 우리의 무기가 되어야 해요.
말씀을 읽어야,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명확하게 알아야!!! 세상 문화가 숭배하고, 또 나의 마음이 끌리는 우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어요.
싸워야 할 대상, 끊어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면 우리는 깨닫지 못한채로 무한정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진정한 믿음은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면서도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거에요.
치러야 할 대가가 보여도, 내가 손해보는 것이 확정이라해도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순종하는 것이에요.
“나는 OOO에게 절하지 않겠다!” 이것이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첫번째 방법이에요.
벨사살 왕은 두려울 것이 없었어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발 아래에 있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하나님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신들이 자신보다 못한 존재라 여겼어요.
그 교만이 극에 다다랐을 때, 어깨 뽕이 하늘로 한 껏 치솟았던 그 때,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그가 조롱하며 무시하며 심지어 술을 따라 마셨던 그 집기의 주인공 하나님이 등장한거에요. 엄선한 천 명 앞, 세상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벨사살 앞에 손가락 하나가 띡 나타났어요.
벨사살세상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에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의 모습은 온 세상을 의미해요.
세상 문화는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고 기뻐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죽이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던 그 때 그날의 사람들처럼, 세상은 지워지는 하나님의 흔적을 보며 너무너무 행복해 하고 있어요.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와는 무관하게요.
저 문 밖의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매순간 선포하고 있어요.
성경 속에 하나님.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외치고 있어요.
화려한 불빛들은 세상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여요.
하나님이 졌고, 세상이 이긴 것처럼 보였던 그 날 밤 하나님이 나타나요. 기뻐하는 세상 앞에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를 보여주세요. 그리고 벨사살의 시대가 끝이 날 것이라는 글을 쓰고 사라져요.
이 글을 해석하기 위해 왕궁에서 더 이상 환영을 받지 못하고, 느부갓네살이 죽은 후 30년 동안 잊혀졌던 다니엘이 또 다시 세상의 중심으로 나와요.
느부갓네살 왕이 있었을 때 모두의 질투 대상이었던 다니엘은 30년 동안 무대의 중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어요.
권력이 있었을 때는 함부로 사람들이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권력을 사라지자, 사람들은, 세상은 다니엘을 무섭게 공격하고 넘어뜨리려 했어요.
거센 변화의 바람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흔들리지 않았었어요.
여러분 인싸가 되고 싶어요 아싸가 되고 싶어요? 아싸보다는 인싸가 되고 싶은게 우리 아닌가요?
모두에게 무시 받고 냉대 당하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사람들이 찾아주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게 우리에요.
다니엘은 핵인싸였다가 아싸 중에 아싸로 밀려 났어요. 완전히 밀려났어요.
권력을 잃어버린 그를 향한 사람들의 도전을 30년동안 받아왔어요.
그냥 다니엘이 한번만 타협했으면 그 공격이 30년동안 이어지지 않았을거에요. 그런데 그는 버텼어요. 죽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자신에게 벌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여겼거든요.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갈 세상이 이럴거에요. 세상은 점점 치사해지게 다가올거에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고 하면 승진에서 제외가 될거에요.
이미 미국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동성애 커플이 결혼하다고 케익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그것을 거부한 빵집 사장들이 고소를 당했어요. 그리고 벌금을 내고 징역을 살았어요.
이런 말도 안되는 세상이 지금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어요.
세상은 급속하게 바벨론화 되어가고 있어요.
바벨론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해요. 타협해서 안돼요.
다니엘이 30년 동안 한번이라도 타협을 했다면,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했을거에요.
하나님의 손가락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거에요.
다니엘은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일하시면 세상은 바뀐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수모가 끝나고 회복이 일어날 것을 믿었어요.
다니엘의 그 믿음이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해요.
다니엘의 믿음. 바벨론에서 변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했던
그의 믿음“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드셔도 세상은 변한다”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난 그 날 밤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벨사살 왕의 시대가 끝이나요.
잔치를 즐기던 그 때, 메데와 바사의 병사들이 성으로 잡입할 길을 뚫고 있었거든요.
벨사살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다리오와 병사들은요. 바벨론 성벽 아래에 흐르던 물의 줄기를 막아버렸어요.
물이 흐르면 침입하기 어려우니까 물줄기를 막아버렸어요. 그리고 습지가 된 그 곳에 머리만 물 위로 내놓은 채 걸어 건너왔어요.
성벽 아래 얕은 물을 통과해 성에 들어와 벨사살을 죽였어요.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하고, 하나님을 우습겨 여겨도,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드시면 세상은 뒤집혀요,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드셔도 세상은 변한다는 믿음” 이것이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두번째 방법이에요.
마지막 이야기로 돌아가볼까요. 가짜 믿음으로는 끝까지 절대 버텨낼 수 없어요.
이 시간 나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펴보아야 해요.
여러분 일단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믿음은 절대 가짜일 수 없거든요.
여러 상황적 어려움과 고민 속에서 선택하고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모두는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해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해서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넘어져요. 성경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랬어요.
그들도 처음부터 믿음이 좋지는 않았어요. 패배하고 넘어졌어요.
하지만 다시 일어섰어요.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일어 설 수 있었는가를 배워야 해요.
그것이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세번째 방법이거든요.
그들도 인간이기에, 우리처럼 쓰러지고 넘어진 후 자책 했을거에요.
후회하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했어요. 그리고 또 넘어졌어요.
늘 승리하는 삶을 살지 않았어요.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또 넘어졌어요.
하지만 일어났어요. 쓰라리지만 다시 일어서 앞을 보고 달렸어요.
앞을 향해 달릴 수 있었던 것은 “패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그들에게 패배는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인의 흔적이었어요.
내가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다 얻게 된 훈장으로 여겼어요.
하나님을 반대하고 흔적을 지우는 세상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흔적을 새기며 살아가다 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패배를 즐기기 시작했어요.
패배를 다시 달려나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내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드렸어요.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 나를 바라보며 자책하는 것을 그치고, 나에게 남겨진 상처가 무엇인지, 그 쓰라림이 어떤 것인지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바라보면서 자신의 믿음을 마주하게 된거에요.
“이 상처를 싸매어줄 분, 이 아픔을 보듬어 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다시 일어섰어요.
여러분 넘어질 수 있어요. 실패할 수 있어요. 넘어졌다고 한번 실패했다고 자신을 실패자로 낙인찍지 마세요.
실패를 그냥 받아드리세요.
인정하고 다시 일어서세요.
일어서는게 어려우면 그냥 앉아있어요. 누워있어요.
당장은 죽을만큼 힘들지 모르지만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될거에요.
하나님은 절대, 결코 당신을 여러분을 잊지 않으셨거든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에요.
세상과 다른 길을 걷겠다는 고백을 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고백을 한 사람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에요.
버텨내는 것,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것 불가능하지 않아요. 무조건 가능해요.
세상의 가치로 가득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발을 딛고 바로 일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요. 패배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반드시 저와 여러분은 살아갈 수 있어요.
“실패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 이것이 바벨론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세번째 방법이에요.
“나는 OOO에게 무릎을 꿇지 않겠다”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드셔도 세상은 변한다는 믿음”
”실패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
세가지를 고백하고 선포하고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는 이 시간 되기를 기대하며 소망하며 또 축복합니다!
첫 날 기도회
1. 다 듣고 계시는 나의 주님께
- 이 시간 나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라
- 나의 신음에 응답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너의 죄를 고백하며 나아가라
> ex. 니느웨 성읍
2. 주가 일하시네
- 하나님께 시간을 드릴 수 없는 이유는 ‘바쁜 것이 아니라, 혼란스럽기 때문’
> 세상은 바쁘지 않으면 나에게 실패했다 말하며, 끊이없이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말함
> 그 불안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함.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음
> 바쁜 것인가? 아니면 혼란스러운 것인가?
>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혼란을 느낀다면, 영적 순위가 바로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
> 그런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 혼란스러운 지금 나의 마음 속에 이미 자리 잡고 계신 그 하나님을 찾으라. 부르짖으라
3. 물 위를 걷는 자 (후렴으로 들어가서 찬양)
- 무엇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가? 여전히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의 최대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안도 괜찮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도 괜찮다.
> 우리는 절대 하나님에게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 하나님이 결정한 이상 우리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
> 당신을 택하신 그 주님이 여기 계신다. 깊은 바다를, 거친 파도를 반석을 만드시는 그 주님이 지금 이 시간 너와 함께 하신다.
> 나를 택해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함을 고백하라. 나를 부르고 오라하시며 올 때 까지 지켜보고 계시는 그 분께 감사를 고백하라
4. 믿음과 삶
- 믿음과 삶은 절대 어렵지 않다. 내가 그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꼬아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 지금처럼 그 길을 걷는 가온누리가 되기를
>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 흘러가는 인생을 살더라도 방향을 잃지만 않으면 된다.
> 지금 이 모습처럼 믿음을 깊이 있게 대신 끊어지지 않게 걷기만 하면 된다.
> 그 삶은 나 혼자 살아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옆에 있는 모든 동역자들이 함께 살아내야 한다.
> 가온누리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라.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 그 누구도 헛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지 않도록. 함께 기도하라. 생각나는 이가 있다면 찾아가서 기도해도 좋다.
> 15분 동안 서로를 위해, 나와 함께 이 힘든 길을 걸어가는 동역자를 위해 기도하자.
> 기도할 수 있도록 반주하는 기악팀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자.
5. 끝까지
- 끝까지 주를 위해 살고, 주를 따라가고, 주를 예배하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있다.
> “나는 OOO에게 무릎을 꿇지 않겠다”
>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만 드셔도 세상은 변한다는 믿음”
> ”실패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을 선포해야 한다.
>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게 된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 ‘청사에 길이 빛난다’라는 말이 있다.
> 청사는 푸른 대나무 죽간에 역사를 기록한 것을 말한다. 현실에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사실을 기록한 사관들이 있었다. 그들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지난 역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 ‘청사에 길이 빛난다’라는 이 고백우리의 삶이 흔적이, 그 발걸음이 헛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서서 끝까지 버텨낸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실 것이다.
> “더 이상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겠다!”
> “더 이상 우리는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라고 고백하고 선포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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